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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성신한문학(~2003) → 한문고전연구(2004~)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6권 0호 (2018)

선상(船上) 창작 한시(漢詩)의 특징과 의미

구본현 ( Gu Bonhyeo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6권 0호, 2018 pp. 1-28 ( 총 28 pages)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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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연구 목적은 “船上”이라는 창작 공간이 한시 작품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는 데 있다. 창작 공간은 한시 작품의 소재, 주제, 형상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창작의 동기와 상황, 문학적 관습 등 다른 요소들과의 관련을 고려하여 창작 공간의 영향을 살펴야 한다. 예컨대 사행이나 부임 등 특정한 여행 목적이 창작의 동기가 되는 경우에는 선상이라는 공간이 작품의 주제와 소재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배를 타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경우, 즉 船遊 등의 상황에서 창작된 한시일 경우에는 선상이라는 창작 공간의 특징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게 된다. 선상은 일상의 터전인 육지로부터 이탈된 창작 공간이므로 초월, 여유, 고독등과 연관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선상 경험은 새로운 시각에서 산수와 조우하게 만들거나 일상의 번잡함을 벗어나게 해주는 동시에 과거를 회고하거나 반성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주제가 형상화되는 방식을 살핌으로써 여타의 공간과 구별되는 선상의 고유한 창작 공간적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창작 공간으로서의 선상은 고유한 구성물과의 만남을 가능케 함으로써 작품의 소재와 제재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선상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망망대해, 궂은 날씨, 험한 여울 등이 그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19세기 두릉(斗陵) 유람 시첩, 『두강승유첩(斗江勝遊帖)』

김지영 ( Kim Jiyou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6권 0호, 2018 pp. 29-59 ( 총 31 pages)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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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문인 洪錫謨, 朴鍾儒, 吳泰雲, 洪宣謨가 斗陵을 유람하고 남긴 시첩인 『斗江勝遊帖』을 소개하고 그 내용을 살핀 논문이다. 이 시첩에는 1845년 이들이 두릉을 유람하고 쓴 유람시 15제 55수와 두릉 유람의 정경을 그린 李建弼의 「두강승유도」 2점이 함께 장첩되어 있다. 유람에 참여한 네 사람은 모두 少論으로 당색이 같으며 일찍부터 교유가 있었다. 두릉은 박종유의 거처가 있던 곳이었고, 당시 문인들이 敬慕했던 丁若鏞·徐有榘와 같은 선배 문인들이 자리 잡았던 곳이기에 자연스레 유람지로 선택되었던 듯하다. 문인서화가 이건필이 두릉의 鈔鑼潭과 松亭을 유람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을 남겨 이들의 유람시에 덧붙였는데, 19세기에 유행했던 南宗文人畵의 경향을 따르면서도 두릉의 實景을 소박한 필치로 담고 있다. 유람시에는 당시 두릉의 승경지로 손꼽혔던 여러 지역이 묘사되어 있다. 정약용 가문에 이어 박종유 가문이 소유했던 송정, 사라담 앞에 있던 練帶亭, 德水李氏의 田莊이 있었던 石林, 申翊聖의 東淮 別墅가 있던 白雲樓 터 등이 그 예이다. 네 사람은 풍광이 아름다운 두릉에서의 은거를 노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못다 이룬 출사의 꿈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었다. 이와 관련해 두릉이 뱃길로 도성에 쉽게 닿을 수 있었던 근교지로서 은둔과 출사를 동시에 꿈꿨던 당시의 문인들에게 각광 받았던 지역이었음을 주목할 만하다.

조선의 문헌 속에 그려진 미비(米芾)의 몇 가지 형상에 관한 소고

신영주 ( Shin Youngju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6권 0호, 2018 pp. 61-87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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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불의 서예와 회화의 작품과 이론, 그리고 그의 기이한 행동과 취미가 우리나라에 수용되어 나타난 현상들에 관하여 알아보았다. 미불은 우리나라에 고려시대부터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서예를 수용하는 것보다 그의 회화를 즐기고 수용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이는 그의 회화가 수용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초기의 그림에서 이미 미불의 화법이 수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지식인들이 실용적 기능보다 예술 감성이 극대화되어 있는 미불의 회화를 언급하는 데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이 적어진 것이리라 생각한다. 미불 서예도 예술적 측면이 강조되어 있어 조선 사회에서 평가가 갈리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로 가면서 점차 그의 서법과 화법에 대한 부정적 인식들이 사라져 갔다. 그 사이 미불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서화에서보다 ‘書畵船’이라는 말로 일컬어지는 서화를 즐기는 독특한 방식과 ‘拜石’이라는 말로 일컬어지는 바위를 몹시 좋아하는 행위에 집중되었다. 본고에서는 미불이 이런 까닭으로 우리나라 문헌에서 기이한 행동을 좋아하고 예술에 몰입하는 예술 취미가 강한 인간의 형상으로 그려지게 되었음을 밝혔다.

홍석모(洪錫謨)의 연행과 청(淸) 문인(文人)의 만남, 그리고 북경 유리창

김동건 ( Kim Dong-geo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6권 0호, 2018 pp. 89-122 ( 총 34 pages)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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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錫謨는 부친인 洪羲俊이 洪良浩를 배행하여 연행을 다녀온 사례를 그대로 이어받은 인물로, 풍산 홍씨가 중에서 비교적 많은 淸 文人과 사귀었다. 淸 문인들은 內閣中書 계열의 벼슬이 많았고 홍석모와 동갑에다 고향을 떠나온 처지 등이 비슷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만남은 짧았지만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홍양호의 손자 홍석모가, 예전 연행과 같이 아버지 홍희준을 모시고 온다는 것은 연경 선비들에게도 다시 있기 어려운 사건이었기에 그들도 적극적으로 만남에 응해주었다. 이들이 수창한 시를 분석하여 교유의 양상과 감정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구체적인 대화가 담긴 필담은 존재하지 않으나, 시를 통해서도 그들의 교유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상대방의 인품을 높이 여기는 내용의 시를 和韻의 형식으로 지었다. 상대방의 字號를 이용한 장난스러운 시도 있는데 그만큼 그들의 허물없는 許與를 알 수 있다. 헤어지기 전에 수창한 시에서는 이별의 아쉬움과 그리움 등이 절절히 흐르고 있다. 이들이 만난 장소는, 북경 宣武門 밖 琉璃廠 일대였다. 이곳은 紀昀의 손자 紀樹蕤의 저택을 비롯하여 홍석모가 만난 인물이 주로 거주하였던 곳이다. 조선 사람을 만나 교유하기를 좋아하는 인물도 있다는 점에서 유리창은 조선사행과 중국 선비들 사이에 교유의 장이 열렸음을 알 수 있다.
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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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활자로 서적을 간행하여 문신들에게 반포하고 지방관아로 하여금 정판간행케 함으로써 문화 수준을 향상시키려고 하였다. 詩學을 진흥시키기 위해 경자자로 『選詩演義』(1422, 1434)를 간행하고, 『分類補註李太白詩』(1435), 『唐柳先生集』(1440)을 갑인자로 간행하였으며, 별도로 『唐詩鼓吹』·『續鼓吹』도 갑인자로 간행하였다. 그 후 세종은 劉履의 『風雅翼選詩』를 갑인자로 간행하였다. 『風雅翼選詩』는 劉履가 주희의 유의를 계승하여, 『문선』에서 시를 선별하고 『문선』에 누락된 시를 채록하여 『選詩補註』를 엮고, 다시 唐虞 이래 晉에 이르기까지 傳記와 諸子集에 산견하는 古歌辭를 선별하여 『選詩補遺』를, 그 외 唐宋의 여러 작품들과 주희 「감흥시」를 선하여 『選詩續編』을 엮은 것이다. 유리는 또 세 편 모두에 대해 주해를 붙이되 『선시보주』의 경우 『시집전』과 『초사집주』의 방식을 따랐다. 劉履의 『보주』는 형식에 있어 『시집전』과 마찬가지로 크게 訓詁를 설명하는 圈內註와 작자의 旨意를 풀이하는 圈外註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내용상 『보주』는 시를 逐句 부연하여 시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시집전』의 주해방식과는 달리, 주석자 자신이 시인의 입장이 되어 詩想의 흐름을 따라가며 詩語에 나타난 시인의 심리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보주』의 흥설은 『시집전』의 흥설을 대체로 따랐다.

김종직(金宗直)의 서적 간행 활동 일고 - 지방관 재임기를 중심으로 -

구슬아 ( Koo Seul-ah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6권 0호, 2018 pp. 159-196 ( 총 38 pages)
7,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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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占畢齋 金宗直의 정치적 이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治績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는 지방관 재임기, 그가 嶺南 지역에서 간행한 8종의 서적들을 목록화하고 그 간행 양상과 특징, 목적을 연구한 것이다. 먼저 김종직이 간행에 관여한 서적들이 문장 학습 및 科擧 준비와 일정부분 관련이 있음을 살피고, 그것이 조선전기 영남 지역의 학술사·서지사적 경향과도 일치함을 분석하였다. 김종직은 經書와 문장학습서를 중심으로 지방의 인재를 고무시키고 향촌의 문화를 유교적으로 쇄신하는 데 일조하고자 하였다. 그는 지방의 인재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 조정으로 진출하여 조선의 문명화를 진행할 것을 주문하였다. 이에 따라 보다 정확한 경전의 독서를 가능하게 하는 각종 注解書를 간행하였다. 그것은 유가의 경전에만 머물지 않고, 당송고문을 학습할 수 있는 문장선집, 예서 등에 이르렀다. 특히 주해서는 조선전기의 경전 학습방법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김종직은 자신이 간행·보급하는 서적들이 지방 인재들의 학습교재이자 조선에 유가 문명을 확산시킬 도구로 활용되기를 바랐다. 이 연구를 통해 교육자로서 김종직의 면모를 재발견하고, 조선전기 문학사의 연구사적 공백을 일정 부분 메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의 원림(園林)과 문학(文學)

신두환 ( Shin Doo-hwa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6권 0호, 2018 pp. 197-241 ( 총 45 pages)
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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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石門 鄭榮邦(1577년 ~ 1650년)의 원림과 문학에 대해 연구한 논문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선조시대의 임진왜란, 광해군 시대의 亂政과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조선 역사의 대 혼란기였다. 石門 鄭榮邦은 당대 성리학을 공부했던 영남의 유명한 학자로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원림을 경영하며 강호가도를 추구했던 고결한 학자였다. 石門 鄭榮邦은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나 자연의 진경에 몰입하여 강호의 경치를 구가하면서 성리학의 도를 추구하려는 새로운 사림이었다. 그가 병자호란을 피해 영양 임천으로 은거하여 원림을 조성하고 축조한 서석지는 문학과 예술을 함의 시킨 위대한 유가의 정원이자 원림의 보고이다. 이 서석지는 우리나라 사대부들의 원림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원림은 정자를 향하고 정자는 그 원림을 끌어들이며 편액과 기둥의 글귀들은 그가 추구하는 도를 표방하게 된다. 그의 원림의 세계에는 성리학의 이상세계가 들어 있고, 학문에 대한 애정이 들어 있으며, 수기치인의 반성과 수양의 미학이 들어 있었다. 서석지의 자연석에 기이한 형상들을 유추해 내는 그의 시각에는 심미적인 감수성이 넘쳐나며, 서석군의 형상미를 창출한 미의식에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넘쳐난다. 석문 정영방의 문학은 강호가도가 주를 이룬다. 그의 詩는 470여 수나 되고 文은 18편인데 문장은 贍麗하여 읊을 만하며, 특히 그의 사부는 초사의 형식을 함의하고 있으며 그 지역의 향토적 소재로 지어진 특이한 문채이다. 그의 <정과정곡>에 대한 민족문학적 견해는 우리 문학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제공해준다. 그의 詩는 더욱 淸絶하여 격조가 있었다. 그의 시는 唐詩의 경지에 나아갔으며, 운율이나 氣勢 같은 말단에 힘쓰지 아니했다. 그의 시는 宋나라 詩風이 스며있으면서도 사실에 얽매이는 누습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그의 오언절구는 훌륭하여 康樂 謝靈運과 長吉 李賀의 風致가있다. 그가 완상한 것은 석문의 빼어난 자연경관에서 감발한 것이며, 그의 풍자는 석문의 風泉과 서로 和答한 것이다. 석문의 원림과 문학에는 성리학의 미의식이 앙금처럼 녹아서 영롱한 미를 발산해내고 있다.

사천(沙川) 심제(沈𪗆)의 시세계 연구

김묘정 ( Kim Myo Ju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6권 0호, 2018 pp. 243-274 ( 총 32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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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小北八文章 중 한명인 沙川 沈𪗆에 대한 첫 연구로, 그의 삶의 행적과 문집 전체를 개관하고 시세계 양상을 규명하고자 기획한 것이다. 사천의 시세계에 대한 접근은 17세기 小北 문단과 小北八文章이라는 집단의 실상을 규명하고 문학적 성취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선행 작업이다. 이에 필자는 전체 작품을 면밀히 검토한 후 사천 시세계의 특징적 양상을 추출하였다. 첫 번째는 자기인식 과정에서 포착되는 탈속적 세계에 대한 갈망양상이다. 이를 통해 사천의 의식세계 일부를 확인하였으며, 사천이 내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탈속 공간인 仙境과 自然으로 진입해 속세의 번민에서 탈피하고자 했음을 밝혔다. 두 번째로는 작가 고유의 정서가 표출되는 동시에 이별의 정한이 미적으로 승화되어 있는 送詩・贈詩를 기저로 작품의 시적 성취를 확인하였다. 사천의 送詩・贈詩는 작시 대상이 小北 문인이나 친인척에 한정되어 교류의 의미가 강한 편이며, 진실성을 구비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세 번째로는 小北八文章의 창작 경향성을 대변하는 挽詩 작품을 대상으로 하되, 특징적 면모인 여성의 시적 형상화 양상을 검토하였다. 이에 사천의 만시에 드러난 여성이 전통적 여성상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음을 파악하였다. 또한 사천이 仙界를 제재나 배경으로 삼아 道敎的 死生觀을 표출했음을 고찰하였는데, 이 역시 사천 만시에서 포착되는 특징적 지점이다.

신광하(申光河) 기행시의 몇 가지 국면

이은주 ( Yi Eunju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6권 0호, 2018 pp. 275-298 ( 총 24 pages)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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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광하의 기행시에 나타난 몇 가지 측면을 살펴본 것이다. 전 생애에 걸쳐 여러 차례 여행을 떠났던 만큼 신광하는 여행으로 유명하고, 그의 시문 역시 주로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연구되었다. 다만 그동안 신광하의 기행시에서 주목된 점은 주로 백성의 피폐한 삶을 고발하고 현실비판적인 서사시 창작의 맥락이었고, 논의대상은 주로 「북유록」과 「백두록」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신광하의 기행시권은 단일하지 않고 「사군록」, 「서유록」 등 다양한 관심사와 성격을 보여주는 시들이 많다. 이 글의 목표는 신광하의 기행시가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광하가 맏형 신광수에게서 일정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였다. 「북유록」과 「백두록」에 수록된 시는 주로 함경도 백성들의 피폐한 삶과 그 참상을 보여주는 데에 있지만, 여타의 시에 비해 좀 더 구체적이고 특수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신광하는 이 일대를 다닌 뒤에 관료들에게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했을 정도로 관의 수탈과 백성의 고통, 임금의 은혜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수준을 넘어서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서유록」은 평양을 유람한 일반적인 시처럼 보이지만, 세상을 떠난 신광수의 흔적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때로는 신광수의 시가 남아있는 곳에서 감회를 느끼며, 때로는 신광수의 예전 시를 염두에 두고 시를 짓고 있으며 때로는 신광수가 평양에서 지었던 시를 환기시키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 「사군록」의 경우에는 인문 경관보다는 기이한 장관을 형상화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렇게 신광하의 기행시는 다양한 편차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평생 여행에 몰두했던 신광하가 가지는 개성일 것이다.

한(韓)·중(中) 인삼시(人蔘詩)의 양상과 특징

김보성 ( Kim Bo-su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6권 0호, 2018 pp. 299-329 ( 총 31 pages)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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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蔘은 한국에서 재배가 시작되어 일찍이 동북아시아에서 활발히 거래되고, 나아가 동남아시아 및 서양 권역에까지 그 명성과 가치를 널리 알린 産品이다.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인삼은 한국의 대표 약용작물로서 각광 받았다. 이른바 ‘만병통치약’이라 소문난 인삼을 구하려 했던 동아시아인들의 노력相은 현존하는 고문헌에 산재되어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인삼은 오랜 세월동안 값비싼 名藥으로 자리매김했다. 인삼 수요가 동아시아 차원에서 급증하자, 인삼 생산국인 우리나라는 적잖은 부작용을 감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백성들은 중국에 바치는 필수 朝貢品이 되어버린 인삼을 채취하느라 노역에 시달렸고, 조정 중신들은 일본의 採蔘者나 商人이 배출한 위조 인삼을 막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인삼은 한·중·일의 주요 관심사로 늘 부각되면서 동아시아 문화권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인삼이 중증 환자를 치유하는 약용식물로 각인되고, 높은 이윤을 남기는 무역상품으로 부상하여, 이로 인해 오히려 몸을 상하게 하는 남용·오용이나 백성의 생계를 파괴하는 지경의 조공을 초래하는 일련의 과정이 漢詩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또한, 개인 체험으로 습득한 생생한 인삼 정보가 장편 한시에 보인다. 인삼에 대한 공적 기록물(역사서)과 더불어 개인 기록물(한시)을 함께 분석하는 것은 동아시아 인삼 문화사를 온전히 재구하는 일환으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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