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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Literary History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7-0962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56권 0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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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식민지 시기부터 최근까지 대표적인 ‘현대문학사’ 몇 종을 민족문학과 아카데미즘의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 『신문학사』(1939), 『조선신문학사조사』(1948), 『한국문학사』(1973), 『한국근대민족문학사』(1993), 『민족문학사 강좌』(2009),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2013)를 검토하였다. 주지하는바 그간 출간된 현대문학사는 민족문학사의 틀안에서 작업된 것이었다. 하지만 근대적 학술체계로서 문학사는 아카데미즘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사가의 인식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문학의 성격과 위상은 개별 문학사에서 차이를 갖게 된다. 서구적 보편과 조선적 특수의 관계에 대한 사유, 즉 비교문학적 시각은 문학사에 내재되어 시기별로 유동하는 특징을 보이는 것이다. 최근 10년 한국사회 전반의 변화 속에서 대학 인문학의 위상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더 이상 문학사가 과거와 같은 위치를 차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향후 문학사 쓰기의 향방은 ‘국가-대학-국어국문학’이라는 문학사 쓰기의 전통적인 틀을 어떻게 새롭게 마련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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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20년대까지의 소설 번역의 추이를 통해 초기 근대소설사의 한국적맥락과 그것이 형성된 조건을 추출하고, 이분화 되어 있던 창작문학·번역문학 연구의 풍토를 재고해보고자 씌어졌다. 주로 1910년대에 일본 유학을 경험한 일군의 한국 지식인들은, 창작과 번역이라는 두 가지 채널을 통해 소설을 ‘순문예’의 영역 속에 안착시키려는 노력을 본격화하였다. 특히 그들은 질과 양의 측면에서 모두 수준 이하라고 인식한 조선문단의 발전을 앞당기기 위해 세계문학 번역의 필요성을 주창하고 직접 실천하였다. 이 같은 번역 실천은 1910년대를 중심으로 하는 번역소설의 1차 중흥기와 1920년대의 2차 중흥기를 형성하는 가시적 성과를 낳는다. 이 과정에서의 성격 변화는 순문예 소설 번역의 강세로 압축되는데, 그중 러시아 및 프랑스소설의 번역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1920년대를 순문예 번역의 질적·양적 팽창으로 전대와 구획하는 종래의 이해 방식은 비판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우선, 번역량은 격증했으나 문예 지면의 확대 수준을 감안하면 이를 진정한 의미의 격증이라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그 양적 상승세 자체도 1920년대 중반부터는 둔화된다. 이는 번역량이 팽창일로에 있던 동시기 일본과 중국의 번역 상황과도 상반되는 독특한 현상이다. 또한 번역이 순문예물로 집중되는 경향이 뚜렷해지기는 했지만, 압도적이라 할 만큼의 비중은 아니었다. 오히려 필독서라 할 만한 정전(正典) 급의 장편소설의 번역도, 비교적 수월하게 결과물을 낼 수 있는 단편소설의 번역도 설 자리를 잃어갔다. 신문은 주로 통속적인 장편 연재소설을 역재(譯載)했고, 잡지의 소설 지면은 대부분 창작 단편의 공간으로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번역문학의 내적 맥락 속에서 간취되는 순문예 번역의 저조는, 다음과 같은 한국근대소설사의 두 가지 한계와 인과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첫째는 순문예물 독자층의 저변확대에 실패한 것으로서, 이는 다시 작가의 경제적 상황 및 창작 여건의 불안정을 수반하는 악순환의 고리로 작용했다. 둘째는 끝내 식민지기의 문단이 ‘대장편’ 문예물의 창작과는 친화하지 못한 것으로서, 이는 결국 한국 근대소설사에서 고착화 된 장편= 통속/ 단편= 예술이라는 양식적 감각과 연동되어 있는 문제다. 순문예 번역의 저조와 그에 반비례하는 창작과잉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식민지의 이중 언어 환경 및 출판시장의 문제뿐 아니라, 일본문단이라는 대타항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문학사의 시차(時差)를 조급히 상쇄하고 싶어 했던 식민지 문인들의 욕망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특집 : 문학사의 젠더

소영현 ( Young Hyun S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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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에 젠더를 기입하는 일은 무엇이며 또 어떻게 가능한가. 학계와 문단에 폭넓게 근대의 자명성에 대한 회의가 시작된 1990년대 이후로, 근대, 민족, 문학, 역사에 대한신화 깨기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성을 획득했다. 이에 따라 탈근대 담론의 영향 아래 문학사서술의 무용성이 의문의 여지없는 귀결로서 인식되었다. 그간의 문학사 서술의 실질을 돌이켜 보건대, 이러한 추론은 역설적으로 문학사 서술의 완전무결성과 실현가능성을 상정하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문학사 서술의 불가능성이 문학사 서술의 무용성으로 오해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이는 문학사 기획이 내포한 불가능성과 그로 인한 반복적 재기술의 필요성을 세분해서 사유할 필요를 요청한다. 문학사에 젠더를 기입하는 일이자 그 일환으로서의 ‘여성’ 문학사의 재기술 가능성을 논의하는 작업은 우선적으로 그간 어떻게 ‘여성문학’ 연구가 게토화되었는가에 대한 재검토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문학사에 젠더를 기입하는 작업이 갖는 탈근대적 비판으로서의 성격이 그것의 역설적 불가능성을 입증하게 하는 정체성론에 기반해 있음을 짚어봄으로써 ‘여성문학사’ 기술과 ‘여성문학’ 연구가 갖는 방법론적 딜레마를 단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과 정치를 가로지르려는 시도가 직면하는 난점과도 다르지 않은 이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여성문학’ 연구는 젠더/ 섹슈얼리티 연구로 통합되어 들어가는 한편, 여성문학에 대한 관심 자체의 저하와 함께 왜소화되고 게토화된 경향이 있다. 여성문학 연구의 왜소화는 현실사회의 ‘여성’의 재배치로부터 야기된 것이다. 이는 여성문학 연구의 게토화가 곧바로 여성문학 연구에의 요청을 무효화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더구나 2000년 이후로 글로벌리즘의 전면화와 함께 가족주의에 함몰된 ‘엄마’의 출현을 야기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보자면 모순의 배리 속에서도 여전한 여성연구의 필요성이 역설된다. 여성문학 연구는 한편으로 새로운 문학연구 방법론으로서의 모색을 전진시켜 나아가는 동시에 글로벌리즘과 결합한 가부장제의 역습으로 대표되는 현실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에 비판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여성문학 연구를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여성문학 연구의 유의미성은 여성문학 연구 방법론이 불러오는 ‘차이/ 보편’의 배리의 정치학에서 분출되는 것이라 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요컨대 여성 문학사를 포함한 복수의 문학사 서술 기획이 반복적으로 요청되어야 하는 것은 여성문학 연구가 문학에 대한 관점의 재조정, 문학에 대한 가치와 독해법을 둘러싼 새로운 발견, 나아가 소수자/ 타자라는 키워드로 불거진 현실사회의 시스템의 재고를 겨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집 : 문학 교육에서 바라본 문학사

윤대석 ( Dae Seok Y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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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문학사 교육의 위상 변화와 그에 대응하는 문학사 교육 탈구축 작업을 살펴봄으로써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문학사의 탈구축 작업에서 시사점을 얻고자 한다. 국어과 교육 과정은 문학사 교육을 국민 교육의 장으로 삼았으나 국어 교육이 학습자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문학사적 지식은 독립적인 지식과 개별 작품들을 통합하는 지식의 역할을 할수 없게 되었다. 학습자의 다양한 반응과 해석을 이끌어 내는 방향으로 전환한 문학 교육은‘복수의 문학사’를 제재를 통해 구성하였기에, 단일하고 평면적인 해석밖에 생산하지 못하는 민족 문학사와 괴리되었다. 그 때문에 문학사적 지식은 고전과 현대의 상호텍스트성을 지시하는 전통의 연속성과 민족 문학의 정전을 부각시키는 한국 문학의 범위에 관한 지식으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문학사 교육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문학 교육학계에서는 문학사 교육의 목표를 지식 습득보다는 지식과 능력이 결합된 안목의 획득으로 재설정하고 학습자로 하여금 통합적이고 관계적인 문학사적 지식을 주체적으로 구성하는 데 초점을 두는 방향으로 문학사교육을 갱신하고자 했다. 그러한 가운데 고정된 실체로서의 민족 문학사를 해체하고 복수의 문학사를 도입하거나 그 복수의 문학사를 토대로 자신만의 소문자의 문학사를 구성하는 방안도 제시되었다. 또한 문학 연구 영역의 성과를 바탕으로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문화사적 문학사를 서술하자는 제안도 제출되었다. 이러한 민족 문학사를 대체하는 대안적인 문학사들로 구성되는 복수의 문학사 교육은 정치적 장이자 비평적 장으로서 문학사를 새롭게 탈구축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특집 : 통일 담론과 남북한 문학사 소통방안

김성수 ( Seong Su K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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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우리’ 한국문학(사)의 타자이자 소수자라 할 북한문학(사)을 어떻게 볼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북한문학은 언젠가는 재통합될 한반도 이북의 우리 민족의 문학이니 이념 차이 때문에 무조건 배제할 수는 없다. 북한문학도 문학이며 ‘우리문학’이기에, 궁극적인 통합을 위해서 원래 하나였던 것이 해방 직후 분단된 과정을 천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백철의 『조선신문학사조사』, 조연현의 『한국 현대문학사』, 한효의 「현대조선문학사조」, 안함광의 『조선문학사 1900~』, 과학원 문학연구실의 『조선문학통사』 (하) 등을비교하였다. 그 결과 남북 학자들이 자기중심으로 현대문학사를 전유하고 상대를 배제하는‘뺄셈의 서술’을 통해, 자기 체제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음을 알았다. 나중에 승리한자가 이미 존재했던 역사적 실상을 왜곡, 재편하는 것이 공식 역사 기술의 당연지사겠지만,공식화와 정전화를 공고히 할수록 원래 하나였던 우리문학사, 민족문학을 결과적으로 영구분열시킬 수밖에 없었다. 즉, 자기중심적 정통성 담론은 기실 모국어의 분단을 공고화하는분단문학사의 출발일 뿐이다. 1950년대 이후 최근까지 남북한의 문학사를 통합 서술한 실질적인 성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최근 남북한의 현대문학사 서술은 완전히 다른 나라 것처럼 되었다. 가령 북한의 『조선문학사』 16(2012)는 ‘조선민족제일주의’와 ‘수령론’으로 점철된 ‘선군(先軍) 문학사’를 정초하고, 남한은 문학사 자체를 공식화하지 않거나 아예 해체하는 분위기이다. 그나마 민족문학사연구소의 『새민족문학사강좌』(2009)가남북문학(사)의 공존을 소수자담론으로나마 서술한 수준이다. 문학사적 분단의 재검토를통해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해진 북한문학과의 상호 이해와 교류, 통합방안을 다시 고민할 때이다. 북한문학의 실체를 인정하고 부단히 소통하며 남북 문학의 공존을 서술해야 우리 민족문학사의 재통합이 가능할 것이다.

"기씨녀(箕氏女)" 와 "미주(媚珠)"

정환국 ( Hwan Kuk J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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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금오신화』의 .취유부벽정기.와 베트남 전기 .옥신환화(玉身幻化).의 여주인공 기씨녀(箕氏女)와 미주(媚珠)에 주목하여 두 작품을 비교한것이다. 이는 동아시아 전통서사의 면모 가운데 한.월의 근친성이 유독 강하다는 점에 착안하되, 종래 『금오신화』와 『전기만록(傳奇漫錄)』 위주의 단선적 비교 연구를 넘어서서 양국이 공히 ‘상고(上古)의 원녀(寃女)’를 특화한 사례에 주목한 것이다. .취유부벽정기.의 기씨녀는 기자조선의 후예로 망국의 비애를 안은 가공의 인물이며, .옥신환화.의 미주는 베트남의 옛 왕조인 구락국의 마지막 공주로 왕조교체기에 희생된 비극적인 존재이다. 두 작품은 왕조교체기와 그 어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 과거 망국의 공주들을 주인공으로내세운 것이다. 그녀들을 왕조의 전환기에 소환한 것은 나라의 운명과 그 추이를 예민하게고민한 흔적이라 할 만하다. 또한 문면에서 토로하거나 술회하는 그녀들의 정조는 정통 왕조가 훼손되거나 그럴 위기에 처한 당대의 착잡한 심리의 반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두 작품사이에는 일정한 차이도 없지 않다. .취유부벽정기.는 옛 도읍지에서 기씨녀와 홍생이 만나고 함께 선화(仙化)했다는 점에서 계유정란으로 희생된 사육신과 단종에 대한 애도이자조문의 서사로 이해된다. 반면 .옥신환화.는 미주의 도움으로 남주인공 왕생(王生)이 화락한 인생을 맞는다는 점에서 정통 왕조가 유린되고 외세의 침략에 직면한 난망한 현실 속에서도 이를 타개하기를 바라는 희망의 서사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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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체제를 갖춘다는 점에서 역사서의 편찬은 문명 구성의 핵심이 된다. 역사서의 편찬은 사회·정치·문화·지리·예악 등 문명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역사서의 편찬 과정은 역사 인식, 역사 기술의 방식, 그리고 역사 기록의 주체로서 史官의 문제를 환기했다. 조선 전기에, 처음에 역사 문제는 『고려사』와 실록 편찬을 위한 사관 ‘제도’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점차로 기록 주체와 기록 대상의 도덕성에 대한 판단, 준엄한 도덕적 평가를 관철시키는 문제를 둘러싼 신진의 지성과 기존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번져 나갔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정치적인 숙청[士禍], 즉 사옥(史獄)과 사화(史禍)를 일으킨 정치적인 갈등으로서 부정적인 함의만을 남기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조선 전기의 문명을 구성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주체, 즉 조선 전기 지성의 형성과 직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의 기본 관점은, 이처럼 역사를 기록하는 주체로서의 경험과 인식은 조선전기, 당대의 지성의 성장과 변화에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은 조선 전기 지성의 중요한 ‘역사 경험’으로 두 가지 사안을 다루었다. 하나는 1469년(예종1) 기축사옥(己丑史獄)으로, 『세조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차원에서 촉발된 역사문제들과 그 실천의 주체로서 사관의 의식이 드러난다. 다음은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로, 기축사옥 이래 사관으로서의 인식과 실천이 어떤 지점까지 나아갔는지, 그 변화의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1498년의 무오사화에서는 ‘과거사’라고 할, 세조대의 일이 첨예한 사안이 되었다. 기축사옥과 무오사화라는, 30년을 사이에 둔 두 사화(史禍)에서 사관과 대신들이 보여준 태도는 매우 중요한 점을 제기한다. 기축사옥은 『세조실록』의 편찬으로 발생한 필화(筆禍)였다. ‘세조’라는, 명분상의 문제를 가진 왕과, 그런 왕의 정치를 비호하던 세조 측근의 신하들이 역사 기록의 대상이 되는 사안이었다. 게다가 사필(史筆)의 기본인‘무기명(無記名)’의 원칙이 갑자기 ‘기명(記名)’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기축사옥의 발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대신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낀 사관들이 사초를 집단적으로 수정하고, 그로 인해 사관들이 처벌(죽음)을 받았던 사건이었다. 이 사옥에서 사관들은 자기의 사필을 어느선까지 관철시킬 수 있는가, 그에 대한 이념적·실천적 임계점을 드러냈다. 30년 뒤, 1498년의 무오사화에서 사초를 고치기를 원한 것은 반대로 대신(大臣)들이었다. 반면, 사관들은 자기 사필의 정당성을 삼대(三代)의 사관에서 공자의 『춘추(春秋)』, 그리고 좌구명(左丘明)의 『좌전(左傳)』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정통 계보에서 주장했다. 사관들이 자기의 사필을 정당하게 인식하고, 그것의 근거를 역사의 정통에서 찾아내어 원칙을 관철하려는 힘은 훨씬 투철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 근저에는 새로운 지성들이 자기들만의 정보와 공론(公論)으로 만들어 갔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평가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이들 새로운 지성들은 ‘도덕적 존재’로서 자기정체성을 전면에 부각하며 그 타자로 ‘훈구(勳舊)’라 불리던, 기성의 지성들을 설정하였다. 이처럼, 기축사옥과 무오사화는 조선 전기 지성의 성장과 변화의 지점을 뚜렷하게 드러낸다는 지성사적 위상을 갖고 있다.

심원자(心遠子) 한재렴(韓在濂) 시 연구

이현일 ( Hyun Il L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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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후기 개성(開城)을 대표하는 시인이었던 심원자(心遠子) 한재렴(韓在濂, 1775~1818)의 생애와 시문학을 다시 조명해 보려는 글이다. 한재렴의 삶에 대해서는 여러 문장가들이 지은 글이 있지만, 그 가운데 소년시절부터 절친한 벗이었던 이학규(李學逵, 1770~1835)가 그의 아들의 부탁으로 지은 묘지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 묘지명을 중심으로 다른 자료들을 대비하면서 그의 생애를 다시 한번 재구해 보았다. 아울러 이충익(李忠翊, 1744~1816)의 .한생에게 답하는 편지[答韓生書].는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이지(李贄).김성탄(金聖嘆).전겸익(錢謙益)의 글들을 좋아하고 한창 이들의 글을 본받으려 한 한재렴을 타이르는 글로 그의 청년 시절의 문학적 지향을 엿볼 수 있는 글이므로 함께 읽어 보았다. 본론에서는 심원당시초(心遠堂詩抄) 에 실린 한시 작품들을 통해서 그의 ‘청재(淸才)’와조선 후기 시단에서의 위상에 대해서 논하였다. 우선 한재렴 집안의 자랑거리였던 서대문근처의 경제(京第)인 우화당(藕華堂)을 읊은 작품들을 읽어보았다. 여름이면 아름다운 연꽃이 무성하게 피었던 큰 연못이 있었던 이 집은 한재렴 집안의 전성기를 상징하며, 이 집안사람들이 경화세족들과 교유할 수 있게 해 주는 주요한 공간이어서 특히 중요하다. 그리고 심원당시초 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 비중이 높은 순천(順天) 유배기의 여러 작품들을 살펴보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시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인식되지만 난해한 「중경회고(中京懷古)」를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이광수의 『춘향』과 조선 국민문학의 기획

유승환 ( Sung Hwan Y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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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23년에서 1926년까지, 즉 이광수가 역사소설 창작으로 선회하기 이전 시기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발표한 세 편의 주요한 장편소설(『허생전』, 『재생』, 『춘향』)이 각각 한문학인 「허생전」, 번역/ 번안소설인 「금색야차」/ 「장한몽」, 고전국문소설인 「춘향전」에 대한 패러디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 것에서 출발한다. 이때, 한문학,번역/ 번안소설, 고전국문소설은 당대의 조선독자들에게 주어진 세 개의 서사적 전통과 정확히 일치한다. 즉, 이광수의 패러디 소설 창작은 『동아일보』라는 민족지를 바탕으로 한 조선의 국민문학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조선에 주어진 상이한 서사적 전통을 한편으로는 꾸준히 참조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을 포괄하는 단일한 국민문학의장을 기획하며 이들을 배제하려는 시도라고 파악할 수 있다. 이때 세 편의 패러디 소설의 텍스트 형성 원리는 각각 다른 바, 이 논문은 이 중 고전소설에 근대소설의 의장을 씌우는 것에 집중한 『춘향』 개작의 맥락과 그 실제 개작 양상에 주목하여 이광수가 기획한 조선 국민문학의 이념태를 밝혀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일제시기 「춘향전」은 일반적으로 ‘소설’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이때 이러한 인식은 구비전승에 의존하는 「춘향전」의 연희 방식에서 기인한다. 이광수는 「춘향전」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 인식에 동의하면서도, 현존하는 .춘향전. 판본들을 고대에 존재했던 ‘국민문학’의 흔적이 잔존한 일종의 ‘전설’로 상상하면서, 이를 근대 예술가의 손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전략을 취했다. .춘향전.을 비롯한 조선국문소설에 대한 이광수의 이러한 독특한 관점은 한편으로는, 조선어에 의한 조선 국민문학의 발전 가능성을 부정하고, 조선 국민문학을 일본국민문학의 하위범주로 배치하려고 했던 시마무라 호게쓰의 조선문학론에 대한 위기감과 동시에, 농촌독자들을 정치적 지지 세력으로 포섭하려고 했던,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활동한 민족주의 우파의 정치적 전망과도 관계를 맺는다. 이때 이광수는 .춘향전.을 표준적인조선어를 통해 광범위한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조선 국민문학’으로서 개작하려는 노력을 하는 한편,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농촌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독자들을 ‘조선 국민문학’의 장 속에 포섭하려 시도했다. 『춘향』의 개작 양상에 있어서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일상적인구어체의 활용, 대화부와 서술부의 분리, 서술자의 중개적 기능의 강화 등을 핵심으로 하는문체, 서술 측면에서의 변화이다. 이는 종래 .춘향전.이 가지고 있었던 ‘낭독되는 텍스트’로서의 성격을 탈각하고, .춘향전.을 ‘읽는 텍스트’로 바꾸어내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춘향전.이라는 텍스트를 통어하는 주체는 개별적인 낭독자에서부터, 표준적인 텍스트를 생산하는 근대 예술가로서의 작가로 넘어간다. 두 번째 양상은 ‘이도령’을 ‘몽룡’이라고 부르는 호칭의 변화이다. 이는 작중 몽룡을 봉건적이고 계급적인 주체로부터,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주체로 바꾸는 중요한 변화이다. 이광수는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평등한 개인성에 근거한 이몽룡과 춘향 및 그 주변 인물들의 연대 가능성을 제시하는 한편, 이러한 방식으로 연대한 집단과 ‘변학도’의 대립을 보다 선명하게 제시하는 바, 이는 당대 이광수 및민족주의 우파가 생각했던 정치적인 비전과도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처럼 .춘향전. 개작의 여러 맥락들, 그리고 『춘향』 개작의 양상을 검토해 볼 때, 이광수의『춘향』 개작은 ‘조선 국민문학’이라는 문학적 장 속에 포섭되어야 할 독자, 이들을 포섭하기위한 매체, 그리고 이 문학적 장 속에서 교환되어야 할 메시지의 문제 등과의 긴밀한 관계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점에서 이광수의 .춘향전. 개작은 1925년의 시점에서 이광수가 구상한 ‘조선 국민문학’의 이념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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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12월부터 1937년 8월까지 장로회와 감리회의 연합으로 발행된 『기독신보(基督申報, The Christian Messenger)』는 표제에서부터 기독교 전파를 위한 목적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영택, 이일, 남궁벽, 노자영 등 이 신문에 글을 게재하고 있는 1920년대 초기 문인들에 대한 논의는 그간 없었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기독신보』에 실린 이문인들의 글을 본격적으로 검토할 뿐만 아니라 특히 『기독신보』 소재의 문예 방면에서 꾸준한 활동을 전개하였던 남궁벽, 노자영의 글을 토대로 문학의 차원에서 그들이 지향하려한 ‘이상향’의 의미를 해명하는데 있다. 『기독신보』에서 활동한 문인들의 글을 검토해보면 성서나 기독교의 신관(神觀)을 다루는등 기본적으로 신문의 체제와 부합하며 ‘소년문학’란에서 활동한 남궁벽의 글에서도 선/ 악과 같은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거나 교훈적인 내용으로 독자를 계몽하려는 의도에서 크게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남궁벽은 점차 종교가 아닌 문학의 측면에서 ‘이상향’을 추구하려는 의도를 내비쳤으며 그 이후 소설, 시, 감상, 논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활발한활동을 전개한 노자영은 기독교의 수사를 동반하여 ‘생명’의 근원이 ‘이상향’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 현실에 근거를 둔 ‘이상향’을 탐색해간다. 그 과정에서 그는 진화론의 관점에서 육체와 정신, 물질과 영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생활’의 개념과 지표를 도입하여 당대의 현실에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 ‘이상향’을 모색하였다. 1920년 2월을 기점으로 그들의 글은 『기독신보』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으나 이후 남궁벽은 『폐허』에서, 노자영은 『서울』, 『학생계』, 『백조』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펼쳐간다. 이 글은 그들이 본격적인 문예활동으로 들어서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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