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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521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성신한문학(~2003) → 한문고전연구(2004~)
논문제목
수록 범위 : 43권 0호 (2021)

근재 안축의 시문에 나타난 공적(公的) 풍경 구성 방식

김풍기 ( Kim Punggi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3권 0호, 2021 pp. 1-25 ( 총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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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고려 후기 관료 문인 安軸(1287~1348)이 지은 『關東瓦注』에 수록된 작품을 통해서 그가 구축하고 있는 풍경 구성 방식을 탐색하고자 한다. 풍경을 읊은 시는 작자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그가 주목하는 풍경요소들을 문학적 장치로 나타낸다. 특히 작자가 관료의 신분일 때 그가 보여주는 풍경은 다분히 공적인 측면을 강하게 반영한다. 이를 ‘공적 풍경’이라고 한다면, 안축의 시문은 공적 풍경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필자는 안축의 시문에서 공적 풍경을 세 가지 측면으로 이해하였다. 아름다운 풍경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백성들의 고통을 응시하는 것, 고요한 풍경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유교적 이성을 발현하는 것, 풍경에 들어있는 역사적 이야기를 주목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서 그는 개인적 차원에서 여행하거나 정자를 건립하여 풍경을 즐기는 私的 풍경과는 다른, 공무를 담당하는 관리의 시각을 반영한 공적 풍경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안축은 지방관의 입장에서 과거와 현재의 삶을 자연 경물과 혼합하여 풍경의 해석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었다.

시문(詩文)에 나타난 철원(鐵原) 고석정(孤石亭)의 풍경과 이미지

강지희 ( Kang Ji-hee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3권 0호, 2021 pp. 27-59 ( 총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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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고석정은 고석 바위의 독특한 풍광과 그곳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로 인해 옛날부터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고석정에 관한 문헌 기록은 크게 산문과 시로 나눌 수 있다. 산문은 고려시대 승려였던 無畏國師가 남긴 「孤石亭記」가 최초의 기록이고, 그 후로는 조선후기에 몇 명의 문인들의 저작이 있다. 무외국사의 記가 고석정의 외관과 주변풍경을 주관적 관점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그 기이한 절경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했다면, 조선후기의 기록들은 인문ㆍ역사지리학적 관점에서 그곳의 지형과 지세를 재조명하려 했던 측면이 있다. 고석정의 풍경을 다양하게 묘사한 한시들은 지속적으로 창작되었다. 고려후기에서부터 조선후기까지 고석정은 東遊를 떠나는 이들에게 꾸준히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내용은 크게 覆轍 鑑戒의 현장으로서의 인식, 仙界의 이미지가 투영된 측면, 유한한 인간 존재에 대한 각성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고석정에는 신라 眞平王의 遺墟碑가 있기 때문에, 오랜 역사와 더불어 천년의 승경이라는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평왕이 사냥을 좋아하여 巡狩에 탐닉했던 폐해를 지적하고 왕들이 지나친 유흥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철원은 泰封을 건국한 弓裔가 도읍한 곳이었으므로, 그곳을 지나는 시인묵객들은 궁예가 보여준 흥망성쇠의 역사와 교훈을 시에 언급하기도 하였다. 또한 많은 시인들은 砌川의 푸른 물빛과 層石이 켜켜이 쌓이고 침식된 기암절벽, 강물 한 가운데 우뚝 선 孤石의 우람한 형상에 찬탄을 보냈다. 그들은 三神山의 仙界를 떠올리며 현실을 벗어난 이상향, 별천지로서의 환상적인 이미지를 고석정에 착색해 놓았다. 뿐만 아니라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사찰의 종소리는 그곳을 지나는 나그네들에게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깨닫게 하기도 하였다.. 조물주가 빚어 놓은 자연과 자신의 시문을 비교하며 창작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변함없는 산천의 형승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은 늙고 쇠하며 늘 구름처럼 떠다니면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탄식하였다. 이렇듯 고석정은 오랜 세월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관점으로 향유되고 음미되어 왔다.

흡곡(歙谷) 시중대(侍中臺)의 역사와 명승(名勝)의 향유 양상

김세호 ( Kim Se Ho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3권 0호, 2021 pp. 61-88 ( 총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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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關東八景은 당대 최고의 名勝으로 각광을 받았다. 관동팔경의 대상지는 품평자의 시각에 따라 일부 출입을 보이는데, 歙谷의 侍中臺는 이러한 특징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 공간이다. 시중대는 본래 七寶臺라 불리던 곳으로 韓明澮가 이곳을 유람하던 중 정승에 제수되면서 유래한 이름이다. 관동의 상징적인 명승으로 鄭敾ㆍ金弘道 등이 그린 그림이 전하지만, 정작 어떠한 역사를 지닌 곳이며 어떠한 특징을 지닌 명승인지 아직 조명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시중대의 역사를 고찰하고 명승의 향유 양상을 밝히며 한시를 통해 그 다양한 이미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시중대는 한명회가 다녀간 이후 흡곡의 대표적인 명승으로 이름을 올렸다. 호수와 바다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특징으로 유람객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조선 후기에는 그 풍광을 감상하기 위한 湖海亭이 들어섰다. 관동팔경에 확고히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그 명승적 가치만큼은 관동팔경에 버금가는 위상을 자랑했다. 시중대를 방문한 문인들은 제영시를 통해 시중대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한명회의 자취를 회상하고 그윽한 분위기를 신선세계에 비유했으며 풍류를 즐기고 만끽한 경험을 시로 읊었다. 이러한 다양한 면모는 시중대의 명승적 가치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중대가 흡곡의 상징으로 일컬어진 이유를 대변한다.

영남 선비 서간발(徐幹發)의 관동(關東) 유람록 『봉해첩(蓬海帖)』에 대한 고찰

禹芝英 ( Woo Jee-you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3권 0호, 2021 pp. 89-123 ( 총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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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조선 후기 영남 지역의 재야 학자 徐幹發의 관동 유람록인 『蓬海帖』에 대해서 序文部ㆍ紀行部ㆍ跋文部로 나누어 그 대략적인 특징을 고찰해 보았다. 서간발은 李象靖의 문인이었던 叔祖 徐昌載와 스승 鄭宗魯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일생 동안 처사의 삶을 살면서 학문을 연마하였고, 소수서원을 기반으로 지역사회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인물이다. 서간발의 유고로는 『南厓遺稿』 14권 7책이 필사 定稿本으로 남아 있으며, 『봉해첩』은 그중 제2책에 해당한다. 『봉해첩』은 강원도 일대와 금강산의 명승지에 대한 소개 뿐만 아니라 강원도의 지리와 풍속ㆍ생활상 등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가진다. 서간발은 금강산과 관동 여러 지역의 지리와 풍속 등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는데, 강원도의 수려한 산수와 순수한 풍속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인식을 바탕하고 있지만 영남 선비의 입장에서 강원도 문화를 철저히 유교 문명화라는 잣대를 통하여 재단하려는 시각이 분명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봉해첩』을 산수유기의 형식적 측면에서 분류해 본다면, 장형의 일기체 산수유기 중에서도 한시가 포함된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봉해첩』 기행부의 특징으로 일정과 경로 및 여행지의 경관 등 여행 전체를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점, 유적지의 유래와 고사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점, 여행지에서의 감흥을 읊은 시의 비중이 높은 점, 여행의 고생과 향수 등 객지에서의 어려움을 여과 없이 표출하고 있는 점을 거론하였다. 또한 『봉해첩』에 부기된 10여 편의 발문을 통하여 『봉해첩』의 가치를 정리해 보고, 그들이 생각하는 관동 유람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영남 문인들에게 강원도와 금강산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지상낙원이자 신선이나 노닐만한 탈속의 공간이라고 인식되었지만 금강산이 지니는 불교적 색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을 표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관동 유람이 가지는 희소성에 대해서는 십분 인정하면서도 단지 유람의 즐거움을 찾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람의 주체인 유람자가 유람을 통하여 학문의 발전과 인격의 완성 등 인생에 있어 진일보한 결과물을 산출해 낼 때라야 비로소 유람의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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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김상헌의 「청평록」과 정약용의 「산행일기」를 대상으로, 조선후기 여행지로서 ‘춘천’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 것이다. 이를 위해 각 작품에 나타난 춘천까지의 육로, 수로 여정을 살피고 그중 여행자가 멈추어 특별히 주목한 풍경으로서 결절점을 도출하였다. 이어 각 결절점이 환기하는 미감을 詩文을 통해 분석하고, 이를 통해 여행의 목적지로서 춘천에 이르기까지 여행자의 인식변화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청평록」은 육로 여행의 기록으로 초연대, 석파령, 소양정, 청평동을 결절점으로 도출할 수 있었다. 이들 결절점을 통과하면서 김상헌은 세상과 거리를 두고 보신할 만한 이상적 공간을 찾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춘천은 그 최종적 형태로 그에게 발견되었다. 「산행일기」는 수로 여행의 기록으로, 정약용의 지향은 풍경 유람에서 점차 역사 고증, 지리 비정, 경세적 태도로 변모해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지리적 탐색과 경세의식을 통해 춘천에서 治國의 공간을 발견했다. 그리고 당시의 춘천은 조선의 成都라 할 수 있을만한 천험의 요지이나, 잘못된 정치로 망가질 수도 있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춘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찬탄은 두 작품 모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상적 은거지, 천험의 요새 등의 인식은 공통적으로 석파령과 현등협의 험준한 지형을 통과한 후 만나게 되는 넓은 평야 지대라는 지리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 춘천이 지닌 지리적 성격은 김상헌, 정약용의 내면 혹은 성향과 결합하여, 각자의 지향에 따라 다양한 공간성을 드러내게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색 시에 나타나는 ‘노년/노쇠함’의 시적 자아와 그 성격

장진엽 ( Jang Jin-youp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3권 0호, 2021 pp. 155-205 ( 총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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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 李穡은 질병 및 정치적 소외로 인해 오십 대부터 자신을 노년으로 인식하였다. 오십 대 초중반에 해당하는 多作期의 작품들에는 작가 자신의 삶을 제재로 한 시들이 많은데, 여기에 ‘노년/노쇠함’이라는 특질을 가진 시적 화자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색의 작품 속에서 노쇠함은 시적 대상이라기보다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규정하는 주된 특질로서 나타난다. 이 점에 주목하여 본고에서는 ‘노쇠한 시적 자아’의 성격과 태도를 살펴보는 방식을 통해 이색 한시에 나타나는 노년/노쇠함의 문제를 고찰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문학적 주체’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문학적/시적 주체’는 “작가 및 현실 세계의 부분적 반영인 동시에 그것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목소리로서, 한 작가의 전체 작품 속에서 연관된 속성을 지니며 상호 간에 계열 관계를 이루며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시적 자아 또는 작품 속 발화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색 한시에서 ‘노쇠함’의 시적 자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성격의 주체로 나타난다. 첫째는 회고와 탄식의 주체이다. 이 주체는 국자감 유학과 한림원 재직 시절을 자랑스럽게 회고하기도 하고, 원나라의 쇠망에 대해 통한하거나 공민왕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하기도 한다. 이처럼 시적 자아의 ‘노쇠함’은 상실한 것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자질인데, 각각의 대상에 따라 발현하는 정서는 조금씩 달라진다. 두 번째는 성찰과 관조의 주체이다. 성찰의 주체는 명리를 좇았던 지난날을 반성하며 삶의 유한성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한편, 귀거래하지 못하고 현실에 매여 있는 자신을 책망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城南에서 한적한 생활을 영위하며 機心을 잊은 物外의 존재로 자신을 형상화하고, 存心養性의 내면 수양에 정진할 것을 다짐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태도는 노쇠함과 정치적 소외라는 현실적 난관을 문학적으로 수용, 극복하려는 기제로서, 세상 만물을 ‘관조’하는 흔들리지 않는 자아의 수립을 지향한다. 성찰의 주체가 관조의 주체로 비약한 것이다. 세 번째는 수용과 긍정의 주체이다. 이색의 노년시에는 老境의 한가로운 정취와 고요한 내면, 詩作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종종 표현된다. 수용의 주체는 노쇠함으로 인해 얻게 된 것들을 긍정적으로 의미화한다. 이런 작품들에서 시적 자아는 도연명과 같은 지극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 이는 작가 이색의 실제 모습이라기보다는 시인의 염원을 구체화한 하나의 가상이라는 성격이 짙다. 그러나 문학적 주체의 기능을 염두에 둘 때, 이와 같은 자기 긍정은 노쇠한 시적 자아의 성취인 동시에 ‘노쇠함’이라는 현실의 난관에 맞서 자신의 중심을 수립하려는 작가 이색의 ‘문학적’ 성취라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남은 문제는 다음과 같다. 하나는 이색의 육십 대 작품에 나타나는 노년의 모습이다. 작품 분량상 균형이 맞지 않아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지만, 유배기의 작품에서도 성찰과 관조, 수용과 긍정의 주체가 여전히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무력한 자신의 처지를 분명히 받아들인, 보다 안정된 자의식을 가진 시적 자아가 느껴지기도 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한시 문학에서의 주체 개념의 유효성 문제이다. 주체 개념의 활용은 한시에서의 작가와 표현의 문제에 대한 탐색의 일환으로 시도된 것이다. 향후 이에 관한 발전적인 논의를 제출할 것을 기약한다.

소세양(蘇世讓)의 사행경험(使行經驗)과 사행시(使行詩)

이성형 ( Lee Soung-hyung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3권 0호, 2021 pp. 207-235 ( 총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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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稿는 陽谷 蘇世讓(1486~1562)의 使行經驗과 使行詩를 고찰하였다. 양곡의 사행록은 사행시와 「赴京日記」로 구성되었는데, 사행시는 날짜와 노정에 따라 순서대로 작품이 편차되었고, 後識가 첨부되어 別冊으로서의 완성도가 높다. 사행일기인 「赴京日記」는 중간본 _陽谷集_의 雜著에 편차되어 있고, 매일의 여정과 주요 사건을 간략히 기록하였다. 양곡의 사행시와 「부경일기」는 서로 상보적인 기록이자 작품이다. 양곡의 진하사행은 明 관리들의 비협조적인 태도, 㺚子들과의 갈등, 악천후 등 괴로운 여정의 연속이었다. 양곡은 황태자의 誕生을 축하하는 進賀 使命을 무사히 진달하고, ‘會同館 門禁 解除’와 ‘조선출신 현직 宦官 명단 파악’의 別命을 완수하였다. 양곡은 귀국 후에 禮部尙書 夏言에게 시문을 증서한 일로 비난을 받았지만, 외교상의 전대능력이 현안 문제의 해결에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였다. 양곡 사행문학의 작품세계로 먼저 ‘見聞 所懷와 客愁의 露呈’에서는 東岳廟와 駐蹕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여타 사행록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개성적인 견문의 소회를 남겼다. 또한 사행 중에 고르지 못한 날씨로 인한 고통, 㺚子의 위협, 會同館에서의 門禁으로 인한 자괴감 등의 困苦함 속에서 詩料를 찾는 문인으로서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嘉靖 治世에 대한 二重的 認識’에서 양곡은 기본적으로 사대의 대상인 명을 문명국으로서 존경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관리들의 토색질이나 국자감 유생들의 탐욕스러움, 심한 기근으로 인육을 먹으며 연명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서 가정 치세에 대한 이중적인 인식 양상을 보여 주었다. ‘外國 人事와의 多樣한 交遊’에 대한 고찰에서 양곡은 明의 禮部尙書, 提督主事, 序班 등 예부 관원들과 활발한 교섭과 교유를 나눴다. 또한 양곡은 琉球 사신들에 대해서는 호기심과 친근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咸鏡道 鍾城 인근에서 왔던 女眞 사신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경계와 조소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양곡의 많은 사행시와 더불어 「부경일기」를 통해 자신의 사행 경험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조선 전기 사행문학 작품과 형식으로서 매우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대표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 민간의 전염병 대처 방식 연구 - 조극선(趙克善)의 일기를 중심으로 -

金東鍵 ( Kim Dong-geon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3권 0호, 2021 pp. 237-267 ( 총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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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임진왜란 직후에 태어나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등을 겪었던 인물인 조극선의 전염병 대처 방식을 살펴본 것이다. 그는 15세(1609)부터 41세(1635)까지 27년 동안 일기를 썼는데, 그렇게 남은 기록이 『忍齋日錄』과 『冶谷日錄』이다. 『인재일록』은 1609~1623(15년)까지, 『야곡일록』은 1624~1635(12년)까지의 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일기에는 각종 질병과 전염병에 대처하는 장면이 많이 보인다. 마을을 넘어서는 전국적 단위의 전염병 발생도 여러 차례였다. 1634년 1월 6일, 조극선은 그의 가족들이 다섯 차례나 천연두를 겪었다며 한탄할 정도였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한의학이나 민간에 전해지는 처방을 써보는 것 외에 특별한 치료법이 없었다. 전염병 중에서 천연두와 홍역은 치사율이 특히 높았다. 따라서 병이 발생하면 주변 사람들은 병을 피해 거처를 옮겨 지내는 避接을 행하였다. 주변 지역의 사람들은 해당 마을에 들어가지 않거나 지나야 할 일이 있더라도 다른 지역으로 돌아가는 등의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또한 전염병과 관련된 금기사항이 많았다. 疫神이 치성한 상태에서는 조상신에게 제사 지낼 수 없으므로 제사를 금지하게 된다. 조극선의 일기에는 제사를 지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병을 잘 치러 살아남게 되면, 送神을 위한 무당 놀이를 하였고, 검은색의 떡을 만들어 바치는 등의 풍습도 있었다. 조극선은 가족들에게 전염병이 퍼진 것은 모두 자신의 不德으로 벌어진 일이라며 자책하곤 하였다. 善人에게 복을 내리고 惡人에게 화를 내리는 것처럼, 질병 역시 德의 不在에 따른 결과라고 믿었으며, 병과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모습도 보인다.

鳳溪 尹揄의 交遊와 時弊 改革案

정만호 ( Jung Man-ho )
한국한문고전학회|한문고전연구  43권 0호, 2021 pp. 269-297 ( 총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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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윤유와 민준의 교유, 그리고 윤유의 시폐 개혁안의 내용과 장단점을 분석한 것이다. 필자는 자료 조사를 통해 윤유의 『봉계집』을 확보한 후 윤유가 민준과 각별한 관계임을 파악하였다. 추가 조사를 통해 민준의 『성재집』을 발견하였고, 두 사람의 친분을 확인하였다. 두 사람의 우정은 「尹鳳溪贈閔松村詩圖」에 오롯이 담겼다. 이 그림에는 윤유와 민준의 시가 2수씩 수록되었고, 그림의 제작 배경과 목적을 알려주는 민준의 기문도 기재되었다. 윤유의 아우 윤부와 조카 윤시교의 시도 있으므로, 그들의 문집까지 찾아보았으나 윤시교의『춘락와유집』만발견하였다. 네 사람은 모두 충남 논산시에 거주하였으며, 소론의 핵심인 윤증과 혈연 또는 사승 관계에 있는 인물이다. 그 중에서도 윤유는 윤원거의 아들로서 학문적 연원이나 성취 면에서 중심인물이라 생각하여 『봉계집』 고찰을 먼저 시도하였다. 윤유와 민준의 교유는 「윤봉계증민송촌시도」를 중심에 두고 두 사람의 문집에서 발견되는 시문을 통해 고찰하였다. 이 그림은 두 사람의 우정뿐 아니라 두 집안의 世誼가 후손들에게 영원히 전해지기 바라는 염원에서 제작되었다. 시를 기록한 부분이 일부 손상되었지만 300년 이상 온전히 전해졌으니 일정 부분 목적을 달성했다 하겠다. 윤유의 시폐 개혁안은 「辛巳擬上封事」에 담겼다. 윤유는 ‘정치의 근본을 바르게 할 것[端治本]’을 要道로 제시하고, 先務로는 ①어진 재상 선택[擇賢相] ②신중한 인재 선발[精選擧] ③관리에게 믿고 맡길 것[專任使] ④언로의 개방[開言路] ⑤예산 절약[節財用] ⑥풍속 정화[正風俗] ⑦신상필벌[明賞罰] ⑧군정의 엄격한 정비[嚴軍政] ⑨폐단의 개혁[革弊瘼]을 제시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이전 시기에 자주 거론되었던 것들로, 방안 자체의 독자적 특징은 부족하다. 오히려 기존에 개별적으로 제기되었던 개혁안들을 종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항목은 다르지만 財用과 人事를 중복 언급하여 두 사안에 치중된 한계도 나타난다. 그러나 미관말직에 있던 인물이 초야에 머물던 시기에 시대의 병폐를 진단하고 개혁안을 만들었다는 점, 女色 등 숙종의 치부까지도 신랄하게 비판한 점, 각 개혁안을 유기적 관계로 구조화하려는 시도 등은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비록 실제 올리지는 않았지만 15,000자 가량의 장문인 이 글은 율곡 이이 이후 지어진 만언봉사의 대열에 포함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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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일제강점기 강릉읍지 『增修 臨瀛誌』의 편찬 과정을 상세히 재구하고 그 의미를 탐색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임영지』는 강릉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읍지로 광해군 연간에 처음 편찬되었다. 이후 조선 후기에 2차례 續修가 이루어졌으며, 일제강점기인 1933년 강릉고적보존회에서 『증수 임영지』를 간행하였다. 읍지 중에서 『임영지』만큼 조선 시대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쳐 여러 차례 증보가 이루어진 사례는 드물다. 『증수 임영지』의 편찬 과정은 朴元東(1873~1949)의 『詩湖文集』과 『詩湖居士日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926년에 강릉활판인쇄소의 발의로 강릉의 유림들이 참여하여 『임영지』 속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河南齋와 五峯書院 관련 記事를 두고 유림 사회에서 소론과 노론 사이의 갈등이 재현되면서 중단되었다. 그 후 1932년에 군청의 주도로 『임영지』 속수가 다시 추진되었으며, 유림 사회의 갈등은 편찬 위원이 조정안을 마련하고 군수가 주재하는 임원 회의를 통해 해결하였다. 『증수 임영지』는 지역 유림의 갈등으로 인해 편찬이 중단되는 사태를 겪었지만, 강릉의 역사와 문화를 증보해야 한다는 지역 사회의 의지, 편찬 위원을 비롯한 임원들의 지속적인 협의와 조정, 군수의 주도와 지원 등에 힘입어 마침내 간행될 수 있었다. 『증수 임영지』의 편찬 과정은 오늘날 지역학을 연구하는 데에 시사해주는 바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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