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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가문화연구(구 한국고시가문화연구)검색

The Studies in Korean Classic Poetry and Cul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2466-1759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6권 0호 (2010)

김천택의 교유와 『청구영언』의 편찬 과정 검토

강혜정 ( Hye Jung Kang )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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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천택과 교유한 인물이 『청진』 편찬 과정에 미친 영향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김천택은 안동 김문, 노론의 인사들과 교유하였고, 이 교유를 통해 많은 작품을 수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철이 서인의 영수였으며 서인이 노론의 계보을 잇는다는 면에서 볼 때, 안동 김문과 교유 덕분에 『송강가사』를 접하기에 용이했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김광욱, 신흠, 조존성의 경우 이 세 사람의 교유가 확인되며, 김광욱과 김성최가 혈연지간이며, 김성최가 김천택과 교유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세 사람의 작품은 김성최를 통해 김천택에게 수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낭원군 이간의 경우 『영언』이라는 개인 가집을 가지고 있었고, 김천택이 이를 접한 후 30수의 작품과 이하조의 발문을 수록한 것으로 보았다. 김천택이 『영언』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낭원군과 같은 왕실 인사이며 『청진『의 발문을 쓴 이정섭을 통해 가능했을 것이며, 이하조와 친분이 있었던 김창업을 통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이들은 당대 상층 사대부라는 공통점을 갖기에 낭원군의 작품이 수록된 것 역시 김천택과 안동 김문과의 교유라는 자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윤선도의 경우 노론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남인이었기에『고산유고』를 접하기 어려웠거나, 접하였더라도 수록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았다. 반면 『청진『에 이황의 <도산십이곡>은 들어 있으되, 이이의 <고산구곡가>가전하지 않는 것은 앞서 설명한 노론의 입장과 상치되는 데, 이는 두 노래의 전승 양상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도산십이곡>은 일찍부터 판각되어 널리 유포되었으나, <고산구곡가>는 김천택 당대에 노래가 아니라 시화첩의 일부로 전해졌기에 수록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았다.

새로운 가사 작품 <감별곡>에 대하여

구사회 ( Saw Hae Gu )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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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별곡>은 경상도 양반 집안의 아녀자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하며 지은 규방가사이다. <감별곡>은 같은 마을에서 성장하다가 출가했던 아녀자 7인이 20여년 만에 다시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면서 재회를 기약하는 신변탄 식류의 가사작품이다. 이 작품은 표기법이나 어휘 사용, 작품의 마지막에 기록된 간기로 미루어 개화기인 1892년 2월에 작성된 것이다. <감별곡>의 작품 구성은 대부분의 가사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서사`` - ``본사`` - ``결사``로 이뤄져 있다. <감별곡>의 ``서사``에서는 작품명과 창작 동기가 제시되었다. ``본사``는 세 단락으로 나눠지는데, ``본사1``에서는 여성들이 성장하여 결혼하면서 부모형제의 곁을 떠나는 여성의 처지를 말하고 있다. ``본사2``는 다시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첫째 부분은 여성 7인의 출가한 집안과 각각의 성격과 성품을 읊고 있다. 둘째 부분은 여성들의 설움과 신세를 한탄하 면서도 새로운 문명시대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반기면서 그것을 기대하는 부분이다. ``본사3``에서는 이들 여성들이 봉건사회의 구속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하소연을 하면서도 전통적인 윤리 규범을 존숭하자는 그들의 다짐과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는 부분이다. ``결사``는 이들 여성 7인이 자신들의 이별을 체념적으로 받아들 이면서도 독자들에게 그러한 여성들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알아달라고 하소연하고있다. 한 마디로 <감별곡>은 조선사회 남존여비의 봉건제도 아래에서 여성들이 삼종지도라는 전통적인 규범을 따라야만 하는 고통과 원망의 내용을 담론화한 작품이다. 그래서 <감별곡>은 봉건사회에서 사회적 주체가 되지 못하고 타자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고충과 한탄을 담고 있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사행시(使行詩) 연구(硏究)

권순열 ( Soon Yoel Kwon )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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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봉 고경명은 1581(선조 14)년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사절단은 명나라에 태조 이성계의 잘못된 종계를 시정해 주도록 요구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이때 고경명은 서장관이었다. 그의 임무는 사절단의 여러 임무를 왕에게 보고하고, 사절단의 실질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사행 기간 그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극복하고, 많은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사행 기간 동안 쓴 고경명의 시는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만주를 지나 북경까지 갈 때 쓴 것들이다. 두 번째는 북경에서 사행 업무 동안 쓴 것들이다. 세 번째는 북경을 떠나 귀국할 때 쓴 것들이다. 그는 사행 기간 동안 64수의 시를 썼다. 만주를 지나가고 있을 때 쓴 시들은 이국적 정서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대표적인 시가 <분수령>과 <알문묘>이다. 분수령에서는 많은 사신들이 시를 지었다. 그곳은 휴식의 공간이면서 의미가 심장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요하로 들어가고,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경명은 <알문묘>에서 중국문화에 대한 엄청난 실망감과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보여주고 있다. 북경에 도착한 그는 외교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명나라의 비호의적인 처신과 엄격한 통제 때문에 활동에 애로가 많았다. 이때 그는 <예예부상서>와 <문성지불허강칙창음첩전운>이라는 2수의 작품을 썼다. 그는 이들 작품들을 통해 종계변무 외교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리고 그는 귀국길에 북경 근교에 있는 삼충사를 참배했다. 이 사원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충신인 제갈량, 악비, 문천상을 제향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고경명은 특히 문천상에 대한 감회를 토로하고 있다. 문천상은 의병을 이끌고 투쟁하며 죽을 때가지 원나라에 항복을 거부한 우국 지사이다. 이 시에서 고경명은 문천상을 자신의 이상적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귀국길에 고경명은 <칠가령제석집고구>라는 시를 짓고 있다. 이 시에서 그는 고국에서의 미래를 위한 강한 결단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귀국을 또 다른 환로의 출발로 삼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고경명에게 있어서 1581년에 있었던 명나라 변무외교 사행길은 인생의 큰 분수령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환로에서의 진로를 개척하고자 하는 욕망을 보이고 있고, 문천상과 같은 충신의 길을 걷겠다고 하는 삶의 좌표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부(賦) 연구(硏究)

김동하 ( Dong Ha Kim )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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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재 박상(1474-1530)은 일반적으로 절개와 의리의 선비이자 뛰어난 도학자, 청렴결백한 관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대 제일의 문장가이자 1160여 수가 넘는 시를 남긴 위대한 시인으로서, 호남시단의 祖宗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일찍이 정조는 『訥齋集』을 重刊한 뒤 인쇄해 올리도록 하교하며, "우리나라의 시 가운데에서는 오직 고(故) 교리 박은(朴誾)과 증 이조판서 박상(朴祥) 두 사람의 시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라고 하여 그를 박은(朴誾)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언급했다. 또한 허균은 『惺수詩話』에서 "조선 시대의 시는 중종 때에 와서 크게 이루어졌다. 박상, 신광한, 김정, 정사룡 등이 아울러 같은 시대에 났으니, 이때의 빛나고 울리던 시는 천고에 일컬어질 만하다."라고 하여 중종 연간의 시단을 빛낸 대표적 시인으로 언급했다. 사실 눌재는 방대한 분량의 詩와 더불어 賦, 序, 記, 跋, 祭文, 文, 疏등의 다양한 문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탁월한 문장가요 위대한 시인이었다. 눌재가 평생동안 남긴 다양한 문학 작품 중 흥미를 끄는 것은 무엇보다도 12편에 이르는 부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12편의 賦가 모두 장편으로 쓰여 있어 전체 1424구에 이른 방대한 분량일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요순과 3대의 왕도정치, 유교적 세계관과 인간관, 春秋의 역사 의식, 맹자의 의리 사상 등 실로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어, 눌재 문학의 전반적인 양상을 살피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때문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눌재가 남긴 12편의 부를 내용적 특징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보았다. 눌재 부 12편 중 <夢遊>, <五絃琴>, <石鼓>, <登泰山小天下賦>, <黃鍾賦> 등 5편은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주로 꿈이나 상상 내지는 환상의 기법을 통해 왕도를 찬양하고 지치를 동경하는 소망을 나타냈다. <夢遊>에선 3황5제 등 성인의 업적을 찬양하고 유교의 절의관에 기초한 역사관을, <登泰山小天下賦>에선 중국적 천하관과 儒道의 우월성을, <黃鐘賦>에선 周易의 우주관과 황제의 예악 사상을, <五絃琴>에선 순임금의 예악 사상을, <石鼓>에선 이상적 국가관 등을 표명했다. 눌재는 5편의 부를 통해, 德治에 기초한 王道政治가 실현되고, 하늘의 뜻이 펼쳐진 요순, 3대의 지치주의 시대가 구현되기를 갈망하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눌재의 安貧樂道하는 삶에 대한 의지를 담은 작품에 <爲善最樂>이 있다. 屈原이 <어부사>에서 은사인 어부와의 문답을 통해 속세와 동화될 수 없는 작자의 의지를 표현한 것처럼, 눌재는 <爲善最樂>에서 선비와 객과의 문답을 통해 선비의 진정한 즐거움을 표현했다. 눌재는 폭군인 연산군과 유약한 임금인 중종 시대를 살면서, 정치적으로 많은 좌절을 경험했다. 중종반정 이후의 혼란한 시대상을 중국 당나라의 五王에 비겨 표현한 작품이 <弔五王>이다. 중종반정의 공신들에 둘러싸여 나약한 모습만을 보이다가, 己卯士禍와 辛巳誣獄 등으로 많은 선비들을 희생시킨 당시의 가슴 아픈 상황을 풍자했다. 삼포왜란에서의 우리 군이 승리한 사실을 통해, 애국과 충군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작품이 <平倭>이다. 왜적과의 싸움을 계기로, 국토방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장기적이고 원대한 유비무환의 대비책을 강조함으로써 애국과 충군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눌재는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파란과 굴곡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哀大鳥>, <海棠>, <聞杜鵑>, <擬自悼賦> 등 4편의 작품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험난했던 가슴 아픈 사연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擬自悼賦>에서는 가족들의 잇단 죽음으로 인한 처절한 아픔을, <哀大鳥>, <海棠>, <聞杜鵑>에서는 각각 자신을 덫에 걸린 커다란 새, 모란과 같은 부류인데도 인정받지 못하는 해당화, 밤새 피를 토하고 우는 두견 등에 비겨 능력을 지니고도 항상 정치 무대에서 소외되는 아픔을 노래했다. 이를 정리하면 王道讚揚·至治 憧憬, 山林 處士의 樂道, 時事 諷刺, 愛國 忠君, 抒情의 美學 등으로 볼 수 있다.

문화변동의 확장과 전이 -16세기초 유배시를 중심으로

김준옥 ( Jun Ok Kim )
7,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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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Paper는 유배인의 의식과 행동이 지역의 문화와 정신에 작용했는가를 규명하기 위하여 연구되었다. 예부터 전남은 왕도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섬이 많아 유배지로 곧잘 활용되었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권력 투쟁의 산물로 이름 있는 중앙의 많은 관료들이 전남으로 유배를 많이 왔다. 이러한 역사적 연고로 인해 지역 문화와 정신에는 유배인의 의식과 행동에 의한 문화변동이 크게 작용했다는 식의 주장이 있다. 곧, 전남의 지역적 특성인 의리와 저항의 정신, 한이 서린 서민의식, 예술성과 풍류성등이 유배인의 의식과 행동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가설로서는 일단 성립한다고 본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조선 초기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전남은 많은 문인들이 나와 개인적인 의식과 취향에 따라 왕성한 문학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때 중앙에서 유배를 당한 관료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시문학을 두고 볼 때, 이 과정에서 문화적인 마찰이 일어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결국, 중앙에서 활동하다 전남에서 적거생활을 했던 유배인은 생소한 이곳 문화 및 정신에 어느 정도 동화되었을 수도 있고, 상류층에다 지식인으로서 지역사람들과 긴밀한 교유관계를 맺고 그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할을 했을 수는 있으나 지역의 정신사적 특징이 유배인 때문에 형성되었다는 가설은 적어도 선초에는 전혀 타당성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앞으로 유학과 문학의 이론적 결합 논리를 감안하고 전남 유배의 양상을 고려하여 시기별로 이러한 연구 작업을 계속한다면 전남의 정신문화사적 특징과 유배문화 사이에 보다 명쾌한 수수 관계가 밝혀지리라 기대한다.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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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 民俗詩의 대표작인 <上元雜영>은 매천이 52세가 되던 상원에 창작한 칠언고시 10수의 작품이다. 여기에서는 <上元雜영>에 드러난 우국심과 朝鮮詩성격의 수용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먼저, 民俗詩라는 장르의 특성상 우국심이 투영되기는 정서적으로 어렵다. 이것은 18세기에 집중적으로 창작되어진 숱한 民俗詩들 중 우국심이 반영된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매천은 이러한 民俗詩에 우국심을 투영하여 民俗詩의 질적 승화를 이루었으며, 민속이라는 것 역시 나라의 존속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세시풍속과 민속놀이가 시적 제재가 된 작품에서는 憂國心이 반영된 작품을 찾기도 어렵거니와 정서적으로 세시풍속이나 민속놀이에 대한 詩化에서 그 시심이 우국심으로 발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민속시의 속성에 우국심을 투영하였다는 것이 매천 민속시 <上元雜영>의 독특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매천 民俗詩<上元雜영>의 또 다른 특성으로 조선시를 수용함으로써 그 외형을 확장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조선시의 수용은 <上元雜영>이 현장의 사실적 묘사를 통한 미감을 획득함으로써 민속시의 질적 상승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을 논의 하였다. 우리 문화사에서 18세기는 격동의 시기였다. 중세의 붕괴가 곳곳에서 나타났으며, 새로운 질서를 찾고자하는 움직임이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던 시기였다. 음악에서는 판소리가 등장하였고, 미술에서는 진경산수화가 대세가 되었다. 국문학 역시 사설시조의 확장과 더불어 전통 미의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한시 역시 예외일수는 없었다. 典範에 대한 고민이 일어났으며, 법고에 대한 회의가 일었던 것이다. 매천의 <上元雜영>은 당대 현실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 초점을 맞추고, 개성의 발휘, 전범의 파괴, 탈중심적 사유, 6언시의 활용 등 朝鮮詩의 특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특히 <上元雜영>은 朝鮮詩의 중요한 특성인 현장성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조선인이기에 조선인의 人情를 노래하겠다는 詩作態度가<上元雜영>에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항상 그러한`` 관념 세계가 아닌 ``지금 여기``라는 분명한 시적 공간이 작품화되었기에, <上元雜영>은 세밀한 사실적 묘사에서 오는 일치감과 동화감이 독자에게 주는 주요한 미감이다.

경렴정(景濂亭) 탁광무(卓光茂)의 삶과 시적 구현(具顯)

박명희 ( Myoung Hui Park )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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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는 탁광무의 삶과 그의 시문 26제(題) 28수(首)를 연구 대상으로 하여시적 구현 양상은 어떠했는가? 등을 구명해보고자 하였다. 시적 구현 양상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는 유학(儒學)의 습득과 이해요, 둘째는 시국(時局) 인식과 절의(節義)의 강조, 셋째는 탈속적(脫俗的)인 삶과 염락풍(濂洛風)의 시 등이 그것이다. 첫째의 내용에서는 주로 탁광무가 유학을 습득하는 과정과 어느 정도의 이해를 하고 있었는가 등을 다루었다. 탁광무는 유학이 어떻게 알려지고 있는가 등에 대한 내용을 시문에 담았는데, 유학과 관련된 작품에서 아직은 깊이 있는 사상을 드러내지 못한 것을 한계점으로 지적하였다. 둘째 내용에서는 탁광무의 시국 인식 정도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절의를 강조하는 모습을 주로 언급하였다. 탁광무와 교유했던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이 고려의 신하로서 조선의 건국에 별로 동조하지 않았다. 때문에 심한 고초를 겪어야만 했는데, 그러면서도 절의만은 꺾지를 않았다. 탁광무는 이점을 높이 샀던 것이다. 셋째 내용에서는 탁광무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 탈속적인 삶을 살아갔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아울러 그러는 가운데 창작된 염락풍의 시문에 주목하였다. 염락풍은 속된 기운이 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마치 주돈이(周敦이)의 인품과 비견된다고도 할 수 있다.
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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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영·호남 서사민요의 전승적 특질을 비교하기 위한 전 단계로 영남 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서사민요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영남지역 서사민요의 전승적 특질을 유형별, 권역별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영남 지역에서는 서사민요 유형 중 Ba 베짜며 기다리던 남편이 죽자 한탄하는 아내 유형이 가장 활발하게 전승되며, Ea 오빠가 부정을 의심하자 한탄하는 동생 유형, Ia 장식품 잃어버린 처녀에게 구애하는 총각 유형과 같은 혼인 전 여자의 애정 관련 유형이 많이 전승되는 반면, 상대적으로 Aa 시집식구가 구박하자 중이 되는 며느리 유형을 비롯한 시집살이 관련 서사민요가 적게 전승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는 호남 지역에서 시집살이 관련 서사민요가 활발하게 전승되는 것과 대조된다. 다음 영남 지역을 영남 북서부권, 영남 북동부권, 영남 남부권의 세 권역으로 나누어 전승양상을 살펴본 결과 영남 남부권, 영남 북서부권, 영남 북동부권의 순서로 서사민요가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었다. 이는 영남 서남부권이 북동부권에 비해 양반 문화의 영향을 적게 받았을 뿐만 아니라 호남 지역과의 문화적 소통과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 생각된다. 영남 북서부권은 시집살이 관련 서사민요가, 영남 북동부권은 살림살이 관련 서사민요가, 영남 남부권은 애정 관련 서사민요가 상대적으로 많이 전승되었다. 또한 영남 북동부권은 여성들에 의해 가사 향유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으로 서사민요 역시 교술적인 성향을 많이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편 영남 남부권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정적 성향을 많이 드러내며, 호남에서 활발하게 전승되는 유형과의 혼합형이 많이 나타나는 것도 특징으로 파악되었다.

궁중 연향에서의 가사 창작과 전승 -<화조가>를 중심으로

신경숙 ( Kyung Sook Shin )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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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그동안 연구에서 소외되어 온 <화조가>의 창작기반과 전승양상을 알아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분석과정에서 얻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화조가>는 두 단계에 걸쳐 작품을 완성했다. 첫 단계에서는 궁녀 조맹화가 작품을 창작하고, 둘째 단계에서는 이 작품을 본 효명세자가 작품 서두에 2행을 추가했다. 따라서 오늘날 <화조가>는 궁녀와 세자의 합작품이다. 둘째, <화조가>는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에 있었던 1829년 2월 기축 진찬의식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진찬이라는 소재를 통해, 효명세자의 왕권회복을 위한 정치 활동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찬동의사를 드러낸 정치적 가요이다. 셋째, <화조가>는 첫 향유 장소인 궁궐을 떠나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다. 전승과정에서 규방가사와 민요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길을 걸었고, 그 주요 전승지역은 영남지방이다.

오광운(吳光運)의 시인식(詩認識)에 관한 연구(硏究)

여운필 ( Woon Pil Yeo )
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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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오광운은 육경을 최고의 전범으로 삼고 先秦·兩漢의 고문을 그 다음 전범으로 하여 작가의 神氣와 시대의 본색을 배워서 본떠야 하고, 자구를 모의하는데 빠져서는 안 된다는 산문론을 지녔다. 明代秦漢派의 주장을 대체로 수용한 이런 산문론은 近畿南人의 입장을 견지하고, 韓·歐正脈을 인정하는 老論의 주장에 대응한 것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약산은 5언고시의 전범을 國風과 漢魏古詩에 두고, 나머지 시체의 전범으로는 성당시를 내세웠는데, 7언고시·율시는 이백·두보 등을 내세웠지만, 절구의 경우 변체인 두시를 배제했다. 그는 中唐~明代명가의 장점·정수를 취해야 함을 인정했으나, 서곤파·강서파는 극단적으로 배척하였다. 이런 입장은 중국 의고파의 입장을 수용하고 당대 시단의 풍상이 반영된 것이지만, 시체별 견해는 상당한 독자적 의의를 지닌다. 약산은 산문에서 神氣, 賦에서 神會라 한 것과 마찬가지로, 시작의 핵심적 요소로 神韻을 내세웠는데, 言外之趣·韻外之致·趣外之趣의 동의어라 할 수 있는흥취를 같은 비중으로 표방한 점으로 보아, 神情·神韻을 지닌 무한한 흥취를 지닌 시를 시의 바람직한 경지로 생각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다음으로는 기상·기골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풍격을 중시하는 입장을 드러내었다. 약산이 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식한 것은 신정·신운, 무한한 흥취, 뛰어난 풍격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시인식은 중국·국내의 영향을 두루 받은 결과이면서 形似와 神情의 융합과 현실의 형상화를 강조하였던 三淵의 眞詩論보다는 신정 쪽에 무게를 둔 입장으로 보인다. 약산이 시창작의 실제적 요건으로 내세운 六事중 格은 品格(風格), 調는 律調, 情은 情感[情思], 聲은 聲韻, 色은 色澤[詞彩], 趣는 興趣를 가리키는데, 시작의 궁극적 목표의 일부였던 풍격·흥취를 맨 앞과 맨 뒤에 둔 데에 강조점이 나타나 있으며, 형식적 요건도 중시한 데서 시작의 실제에 대한 배려를 엿볼 수 있다. 약산은 작시의 금기사항인 六戒로 俚俗·초急·幽怪·纖細·多引事·喜영物을 내세움으로써, 부분적·지엽적인 폐단으로 말미암아 흥취·품격을 손상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견해도 드러내었다. 제기된 금기는 대체로 當代의 주류적 시풍을 비판하는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보면 약산은 시의 이상적 전범, 궁극적 목표, 실천적 지침, 지엽적 금기사항 등을 고루 배려하는 포괄적 시론을 전개한 시인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의 바탕은 중국에 기원을 둘 뿐 아니라, 당대의 시인들과도 상통하므로 창의적이라 하기 어렵지만, 시체별로 지향의 요점과 전범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작시의 실제적 요건·금기를 자세히 논의한 데서 드러난 체계적 견해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독자성을 지닌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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