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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성신한문학(~2003) → 한문고전연구(2004~)
논문제목
수록 범위 : 41권 0호 (2020)

청주 공북루(拱北樓) 제영시고(題詠詩攷)

李東宰 ( Lee Dong-jae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1권 0호, 2020 pp. 1-32 ( 총 32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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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충북의 도청 소재지인 청주의 문화사적 전통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 연구로서 청주읍성의 북문루였던 공북루의 연혁과 함께 이곳에서 지어진 제영시의 현황과 내용을 살펴보았다. 청주 공북루는 고려 말인 1320년 尹繼宗에 의해 세워졌고, 1524년 沈彦光이 이곳에 걸려 있는 시판의 시를 次韻하여 시를 지은 이후 지은 시가 없는 것으로 보아 퇴락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공북루는 1667년 청주목사인 李暹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李夏坤 등이 이곳에서 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 18세기 초반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청주 공북루 제영시는 1321년 최초로 權漢功이 지었고, 1362년 공민왕의 명령으로 李穡 등 26명의 문신들에 의해 26수의 응제시가 지어졌으며, 이후 고려말 鄭樞, 成石璘, 조선 초기 韓尙質, 沈彦光, 18세기 초기 李玄祚 등에 의해 지어진 시 37수가 전한다. 시의 내용 중 응제시는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리치고 나라를 재흥시킨 것이 왕의 덕화라고 칭송한 내용과 응제에 참여한 개인적인 영광을 드러낸 것이 주된 내용이고, 다른 시의 내용은 정치적 패배로 인한 나그네 신세나 지방관으로 부임하게 된 불편한 所懷, 청주의 승경 등이다. 청주 공북루의 누정 제영시는 공북루의 연혁과 고려 후기 청주에서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으므로, 이에 대한 후속연구가 이어져서 청주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 가치를 찾는 일이 심화되었으면 한다.

청주지역(淸州地域) 불교문학(佛敎文學)의 위상(位相)

김미선 ( Kim Mi-seo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1권 0호, 2020 pp. 33-51 ( 총 19 pages)
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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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발표는 청주지역 불교문학의 위상을 다루었다. 그간의 다양한 지역학 연구가 이루어져 왔지만, 충북 청주에 대한 지역 불교문학의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청주는 내륙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 청풍명월이 의미하는 선비의 고장으로 인식 되어져 왔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두드러진 특징은 청주의 진산으로 알려진 牛巖山과 청주 시내를 가로 흐르는 無心川이 있다. 이에 청주는 二樂樂을 즐길만한 자연여건을 갖추고 있다 하겠다. 우암산과 무심천을 중심으로 儒佛의 지역문화가 꽃피워져 왔다. 불교의 문화로 『直指』라고 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白雲和尙抄錄 佛祖直指心體要節』이 간행 된 곳이 청주지역이다. 『直指』는 청주 興德寺에서 1377년 7월에 간행한 것으로 백운화상(1299~1375)이 75세였던 1372년에 祖師禪風의 法脈을 계승하게 하고자 저술한 것으로서,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인쇄한 것이다. 청주의 불교 문화 『직지』가 오늘날에 이르러 발굴되어 200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위상을 세계적으로 더욱 확고하게 지리 잡고 있으니 청주지역에서는 불교라고 하는 문화의 위상의 중요한 일면이다. 또한 청주지역의 인쇄술 발달은 淸州本 『新刊大字明心寶鑑』을 최초로 印刊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청주지역의 유불문화의 정신을 형성시킨 요인이 되었다 하겠다. 이에 본 논고에서는 청주지역 불교 문화가 꽃피운 불교문학 위상에 접근해 가고자 하였다. 먼저 『직지』와 같은 불교 문화가 자리하기까지의 청주지역 불교사상 및 불교문학의 수용과정을 고찰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직지』의 내용 요체라 할 수 있는 無心思想은 청주지역에서 어떻게 숨 쉬어 왔나 그 위상을 찾아 이를 통해 청주의 지역 사찰에서 無心의 사유를 통해 남겨진 사찰 공간인식의 제영시를 고찰함으로써 그 위상을 자리매김하여 보고자 하였다.

백곡(柏谷) 김득신(金得臣)의 청주 유람시(遊覽詩) 고찰

송기섭 ( Song Gi-seop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1권 0호, 2020 pp. 53-79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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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곡 김득신(1604~1684)은 17세기의 시인으로서 전국의 곳곳을 유람하면서 많은 시를 남겼는데, 『백곡집』에 1594수가 실려 있다. 그 중 청주를 유람하며 지은 시도 수십 수가 보인다. 이 시에서 그의 서정과 감회를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청주를 찾아 시심을 녹인 것은 그의 생활근거지였던 잣밭마을, 능촌마을, 율치가 모두 청주목에 접하거나 근접한 곳에 위치해 있었고, 청주목의 친분 있는 관리나 騷客들과 자주 교류했으며, 특히 가장 가까운 친구인 명망한 시인 홍석기가 있었다. 즉 지리적으로 청주를 찾기가 용이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교분으로 서로 상통할 수 있는 인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의 시를 분류하고 청주 유람에서의 서정, 만남과 이별의 歡恨, 만주 홍석와의 우정과 관련하여 분석해 보았다. 첫째, ‘청주 유람에서의 서정’에서는 백곡이 자연의 경관을 보고 이를 수용하는 정서적 함의를 살폈다. 이에 「伏次先君枕流亭十詠詩韻」과 「蜜巖洞」에서는 자연에 동화되어 그 흥취를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천기의 조화와 자연과의 동화하는 심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또 「鵲江」은 靜的으로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심정을 그리고 있다면 「次朴仲久韻西原」은 動的으로 자신 밖 주변 모습을 그리고 있다. 둘째, ‘만남과 이별의 歡恨’에서는 지인과의 만남과 이별에서 느끼는 작자의 심정을 살폈다. 「別淸牧沈文伯榥」과 「寄忠淸方伯」은 이별의 회한을 노래하고 있는데 「寄忠淸方伯」 8구의 ‘願把酒盈鍾’과 「別淸牧沈文伯榥」 결구의 ‘的應魂夢共悠悠’는 표현상 서로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라도 만나서 그간의 회포를 풀고 싶은 염원이 깊이 배여 있다는 점에서 두 시구의 표현이 의미상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한다. 「贈亞使申德夫厚載葵亭」 2수는 其一에서는 만남의 기쁨을, 其二에서는 이별의 회한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서 ‘會者定離’의 天則을 깨닫게 한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其二의 끝구의 ‘悵望’이다. 왜냐하면 悵望은 懇念과 상대적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훗날 다시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을 엿볼 수 있어 그의 심리적 상황을 가늠하게 하는 시어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 ‘만주 홍원구와의 우정’에서는 둘의 인간적 관계와 둘의 시풍에 관하여 비교하며 살펴보았다. 당시 黨色이 다르고 시풍이 다른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우정을 살필 수 있었다. 백곡의 「贈洪元九」 2수와 만주의 「喜金子公至」에서 둘의 관계가 친구로서, 시인으로서 우의가 매우 돈독함을 보여준다. 「寄洪元九」에서는 작시에 있어 만주가 天機와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하는 자신의 시풍과는 완전히 다른 西崑體의 시풍을 추구하고 있음에도 친분을 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관계가 더욱 각별하게 느껴진다. 이처럼 백곡은 청주를 드나들며 유람하고 교유하면서, 그때마다 느끼는 심정을 시로 남겨 놓았다. 여기에서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기쁘고 즐거워하며, 때로는 슬퍼하면서 이를 여과 없이 노래함으로써 그 여운이 깊게 느껴진다.

임진왜란기 청주성 전투 의병장의 격문에 나타난 창의 이념과 문학적 특성

박정민 ( Park Jeong-mi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1권 0호, 2020 pp. 81-105 ( 총 25 pages)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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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의 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 중 하나는 임진왜란 때 왜적에서 함락된 청주성을 탈환한 것이며, 그 중심에는 의병장 趙憲(1544~1592) ㆍ朴春茂(?~?)가 있다. 이 두 사람은 土亭 李之菡(1517~1578)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인물로서, 유학의 이념을 구국 행위의 실천을 통해 실현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儒者로서 정규군이 빼앗긴 청주성을 의병을 조직하여 탈환할 수 있었던 것은 斯學이라 불리우는 유학적 이념과 斯文이라 불리우는 유학자들의 연대가 존재하였기 때문이며, 분산된 유학자들을 집중시키고 조직할 수 있었던 수단은 檄文이었다. 필자는 조헌과 박춘무의 격문을 중심으로 격문에 드러난 항쟁의 이념과 선동의 전략을 고찰하였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내용적 측면에서 항쟁의 명분과 의의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속수무책으로 붕괴되던 관군 주도의 국가 방어태세를 더 이상은 좌시할 수 없다는 절실함, 그것이 청주성 전투의 격문에는 여실히 녹아 있다. 침략 전쟁의 부당성과 왜국의 무도함은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의병장의 역사의식과 맞물려 격문에 형상화됨으로써 민중에게 항쟁의 명분을 제시하였고, 이를 통해 결집된 비정규군은 결국 임진왜란 발발 이후 陸戰에서 최초의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둘째, 표현적 측면에서 임란기 청주 지역의 격문에는 선동과 설득의 수사가 두루 구비되어 있다. 격문은 선전과 선동의 목적을 지니는 글로서 명백한 질서 의식과 강렬한 수호 의지를 표출하는 글이다. 이에 격문은 필자의 의식에 내재된 결연한 의지를 독자들에게 이양시키고, 그들의 가슴속에 구국의 열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행동의 변화를 야기하도록 설득시킨다. 역사 전고의 표현을 빌어 깊은 인상을 남기는 用事의 수법과 반복과 정연한 구조의 설정을 통한 긴장감 고조의 수사법 등은 격문의 선동성을 극대화시키려는 지극히 의도된 설정이다. 본 연구는 격문의 문학성에 주목한 연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한반도 전쟁문학 연구에도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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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충청도의 중심 도시인 청주의 역사적 지역 정체성을 탐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청주는 동서남북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의 중심지라는 특성이 지역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요인이 되었다. 교통이 용이하였기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특성이 형성되었으며, 역모사건을 시작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청주 토착민들에게 외지인은 한동안 머물다 떠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열고 받아주지 못하였다. 그 결과 청주는 목민관이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청주는 서북쪽으로 비옥한 넓은 들판을 품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것도 교통과 군사적 요충이라는 점과 일정부분 연관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 풍요로움은 청주에 호족들이 득세하게 되는 경제적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오랜 기간 쌓여온 역사적 특성과 지리적 특성으로 형성된 것이며, 이 지역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내면으로 쉽게 이방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배타성과 고집스러움이 은연중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퇴계(退溪)와 고봉(高峯)의 매화시(梅花詩) 화답(和答)의 미의식(美意識)

신두환 ( Shin Doo-hwa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1권 0호, 2020 pp. 133-177 ( 총 45 pages)
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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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退溪 李滉(1501~1571)과 高峰 奇大升(1527~1572)의 매화시 화답에 대한 미의식을 연구한 논문이다. 퇴계와 고봉은 26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단칠정론을 비롯해서 다양한 학문적인 교류와 토론이 있어왔다. 고봉은 퇴계를 스승으로 삼아 성리학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완성하였다. 고봉은 선조임금에게 퇴계를 다시 조정으로 모셔야 한다고 극구 주장했다. 퇴계가 선조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마지막으로 조정에 출사하였다가 사직 상소를 수차례 올려 드디어 사직을 허락받고 도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때 고봉은 봉은사까지 따라와 같이 자면서 퇴계를 전송하며 둘이서 이별주를 밤늦도록 마셨다. 고봉은 그 자리에서 퇴계가 서울의 건천동 우사에서 기르던 매화 화분을 주제로 시를 지어 바쳤다. 퇴계는 그 매화시에 대한 화답의 의미로 떠나는 배에 올라 마지막으로 전송하는 자리에서 이별의 정표로 고봉에게 梅花詩 8수를 주면서 화답을 해달라고 하였다. 고봉은 퇴계가 주었던 매화시 8수에 정성을 다하여 和答한 시를 지어서 부쳤다. 퇴계는 또 화답시를 지어 편지와 함께 고봉에게 보냈다. 고봉은 이에 대한 화답시를 또 지어 보냈다. 퇴계와 고봉이 이렇게 주고받았던 매화시에는 매화가 상징하는 고매한 절개와 선비정신이 들어 있으며 멋과 풍류가 넘쳐난다. 이들이 주고받았던 매화시에는 이지적이고 낭만적인 시풍이 넘쳐나며 고도의 품격과 다양한 성리학적 美意識이 함의되어 있었다.

박시순의 『면불일기(沔紱日記)』 연구

임현정 ( Im Hyun-ju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1권 0호, 2020 pp. 179-204 ( 총 26 pages)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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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불일기』는 朴始淳(1848~1907)이 沔川郡守로서의 직무를 수행한 1894년 10월 13일부터 1895년 6월 20일까지 9개월 동안 官人으로서의 생활을 기록한 일기이다. 박시순의 字는 允元, 호는 菊人, 본관은 咸陽이다. 함양 박씨는 다수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고 대대로 벼슬에 종사한 현달한 가문이다. 박시순은 安孝濟(1850~1916)의 상소를 거르지 않고 올린 일로 인해 탄핵을 받아 8월 29일에 함경도 洪原에 유배되어 약 10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한다. 얼마 뒤 특별 사면으로 복직되지만 다시 4개월만에 면천 군수에 제수된다. 면천은 박시순의 8대조 무덤이 있는 곳이며, 여러 친족 등 다수의 지인이 살고 있던 곳이다. 이러한 지역적 연고로 인해 면천에 부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면불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내용은 박시순이 교유한 인물에 대한 것이다. 지역의 인사와 친구, 친족과의 만남에 대한 내용 및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에 대한 내용이 다수 등장한다. 또한 면천에 부임하고 나서 수행한 관리로서의 직무를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기우제를 지내는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당시 유행했던 돌림병을 퇴치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沔川의 14개 面의 이름을 넣어서 지은 「沔陽賦」와, 당진시의 유적 1호인 君子亭에 대한 기록이 있어 역사를 고증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추후 면천지역의 향토사 복원과 연구를 위한 원천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의 작자(作者)와 판본(板本) 연구(硏究)

김광년 ( Kim Kwang-nyeo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1권 0호, 2020 pp. 205-229 ( 총 25 pages)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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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造藩邦志』는 華隱 申炅(1613-1653)이 壬辰倭亂의 배경과 진행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술로서, 조선 후기에 광범위하게 유통되어 임진왜란에 대한 이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지금까지 이 책과 저자인 신경에 대해서는 학문적 조명이 제대로 이루어지 못하였으므로, 이 논문에서는 저자 신경의 생애를 비롯한 관련 사실들을 정리하여 소개하고, 『재조번방지』에 대한 文獻學的 고찰을 통해 신경과『재조번방지』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신경은 조선 후기의 저명한 문인 象村 申欽의 손자로서 家學의 영향을 받아 개방적 학문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상당한 文才를 지녀 미래가 기대되었으나 丙子胡亂으로 인해 세상에 나아갈 뜻을 접고 은거하다 삶을 마감하였다. 그는 병자호란에서 느낀 울분을 계기로 임진왜란과 관련된 사실들을 수집하여 정리해『재조번방지』를 저술하였다. 여기에는 명나라의 再造之恩에 대한 의식과 더불어 조선이 청나라에 굴복한 데 대한 분노가 함께 담겨 있다. 아울러 이 책은 조부인 상촌 신흠의『征倭志』를 토대로 신경이 각종 문헌에서 관련 사실들을 채록하여 이루어졌던 바, 그 편찬에 家學의 영향이 내재되어 있다고 평가된다. 『재조번방지』는 활자로 처음 간행된 이후 여러 차례 필사를 거쳤고, 18세기에는 언해본도 만들어지는 등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손지(遜志) 홍재구(洪在龜)의 『식한진전(息閑眞詮)』 일고(一考)

신요한 ( Shin Yo-ha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1권 0호, 2020 pp. 231-259 ( 총 29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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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遜志 洪在龜(1845~1898)의 『息閑眞詮』을 바탕으로 위정척사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正俗新編』 이후 새로 밝혀진 홍재구의 저술에 대한 연구로, 重菴 金平默(1819~1891) 문인의 위정척사론을 정리하기 위한 기반으로 삼고자 한다. 홍재구는 김평묵의 문인이자 사위로, 華西 李恒老(1792~1868)의 위정척사 사상을 계승한 인물이다. 1876년 일본이 조선에게 개항을 요구하였을 때 疏首로 추대되어 개항반대 상소인 「丙子聯名儒疏」를 올렸고, 1881년 동생 勵志 洪在鶴(1848~1881)이 소수였던 「關東聯名儒疏」를 작성하였다. 김평묵은 이 상소에 추가하여 尾附疏를 지었다. 『식한진전』은 乾ㆍ坤 2册에 모두 24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기존의 성리학적 통치 이념과 유교적 사회질서 등이 흔들림에 따라 그 폐단을 막기 위해서 지어졌다. 본 논문에서는 坤책에 수록된 마지막 3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乾책의 8장과 坤책의 13장은 천주교 교리를 辨駁한 글이다. 본고에서 살펴볼 마지막 3장은 「聖道說」, 「衣冠說」, 「洋物辨」으로 홍재구의 위정척사 사상의 이론적 바탕과 斥洋의 방책이 서술되어 있다. 먼저 「성도설」에서는 인간 본성의 착함 즉, 성선설을 바탕으로 인간 성품과 마음에 대하여 정의하였다. 「의관설」에서는 의관은 유형이고 마음은 무형인데, 의관에 마음이 타면 유형이 된다는 점을 들어 밖으로 들어나는 의관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양물변」을 살펴보았다. 서양의 화륜선, 양직기, 전기등이 기이하는 하지만 이들이 조선에 미치는 폐해에 대해서 설명한다. 서양의 물건들은 천천히 하고 급히 하고, 원근의 구분을 없애버려 천리를 거스르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본 연구는 『식한진전』의 일부분 만 살펴보았다. 천주교 교리를 비판한 나머지 21章의 내용과 함께 살펴보고, 『정속신편』과 비교 검토의 연구가 이루어지면 『식한진전』에 대한 종합적 연구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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