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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성신한문학(~2003) → 한문고전연구(2004~)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7권 0호 (2018)

세종대(世宗代) 학술·문화에 끼친 권근(權近)의 영향

강문식 ( Kang Moonshik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7권 0호, 2018 pp. 1-32 ( 총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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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의 학술·문화의 발전은 세종과 당시 관료·학자들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선배 학자들의 학문적 성과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세종대 학술·문화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이가 權近이었다. 권근의 학문은 크게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세종대의 학계에 영향을 끼쳤다. 첫째는 安東權氏 家學과 官學에서의 교육 활동을 통한 학문 전수이다. 가학과 관학을 통해 권근의 학문을 계승한 대표 인물로는 권제·권람·최항·서거정·변계량 등이 있는데, 이들은 세종대 집현전의 학문 활동과 연결되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권근의 문인들이 집현전으로 대표되는 세종대 관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교육과 儀禮 제도 정비를 통한 영향이다. 권근은 교육·문한 계통의 관직에 종사하면서 관학 교육 및 國家典禮에 관한 여러 제도들을 입안했으며, 이 내용들은 법제화되거나 태종~세종대 국가전례 정비에서 참고 자료가 되었다. 교육·의례 제도의 정비는 권근의 학문이 사승 관계를 통한 전수만이 아니라 법과 제도를 통해서 조선 초기 관학계 전반에 영향을 끼쳤음을 잘 보여준다. 세 번째는 저술을 통한 영향이다. 권근의 저술 중 후대 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는 『入學圖說』·『五經淺見錄』 및 經書口訣 등의 경학 저술과 『孝行錄』을 꼽을 수 있다. 『입학도설』·『오경천견록』은 여러 차례 간행되어 학자들에게 보급되었고, 경서구결은 조선 초기 경서 학습의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또, 『효행록』은 내용과 형식적인 면에서 세종대 『삼강행실도』 편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세종조(世宗朝) 문학(文學) 관련 서적(書籍) 출판(出版) 연구

김은정 ( Kim Eun-jeo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7권 0호, 2018 pp. 33-64 ( 총 32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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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에 수많은 서적이 출판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출판 관련 하드웨어의 정비를 들 수 있다. 세종조에는 활자를 정교히 다듬어 庚子字와 甲寅字가 나왔고, 조판 기술과 인쇄술 또한 발달하였다. 또한 세종은 인쇄할 때 소용되는 종이를 확보하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 造紙署를 통해 지료의 다양화와 배합지 사용 등의 방법을 통해 안정적으로 책지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세종조의 수많은 서적은 기술적인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조 초반에는 문학 관련 서적이 드물게 간행되었다. 세종이 문학을 末藝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1435년(세종 17)에 세종 스스로가 시부를 좋아한다고 하고, 실용적인 목적으로 詞章을 권장하면서 문학 관련 서적이 전에 비해 늘어나게 된다. 그 결과 경자자로 11종, 갑인자로 21종의 서적이 간행된다. 세종조에 간행된 문학 관련 서적의 특징은 조선의 독자성을 띤다는 점이다. 가장 앞선 것으로 경자자본 『文選』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중국에서 확인할 수 없는 秀州 州學本을 저본으로 하였는데, 여기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지만 일실되었던 國子監本(이선주본)과 孟氏本(오신주본)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이유로 전승이 되지 못하거나 구하기 어려운 『문선』 관련 판본을 확보하여 간행함으로써 학술의 정통성을 계승해 나갔다고 하겠다. 아울러 학시의 전범이 되는 杜詩 관련 서적을 다수 간행하면서 독자적으로 주해를 달아 『纂註分類杜詩』이 세종 말엽에 완성된다. 『찬주분류두시』는 조선의 학자들이 주석본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독자적으로 편찬한 새로운 서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세종이 중국본을 수입하여 복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주석본을 새로 편찬하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독자적인 서적 편찬은 세종조 중반 이후 중요 시문집 간행의 기본 방향으로 자리잡았다. 韓愈, 柳宗元, 蘇軾의 시문집을 간행할 때도 집현전에서 중국의 여러 전적을 참조하여 체계적인 체제를 갖추면서도 자세한 주석을 덧붙여 학습에 도움이 되도록 간행하였다. 한편 『찬주분류두시』 편찬을 총관하기도 한 安平大君은 독자적인 안목을 지니고 적극적으로 시문을 평가하여 여러 종의 시문집을 편찬, 간행하였다. 이는 안평대군의 개인적인 취향과 문학적 역량, 그리고 당시 조정에서 독자적인 주해서를 편찬하는 분위기가 작용한 결과라 하겠다.
7,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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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삼강행실도』·『명황계감』·『용비어천가『·『월인석보』가 지닌 체재상의 특징을 개관하고, 편찬물들 상호간의 상관성 내지 영향 관계를 분석하였다. 『삼강행실도』는 그림과 해설로 짜인 구성의 선례를 제공했다는 의의가 있다. 백성들에게 삼강의 덕목을 홍포할 목적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그림을 통해 내용을 인상 깊게 전달한 후 관련 사적을 한문으로 풀이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왕실 후손을 경계하기 위해 지은 『명황계감』에서는 그 같은 『삼강행실도』의 체재가 준용되었으며, 문건 제작에 수양대군이 깊이 관여하였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소용되는 『삼강행실도』와 왕실 후손들을 위한 『명황계감』의 쌍을 상정하여 상호 동일한 체재를 갖추고자 의도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창업의 위업을 공식화하기 위해 제작한 『용비어천가』는 노랫말만 존재하던 단계에서는 『삼강행실도』 및 『명황계감』과 별반 관련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세종은 이내 노랫말 각 장에 일일이 해설을 달아 풀이하도록 지시한다. 이러한 개편 체재는 『삼강행실도』·『명황계감』에서 그림이 차지하던 위치에 노랫말이 대신 들어간 형상이다. 한편, 소헌왕후를 추천할 목적으로 편찬한 『석보상절』은 『명황계감』과 마찬가지로 왕실 내부의 문제에 관계되는 문건인 만큼 그 제작에도 역시 수양대군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내용상으로도 『명황계감』과 『석보상절』은 각각 당 현종과 석가모니라는 단일 인물의 행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친연성이 있다. 『용비어천가』는 상기의 편찬물들을 확대하거나 새로운 편찬물의 제작을 추동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세종은 이미 편찬이 완료된 『명황계감』의 내용을 바탕으로 168장에 달하는 장편의 노랫말을 지어 내었는데 각 장이 대우로 짜여있다거나 감계를 영탄으로 드러내었다는 설명으로 미루어 『용비어천가』 한문가사의 형식을 활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유사한 작업은 『석보상절』에 대해서도 이루어진다. 세종은 『석보상절』을 받아 보고서 그 내용에 의거하여 곧 583장 규모의 『월인천강지곡』을 지었으며 이때에는 『용비어천가』 국문가사의 형식을 활용하였다. 이들 노랫말은 세종대까지는 별도로 존재하였다가 세조대에 들어 노랫말이 원 전적과 합편된다. 이때의 합편은 『용비어천가』의 체재를 재현하는 양상으로 귀결되어, 『용비어천가』·『명황계감』·『월인석보』의 체재가 기본적으로 동일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편, 세조는 『삼강행실도』나 『용비어천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반면 『명황계감』을 개편하고 『월인석보』를 제작하는 데에는 진력하는데, 이는 자신이 처음부터 두 문건의 편찬에 관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이들 두 문건을 바탕으로 세종이 직접 노랫말을 지어 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업과 부왕의 작업을 한데 합침으로써 세종의 유지가 자신에게로 이어진다는 뜻을 공고하게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간취된다. 아울러 세조는 합편한 전적을 온전히 국문화하려는 가외의 시도도 하였다. 이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의 사례에서처럼 국문으로써도 만족할 만한 문건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면서, 국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의도를 현창하려는 의지가 개입된 결과로도 해석된다.

세종조 집현전 학사의 교유 양상 연구 - 진관사 사가독서 참여인을 중심으로 -

손유경 ( Son Yoo Kyu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7권 0호, 2018 pp. 103-142 ( 총 40 pages)
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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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는 한글 창제, 각종 서적의 편찬, 예악의 정비 등을 통해 조선이 문화적 역량을 채워나갔던 시기다. 이러한 다양한 업적의 중심에는 世宗(1397~1450)과 왕실연구기관 集賢殿이 있었으며, 이들에 의해 조선 초 정치·제도·문화 등의 상부구조가 뼈대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세종의 뒤를 이은 文宗이 재위 2년여 만에 병사하고, 나이 어린 세자 端宗이 즉위하면서 집현전은 권력 싸움의 한복판에 놓이게 된다. 이 때문에 선행연구에서는 世祖 정권과의 관계에 따른 집현전 학사들의 분열과 입장 차이가 강조되어 이들의 초기 교유 양상은 주목받지 못했다. 본 논문은 집현전 학사 중에서 1442년 세종의 명으로 삼각산 진관사 賜暇讀書에 참여했던 朴彭年(1417~1456)·李塏(1417~1456)·成三問(1418~1456)·河緯地(1412~1456)·申叔舟(1417~1475)·李石亨(1415~1477) 6인의 교유 양상을 살피는 것을 연구 목적으로 하였다. 심도 있는 분석을 위해서 시기와 인물은 세종의 정치철학과 이념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조선 초 엘리트 집단에 한정하였다. 津寬寺와 藏義寺에 체류하면서 서로 수창한 시에서는 휴가를 내려준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한편으로 현실 정치 참여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조급한 심사가 읽힌다. 그러나 걱정과는 다르게 사가독서를 마친 이후 이들은 뛰어난 실력으로 국가의 각종 편찬사업을 독식하면서 교유를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한 면에서 현전하는 네 편의 聯句詩는 젊은 학자 여섯 명의 관료문인으로서의 포부와 작가의식을 집약적으로 볼 수 있어 주목할 만하다. 많지 않은 자료를 근거로 하여 교유양상을 논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다만 자료적 한계 속에서도 이들 6인 간의 교유 정황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있어 이를 정리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다만 편폭의 제한과 능력의 부족으로 중국 사신과의 수창 등 공적인 사귐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였고, 安平大君과의 시모임 양상이나 一庵 스님과의 인연에 대해서도 서술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 추후 연구가 진행된다면 이들의 교유양상이 좀 더 입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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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中宗代 官僚 文人들의 의식 속에 世宗·成宗대의 ‘文治’에 대한 기억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확인하고, 그것이 당대의 학문·문화 정책 추진에 주요한 동력이 되었음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중종대 관료 문인들은 세종·성종으로 대표되는 이전 시기의 文運 盛世를 경험한 세대로서, 燕山君 시기에 정치적 좌절을 겪은 뒤 중종대에 이르러 과거의 정치를 자신의 시대에 구현해내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들이 남긴 기록을 살펴보면 세종·성종의 치세가 훌륭한 故事로서 빈번히 언급됨은 물론, 이에 대한 계승이 정치적 구호로까지 사용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과 열망은 단순한 修辭나 名分 차원에서 활용되고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 정사에도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서적의 정비 및 간행, 인재 육성 등 각종 학문 정책 국면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선 전기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세종·성종대의 학문적 유산은, 중종의 시대에도 여전히 ‘文治’라는 이름으로 유효한 지위를 획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文治’라는 키워드를 통해 중종대 관료 문인의 가치 지향과 실제 정책을 분석하는 작업은, 이들의 학문관을 이전 시기와의 연속적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고 본다. 아울러 이는 그간 ‘詞章’라는 이름하에 다분히 평면적인 해석을 면치 못하였던 이들의 당대 활동에 입체성을 부여함으로써, 그들 나름대로 영위해 갔던 시대정신의 일면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기각한필(綺閣閒筆)』을 통한 19세기 여성문학 활동에 대한 일고찰

김여주 ( Kim Yeoju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7권 0호, 2018 pp. 177-220 ( 총 44 pages)
1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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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여성작가 綺閣의 한시작품 『綺閣閒筆』 분석을 통해 19세기 중반 여성작가들의 활동상을 살피고자 한 것이다. 조선의 신분제는 여성에게 공정하지 않았고, 여성작가들의 활동은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이 출판되거나 구전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듯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한문학사에서 뛰어난 여성작가들은 어느 시기에나 존재하였기에 연구를 소홀히 할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니 『綺閣閒筆』이라는 자료의 발굴은 이러한 의미에서 가치가 매우 높다. 한글 필사본 『기각한필』에는 총 247수의 기각의 시가 실려 있다. 『기각한필』 수록 시들은 분명 한자로 지은 漢詩이지만 한문 원문이 전혀 적혀 있지 않고 한글로만 필사되어 있다. 제목·제목에 대한 풀이·본문·해석이 모두 한글로만 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성으로 돌아가다”라는 시를 ‘還魯城’으로 적지 않고, ‘환노성’으로 적었다. 한시를 한글음사방식으로만 기술한 『기각한필』의 형태는 기존 여성시인들의 한시문집과는 다른 점이라 볼 수 있어 주목을 요한다. 이는 18세기 이후 여성문인들에게서 보이는 또 다른 문학향유 방식의 일환이므로 이에 대한 연구는 당시의 여성문학 활동상을 이해하는데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본고에서 연구 텍스트로 삼은 『기각한필』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자료로, 선행 연구자들에 의해 漢詩로 복원된 것을 그대로 따랐다. 개별 시 작품의 분석에 보다 중점을 두어 기각의 생애와 시적 특징을 재구성하고자 한 점, 이후 연구 범위를 확대ㆍ적용하여 19세기 사대부가 여성들의 공통적이면서도 다양한 문학 활동 양상을 살피고자 한 점이 본 연구가 갖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세밀한 분석의 틀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면서 생몰연대가 상세하지 않지 만 19세기 여성시인의 활동이 다양했던 시기에 한글음사 방법을 통해 한시를 공유하고자 했던 기각의 활동상을 고찰할 수 있었다. 더불어 오빠를 비롯한 주변 남성 시인들과의 교유 모임에서 자연스런 시작 일상도 엿볼 수 있었다. 시세계의 특징을 題材별로 분류하여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읊었다고 여겨지던 작품들에서 사물의 내적 속성을 재치 있게 詩化한 詠物詩와 자연의 외적 묘사를 대상으로 자신의 밝은 심경을 투영한 景物詩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주로 七言絶句 형식의 시를 작시함으로서 여성시인들과 함께 공유하며 감상하고자한 배려도 보인다. 또한 옛 시인들이 지은 시구를 제목화한 작품들에서는 作詩의 형식을 배우려는 시도와 옛 시인들의 감성을 체득하면서 다양한 정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면모가 기각의 시인으로서의 창작 의지에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기각은 다양한 題材의 시화를 통해 시적 재치를 효율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고, 다양한 감성의 체득 및 공유를 통해 여성시인으로서의 자부를 내비치고 있다. 이는 시인 개인의 詩才 표출과 정감 표현의 욕구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대상 시들을 단순한 습작으로 평가하던 시각에서 벗어나 그 가치를 재평가 할 수 있게 한다. 게다가 한시를 한글음사방식으로 편집한 것은 여성독자와의 공유를 위한 배려로서 이것은 19세기 여성시인들의 창작활동의 적극성과 일상적 향유의 면모와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자신의 시문집을 『기각한필』이라고 詩話의 성격이 강한 이름을 붙인 것도 이러한 의식의 반영으로 보인다. 기각의 이러한 시세계 특징과 시인 의식은 19세기 여성시인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 한시(漢詩)에 인용된 태산(泰山)의 형상화 양상 연구

이동재 ( Lee Dongjae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7권 0호, 2018 pp. 221-249 ( 총 29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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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山은 중국 산동성에 있는 산으로 중국 역대 왕조의 황제들이 통치의 정당성을 하늘로부터 확인받는 의식인 封禪儀式을 거행하였고, 공자가 이 산을 오른 이후 五嶽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산으로 인식되었다. 태산이 문학의 소재로 처음 등장한 것은 詩經이며, 이후 盛唐의 杜甫가 태산에 올라 지은 <望嶽> 시가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문인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 문인 가운데 태산을 소재로 하여 쓴 시는 고려 말 李穡이 지은 <雲出泰山> 최초이고, 이후 조선에 들어와서 李民宬, 鮮于浹, 吳䎘, 李玄錫, 徐宗泰 등이 시를 지었다. 泰山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사용하는 관용구나 속담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어휘이고, 문인들이 지은 漢詩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시어이다. 태산은 우리나라의 漢詩에서는 주로 挽詩에 인용되어 고매한 인품과 학식, 덕망 등이 높은 亡者를 형상화하는 시어로 활용되었다. 이는 『禮記』 「檀弓」 上에서 ‘泰山其頹’라고 하여, 공자의 죽음을 비유한 이후 학문이나 공적이 뛰어난 인물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의미가 轉成되어 중대한 가치가 있는 일을 형상화하는 시어로 활용되었다. 이는 司馬遷이 任安에게 보낸 편지에서, 史記의 완성을 태산에 비유하여 죽음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한 것에서 기인하였으며, 우리나라의 漢詩에서도 종종 특정 인물의 殺身成仁과 같은 행위를 비유하는 시어로 활용되었다. 나아가, 태산은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경지를 비유하였는데, 이는 주로 자손들이나 후학들에게 훈계의 목적으로 지은 시에서 학문의 목표를 높게 세울 것을 당부한 시에서 활용되었다. 앞으로 태산을 직접 소재로 한 한시를 비롯하여 태산을 직접 유람하고 쓴 유람기를 발굴하여 우리조상들이 태산을 어떻게 형상화하였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추후의 과제로 남긴다.

조선조 문인의 도연명(陶淵明) 사언시(四言詩) 수용 양상 연구

이훈 ( Lee Hoo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7권 0호, 2018 pp. 251-299 ( 총 49 pages)
1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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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陶淵明의 四言詩를 和作한 조선조 문인의 작품을 ‘和陶四言詩’로 명명하고, 도연명 사언시를 수용한 양상을 구명하면서 수용의 내부적 발전 정도와 문학사적 의미를 탐색한 것이다. 본고에서 대상으로 삼은 조선조 ‘화도사언시’ 문인은 김시습·신흠·유계·김수항·김창협·조유수·조종진·이만수 등으로, 분석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도연명의 사언시는 형식과 수사적 측면에서 의식적으로 『詩經』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復古 내지 尙古的인 성향을 지닌다. 이에 대한 조선조 ‘화도사언시’는 창작 과정에 古風을 추구하고자 하는 문학적 지향이 내포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문인별 문학성의 차이로 인해 古風 추구 인식에 편차가 존재한다. 따라서 조선조 ‘화도사언시’는 詩題와 형식에서부터 다채로운 양상을 보이는데, 화도사언시 문인들은 도연명 사언시의 체제를 그대로 수용하는 한편 자신만의 개성으로 변주하기도 하였다. 개인별 창작 시기는 대체적으로 중년 이후이며 작가가 처한 상황은 심적인 고뇌를 겪던 시기였다. 이러한 양상은 도연명의 사언시가 言志와 述懷에 특장이 있음을 반증한다. 아울러 조선조 ‘화도사언시’의 창작 연대가 17세기에 집중된 것은 특기할 점으로, 이는 17세기에 들어와 古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는 한시사의 흐름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도연명 사언시와 조선조 ‘화도사언시’ 간에는 韻字에 차이가 있다. 조종진과 이만수의 경우는 마지막 운자를 原詩의 운자와 동일한 韻目에 속한 다른 글자로 전환하는 依韻의 방식을 구사하여 주제의식의 내면화를 구현하였다. 김창협의 경우는 도연명의 사언시가 지닌 주제의식에 부합하여 和作하되 和韻하는 방식으로 창작하지 않았다. 조선조 ‘화도사언시’에 있어서 가장 특색 있는 부분은 수사적 측면이다. 김시습의 경우는 도연명 사언시의 모든 수사적 특징을 함유한다. 그러나 17세기 신흠·유계·김수항·김창협의 경우에는 수용과 변주에 편차가 있다. 18세기 조유수의 경우에는 수용의 정도가 희박해졌으며, 19세기 전반기 조종진과 이만수의 경우에는 수용의 정도가 다시 높아졌다. 김창협이 도연명의 詩題를 활용하지 않은 점과 和韻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그의 작품은 조선조 ‘화도사언시’의 역사적 轉變 과정에서 전환점이 된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창협은 17세기에 대두한 복고주의 시풍에 비판을 가했고, 이로 인해 18세기는 개성주의가 주된 문풍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8세기 조유수의 작품이 수사적 측면에서 도연명의 사언시를 수용한 정도가 낮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정조의 문체반정과 詩選集 편찬 사업에 영향을 받은 19세기 전반기 관료문인들은 복고주의 내지 상고주의를 표방하였는데, 이것이 19세기 전반기 조종진과 이만수의 작품에 도연명의 사언시를 수용한 정도가 다시 높아진 이유이다. 이와 같이 조선조 ‘화도사언시’는 도연명의 사언시가 지닌 제특성을 시대별 문풍과 작가별 문학적 지향으로 재구성하는 내면화의 轉變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조선조 ‘화도사언시’의 창작 방식은 압운과 詩意의 수용 양상에 따라 ‘和韻和意’ 유형, ‘和意不和韻’ 유형, ‘和韻和意’와 ‘和韻不和意’ 결합 유형으로 분류할수 있다. ‘和韻和意’의 유형은 도연명 原詩의 韻字를 재사용하고 詩意를 수용하여 내면화한 것으로, 김시습·신흠·유계·김수항·조유수·조종진의 작품이 해당된다. ‘和意不和韻’ 유형은 도연명 原詩의 韻字를 재사용하지 않으면서 原詩의 詩意를 수용하여 내면화한 것으로, 김창협의 작품이 해당된다. ‘和韻和意’와 ‘和韻不和意’ 결합 유형은 도연명 原詩의 운자를 재사용하되 原詩의 詩意를 수용하여 내면화한 것과 독자적인 新意를 구현한 것이 병존하는 경우로, 이만수의 작품이 해당된다. 특히 이만수의 화도사언시는 도연명 사언시 전체를 화운한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과 도연명 사언시의 형식과 율격을 내면화하면서도 독자적인 新意를 구현한 점에서, 조선조 ‘화도사언시’의 내부적 발전 정도에 있어 최고의 정점에 위치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땅’의 어원(語源) 시고(試考)

한연석 ( Han Youn Suk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7권 0호, 2018 pp. 301-339 ( 총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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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땅)’의 語源에 대해 未詳과 ‘달’이라는 주장이 상존한다. 필자는 ‘달’이 祖語라는 주장에 동조하되, 그 방증은 국어학계와 달리 上古漢語 ‘地’에서 찾았다. 上古漢語에서 地의 독음은 ‘달’이고, 이 ‘달’이 ‘따’와 ‘지’로 音變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따(땅) 지(地)’의 ‘따’와 ‘지’는 모두 상고한어 ‘달’의 音變이고, ‘달 > 따 > 지’의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地는 수용초기 ‘강 강(江)’처럼 ‘달 달(地)’의 訓ㆍ音借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漢語의 변화와 그에 따른 우리자전의 수용과 세속의 보수적 독음 고수로 인해 ‘달, 따, 지’가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르게 적용되면서 ‘따’와 ‘지’를 訓과 音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달, 따, 지’와 이들의 혼재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地의 上古音은 ‘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존 音韻書는 자료의 한계로 ‘定紐 歌部’의 ‘다, 대(dĭa)’로만 再構 하나, 地의 古字 墬의 ‘定紐 物部 diwə̅t(달)’을 참고하면 상고의 어느 시점에서는 ‘달’로 읽었을 것이다. 둘째 地의 ‘달’이 ‘따’로 演變된 것은 입성운미 소실의 한어음운사가 반영된 것이다. 민간어원에 보이는 ‘多 大 墮 吐’ 역시 한편으로는 이를 반영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고한어에서 이미 운미가 탈락된 地의 ‘定紐 歌部’를 반영(音借)한 것이다. 셋째 ‘따 지(地)’의 ‘지’는 地의 中古音 ‘定紐 至部 di’를 반영한 것이다. 넷째 ‘따 지(地)’의 ‘따’와 ‘지’는 地의 訓ㆍ音借인 ‘달 달(地)’의 演變이다. ‘따’를 訓, ‘지(地)’를 音처럼 인식하는 것은 漢語의 변화에 따른 우리자전의 수용과세속의 보수적 태도 때문이다. 황윤석의 언설을 참고하면 새로 제작되는 자전은 중국의 변화된 독음을 반영하고, 세속은 오래전에 받아들인 음가를 고수하려는 경향을 띄게 된다고 한다. 예컨대 地의 독음은 中古漢語(唐代)에 이미 ‘지(di)’로 연변 되었는데 삼국사기 등 문헌이나 양달 음달의 ‘달’에는 여전히 수용초기의 독음 ‘達’을 고수한다. 다시 중고음에서 이미 독음이 ‘지’로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17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상고음인 ‘따(다, 대(dĭa))’를 쓰기도 하였다. (민간어원 ‘多 大 墮 吐’가 ‘따’의 音借임) 이렇게 17세기 이후 세속과 ‘훈몽서 혹은 자전’의 독음 반영이 축차적으로 일어나 결국은 ‘달 달(地)’의 訓ㆍ音借가 ‘따 지(地)’로 변해 ‘따’와 ‘지’를 訓과 音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다섯째, 우리말 ‘따(땅)’는 토지 대지 장소를 아우르는 多義語이고 ‘다, □, 데’와 同源語이며, 이의 한자기록 ‘土, 地 處’는 ‘따(땅), 다, □, 데’의 訓ㆍ音借이다. 그렇다면 우리말 ‘따(땅), 다, □, 데’는 漢語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漢語 ‘地 土 處 所 場’은 대략 上古音이 ‘따(달), 다, 처, 타’이고, 대지 토지 장소를 나타내는 同源詞이다. 따라서 이는 우리말 ‘달’ ‘따’가 상고한어 地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 同源語인 국어 ‘따, 다, 데’는 초기에는 ‘地 土 處’를 가리지 않고 사용하였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대략 토지 대지의 ‘따’는 地로, 장소의 ‘다, 데’는 處로 수렴되는 듯하다.

출생(出生)에 관한 한자(漢字) 고(考)

우온식 ( Woo Onsik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7권 0호, 2018 pp. 341-379 ( 총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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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탄생과 관련된 한자의 자원을 분석한 논문이다. 출생이란 태아가 모체로부터 완전히 나와 독립 생명체를 이루는 현상이다. 인간의 출생은 종족을 보존하고, 그 가업을 계승하고 가문을 잇는 중대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혼인을 자녀 출산의 수단으로 여겼던 까닭에 혼인한 여성은 아이를 낳는 일을 가장 큰 의무인 동시에 소망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온 문중이 바라는 일이기도 하였다. 대종사에 번거로운 예법을 많이 지켰던 전통사회에서는 入胎 전후에 산모를 보호하는 법과 해산할 때 집안사람들이 함께 産兒의 건강을 도모했다. 또한 아이가 출생하면 대문에 금줄을 쳐서 喪人과 잡인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막고 집안사람들조차 부정한 곳의 출입을 삼갈 정도로 ‘出生禮'를 철저하게 지켰다. 최초의 인류가 탄생한 이후 현생인류는 끊임없이 진화하여 고도의 정신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한 집단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레 하나의 사회를 형성해 가면서 서로의 의사소통을 위해 독창적인 언어를 구현·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출생과 관련된 문자 또한 인간은 소통과 기록의 필요를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수천 년간 전해져 내려오는 한자의 자원분석을 통하여 고대의 출생에 관한 관습과 관념 등을 연구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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