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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성신한문학(~2003) → 한문고전연구(2004~)
논문제목
수록 범위 : 42권 0호 (2021)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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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동은 서울을 북쪽에 있는 유원지로 유명한 곳이다. 불과 백여 년 전만해도 벚꽃놀이로 유명했던 우이동은 이제 그 원형을 알아보기 쉽지 않을 만큼 변화하여 옛날의 모습은 선인들의 기록으로만 알 수 있게 되었다. 우이동에 대하여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인물은 관암 홍경모이다. 지금까지 우이동에 관한 연구는 주로 이계구곡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본고에서는 홍경모가 남긴 우이동 관련 기록과 「겸산루팔영」을 통해 우이동의 승경에 대하여 고찰하여 홍경모의 눈에 비친 옛 우이동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한다. 『兼山樓八詠』은 「水落朝旭」, 「天冠新月」, 「三角奇峰」, 「牛耳長川」, 「松徑聽濤」, 「花漵觀魚」, 「前山桃花」, 「後園栗林」이다. 이는 겸산루에서 바라본 승경과 겸산루에서 즐길 수 있는 경관을 읊은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조상이 남겨 준 유산에 대하여 마음을 다하여 가꾸고 이를 기록으로 하나하나 정리하고 계승하고자 했던 홍경모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작은 것에라도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에서 선인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성북동 일대 명승 사적을 노래한 한문학 유산

신영주 ( Shin Young-ju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2021 pp. 29-61 ( 총 33 pages)
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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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성북동을 소개한 옛 문헌을 찾아 분석하고 소개한 것이다. 성북동은 도성에서 가까우면서 한적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갖춘 나들이 공간이다. 특히 봄철에는 복숭아꽃이 만개하여 도성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그 만큼 많은 시인 묵객이 이곳을 찾았기에 적지 않은 한문학 창작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크다. 그러나 기대만큼 많은 시문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이곳이 창작 공간이 된 것은 분명하나, 곧장 창작 소재로 활용되지는 않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북동 지역 문화 콘텐츠 개발에 한문학 유산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한 것 같다. 성북동을 기록한 문헌 자료가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과거의 문헌에서 관련 기록을 찾아내어 소개할 필요가 제기된다. 이에 부족하나마 성북동 공간을 시문으로 구현한 한문학 유산을 발굴하여 소개하였다. 먼저 여러 문헌 자료를 분석하여 성북동 일대에 존재하는 명승 사적을 조사하여 인문 지리적 성격을 알아보았고, 이어서 관련 한문학 작품 몇 편을 찾아서 소개하였다. 먼저 蔡濟恭이 1784년 봄에 기록한 「遊北渚洞記」와 나들이에 동행한 睦萬中이 기록한 「與樊巖公會游北屯」을 소개하였다. 이를 통해 성북동이 봄철에 꽃을 즐기는 나들이 공간으로 인기가 높았던 사실을 알아보았다. 이어서 鄭士龍이 1552년에 창작한 시와 尹愭가 1793년에 창작한 시 「上巳遊北渚洞」을 통해 성북동이 修禊의 장소로 활용된 사실을 알아보았다. 아울러 金鑢가 1815년경에 창작한 「晩春游覽 絶句十二首」를 통해 성북동 주변의 여러 명소가 나들이 코스로 묶여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던 사실을 알아보았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이를 토대로 관련 있는 소중한 역사 흔적들이 계속 발굴되고 그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사연들이 복원되어 이 지역의 역사성이 더욱 강화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다양한 지역 콘텐츠가 개발되어 현대의 시민들에게도 소중한 공간으로 추억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과 명덕동(明德洞)

백승호 ( Baek Seung-ho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2021 pp. 63-89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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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서울 동북 4구 한문학 내러티브 유산 발굴과 확산이라는 기획 아래 樊巖 蔡濟恭과 明德洞을 다루었다. 선행 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 논문에서는 선행 연구의 정보를 일부 보완하였고, 방법론적으로 문학 텍스트 연구의 공간 감각을 제고하는 방법으로서 근대 지도 분석 사례를 적용하였다. 내용적 측면에서 明德洞 관련 記文 중심 선행 연구를 보완한다는 차원에서 明德洞의 당대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한시 자료를 새롭게 소개하였다. 또한 선행 연구에서 전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1780년대 蔡濟恭이 明德洞에 은거했다는 대략적인 구도에 대해 그 시기를 세분하여 구체적으로 특정하였다. 明德洞은 초창기에는 은거 예정지이자 宦路 속 別世界의 휴식처였다. 1780년대 후반기에는 정치적 고난을 피하기 위한 隱居의 장소였다. 이 시기 한시 가운데 당시 도성 밖 외진 산골 속에서 삶을 이루고 사는 백성의 삶과 고통에 공감한 작품의 성취를 주목할 만하다.

폐주(廢主)와 함께 남겨진 사람들 -연산조(燕山朝) 절신(節臣) 기억의 형성과 전개-

정용건 ( Chung Yong-gu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2021 pp. 91-132 ( 총 42 pages)
1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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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문인 사회에서 ‘燕山朝 節臣’으로 호명된 인물들의 면면과 그 史的 형상화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은 유가 이념을 표방하며 건국된 나라로서 자신이 한 번 섬긴 임금에 대한 마음을 변치 않아야 한다는 의리관을 공고히 견지하였다. 이러한 관념은 ‘暴君’이라 일컬어진 연산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의 문인들은 연산군에 대해 절의를 지킨 인물을 찾고자 노력하고 반대로 이를 저버린 인사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는 등 ‘연산조 절신’에 대한 적지 않은 관심과 요구를 보였다. 洪彦忠, 兪起昌, 南褒는 바로 그와 같은 주목과 기대 속에서 ‘탄생’한 연산군의 절의지사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저마다 다른 성장 배경과 이력을 가졌지만, 중종반정 이후에도 끝까지 옛 임금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 은거의 길을 택한 인사들로 기억되었다. 다만 이들이 점유한 ‘절신’으로서의 지위는 어느 일순간에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후손 및 후배 문인들의 오랜 기간에 걸친 현양 작업에 힘입어 존재 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절의 관련 敍事의 정비ㆍ윤색ㆍ조탁 등 치열한 인물 재구성 노력의 과정을 수반하는 것이었으며, 때로는 오해와 와전이 절신 이미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바로 이와 같은 과정이 있었기에, 연산군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지 않고 자신을 위해 남아 충절을 다한 ‘節臣’들과 함께 기억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연산조 절신에 대한 기억과 그 형상화 양상은 시대를 거듭하며 점차적으로 고조ㆍ확장되어 간 유가적 의리관과 절의에 대한 관심을 배경으로, 부연ㆍ수식ㆍ재조명의 과정을 더해가며 이상적인 ‘연산조 절신의 像’을 정립하고자 노력했던 조선 후기 문인들의 면모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는 그간 ‘暴君’, ‘亂政’, ‘士禍’, ‘反正’ 등 제한적인 범주에서만 논의되는 경향이 강하였던 ‘연산군 내러티브’의 발굴과 확산에 있어서도 긴요한 참조점이 된다.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의 산문(散文) 연구(硏究)

황아영 ( Hwang Ah-you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2021 pp. 133-156 ( 총 24 pages)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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荷潭 金時讓(1581~1643)은 조선 중기 청백리로 이름난 문신이다. 宣祖 14년 (1581)에 태어나 壬辰倭亂을 겪으면서 부모님을 여의고, 선조 38년(1605년)에 문과에 등제하면서 光海君과 仁祖를 모셨다. 하담은 임진왜란과 丁卯胡亂, 丙子胡亂과 같은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면서 시, 필기와 함께 많은 산문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산문 작품들에 관한 연구는 아직까지 미진한 상태이다. 하담의 문학관을 알기 위해서는 시와 필기뿐 아니라 산문 작품에 관한 연구도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본 논문은 하담 김시양의 산문에 나타난 주제의식을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담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이전까지 옳다고 여겼던 성리학이 무너지고 소중화라 자부하였던 가치관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목도하였다. 일반적인 서민, 하층민이었다면 그것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을 것이고, 높은 관직에 있는 사대부였다면 성리학과 소중화라는 사상만을 중시하였을 텐데, 김시양은 사대부이지만 유배지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기에 당시의 상황과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고 평가할 수 있었고, 이후 인조대에 관직에 돌아와 여러 중요한 임무를 맡으면서 유연한 사고와 대처를 강조하였다. 또한 김시양은 임금과 신하로서의 태도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였는데, 특히 임금에게는 강한 임금을 요구하였고, 신하에게는 책임감을 강조하였다. 임금은 임금으로서의 威儀를 가지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소인들을 두렵도록 다스려야 하며, 신하는 임금에게 간하는 것을 중히 여기고 자신이 맡은 일에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임해야 함을 여러 번 언급하였다. 그리고 하담은 자신이 맡은 직책과 임무에 관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 대한 높은 자신감과 자부심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그러하기에 하담은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고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었고, 진퇴에 관하여도 소신껏 임금에게 아뢸 수 있었다. 이는 하담이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한 점과도 관련이 있다. 공적인 일에 관한 글은 물론이고, 친구와 주고받은 글에서도 공과 사를 구분하여 글을 적고 있음이 잘 나타난다. 이와 같이 하담의 산문 작품은 시와 필기와는 또 다른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하담의 산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지만, 하담 김시양은 조선 전기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중기의 여러 가지 대내외적 영향을 받아 시, 산문, 필기 문학에서 다양한 글쓰기를 선보인 인물이므로 다각적 접근의 과정을 거친 뒤에 김시양 문학에 나타난 통일된 가치관과 의식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17세기 그리고 조선 중기 문학사에서 김시양의 문학이 차지하는 위상과 의의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조선 중기 사회와 문학에 대한 이해가 풍성해지길 기대해 본다.

허목이 찬술한 조식 선생 ‘신도비’논란에 대한 고찰

조주희 ( Cho Joo-hee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2021 pp. 157-188 ( 총 32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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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도입과 함께 전래된 유학은 혈연공동체의 생활규범과 사회공동체의 행동규범을 보편화하여 도덕·윤리의 근간을 이룸으로써 우리 전통문화의 정수를 제공하였다. 문화란 자연 상태에 있는 정신적·물질적 실체를 인간이 가공하여 그것을 변화시키거나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문화생산의 촉매제로는 문자에 의해 정리된 학문이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한 사회에 특정 학문이 정착되면 그 학문이 통치의 이념을 제공하여 사회변동이 일어나고 사회변동은 문화 변화를 일으킨다는 학문과 사회와 문화 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이 패러다임의 틀에서 미수 허목이 찬술한 ‘남명 조식의 신도비’인 『덕산비』에 대한 논란을 사회·문화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성리학의 경우 고려 말에 도입되어 왕조교체의 명분을 제공하여 사회 변동을 불러 왔을 뿐만 아니라, 혈연공동체의 생활 규범과 사회공동체의 행동규범을 제시하여 불교와 도교를 멀리하는 문화변동을 일으켰다. 실학은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공리공담에 치우친 성리학을 개혁하여 實事求是의 논증을 중시함으로써 영·정조의 문예부흥기를 태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허목이 찬술한 『덕산비』가 신도비의 원래 취지인 揚善隱惡 보다는 자신의 의도인 陽尊陰擠를 각인하여 놓았다는 논란을 정파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후손의 효심에 의존하여 판단하는 문화변동을 가져왔다. ‘신도비’는 2품 이상의 품계를 얻은 망자에게 주어지는 은전으로, 망자가 학문 연구를 통해 고고한 인품과 깊은 학문을 지녔었다는 증거였다. 따라서 이것은 가족과 가문 그리고 망자가 속한 학파에게 긍지를 안겨주는 영광스러운 특전이었다. 이러한 영광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남명 조식 (1501~1572)의 신도비문 찬술 역시 당대에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학자에게 청문하였다. 1617년에 세워진 정인홍의 『남명선생신도비』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훼철되고, 그 이후에 남인의 영수였던 허목에게 청문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 비를 세웠다. 이후 서양학문의 전래와 함께 1685년에 세워진 허목의 『덕산비』가 남명에 대하여 양선 은악 보다는 양존음제의 경향이 짙다고 하여 조씨 문중과 노론이 한편이 되어 1926년에 훼철하였다. 그 후에 진주향교의 남인계 유림이 소송을 제기하여 5년간에 걸친 소송 끝에 조식 후손이 승소함으로써 250년 동안 계속된 허목의 『덕산비』에 대한 논란이 종지부를 찍게되었다. 이 논문은 조식의 신도비 청문 과정과 立碑 과정에서 후손의 孝보다는 정파적 이해관계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학문의 정착, 사회의 변동, 문화의 변화라는 패러다임에 입각하여 탐구하였다.
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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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湖 李瀷(1681~1763)은 조선후기 문화의 절정기인 18세기를 살면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변화의 조짐을 읽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학문 탐구에 일생을 바친 남인 실학파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재야 학자로서 많은 글을 남겼으며 그의 작품에는 선비로서의 의식, 시대에 대한 고민과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이익은 평생 동안 학자로서 다양한 호기심과 학문적 열정을 바탕으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시문과 논저를 모아 발행한 『星湖全集』은 이익 사상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이중 挽詩와 交流詩를 중심으로 그의 시적 면모를 살펴보았다. 『星湖全集』에 수록되어 있는 이익의 만시는 전체 시의 약 20%가 넘을 정도로 양이 많다. 만시는 죽음에 대한 시로 죽음 앞에서 고인의 일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게 되는데 남다르게 많은 양의 만시를 지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주목된다. 이익은 만시에서 그가 교류하는 인물에 대한 구체적이고 다양한 표현을 통하여 고인의 삶을 보여주었고 특히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들의 삶을 발견해주었다. 그는 철학자로서 죽음을 단지 슬픔으로만 보지 않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뛰어난 재능이 있음에도 뜻을 펴지 못했던 인물들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만시를 통해 진정한 선비(眞儒)의 삶을 밝혀 드러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많은 만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며, 이것은 이익 스스로 학자로서 선비 의식을 실천하는 다짐의 과정이었다. 이익의 만시에 드러나는 고인의 학자적 경향과 더불어 신선의 세계를 추구하는 儒仙의 면모를 지향하는 의식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유자이면서도 신선과 같은 맑고 깨끗한 인품을 가진 이들의 삶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이익의 인생과 그가 추구하는 삶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이익의 교류시에서는 대상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 그의 폭넓고 다양한 인간 관계를 찾아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그가 추구하는 인간상, 그의 삶의 방향을 살펴보고 시를 통해 나타나는 의식과 시적 감성을 고찰해 볼 수 있었다. 임지로 떠나는 이들에게 주는 시에는 이별의 마음과 더불어 관리로서의 역할을 당부하며 현실을 파악하는 그의 인식, 이에 대한 개선을 당부하는 선비 의식과 백성을 걱정하는 애민 정신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를 살아가는 재야 학자로서의 고민과 포부, 노력을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교류시 중 인간 이익의 모습이 드러나는 그리움의 감성이 담긴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감성은 담박하면서도 고아한 풍취를 드러내며 인간 이익의 시적 면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회화적인 흥취로 그림을 그리듯이 표현하면서도 절제된 시적 감성을 보여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익의 만시와 교류시를 중심으로 시세계의 특징과 다양한 면모들을 밝히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해 17세기 후반 재야 학자로 삶을 살아간 이익의 감성과 시적 면모를 살펴볼 수 있었다.

담녕(澹寧) 홍의호(洪義浩)의 「자각이십영(紫閣二十詠)」 연구(硏究)

방현아 ( Bang Hyun-a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2021 pp. 235-269 ( 총 35 pages)
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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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澹寧 洪義浩(1758∼1826)의 「紫閣二十詠」과 紫閣洞을 고찰한 글이다. 南人 文人인 洪義浩에 대해서는 연행록을 중심으로 한 논저들이 있지만 그가 남긴 巨帙의 작품에 비해 아직까지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그가 외직에서 관직생활 하던 때를 제외하고 한양의 남산자락 紫閣洞에서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澹寧은 1815년(58세) 2월경 南山의 鑄洞으로 거처를 옮겨 閑居하였는데 그곳은 紫閣洞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는 1817년 여름 紫閣洞에 소유한 含翠堂, 頗好道齋, 居然我屋, 秋夢軒과 주변의 枕雨樓, 約山亭, 後彫堂 그리고 각종 나무와 화훼의 승경까지 20題를 선정하여 그 景觀을 노래하였다. 국토와 자연에 대한 애착과 고향 丹邱와 같은 洞府의 동경은 實景을 통한 仙境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또한, 허목의 篆書 含翠堂(보물 제592-2호)을 통해 洪秀輔와 洪義浩의 예술작품에 대한 수장취미와 후세에 남긴 先見을 엿볼 수 있다. 「紫閣二十詠帖」의 跋文에서 자연의 뛰어난 곳에 사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고자 함이 아니요, 산 속에 사는 진면목을 기록하여 본인의 즐길 거리를 기록하여두는 것에 만족하고자 한다는 저작의도를 알 수 있다. 紫閣洞에서 閑居하며 그가 추구한 것은 자신을 둘러싼 터전의 ‘實際眞景’, ‘山居眞面目’, ‘實光景’의 묘사와 현실에서 自足하는 삶이었다. “詩拙, 畵又拙”이라 하여 詩 외에도 紫閣洞의 眞景을 그림으로 그려 實景圖를 향유하고자 하는 진솔한 면모와 예술적 취향을 드러냈다. 終南山의 幽處는 문학적 창작과 예술적 승화의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紫閣二十詠」은 18세기 다양하게 서울을 조망하는 작품들이 19세기까지 이어져 그 奇勝을 노래하고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과, 사대부들이 경영하던 別墅와 주거에 대한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約山亭의 主人 許霖, 後彫堂의 主人 韓秀運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문인들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고구할 수 있는 자료이며 眉叟의 篆書 含翠堂과 洪義浩의 卜居 등 건축과 조경을 묘사한 문학과 예술의 한 편린을 볼 수 있다.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의 면천유배기 한시 일고(一考)

李東宰 ( Lee Dong-jae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2권 0호, 2021 pp. 271-304 ( 총 34 pages)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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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養 金允植은 내우외환에 처한 조선 말기의 사상가이자 정치가, 외교관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며 많은 저술과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순응하는 처신 등으로 인해 ‘長樂老’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정치·외교사적 위상 못지않게 문학에의 성취에 대한 평가도 우리 문학사를 올바르게 정립하는데 필요하다. 김윤식은 1887년 정권을 잡은 민비와의 갈등으로 면천에 유배되어 9년여를 살았다. 그는 정치적 패배로 인해 면천의 영탑사로 유배형을 당했지만, 유배지 면천에서의 생활은 면천군수를 비롯한 지인들의 경제적 도움과 위문으로 비교적 여유롭게 생활하며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였다. 김윤식은 1887년 6월 유배지인 면천에 와서 1894년 2월 강화유수로 부임하기 위해 면천을 떠날 때까지 생활하며 『沔陽行吟集』이라는 시집과 『續陰晴史』라는 일기를 남겼다. 그의 시집인 『沔陽行吟集』에는 243제 419수의 시가 실려 있고, 『續陰晴史』에는 자신의 일상사와 당대의 사회상이 기록되어 있다. 『沔陽行吟集』의 시는 그가 처음으로 겪은 정치적 패배로 인한 상실감이 극대화된 시기로 그의 진솔한 내면의 세계가 드러나 있다. 시의 내용은 유배지인 면천 영탑사 주변의 풍경을 시화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지인들과 시주를 일삼으면서도 楚囚者로서의 遣悶과 소회를 시화하였고, 자신의 가정적 처지와 경세관을 실천하고자하는 의지로 인한 갈등을 드러냈으며, 유배가 길어지면서 귀향의 갈망을 드러냈다.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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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시인 한치원과 그의 시작품에 대한 분석과 고찰을 주로 한다. 한치원의 시문집은 그가 무관의 길로 접어들기 전의 詩會에서 만난 이들과 수창한 시와 任官이후 직무를 수행하면서 임소에서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들로 채워져 있다. 동랑 한치원의 시 현황은 다음의 자료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부친 韓益相의 『自娛』 권4~권5에는 弱冠 즈음의 시가, 『冬郞集』과『蘇谿集』에는 1840년 이후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소계집』은 편간이 시대순으로 되어 있어, 그의 행력을 고구하기에 편하다. 『동랑집』은 시대순 편간은 아니지만 필사본인 『소계집』이 비해 일정의 교정을 거친 목판본이라는 장점이 있다. 한치원은 주로 부친, 仲兄 韓致肇와 동행하여 그들의 인적 관계망을 기반으로 한 詩作 활동에 주력했는데 초기에는 白社, 西社 등에 초치되거나 풍양 조씨 일문의 사교장인 묵계 산장, 燕巢亭의 시회에 참여한 모습이 포착된다. 필자가 대상으로 삼은 저자의 행력 구간은 초년과 중년 사이의 작품으로, 한치원의 행력과 시작품을 통해 당대를 살아간 중간계층의 내적 균열의 지점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라 할 수 있다. 이는 시인과 작품의 특정한 구간을 우선시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병조참판을 지낸 그의 부친 한익상과 19세기 말~20세기 초라는 혼란의 시기에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관찰사를 거쳐 육군 참장까지 두루 역임했던 아들 한 진창과의 연결 지점에 그의 이력이 관여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회, 문화사적 관점의 고찰, 한치원의 교유망과 유관자료들에 대한 면밀한 고찰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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