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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가문화연구(구 한국고시가문화연구)검색

The Studies in Korean Classic Poetry and Cul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2466-1759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9권 0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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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시조 가단을 이끈 존재는 여항 가객들이다. 이들은 여항인이라는 신분적 토대를 기반으로 한다. 여항인은 조선후기 서울의 주요 구성원으로 첫째 서울에 거주하며 둘째 일정한 공적 업무에 종사하는 계층으로 무시하지 못 할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태생적인 신분적 한계-양반이아님-을 지니고 있어 자신들을 窮人이라고 자처하는 신분 의식을 지녔다. 18세기 가단을 이끈 김천택과 김수장 역시 이러한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여항인이다. 김천택은 포교의 신분으로 남산 아래 무반들 거주지에 자신의 집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경제 상황은 여타 여항인처럼 풍족하였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고답적인 문화 지향을 가졌는데 고검 수집과 음주의 작품과 정격적 시조 음악 창출로 나타난다. 김수장은 서리로 김천택보다 경제적 우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서울의 절승지인 화개동에 집을 짓고 가단의 수장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김천택과 같은 무반류의 풍류를 지양하였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성향은 그를 퇴폐적 문화 지향으로 나타나는데 여성 편력과 변주적시조 음악의 창출에 그것이 반영되어 작품으로 나타난다. 여항 가객들은 이처럼 자신만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들에게 맞는 문화적 지향을 작품에 표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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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만주 망명인을 둔 고국인의 가사문학"을 대상으로 하여 자료를 제시하고 작가를 규명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2장에서는 대상 자료와 그 이본을 제시했다. 대상 작품은 <송교행>(2), <답사친가>(3), <감회가>(2), <별한가>(4), <단심곡>(1), <사친가>(1) 등 총6편(괄호 안은 이본 수)이다. 3장에서는 각 작품의 작가를 규명하고 그 생애를 구체적으로 재구성했다. <송교행>의 작가는 安東權氏(1862~1938)로 51세 때인 1912년에 <송교행>을 창작했다. <답사친가>의 작가는 固城李氏(1894~1937)로 21세 때인 1914년에 <답사친가>를 창작했다. <감회가>와 <별한가>의 작가는 全義李氏(1855~1922)로 59세 때인 1913년에 <감회가>를, 61세 때인 1915년에 <별한가>를 창작했다. <단심곡>의 작가는 1893년 서울의 명문가에서 장녀로 태어나 18세에 영남의 명문가에 시집을 간 여성으로, 30세 무렵인 1922년 경에 <단심곡>을 창작했다. <사친가>의 작가는 1900년 장녀로 태어나 20세에 결혼하여 18년 간 결혼 생활을 한 여성으로, 37세 무렵인 1936년에 <사친가>를 창작했다. 4장에서는 작가의 생애와 가사 작품 간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논의했다. 작가들은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던 양반가 여성이었다. 그러나 가족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 그들의 삶은 굴곡지게 되었다. 작가들은 대부분 가사 창작의 전통적 중심지인 영남의 명문대가와 관련을 맺고 있어 가사 창작에 익숙했다. 그리하여 작가들은 망명자를 그리워하는 그들의 서정을 가사 장르를 선택해 표현한 것이다. "만주 망명인을 둔 고국인의 가사"는 근대기 우리 역사의 중요 국면을 살아갔던 당대 여성의 삶과 표현을 담았다. 이들 가사는 근대기 역사의 증언과도 같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속미인곡>의 창작 기법 고찰

김선기 ( Sun Kee K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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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송강은 53세경에 <사미인곡>을 짓고,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 <속미인곡>을 지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젊은 마음을 작품에 불어 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정이 <사미인곡>을 짓고 나서 읊은 한시 구절 "此身雖老此心新"에 잘 나타나 있다. 이로써 보면 <사미인곡>은 송강의 육신적 분신이요, <속미인곡>은 정신적 분신이라 할 수 있다. 임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 육신과 정신의 통합에 있다고 본다면,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미인곡>의 노파가 못다 펼친 임에 대한 사랑을 <속미인곡>의 각시를 통해 보충함으로써, 선조 임금을 향한송강의 간절한 사랑이 온전히 작품으로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은 송강의 젊은 마음이 각시로 투영된 작품 <속미인곡>의 창작 기법을 살피는데 목적이 있다. 필자는 <속미인곡>의 창작 기법의 특징이 각시 화자(話者) 내세우기·시간대(時間帶) 압축하기·문답형(問答形) 사설 엮기에 있다고 보고, 본론에서 이들의 활용 양상을 세 장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속미인곡>이 <사미인곡>과 쌍생적 관계에 있으므로 두 작품을 비교 거론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 결과 <사미인곡>의 화자는 노파답게 소극적이고 정적(靜的)인 방식으로 임을 그리워하는 반면, <속미인곡>의 화자는 각시답게 적극적이고 동적(動的)인 방식으로 임을 찾아 나서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이들 세 가지 기법이 절묘하게 어울림으로써, 송강의 젊은 마음이 <속미인곡>에 효과적으로 반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도고시가의 작품과 연구 동향

김신중 ( Shin Chung K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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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지역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남도(광주·전남지역)의 고시가에 대한 지역문학적 탐색 성과를 연구사적 입장에서 검토한 것이 이 글이다. 특히 남도고시가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의 시조와 가사문학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논의한 내용은 크게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남도고시가의 작품 현황을 정리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작품 범주를 남도인이 남도를 배경으로 제작한 작품, 외지인이 남도를 배경으로 제작한작품, 남도인이 외지를 배경으로 제작한 작품의 셋으로 나누고, 각 범주에 드는 작품들을 살폈다. 둘째, 남도고시가의 연구 동향을 검토하였다. 먼저 작품의 발굴과 소개가 이루어진 경위를 시기별로 고찰하였다. 이어 지역문학적 입장에서 이루어진연구를 다시 자료정리적 차원과 지역성 해명 차원으로 구분하여 살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남도고시가의 지역적 특성에 대한 해명이 아직 미흡함을 지적하였다. 그 이유로는 ``연구의 편향성``과 ``지역성 해명을 겨냥한 문제의식의 결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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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는 유희춘이 함경도 종성 유배 시절에 지은 시문에 나타난 활동 양상을 구명하고, 그 시문의 성과를 정리하였으며, 남은 과제를 제시하였다. 유희춘이 남긴 종성 유배기 시문은 총 143수이다. 이러한 시문을 활동적인측면에 근거해보면 첫째, 학문을 연마하며 尊朱意識을 표출한 내용, 둘째, 현지인들에 대한 교육과 저술, 셋째, 뭇 인사와의 교유와 이를 통한 소통 등으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 학문을 연마하며 존주의식을 표출한 내용에서는 유배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부하는 자세를 버리지 않은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유희춘은 학문과 관련된 시문을 통해 남송 때의 학자인 朱熹를 존숭하는 태도를 강하게 내비치었다. 둘째, 현지인들에 대한 교육과 저술 활동을 펼쳤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희춘이 종성 유배 시절 현지인들은 배움의 의지를 보여 모여들었고, 유희춘은 유교적 현창 사업과 저술 활동을 통하여 현지인들을 교화시키려 했음을 몇몇 시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셋째, 뭇 인사와의 교유와 이를 통한 소통을 끊임없이 행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관련된 작품 특히, 金麟厚와 주고받은 酬答詩가 인상적인데, 총 16수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유희춘과 김인후는 당시 士林이라는 위치에서 배우고 익힌 것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던 측면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었고, 이러한 공통된 실천성은 결국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누구보다 가깝게 느끼도록 했으며, 짧은 시문으로나마 지닌 소회를 나타냈다고 보았다. 유희춘의 종성 유배기 시문은 각각이 한 편의 작품에 불과하여 떼어서 보면,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니지 않지만, 전체를 관망해 본다면 유배기를 정리해주는 이야기(story)이라는 점에서 성과를 찾을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유희춘이 유배지에서 남긴 중국 역사 시문과 현실 인식을 담은 시문에 대한 관심은 남은 과제로 제시하였다.

소재노수신(蘇齋盧守愼)의 「피구록(避寇錄)」연구(硏究)

박병익 ( Byung Ik P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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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구록」은 소재 노수신 文集의 卷四에 실린 「入智力山次簡齋韻」부터 「題碧波亭楹」까지의 44제 47수를 말한다. 여기에 실린 시와 기록은 소재가 진도에 유배되어 7년 만에 발발했던 을묘왜변(1555년 명종 10년) 이틀 후, 1555년 5월 13일부터 같은 해 7월 19일까지 약 67일간의 행적과 소회다. 소재는 을묘왜변으로 진도가 왜구에게 침략을 당하자 피신하면서 왜구를 물리칠 노력을 기울였으나 수포로 돌아가니 11일 만에 출도하기에 이른다. 절도 안치된 유배객 소재는 변란 중에 목숨을 함부로 하지 않고 보존함이 임금에게 충성한다는 당위성을 갖고 적소를 이탈하였다. 소재는 왜변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진도-해남-목포-무안-함평-나주-광주-순창-옥과-광주-영암-석교원-해남-진도``의 여정으로 피구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 중, 소재는 다양한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처족인 이윤경·이준경은 당시 전라도 실세로 있었기에 피구생활에 도움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현감·군수 등의 관료들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또한 사문에서의 장기 留宿, 호남 거유와의 지속적인 교유, 당풍을 선도했던 호남문인 청련·고죽과 교유 등을 엿볼 수 있다. 소재의 작품을 분석해 보면, 그가 당시 왜구의 참상, 관료의 부패, 가뭄으로 인한 가난한 백성들의 모습을 인식하면서 굴원과 같은 자세를 가진 신하가 되길 바랐다. 그렇기에 환로의 복귀, 즉 해배의 바람이 내적 지향점으로 작동하고 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소재는 내적 지향점의 상실감에 빠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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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時調는 『靑珍』(1728)에 그 명칭이 처음 보인 이후, 조선후기 時調를 향유하는데 있어 가장 널리 사용된 樂曲의 하나였음은 여러 사실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때 『靑珍』의 樂時調는 여러 정황들을 고려할 때 樂曲名으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즐거운 時調로서의 樂曲的특징을 지니는 까닭에 歌集에 수록된 대부분 樂時調계열의 작품에서 작자를 명기하고 있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또한, 『靑가』에 보이는 樂時調와 관련된 다양한 악곡 명칭은 樂時調가 당대 시조를 향유하는데 있어 주도적 악곡의 하나였으며, 平時調로부터 辭說時調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향유된 사실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靑가』 이후 가집에서 낙시조는 주로 사설시조에 집중되어 흥취가 강조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18세기를 통해 급격히 변화되었던 여항시정의 요구에 의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靑가』에 수록된 낙시조 관련 작품들은 불안정한 악곡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말미암아 오히려 18세기 초 시조의 향유양상을 정리하여 드러내 보이는 한편, 이후 전개될 樂時調의 양상을 단초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어 詩歌史的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김종직 <탁라가>의 이본 고찰

윤치부 ( Chi Boo Y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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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주의 풍토와 물산을 노래한 칠언절구인 김종직의 <탁라가>에대한 이본 연구이다. 이를 통해 그 정본과 이본들의 계통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김종직의 <탁라가> 14수를 수록한 문헌들로는 크게 김종직의 작품들을 수집하여 간행한 점필재집류, 여러 문사의 시문을 초선하라는 왕명을 받고간행한 속동문선류, 제주 지지에 수록된 탐라지류, 저자들이 제주에 관리로 왔던 경험을 기록한 남사록류나 남사일록류,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한 개인의 평생에 걸쳐 정리한 문학과 역사를 기술한 심재집류 등으로 나누어진다. 점필재집류에는 경진본, 기축본, 기유본, 기사본, 임진본, 정사본, 무인본 『점필재집』 등 7종이 있는데, 이본 간에는 글자의 변이가 이루어지고 있다. 속동문선류에는 을해자 초간본으로 추정되는 국립중앙도서관본, 필서체자 목판본의 규장각본, 경희출판사 영인본, 경원문화사 영인본 등 4종이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본과 경원출판사본이 같은 계통이고, 규장각본과 경희출판사본이 같은 계통의 이본이다. 탐라지류에는 이원진의 『탐라지』, 이원조의 『탐라지초본』, 동경대학본 『탐라지』, 담수계의 『증보탐라지』 등 4종이 있는데, 이본 간에는 글자의 변이가 이루어지고 있다. 남사록에는 규장각본 『남사록』, 청음유집본 『남사록』 등 2종이 있는데, 후자는 전자를 재정리한 것이다. 남사일록류는 이증의 『남사일록』이 있는데, 남사록류 계통에 가까운 이본이다. 심재집류에는 김석익의 『심재집』이 있는데, 동경대학본 『탐라지』 계통의 이본이다. 이 중가장 정본에 가까운 이본은 『점필재집』으로 오자를 하나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가장 높았다.

경주이씨 가문의 육가 전승과 그것의 문학사적 의미

이상원 ( Sang Won L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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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가형 시조는 이별의 <장육당육가>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 그의 가문에서는 이정의 <풍계육가>, 이득윤의 <서계육가>와 <옥화육가>, 이홍유의 <산민육가> 등이 지속적으로 창작되었다. 이 글은 이런 경주이씨 가문의 육가전승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풍계육가>는 <장육당육가> 이후 경주이씨 가문에서 처음으로 창작된 육가형 시조로서, 현실을 철저히 잊은 상태에서 자연과의 완전한 합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육당육가>를 충실히 계승한 작품이다. <서계육가>와 <옥화육가>는 비록 작품이 전하지는 않지만 관련 자료를 통해 어느 정도 그성격을 추정할 수 있다. 둘은 약 1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 별개의 육가 2편으로서, 각각 모친상과 광해군 정권 출범이라는 이유로 서계와 옥화로 이거(移居)한 후에 창작했다는 점에서 세속과 단절하고자 하는 의식이 깊게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산민육가>는 경주이씨 가문의 육가 전통을 이어세상에 대한 불만이 일정하게 표출된 가운데, 세상에서 버림받은 고독한 존재로 자신을 표상하는 모습에서 전대의 육가에 나타난 강인한 자의식은 많이 약화된 것을 볼 수 있다. 경주이씨 가문에서 4대에 걸쳐 창작된 육가형 시조들은 <장육당육가> 계열로 통합할 수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나름의 역사성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정의 <풍계육가>는 <장육당육가>를 비교적 충실히 계승한 작품이지만 산림처사의 삶을 형상화한 작품들과 겹치는 부분도 어느 정도 발견된다. 그런가 하면 이홍유의 <산민육가>에는 17세기 한미한 재지사족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불우한 처지와 관련된 고민이 일부비치기도 한다. 이런 점들은 경주이씨 가문의 육가 창작이 당대 시가사의 일반적인 흐름과 어느 정도 호흡을 같이하면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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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가 한국 한문학 자료 중 自挽詩작품들을 수집·역주하는 과정에서 눈에 띈 특징적 작품인 李明五(1750∼1836)의 <自挽> 十二首를 소개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명오의 <자만> 십이수는 자만시의 시적 전통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고통의 기억을 세상에 각인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假裝된 죽음의 서사를 통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庶系로서 온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자신의 가치를 세상에 하소연하고 있다. 또, 가까이 교유했던 인물들의 비극적 죽음을 자신의 죽음 안으로 끌어들여 개인을 넘어 집단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다른 자만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국면에 도달하고 있다. 이명오의 작품이 갖는 자만시로서의 특성은 최장 연작시라는 점, 특정한 사건에 대한 기억을 위주로 작성되었다는 점, 먼저 세상을 뜬 인물들에 대한정신적 연대를 담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자만시를 남긴 주요 작가들이 그러하듯이 별도의 自傳的작품을 남기고 있어, 자만시 이해를 돕고 있다. 문학의 계보는 기원을 중심으로 고정불변하는 체계가 아니라 항상 현재 시점에서 사후적으로 배열되고 구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명오의 <自挽>十二首는 그런 측면에서 우리 자만시의 시적 계보를 새롭게 구성해낸 특징적작품으로 기억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명오의 <自挽> 十二首로 인해 조선시대 자만시는 이전보다 더욱 다양한 표현의 매체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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