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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가문화연구(구 한국고시가문화연구)검색

The Studies in Korean Classic Poetry and Cul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2466-1759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5권 0호 (2010)
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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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파 정시림은 조선조 말 호남 사림의 중요한 위치에 선 문장가요 학자이다. 그는 노사 기정진의 고족제자로서 시서예악을 학문의 토양으로 삼고 공맹정주를 학문의 사표로 본받아 문풍교화와 전통윤리교육의 진흥에 헌신하였다. 또 그는 경술의 국치를 당해 조선신민으로서 지조와 절의를 꺾이지 않았던 의인이기도 하다. 월파는 글재주가 뛰어난 문사에 앞서 경전과 도의에 밝았으며, 학문적 사유 외에도 문학에 대한 열정과 낭만이 그의 시편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그의 문학은 자연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물심일여의 자연친화적 성정과 함께 불의가 앞서는 시대에 방외의 객을 자처하며 세상을 초탈하고자 하는 정신세계를 그의 시편에 담고 있다. 월파는 면암 최익현, 송사 기우만, 후윤 정예산, 일신 정의림 등 경기, 영·호남의 수많은 문인, 학자들과 교유하였으며 一時의 선비들과 종유는 명분과 대의가 상실된 시대를 살아가는 월파의 삶에 있어 정통학문을 수호하고 시대를 소통하고 울분을 치유하는 큰 의미를 갖게 된다. 월파는 경학을 중시하는 도학자였지만 그의 시에는 자연을 통하여 성정을 도야하고 진실한 인간적 삶을 추구하려는 순수한 정신세계가 농축되어 있다.

임진왜란 포로의 일본 체험 실기 고찰

김미선 ( Mi Sun Kim )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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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부터 1598년까지 치러진 임진왜란은 국토를 피폐화 시켰고,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겼다. 임진왜란 경험은 어떤 것이든 충격적이며 비극적이겠지만,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간 사람의 경우에는 그 아픔이 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경우에는 생존에 대한 것 뿐 만아니라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실기인 강항의 『간양록』, 노인의 『금계일기』, 정희득의 『월봉해상록』을 살펴보았다. 세 작품은 임진왜란과 포로로써의 일본 체험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세 명의 작자는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포로로써 일본을 체험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호남의 문인으로 일본의 2차 침입이 있었던 정유년에 잡혀 가, 비슷한 시기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의 작품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일본에 다녀온 귀중한 자료로, 전쟁포로로써 해외 체험을 실기로 기록한 독특한 작품군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비슷한 경험을 하여 하나의 작품군을 이루지만, 각 작품은 각각의 특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저자와 일본 체험 여정, 내용상의 특징 등을 살펴서 각 작품의 기본적인 사항 및 특징, 가치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강항은 포로라고 하여 소극적으로만 있지 않고, 일본을 적극적으로 탐색하였다. 그리하여 『간양록』에는 일본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조선을 다스릴 계책이 제시되어 있다. 강항과 정희득이 일본의 허락을 얻어 고국으로 온 반면, 노인의 탈출은 목숨을 건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금계일기』에는 탈출 과정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또한 조선으로 바로 가지 않고 중국으로 탈출함으로써 임진왜란에 참여한 삼국을 모두 경험하였고, 세 작품 중 유일하게 중국에서의 생활을 기록하고 있다. 정희득은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본인의 감정에 치중하여 서술하였다. 그리고 『월봉해상록』에 피란을 떠나는 날부터 고향집에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기록 하여, 세 작품 중 유일하게 포로 체험과 관련한 전 과정을 볼 수가 있다.

양산보 <애일가>의 전승과 성격

김신중 ( Shin Chung Kim )
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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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보의 <애일가>는 부모의 생일에 자제들이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불렀다는 축수가이다. 현재 그 원사는 전해오지 않으며, 양진태의 한역만이 남아 있다. 이 한역의 검토를 통해 <애일가>의 원래 모습을 연구한 것이 바로 이 글이다. 논의한 주요 내용은 크게 다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련 자료의 세밀한 검토를 통해 <애일가>의 전승 양상을 살핀 것이 그 하나이다. 그리고 <애일가>의 귀속 갈래를 추정하고, 작품의 원사를 재구하여, 문학적 성격을 살핀 것이 나머지 하나이다. 논의의 결과 <애일가>는 지금까지 가사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시조 작품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작품 원사의 재구를 통해 <애일가>가 당시 상당한 전파력을 가진 노래였음도 알 수 있었다.

사행가사 <임자연행별곡>의 창작 맥락과 문학적 특질

김윤희 ( Yun Hee Kim )
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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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최초로 학계에 소개되는 사행가사인 <임자연행별곡>의 창작 맥락과 문학적 특질을 살펴 자료적 가치와 시가사적 의미를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작품에 대한 내재적 분석을 통해 작가가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 1669~1745)임을 알 수 있었으며 1732년(영조 8)에 사은사로 다녀온 연행 체험이 창작의 토대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18세기 초에 창작된 <임자연행별곡>은 사행가사 문학에 대한 통시적 구도의 보완은 물론 시대적 변모 양상을 해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상당하다. 17세기 말을 기점으로 대청 관계가 안정되면서 조선은 자국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구심점으로써 ``조선중화주의``를 지향하며 이를 대외 인식의 주요 지표로 삼게 된다. <임자연행별곡>에는 북방 영토에 대한 회고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 당시 지식인들이 자국 인식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측면이 확인된다. 이는 중화 회복에 대한 염원으로 명분론이 대청 인식의 주요 기제였던 17세기 중반까지의 양상과 변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명분론의 관념성과 배타성이 약화되면서 연경의 문물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고 있는 현상이 <임자연행별곡>을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 <임자연행별곡>은 이처럼 18세기 초 조선 지식인의 대청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 동시에 이의현의 문예관과 국문 인식을 토대로 창작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의현은 영조대의 文衡으로 서인 노론계의 일원이었지만 老莊이나 諸子를 애호하는 등 동시대 다른 문인들에 비해 폭넓고 유연한 문예관을 견지했음이 확인된다. 연행 체험에 대한 연작적 한시도 많이 남겼으며 俗語에 대해서도 典雅한 사용이 전제된다면 그 쓰임이 가능하다는 긍정적 시각을 피력한다. 이러한 창작 맥락을 토대로 살펴본 <임자연행별곡>의 주요 특질은 문학적 전거의 활용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이는 여정의 객관적 나열이 초래할 수 있는 심미적 환기의 단절을 방지하고 문학적 감흥을 배가하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또한 공식적 기록인 <임자연행잡지>와 비교해 본 결과 <임자연행별곡>은 시선의 유연성이 강화되어 사적 층위에서 경험과 공간을 인식하고 형상화한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17세기 중반 작품인 <장유가>는 중국에 대한 공간 인식이 명분론에 기반한 ``한탄``의 정서로 수렴되는 반면 <임자연행별곡>의 경우 자국의 북방 고토에 대한 회고와 청나라 문물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어 시대 인식과 문학적 표상의 측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19세기 초 사행가사인 <무자서행록>과 비교해 보면 <임자연행별곡>에서 확인되는 연경의 문화적 풍경에 대한 관심과 어휘의 특성은 前兆的 표상으로서 의의를 확보하고 있었다. 19세기에 창작된 사행가사의 경우 낯선 문물과 이국적 풍속에 대한 관찰의 시선이 상당히 정밀한 층위로 변모하여 나열과 묘사의 편폭이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행가사인 <임자연행별곡>은 18세기 전반기 대청 사행가사의 존재를 확인케 함과 동시에 공시적·통시적 측면에서의 연구 확장을 가능케 하는 주요한 지표가 될 작품임이 분명해 보인다.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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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은 彭澤令이라는 낮은 小官吏로서 당시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부정부패가 만연된 사회에서 녹을 받고 사는 것은 선비의 처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성품과 어긋난 벼슬길을 떠나 "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물러나 숨는다.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論語·泰伯篇』" "달통하면 나서서 천하를 구제하고 막히면 할 수 없이 물러나 자신을 착하게 한다. (達則兼善天下,窮則獨善其身.) 『孟子盡·心上篇』"라는 儒家의 가르침인 隱逸觀에 의해 전원으로 歸去來하여 詩酒로써 자연을 벗 삼아 몸소 논밭을 경작하고, 전임 지방의 小官吏로서 주위 농민들에게 농사를 권장하는 勸農詩를 지으며, 田園閑居 하였다. 牧隱 李穡이 살았던 시대는 중국에서는 元나라를 이어 明나라가 들어서고, 우리나라에서는 高麗와 朝鮮의 易姓革命이 이루어진 역사적 전환기였다. 이 시기에 李穡은 정치적·사상적·문학적으로 고려 말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인물이었으며, 이 땅에 性理學의 뿌리를 내린 고려 儒學의 으뜸으로서 麗末·鮮初 유학사상의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李成桂가 위화도 回軍 후 그는 門下侍中이 되어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 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 (生, 亦我所欲也. 義,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孟子·告子上篇』"라는 儒家의 가르침인 出處觀에 의해 禑王과 昌王을 등극시키는 데 큰 공로를 하였고, 明의 도움을 받아 이성계를 퇴출시켜 고려의 왕권을 수호하고자 하였지만, 오히려 역부족으로 이성계의 세력에 의해 배척을 받아 유배생활을 하였다. 李穡이 고려 왕실의 충성스런 신하임을 표명하고 이성계 일당과 손을 잡지 않은 것은 도연명이 東晉의 충신 집안 子孫으로서 劉宋이 들어서자 晉代의 忠節을 나타내기 위해 그가 써 오던 ``晉代年號``를 ``甲子題詩``하고, 그의 마지막 벼슬인 彭澤令을 사직한 후에는 劉宋의 조정에서 벼슬을 주어 불러도 다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田園歸居한 도연명의 忠義와 節操에 비길 수 있다. 兩人은 일천 년이라는 공시적 시대 차이가 있고, 서로 다른 국가의 정치·사회 현실의 통시적 정황에서 도연명은 자신의 신분에 적합한 儒家의 가르침인 隱逸觀으로 歸去來하였고, 목은 이색은 門下侍中의 높은 벼슬의 위치에서 고려 왕실을 보호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로써 도연명의 인품과 생활을 흠모하며 儒家의 가르침에 의한 出處觀을 실행하였다. 결국 兩人의 隱逸觀과 出處觀은 道家思想이나 佛家思想에 의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儒家思想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 兩人의 同質性을 발견할 수 있다.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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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睡隱 姜沆(1567, 명종 22~1618, 광해군 10)의 連作形 題詠詩인 <水月亭三十詠>과 <癡軒八詠>의 대비적 고찰 통해 睡隱詩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보고자 연구되었다. 수은의 문집 『睡隱集』에 수록된 14제 52수의 제영시 중 연작형 제영시는 이들 두 작품뿐이다. <수월정30영>과 <치헌8영>은 누정 주변에 펼쳐진 자연 경관을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7언절구로서 8연 이상의 연작시라는 형식적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감흥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에 따라 본 논문에서는 두 작품의 作詩 배경과 연작의 구성 방식 그리고 物象의 형상화 양상 등에 대한 비교 검토를 통해 수은의 연작형 제영시가 갖는 시적 지향까지 살펴보았다. 먼저, 수은이 水月亭과 癡軒을 대상으로 지은 <水月亭記>와 <癡軒記>를 통해 <수월정30영>과 <치헌8영>의 작시 배경을 고찰하였다. <수월정30영>은 정치적 실패를 경험하고 귀향한 수월정 주인 鄭渫의 상처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그에 비해 <치헌8영>은 치헌의 주인이자 수은과 사돈 간인 丁鎔의 ``어리석은[癡]`` 삶의 가치와 자긍심을 드러내고자 창작되었다. <수월정30영>과 <치헌8영>은 모두 八景歌型 연작 제영시에 속하지만, 가장 기본적 공통점인 소제명의 제명 방식에서부터 차이가 두드러진다. <수월정30영>의 소제명은 자연 경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나, <치헌8영>은 상징적 의미가 유사한 경물을 단순히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연작의 구성에서도 <수월정30영>은 序(제1영)-本(제2영~제24영)-結(제25영~제30영)의 안정적인 3단 구성 안에 수월정 주변의 다양한 경관을 펼쳐 놓았다. 그러나 <치헌8영>은 本(제1영~제7영)-結(제8영)의 2단 구성을 통해 癡翁의 인품과 유관한 경물을 되풀이하고 마지막 8영으로 종결하는 방식이다. 수은은 이렇게 서로 다른 구성 방식을 통해 두 작품의 상이한 작시 의도에 따라 물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수월정30영>에서는 자연의 다기함을 활용하여 이상적 세계를 표현하였다. 이에 따라 시간의 순환적 질서를 통한 자연의 영속성과 불변성, 경물의 조화로움과 다채로움, 자연과 동화된 인간의 모습 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비해 <치헌8영>은 다소 단조로운 형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즉, 수은은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경물을 선택하여 치옹의 ``어리석고 우직한`` 삶의 ``정신적 우월함``을 반복해서 드러내고 있다. 한편, 수은과 수월정 주인 정설 그리고 치헌의 주인 정용에게서 ``버려짐[棄]의 상처``와 버려진 후에 ``자연으로의 귀의``라는 동일한 경험이 발견되고 있다. 수은은 일종의 동류의식을 바탕으로 이들을 위한 작시 행위를 하고 있으며, <수월정30영>과 <치헌8영>을 통해 자연 속에서 상처의 치유를 통한 자존의 회복을 지향하고 있다.

<황조가>의 배경 연구

박인희 ( In Hee Park )
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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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리왕이 부른 <황조가>는 외로운 신세를 탄식하는 노래이다. 그런데 <황조가>가 불려진 시기가 납득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황조, 즉 꾀꼬리는 여름 철새라는 사실 때문이다. <황조가>는 삼국사기에 유리왕 3년 기록에 실려있다. 주목할 점은 치희와 화희의 다툼 기록에 이어 실려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두 여인의 다툼이 황조가의 배경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꾀꼬리는 음력 10월에 북쪽 지방에서 발견할 수 없다. 유리왕이 꾀꼬리를 본 것은 이때가 아니라 다른 때이다. 그러므로 <황조가>는 원래 다른 일이 원인이 되어 부른 노래이다. <황조가>에서 찾을 수 있는 정조는 외로움이다. 유리왕이 외로움에 빠졌던 것은 아버지의 부재를 자각했을 때이다. 특히 유리왕은 자신을 홀로 키우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외로움을 더 느꼈을 수 있다. 고구려에 와 아버지를 만났지만 아버지는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만다. 유리왕의 외로움은 해소되지 못했고, 어머니도 다시 홀로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은 후 봄이 <황조가>가 불려졌을 때로 보인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 해 봄, 유리왕이 아버지의 묘를 다녀오다 꾀꼬리를 보고 자신과 어머니의 신세에 빗대어 <황조가>를 부른 것으로 이래할 수 있다. 그런데 유리왕이 부른 <황조가>는 치희와 화희의 다툼에도 잘 맞아떨어진다. 치희는 돌아가자는 유리왕의 제의를 거절했고, 유리왕은 혼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치희와 화희 다툼에 이어 기록한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믿는다면, 음력 10월에 꾀꼬리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황조가>는 이때 불려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전에 불려진 것이라야 맞다. 황조가의 정서로 볼 때 아버지가 죽은 다음해 봄에 불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성산별곡(星山別曲)>의 읽기맥(脈)과 성격(性格)

양희찬 ( Hee Chan Yang )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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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서 핵심적인 내용과 부차적인 내용을 가려내고 내용의 중심축인 문맥을 파악하는 것이 이 논문의 고찰 방법이다. 이 작업을 통해 다음의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첫째, 작품 내용이 山中閑居를 핵심으로 기승전결의 구성을 갖추었다. 둘째, 상대화자가 작품에 공존은 하나 작품 前面에 등장하지 않으므로, 자문자답의 擬似對話形式을 사용하였다. 셋째, 문헌 속의 역사적 현상과 작자 당대의 현실 문제를 다룬 것은 山中閑居의 형상화를 강화하기 위한 수사적 장치이다. 넷째, ``새와``와 직접 체험 내용 등의 풀이를 바탕으로, 작자를 林億齡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고찰 결과를 통하여 부수적으로 확인하게 된 잉여 수확물이 있다. 이것은 작품에 사용된 표현의 表裏 意味를 분명하고 엄밀하게 추출하고, 핵심 내용을 일관되고 통일되게 반영한 문맥을 확인하는 작업을 거쳐야 작품 내용의 실체 및 작품의 전모를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현(李齊賢)의 소식(蘇軾) 호방사(豪放詞)의 변용 고(考)

이태형 ( Tae Hyoung Lee ) , 박미숙 ( Mi Suk Park )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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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중국사는 음악과 악공의 수입, 귀화한 중국인의 영향, 중국 서적의 대량 구입, 고려 왕들의 애호 등에서 기인하여 유입되었다. 당시 이제현은 충렬왕을 모시고 元나라에 가서 많은 중국문인과 만권당에서 교유했고,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羈旅, 自然風光, 抒情 등을 중심내용으로 총54수의 사를 지었다. 그의 豪放詞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北宋代 蘇軾 豪放詞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당시 송대 중국에서 가장 유행했던 소식의 사를 전범으로 삼고 창작에 임했다. 이제현은 소식 호방사와 비슷한 내용·주제·전고를 사용했고, 같은 사조를 운용하기도 했다. 아울러 비슷한 구절이나 어구의 차용, 소식사 원운에 차운 혹은 화운하기도 했다. 이처럼 내용과 형식방면에서 두루 그의 사를 모방하여 창작했지만 그는 소식사를 무조건 모방하지 않고 고려인이라는 주체성을 지니고 나름대로 소화시켜 고려의 토양에 맞는 독창적인 사를 창작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호방사를 지은 원인은 당시 元의 속국이었던 高麗의 한 사신으로 元에 가서 중국 사인들의 영향을 받아 悲壯한 감정과 망국의 비통함, 이방인으로서 처량한 심정을 豪放한 필치로 그려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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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잡가의 연구가 거시적 성찰에 치중한 반면 작품론이 미진하다는 문제의식하에 본고는 <난봉가>의 사설 특성과 텍스트 변이 양상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20세기초 대중가요 형성기에 본격적으로 부각된 <난봉가>는 잡가 특유의 혼성을 통한 비유기적 사설짜임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대중적 취향에 따라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노랫말의 구성을 보인다. 수록 매체의 측면에서 볼 때 1910-20년대의 <난봉가>는 주로 잡가집에 실려 있으며, 1920말-30년대의 <난봉가>는 유성기 음반의 가사지에 실려 있다. 따라서 이 둘의 대조를 통해 매체 특성에 따른 사설의 차이뿐만 아니라, 노랫말의 시계열적 변이 양상도 파악해 볼 수 있다. <난봉가>는 형식적 측면에서 단형사설과 장형사설로 구분할 수 있으며, 내용적 측면에서 비정상적인 애정행각과 강렬한 성적 욕망을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 잡가집 소재 <난봉가>는 5~17개 절이 모여 한 편의 노래를 이루는데, 의미 구성은 절 단위에서 완결되고, 노래 전체의 의미적 유기성이나 인과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능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인물형상을 통해 당대 소비적 대중들에게 통속적인 웃음과 욕망의 대리 체험을 선사하면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성기 음반에 실린 노랫말도 잡가집 소재 노랫말과 대동소이하지만 부분적인 변모 양상이 확인된다. 5-7개의 절로 조정되어 비교적 정제된 양상을 보인다는 점, 절 가운데 일부가 새롭게 창작된다는 점,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1인칭 자술적 시점으로 이동하고 독백적 발화가 두드러진다는 점, 주제적 집중성이 보인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가의 장르적 속성이라 할 수 있는 비유기적 사설짜임은 여전히 견지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장르적 폐쇄성이 새로움을 갈망하는 대중적 요구와 괴리되는 요인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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