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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성신한문학(~2003) → 한문고전연구(2004~)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8권 0호 (2019)

<조완벽전>과 <최척전>에 그려진 민간인 포로 형상과 해양체험

권혁래 ( Kwon Hyeok-rae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8권 0호, 2019 pp. 1-26 ( 총 26 pages)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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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 필자는 포로실기 <趙完璧傳>에 기록된 임진왜란 민간인 포로조완벽의 항해와 해양체험을 분석하고, 이와 연관하여 조위한의 소설 <최척전>의 포로서사 및 문학공간 설정이 <조완벽전>과 어떻게 상관있는지에 대해 상론하였다. 이수광은 항해노정 중, 조완벽을 무역선원의 형상으로 묘사하고, 항해 도중겪은 특이한 일들을 주로 기술하였다. 이수광은 항해노정 중 일본 사츠마주, 중국 광동성, 베트남 흥옌, 필리핀[呂宋], 류큐(琉球) 등의 주요 지명과 원양항해기법을 비중 있게 기록하였다. 남양견문에서 해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거세게흐르는 것에 대해 “서쪽 바다의 수위가 높고 동쪽이 낮아 그렇다(海水西高東下)”고 한 인식은 독특하다. ‘游龍’ 이야기는 ‘용오름 현상’에 대한 것으로, 당시 뱃사람들이 토네이도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을 보여준다. 조위한은 조완벽, 이수광 등과 동시대의 인물로서, <조완벽전>을 읽고 <최척전>을 구상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위한은 <조완벽전>에서 민간인포로라는 주인공 형상, 나가사키·바다·무역선·베트남항구라는 문학공간, 민간인 포로의 고국귀환이라는 주제 등의 면에서 제재를 얻고 상상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조위한은 옥영의 ‘베트남행’을 그리면서 항해노정이나 해양체험에 대해서는 거의 기술하지 않고, 베트남 항구에서의 극적인 부부상봉 장면과 선한 일본인 주인 형상을 강화함으로써 ‘민간인 포로의 고국 귀환’이라는 주제를 실현하였다.

통신사행인의 바다 체험과 한시 : -남용익을 중심으로-

이남면 ( Lee Nam-myo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8권 0호, 2019 pp. 27-53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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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통신사행인의 바다 체험 한시를 살피기 위해 시도되었다. 이를 위해 南龍翼(1628-1892)의 바다 체험 한시를 연구대상으로 하여 그 시를 형식과 표현의 측면에서 살폈다. 남용익은 1655년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을 다녀오면서 『扶桑錄』에 다량의 바다 체험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분명한 작시 경향을 드러내었다. 남용익은 바다 체험 과정에서 시의 창작 방식을 다양화하였다. 그는 배안에 있거나 섬에서 체류할 때 정격의 시 뿐만 아니라 잡체시로 분류되는 다양한 체식의 시를 지었고 또 동료들과 聯句를 자주 지었다. 잡체시는 희작으로 분류되지만 정격의 시에 규칙을 추가하거나 제한을 가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창작이 난해할 수 있으며, 연구는 공동 창작이기 때문에 시상의 흐름과 연결이 부자연스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남용익은 유희적이면서도 집중이 요구되는 체식까지 다양하게 지으며 소일함으로써 사행의 답답함과 무료함, 근심과 걱정, 슬픔 등의 회포를 풀었던 것이다. 또한 남용익은 바다 체험 과정에서 자신의 상상력과 지식을 시에 적극적으로 발현하였다.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를 관련짓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여시 중간에 연결 장치를 설정하는가 하면 꿈속의 상상을 통해 신선 세계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기도 했다. 또한 임진왜란을 떠올리며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거나 기타 여러 상황에 대해 다양한 역사 전고를 聯想하여 비유하였다. 남용익의 바다 체험은 그의 나이 28세에 있었던 일이다. 그 스스로 『부상록』을 평생 저작 중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할 만큼 당시 그가 지은 작품들은 공력을 들인 역작이었다. 그 공력은 정격과 변격, 단편과 장편, 개인 창작과 공동창작 등 다양한 방식의 창작을 시도하면서 상상과 연상 능력을 발휘하고 확대하고자 한 노력이었다. 결과적으로 바다 체험은 남용익의 작시 능력을 크게 성장시킨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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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 시대의 한문 산문 작품 중에서 ‘觀海’를 제재로 한 작품들을 대상으로 그 특징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바다는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영원불변의 恒常性을 지닌 존재인 동시에 浩然之氣를 기를 수 있는 광대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바다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다양한 논의들을 전개하였는데, 특히 물리적인 관찰 자체보다는 ‘마음의 눈’으로 그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이는 邵雍의 觀物說을 수용하면서도 주체적 시각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시킨 결과로 파악된다. 이러한 바다의 이미지는 ‘觀海’를 제재로 한 한문 산문 작품들의 내용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조선 시대의 ‘觀海’ 제재 한문 산문 작품들을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조선의 문인들은 바다의 형상을 도덕적 자기 수양과 학문 연마의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둘째, 바다의 광대하고 드넓은 모습에 주목하여 이를 개인의 養氣의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에 나타난 문학적 서술방식 연구

황아영 ( Hwang Ah-you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8권 0호, 2019 pp. 81-103 ( 총 23 pages)
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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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南 崔溥(1454~1504)의 『漂海錄』은 최부가 바다를 표류하다가 중국에 도착하고 중국 내륙을 통하여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경험을 成宗의 명을 받아 기록한 기행문이다. 최부는 『표해록』에 150일 간의 경험담을 일기 형식으로 빠짐없이 기록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조선에 알려지지 않았던 북경 이남 지역의 풍속과 지리, 자연환경 등이 상세하게 전해지게 되었다. 『표해록』은 견문의 내용과 일기의 형식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잡기류이기도 하고 수필과 잡록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필기류로도 볼 수 있다. 특히 최부가 살았던 조선 성종조는 실용적 성격의 학문을 진흥시켰고, 많은 필기류 저서들이 성행하였던 시기이다. 최부도 이러한 실용서적 편찬에 참여하였고 해박한 지식과 견문을 가지고 있었기에 왕명을 받아 『표해록』을 저술하면서 자신의 특별한 경험에 대한 기록과 함께 정보의 전달을 위한 기록을 함께 아우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표해록』에 나타난 정보전달보다는 특별한 경험에 대한 문학적 표현에 대해 집중하여 살펴보았다. 최부는 여러 사람들과의 대화를 그대로 기록하며 사실성과 현장감을 높였고, 주변 상황과 현장을 상세하게 묘사하여 생동감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생사가 오고가는 긴박한 상황들, 그러한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들을 적절히 배치하면서 스토리를 긴장감 넘치게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으로 인해 『표해록』은 정보전달이라는 목적 달성은 물론이고 문학적으로도 높은 성취를 이루어 이후의 조선 문단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7,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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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중종대의 문인이자 정치인 金安老가 아버지 金訢의 일생과 언행을 정리한 작품인 「先府君遺行」을 최초로 전면 분석하고, 일화 선택의 기준 및 표현 방법 등 특징적 국면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에 투사된 김안로의 시대인식을 살펴본 것이다. 김안로는 김흔이 사망하고 20여 년이 지난 151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일생 가운데 특기할 만한 일화 43개를 선별하였는데, 이때 아버지의 스승점필재 김종직이 찬술한 『이준록』의 형식과 문제의식을 차용하였다. 「선부군유행」은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갖춘 사대부들이 조정에 나아가고 군주와 조정의 선진들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는 조화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김안로는 성종대 치세의 가장 큰 장점으로 사대부들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갈등과 반목 없이 상호 신의와 문학으로써 교유하던 문화를 꼽았다. 그리하여 정치적 측면에서 상하의 위계질서에 순응하며 凌上을 경계하는 태도에 입각하여 모범적 정치인으로서 김흔의 삶을 묘사하였다. 반면 학문적 측면에서는 김종직과의 관련성을 적극 부각시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김안로는 「선부군유행」의 찬술을 통해 성종의 치세 한 가운데를 살아간 아버지의 삶을 통시적으로 조망하고 이에 대한 계승의지를 드러내는 가운데, 후대에 자신의 아버지를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전하였으며 나아가 아버지의 시대를 통해 자신이 당면한 시대의 이정표를 찾고자 하였다.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의 학문관(學問觀)에 대한 일고(一考)

김병주 ( Kim Byoung-joo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8권 0호, 2019 pp. 143-166 ( 총 24 pages)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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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先秦儒學의 문헌을 중심으로 무실론에 입각한 芝峯 李睟光(1563년-1628년)의 학문 방향성과 성향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고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특징적인 면을 고찰하였다. 첫째, 지봉은 당시 학자들이 강조하는 四書三經뿐만 아니라 치국을 위한 기초적 배움을 내포하고 있는 六經도 그의 학문적 토대인 기본 경전으로 강조하고 있다. 육경 공부의 가장 큰 목적은 단순한 문자로서의 공부가 아닌 마음으로서 체득하고 이를 실천하는 致用性에 두었다. 둘째, 학문의 방법은 앎을 통한 실천에 있음을 강조하고, 이러한 학문을 참학문으로 정의하였다. 참학문의 최종 목적은 민생의 의식주 해결로 형이상학적인 학문을 표방한 것이 아닌 민생을 위한 日用平常의 학문관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지봉은 문자중심과 이론중심의 학문이 아닌 마음 자세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체득과 실천중심의 학문을 강조하였다. 셋째, 지봉은 마음의 수양을 강조하면서 마음을 모든 사물의 주체로 보고 스스로의 사욕을 제거하고, 자기와 타인, 사람과 사물이 모두 평등해지는 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결국, 지봉의 학문은 다방면의 학문을 수용·절충하고, 실천적 측면에서 학문을 이해하면서 자기 성찰을 통한 수양으로 이어지는 유학의 학문범주를 따르고 있다.

홍백창의 금강산 기행시집 『구일기(句日記)』 연구

강혜규 ( Kang Hye-kyu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8권 0호, 2019 pp. 167-183 ( 총 17 pages)
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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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句日記』는 18세기 문인 洪百昌(1702~1742)이 30대 중반 지은 금강산 기행시집이다. 본고는 『구일기』 서문에 나온 창작의식에 의거하여 『구일기』를 분석하되, 한편으로는 홍백창이 주창한 시적 지향에 주목하고 다른 편으로는 기행시와 기행산문의 관련 양상에 주목하여 고찰하였다. 홍백창은 『구일기』에서 시의 성률과 격조보다 핍진성을 중시하고 있다. 또, 『구일기』는 금강산 총서인 『東遊記實』 안에서 기행일기인 『文日記』와 짝을 이루어 기행시와 기행산문의 유기적 관계를 조명하는 단초가 되고 있다. ‘구일기’는 시로 쓴 일기라는 뜻으로, 『동유기실』 내에서 산문으로 쓴 일기라는 뜻의 ‘문일기’와 표리가 된다. 『구일기』와 『문일기』 창작의식에서부터 시와 산문의 관계를 표리로 설정하여 제목의 짝을 맞추고 시를 일기에 맞게 기행순서대로 배열하여 서로의 관계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이를 하나의 총서 속에서 엮어내고 있다.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의 강학(講學) 활동과 독서론

신영주 ( Shin Young-ju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8권 0호, 2019 pp. 185-212 ( 총 28 pages)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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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세기 말에 성장하고 19세기 전반에 장년기를 보내면서 당시 조선사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불안한 정세를 민감하게 느꼈던 노주의 강학 활동과 독서론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노주는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는 관료가 되기보다 儒賢으로 남아 학문 강학의 길에서 역할을 다하여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당시는 국외에서 밀려오는 이국 문물과 가치가 내부 질서와 충돌하여 조선사회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로 인해 조선 내부에서 지켜오던 학문의 전통과 권위가 흔들리고 儒道가 약해지고 있었다. 이런 시대 배경 속에서 노주는 유도를 회복하기 위해 평생 고심하였다. 국왕에게 돈독한 지우를 입었고 끊임없이 召命도 내려왔으나 번번이 마다하고 학문 강학에 집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주는 사회를 변화시킬 지역 거점으로 서원 공간을 주목하였다. 석실서원과 덕봉서원 등에서 강학을 주관하여 지역 사회가 변화하고 이어서 온 나라가 변화하기를 기대한 것이다.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얻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한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 당대의 왜곡된 가치 질서를 바로 세워사회를 건전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은 크게 의의를 부여할 만하다. 노주는 강학을 진행하는 사이에 선현이 제시한 독서 방법 중에서 당시의 강학 현실에 맞추어 변용할 만한 몇 가지 독서 방법을 취하여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先經後史의 방법으로 경서를 우선하여 읽고 역사서로 보충하여 읽기, 역량에 따라서 課程을 세워 읽기, 字句를 사색하고 疑難을 찾아내어 묻고 분석하여 읽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 독서의 네 단계로서 四法을 제시하여 단계에 따라 심화하여 차근차근 책을 읽을 것을 권하였다. 이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노주의 강학 활동에서 더 주목할 것으로 세자 교육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한 점과 관북 지역 출신 유생들을 교육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진 점을 꼽을 수 있으나, 여기에서 언급하지는 못하였다. 향후 추가 연구를 기대해본다.

조선시대 월출산(月出山) 유산기(遊山記)의 개괄적 검토

사경화 ( Sa Gyeong-hwa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8권 0호, 2019 pp. 213-252 ( 총 40 pages)
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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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山記는 작가가 직접 산에 오른 체험을 기록한 문학이다. 그 안에는 작가가 탐승 과정에서 직접 경험한 내용뿐만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과 가치관, 해당 산과 지역에 대한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때문에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연구되었다. 하지만 그 연구 대상과 범위가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특정 산에 편중되어 있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遊山記의 연구 범위 확대와 다양화를 1차적 목적으로 삼아 月出山 遊山記를 살펴보았다. 본고에서 살펴본 월출산 유산기는 총 7편이다. 조선시대 최초의 월출산 유산기로서 임진왜란 이후 월출산의 면모를 보여주는 정상의 「月出山遊山錄」, 월출산에 존재했던 다양한 봉우리, 암자, 바위 등의 이름을 담고 있는 허목의 「月嶽記」, 구정봉에 오르는 과정만을 매우 실감나게 표현한 김창협의 「登月出山九井峯記」, 조선시대 관리의 유람 형태를 보여주는 김태일의 「遊月出山記」, 진주에서 월출산에 이르는 여정을 상세히 기록한 18세기 유일한 월출산 유산기인 정식의 「月出山錄」, 역사 · 문화 체험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송정희의 「遊月出山記」, 위정척사운동의 확산을 바라는 선비의 소망이 녹아 있는 송병선의 「遊月出天冠山記」 등이 그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월출산 유산기는 산에 대한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담고 있으며, 또 조선시대 유산의 다양한 양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자료적 가치가 충분하다. 향후 이를 바탕으로 월출산 유산기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계속되고 더 나아가 호남 전체를 대상으로 한 유산기를 종합 검토하여 유산기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 하는 등 다양한 연구들이 이루어져 유산기의 가치가 높아지길 기대한다.

연행(燕行) 노정(路程)의 절반, 십삼산(十三山)

김일환 ( Kim Il-hwa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38권 0호, 2019 pp. 253-291 ( 총 39 pages)
7,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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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山은 현재 중국 遼寧省 石山鎭 지역으로, 압록강부터 북경에 이르는 노정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다. ‘十三山’이라는 명칭은 驛站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이 지역에 있는 13개 가량의 산을 가리킨다. 13세기 초에 사신으로 金나라를 다녀왔던 陳澕가 시에서 언급한 이후, ‘十三山’은 명나라에서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조선 사신들이 남긴 시와 글에 등장하였다. 독특하게 ‘13’이라는 숫자로 이루어진 지명과 요동벌(요동평야)의 끝에 우뚝 솟은 지형을 두고 사신들은 몇 가지 흥미로운 관심과 반응을 보여주었다. 우선 그 지역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산들의 숫자를 세어 이름의 정확성을 따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수효가 맞지 않다며, ‘돌산’을 뜻하는 ‘石山’(shíshan)이 중국어로 발음이 비슷한 ‘十三’(shísan)으로 와전되었다는 오래된 견해를 지지하기도 했다. 3대에 걸쳐 ‘13일’에 ‘十三山’을 통과한 일이 있었는데, 그 후손들은 지속적으로 대중사행 업무를 수행한 선조들의 노고와 가문의 영광을 기억하고자 했다. 임진왜란을 겪었던 이는 10년에 3번에 걸쳐 명나라를 다녀왔다는 것으로 ‘13’을 풀어내기도 했다. 海州-牛家庄-廣寧으로 이루어진 노정으로 이동해야 했던 시기의 사신들은 遼澤이라 불린 긴 습지의 끝에 위치한 十三山 봉우리를 ‘希望峰’처럼 인식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楚나라 왕과 神女가 사랑을 나누었던 ‘巫山十二峯’를 언급하면서 낭만적인 사랑을 노래했다. 이것은 외교 임무를 수행하느라 지속적으로 유예된 성생활에 대한 성적 욕망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처럼 십삼산을 소재로 한 다양한 조선 사신들의 반응을 통해 역사 의식이나 외교라는 공적인 임무 수행의 강박에서 벗어난, 여행으로의 使行이 갖는 한 특징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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