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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가문화연구(구 한국고시가문화연구)검색

The Studies in Korean Classic Poetry and Cul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2466-1759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0권 0호 (2012)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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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도곡이의현(陶谷李宜顯)(1669~1745)의 18세기 작품으로 밝혀진 <壬子燕行別曲>을 작자와 창작시기의 문제를 재검증하여 새롭게 소개함으로써, 그 내용과 문학적 특질을 고찰하는데 발생한 오류를 바로잡고, <임자연행별곡>의 작자를 19세기 석범서념순(石帆徐念淳)(1800~?)으로 확정하려는 의도에서 서술되었다. 『가사소리』소재 <임자연행별곡>은 학계에 처음 소개되는 과정에서 작자가 도곡 이의 현으로 추정되었으며, 현재 18세기 연행가사가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료적 가치에 상당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본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초래된 결과로 보인다. 『가사소리』소재 <임자연행별곡>은 2003년에 이미 『연행록해제』를 통해 소개된 바 있는 최우형(崔遇亨)(1805~1878)의 『연행별곡』과 동일한 작품으로, 그의 문집인 『죽하집(竹下集)』에 별축으로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죽하집」 소재 <임자연행별곡>과 『가사소리』소재 <임자연행별곡>의 서지사항과 작품의 내용을 면밀히 분석하여 작자와 창작시기를 정확히 고증하였다. 그 결과 우선 작품에서 언급된 임자년은 1852년이며, 이때 최우형이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연행을 다녀온 정황과, ``도선생``이 도곡 이의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사를 의미한다는 점, 작품에서 1811년 홍경래의 난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 이의현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그 과정에서 작품이 최우형의 「죽하집」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과 「죽하집」 서문과 최우형 약보에도 모두 <임자연행별곡>이 최우형의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임자연행별곡>의 작자가 최우형으로 확정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가사소리』 소재 <임자연행별곡>의 제목 왼쪽 하단에 ``셔관셔렴슌``이라는 서명이 발견되면서, <임자연행별곡>이 1852년 최우형과 함께 연행을 갔던 정사 서염순의 작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작품에 기술되어 있는 ``역사사조(歷事四朝)``와 ``치위팔좌(致位八座)``를 바탕으로 두 인물의 생애와 대조해 본 결과 작품의 내용과 생애가 부합하는 인물은 바로 서염순임을 확인했다. 또한 서염순은 1852년 연행을 떠나기 10년 전인 1842년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는데, 이를 통해 ``십년전 도선생``이라는 구절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임자연행별곡>은 서염순의 작품이라는 것을 비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작자를 도곡 이의현이라고 추정한 선행 연구와 죽하 최우형의 작품으로 소개한 해제, 그리고 각종 인물정보에서 <임자연행별곡>의 작자는 서염순으로 정정되어야 한다. <임자연행별곡>의 작자를 정정할 경우, 가장 큰 변화는 창작시기의 문제에서 일어난다. 지금까지 소개된 조선 후기 연행가사는 모두 7편으로, 17세기와 19세기 작품의 특징이 비교적 뚜렷하게 구분되어 왔다. 그런데 17세기와 19세기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는 <임자연행별곡>이 18세기의 작품이 아닌 19세기의 작품으로 고증됨으로써, 조선 후기에 다양한 형태의 연행가사가 창작되었을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즉 <임자연행별곡>은 다소 획일적으로 재단되어 온 17·19세기 연행가사 작품들의 특징이 재론되어야 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임자연행별곡>을 19세기 서염순의 작품으로 밝힌 본고의 논의를 바탕으로 작품의 구체적인 분석은 물론 작품의 특질, 세계관이 재고되어야 한다. 또한 앞으로 지속적인 논의를 통해 17세기 연행가사의 경향과 함께 19세기 연행가사의 면모를 새롭게 규명하여 연구의 지평을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황상의 산거 생활과 시적 형상화 연구

김규선 ( Kyu Sun Kim ) , 구사회 ( Saw Hae Gu )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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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제자였던 치원 황상의 산거 생활과 관련하여 그가 영위하고자 했던 내면 의식과 삶의 세계를 살펴보았다. 황상이 산거생활을 하게 된 동기는 1805년에 강진 보은산의 고성암에서 다산에게 『주역』을 배우다가 ``이괘(履卦)`` 九二에 나오는 幽人의 삶에 매료되면서였다. 이때 다산은 제자인 황상을 위해『제황상유인첩(題黃裳幽人帖)』을 지어 주었고, 훗날 황상은 그것을 실천으로 옮겨 일속산방(一粟山房)을 조성하였다. 황상이 세속과 거리를 두고 산거 생활로 들어간 것은 그것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로 신분상의 갈등도 적잖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황상이 일속산방을 조성하고 경영했던 경위에 대해서는 최근에 정민교수가 공개한 『치원소고』 권1의 <일속산방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율당잡고(聿堂雜稿)』의 <일속산방기> 등을 통해서 그것의 규모나 공간 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 황상이 남긴 <일속산방기>를 보면 당호는 다산의 장남 정학연이 작명하였는데, 그것은 천하의 광대함을 일속이란 매우 작은 공간에 저장한다는 의미에서였다. 황상의 일속산방과 관련한 산거 미학은 다음으로 요약된다. 황상에게 일속 산방은 평화로운 이상 세계의 공간이었고, 한 톨의 좁쌀처럼 작았지만 그 속에 삼천세계의 거대한 우주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상의 산거생활은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초라하였지만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웠다. 황상은 그곳에서 자연에 동화되며 자족적인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이를 천명(天命)이라 부르고 있다.

하서 김인후 시에 나타난 염락풍

김동하 ( Dong Ha Kim )
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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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도학과 절의, 문장을 모두 갖춘 백세의 스승으로 추앙되며, 문묘에 배향된 유일한 호남인 이다. 그는 특히 도학에 밝아, 해동의 주돈이요, 호남의 공자와 같은 인물로 칭송되었다. 이러한 특성은 시 문학 방면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도학적 내용을 담은 도학시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순수시 자체도 거의 도학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하서의 도학시는 송조5현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형성된, ``시경의 풍아``에 근원을 둔 송시의 한 유파인 염락풍 시가 주류를 이룬다. 염락풍 시란 설리적 경향의 시로, 일반적인 송시와도 구별되는 독특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올바른 심성을 드러내는 시이고, 수양 과정과 유교적 가치관을 추구한 시이며, 천리를 따르는 사람의 마음을 노래한 시란점 이다. 하서는 전형적인 성리학자로서 ``재도문학론``을 충실히 따르며, 성리학적 이치를 정제된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독자적인 문학적 성과를 이루었다. 하서의 문학 작품에 나타난 염락풍 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경``의 ``풍아``를 시의 전형으로 여기며, ``관저``편과 같은 주로 ``주남``과 관련된 작품 등을 독후감 형식으로 남겼다. 또한 경물시의 형식을 빌려 성정을 함양하고, 대자연의 이치를 발견해내는 도학자의 모습을 그려냈다. 둘째, 전형적인 도학자로서, 경(敬)에 바탕을 두고, 유교의 경전을 독서의 대상으로 한 학문 수양을 통해 평생 동안 성도지학을 추구했다. 경서 중에서는 특히``소학(小學)``에 커다란 가치를 두었는데, 이는 스승인 모재 김안국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성리학 이론을 작품화한 경우, 대부분 주희의 이기론(理氣論)을 따르고 있으며, 주렴계의 ``태극도설``과 관련된 시나 인성론과 관련된 내용을 읊은 시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의 서술 특성과 작자 의식

김미선 ( Mi Sun Kim )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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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기 포로 해외체험 실기는 공통된 서술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작자만의 노정과 작자의 의식이 작용하여 작품만의 개성을 가진다. 본 논문에서는 노정을 바탕으로 한 서술적 특성과 작자 의식을 살펴서, 정희득(鄭希得)(1575~1640)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의 특징을 파악하였다. 먼저 『월봉해상록』의 서술적 특성은 귀환의지의 격정적 토로, 국내의 노정기술 두 가지로 파악하였다. 정희 득은 피랍 때 어머니와 만삭의 아내가 자결하였고, 아버지와 어린 두 자식은 조선에 남겨졌다. 관료의 위치에 있지 않은 자연인이자, 누구보다 가족을 중시하였던 정희득은 해외체험 노정 동안 실현되지 못하는 귀환에 극도의 슬픔을 표현하며, 귀환의지를 격정적으로 토로하였다. 정희 득은 강항(姜沆), 노인(魯認)에 비해 가장 짧은 기간 동안 해외체험을 하였지만, 격정적 귀환의지 토로는 『월봉해상록』에서만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힘겹게 부산에 도착한 이들에게 국가는 대책을 세워주지 못했고,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고향을 찾아가야 했다. 정희 득은 강항, 노인과 달리 조선에 도착한 후의 노정을 하루도 빠짐없이 기술하여 임진왜란기 포로 해외체험 실기가 보여 줄 수 있는 경험의 폭을 확대하였으며, 고향에 도착하고 자식을 만나는 것까지 기록하여 노정의 진정한 마무리를 보여주었다. 다음으로 『월봉해상록』에는 비극적인 개인으로서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정희득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끊임없이 표현하였는데, 이는 가족과 헤어진 아픔을 겪는 비극적인 개인으로서 의식을 가지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또 정희 득은 함께 비극을 겪는 동료들뿐만 아니라 신분이 낮은 노비들에게조차 애정을 보이고 서글픈 자신의 감정을 보여주었다. 주인, 양반으로서의 권위보다 같은 아픔을 겪는 한 개인으로서의 의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자 의식은 『월봉해상록』이 임진왜란기 포로들의 처절한 슬픔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 되게 하였다.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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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14년부터 발행된 잡지 『청춘(靑春)』에 수록된 고시조(古詩調)의 특징을 고찰하여 최남선이 1910년대에 고시조를 인식하던 방향과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청춘』에 고시조가 수록된 양상을 살펴보면 한역시조를 소개한 것은 물론 시조의 내용에 부합하는 그림 속에 시조를 삽입한 점, 그리고 고시조 문학에 대한 정선(精選) 의식을 본격화하고 있는 점 등에서 『소년』의 경우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고시조 문학에 대한 최남선의 인식이 점차 다변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근대적 화법을 도입한 안중식은 『청춘』에 네 편의 시조를 회화로 형상화했는데 이는 최남선이 고시조를 잡지에 소개하면서 대중적 친화력을 지향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었다. 또한 『청춘』 창간호에는 <시조한역(時調漢譯)>이라는 항목 내에 시조 9수와 한역시 17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독자적 미의식을 바탕으로 한역시를 창작하려한 신휘, 이유원의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 최남선은 하나의 시조를 한역하는 과정에서 보다 다채로운 시상으로 문학적 구성이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했던 것이다. 또한 1918년에 발간된 『청춘』 12호에는 <고금시조선(古今時調選)>이라는 항목이 확인되는데 최남선은 이를 통해 시조 문학에 대한 선별 의식을 체계화하려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고금시조선> 서문의 전체 맥락을 고려할 때 최남선은 ``자국어``로 된 민족 문학으로서 ``시조의 문학사(文學史)``를 확립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시대(時代)``를 기준으로 통시적 계열화를 시도한 『대동시선(大東詩選)』의 편집 체제를 긍정적으로 보고 그것을 시조 문학에 적용하여 <고금시조선>을 구성했던 것이다. 주지하듯 1920년대 중반 이후 최남선은 본격적인 ``시조론``을 전개하면서 ``시조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1910년대에 발간된 잡지 『소년』과 『청춘』을 통해 확인되는 고시조에 대한 최남선의 인식과 그 추이도 문학사에서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시조 문학론이 표면화되기 이전 시기부터 지속적으로 배태되어왔던 최남선의 의식을 두 잡지에 고시조가 소개된 양상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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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梅泉)은 매우 뛰어난 시인이자, 비평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론을 구체적으로 개진한 전문적 著述이나 체계적 기술을 남기지 않았다. 매천(梅泉)의 문학관은 중국 시인 및 우리나라 시인을 논하면서, 또는 다른 시집의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 그리고 서간(書簡) 중에 드러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매천(梅泉)의 시론(詩論)을 엿볼 수 있는 <화소천논시육절(和小川論詩六絶)>에 대한 이해는 그 의미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매천(梅泉)은 자신의 시론(詩論)을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 한 것이 크게 세 번 있었다. 그 중 첫 번째 작품은 31세 때인 1885년에 지은 <논시잡절(論詩雜絶)> 14수(首)이다. 일반적으로 <논시잡절(論詩雜絶)>로 불러지는 이 작품의 정식 제명(題名)은 <정연일택기칠절십사수의기운희작논시잡절이사(丁煙日宅寄七絶十四首依其韻戱作論詩雜絶以謝)>이다. <논시잡절(論詩雜絶)>은 중국 시인들에 대한 매천(梅泉)의 평가이다. 작품에는 총 48인의 시인이 거론(擧論)되고 있다. 두 번째로는 <화소천논시육절(和小川論詩六絶)>이다. 매천(梅泉)은 1895년 을미년, 41세가 되던 해에 <화소천논시육절(和小川論詩六絶)>을 지었다. <화소천논시육절(和小川論詩六絶)>은 6수로 된 작품으로 중국 시인들에 대한 매천(梅泉)의 평가를 통해 자신의 시론(詩論)을 드러낸 작품이다. 세 번째로는 53세 때 작품인 <독국조제가시(讀國朝諸家詩)> 14수이다. <화소천논시육절(和小川論詩六絶)>이 창작된 1895년은 매천(梅泉)이 가장 왕성하게 시작활동을 하던 시기이자, 고시(古詩)에의 경도가 나타나던 시기였다. 또한 <화소천논시육절(和小川論詩六絶)>의 대상이었던 소천(小川)과 매천(梅泉)은 망년지우(忘年之友)였으며, 소천(小川)은 시재가 뛰어난 시인으로 당시(唐詩)를 숭상하였으며 시풍(詩風)이 평이(平易), 순정(醇正), 전실(典實)하였다. <화소천논시육절(和小川論詩六絶)>에는 매천(梅泉)의 문학관, 시론이 깃들여 있다. 매천(梅泉)은 시인은 그 기상이 높아야 하고, 그 성정(性情)에 따라 개성 있는 시를 써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작시(作詩)방법론에 있어서 수식(修飾)과 조탁(彫琢)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시어(詩語)의 중요성과 시인이라면 시대 정신을 가져야 함을 시화(詩化)하여 <화소천논시육절(和小川論詩六絶)>을 창작하였다는 것을 밝혔다.

<만분가(萬憤歌)>에 드러난 원한(怨恨)의 양상

유연석 ( Yeon Seok Ryu )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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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유배가사는 10여 편으로, 이들은 대부분 정적에 대한 원망과 군주의 은총을 기대한 연군가로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안조환의 <만언사>를 들 수 있다. 이는 작자가 추자도 귀양가서 힘든 유배생활을 읊은 것인데, 이사연은 궁중에까지 알려짐으로 곧 해배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처럼 유배가사는 왕권에 순응하여 왕의 은총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담아야 한다는데 주목되었다. 그러나 조위의 <만분가>는 세상에 없는 先王을 그리워하면서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비통해 하며 읊은 것으로 일반 유배가사와 차원이 다를 내용이다. <만분가>라는 제목에서부터 만가지 원한을 쏟아내고 있다. 이처럼 기존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작자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하겠고, 작품의 내용을 심층적으로 검토해야 되겠으며, 아울러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고찰하고자 하였다. 작자 조위는 詩文에 남다른 재능을 지녔으며, 그 결과 성종의 총애를 입은바가 자못 융숭하였다. 28세에는 왕명으로 「두시언해」를 간행하였고, 40세에는 「점필재문집」을 간행하였으며, 42세에는 「세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이처럼 성종의 편찬사업에 온 정열을 바쳤으며, 특히 성종과 연산조에 걸쳐 제일의 文名을 얻음으로 시노(詩老)란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연산조에 사초(史草)와 관련하여 그에게 비운이 싹트게 된다. 훈구파 유자광, 이극돈의 모함으로 야기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사림 40여명이 제거되는데, 여기에 조위도 억울하게 포함되어 5년여 유배생활로 철천의 원한을 삭이며, 끝없는 인생의 벼랑을 실감하면서 끝내는 중병으로 최후를 맞았다. 또 1년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한다. 작품의 분석은 전체를 서사, 본사, 결사 등으로 나누고 본사를 7단락으로 나누어 고찰한 바, 본사를 7단락으로 나눔에 특별한 근거를 제시하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시간이나 장소, 또는 인물들의 등장도 없이 가슴에 맺힌 원한만이 연속될 뿐이기 때문에 이들을 자의적으로 나눌 수 밖에 없었다. 작품을 1) 창작동기, 2)충정구가, 3)영어비탄, 4)앙천탄식, 5)원분토로, 6)함분축원, 7) 애소회의, 8)성총회복, 9)만분체념 등 9단락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작품에 나타난 작자의 의도는 작품 전체에 다채롭게 제시되는데, 소재, 비유물, 원분을 직소한 구절 등을 통하여 밝혀진다. 소재에는 매난국죽, 꿈, 눈물, 죽음, 이별 등이고, 비유물들은 두견, 백구, 학, 외기러기, 우는새 등 조류와 산, 물, 돌, 달, 비, 구름, 서리, 소나무 등 자연물을 통하여 작자의 통한이 토로되었다. 그리고 13구에 달하는 많은 곳에서 발분의 정을 노래함으로 <만분가>의 작가의식을 충신연군 지사라는 입장에서 원분가라는 시각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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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 5월초 유몽인은 세 번째 연행(燕行)에 나섰다. 직책은 정사(正使)였다. 그는 11월에나 돌아오는데, 그 사이에 250수에 달하는 시를 남겼다. 이 시들은 유몽인의 내밀한 정서에서부터 세계관까지를 보여주는 다채롭고 폭넓은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이 논문은 250수의 시 중, 압록강에서 광녕(廣寧)에 이르는 20여 일사이에 지어진 52수의 시를 텍스트로 삼아, 당시 유몽인의 내면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미시적 고찰은 한 인물의 특정 시기 생동하는 면모를 포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유몽인 및 그 시대의 전체를 이해하고 재구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먼저 논의한 것은 시의 형식이다. 이 구간에서 그가 남긴 시는 모두 52수인데, 그 중에서 12구 이상의 장편시가 20수나 된다. 이는 매우 특별한 현상으로, 그 자체가 통제되지 않은 격정(激情)의 분출이라는 특징이 된다. 당시 유몽인의 심리나 미의식이 함축·절제보다는 범람 및 방출의 경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정치 현실에 대한 혐오, 여행이라는 특수 상황, 조선과는 다른 요동의 광막한 지형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대화체를 활용한 입체적 구성과 시상의 역동적 전환은 부수적인 현상이다. 당시 그는 정국의 변화로 말미암아 1년 남짓 강요된 실직 상태였으며, 이로 인해 그의 건강과 심리는 매우 위축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떠날 때부터 유몽인의 심사는 몹시 불편했으며, 이러한 심리 상태는 지속된다. 하지만 유몽인은 상투적인 자탄이나 유약한 감상에 마음을 맡기지는 않았다. 넓은 세계의 체험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남달랐던 유몽인은, 불편한 심사 가운데서도 새로운 문물을 체험하고 견물을 넓힐 기대에 부풀어 있었으며, 사신으로서의 포부와 임무를 재삼 다짐하였다. 유몽인에게 연행은 고통스러우면서도 가장 신나고 가치 있는 일이었기에, 그의 정신은 늘 적절한 긴장을 유지했다.

허균(許筠) 문집(文集)번역과 한문 고전 번역의 몇 가지 문제

정길수 ( Kil Soo Chung )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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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교산허균(蛟山許筠)의 문집(文集)『성소복부고(惺所覆部藁)』와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의 번역서를 대상으로 삼아 문집을 비롯한 한문 고전 번역의 몇 가지 문제를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원문 입력·교열 과정에서의 오류로 인한 오역, 제목 오역,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본문 오역 및 주석 오류, 기타 주석 미비 사례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한편 오역이 일어난 원인을 추출하였다. 그 결과 현재 기획·추진 중인 한문 고전 번역 사업에서 양질의 학술번역 성과를 산출하기 위하여 주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점으로, 적절한 번역 분량의 산정, 사전 교열·감수 기능의 강화를 위한 실질적인 방안 강구, 번역 결과물의 수정·보완 등의 문제를 제시하였다.

조선조 풍운뇌우(風雲雷雨) 악장 연구

조규익 ( Kyu Ick Cho )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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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름·우레·비 등 기상의 요인들은 마을마다 존재하던 성황신과 함께 산천단에 배향되어 큰 규모로 치제(致祭) 되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백성들의 안위(安危)나 풍요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우순풍조(雨順風調)는 곡식의 생장과 결실에 절대적인 조건이었고, 곡식의 충실한 생장은 백성들의 삶과 직결되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식량을 하늘로 여겼고, 왕도정치를 행하고자 하던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여겼다. 사실 풍운뇌우의 신과 산천신, 성황신 등에 대한 제사는 유교이념 사회에서 음사(淫祀)로 지목 받을 가능성이 컸던 민간신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국가의 제례로 흡수하여 제도화 시키고 중앙에서 관장하려 한 것은 중앙집권적 통치 구조의 구현과 동시에 민심을 국가의 발전에 동참시키고자 한 왕조의 철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그런 생각을 담으려 했던 「풍운뇌우악장」은 여타 아악악장들과 마찬가지로 고전들로부터 의미 있는 구절들을 따다가 모아놓는 수준의 제작 관행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즉 작자는 당대의 문형(文衡)으로서 국가 제의 관련 논의의 핵심에 위치하던 변계량이었지만, 아악악장 제작의 관행이나 관습에 매여 악장의 상투 성만을 심화시키는 데 그쳤던 것이다. 제사절차를 갖추고 신령에게 강복(降福)을 기원한 것이 <전폐악장>이고, 풍운뇌우의 덕을 찬양하고 강복을 기원한 것이 <초헌풍운뇌우악장>이며, 산천의 덕을 찬양하고 강복을 기원한 것이 <초헌산천악장>이다. 또한 성황신의 덕을 찬양하고 임금의 수복과 왕조영속을 기원한 것이 <초헌성황악장>이고, 예의를 갖추어 제사를 마치고 강복을 기원한 것이 <철변두악장>이다. 원래 변계량이 제작한 이 악장들은 그 후 祭次를 수정하거나 변경하면서 순서와 내용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변계량이 구절들의 대부분을 각종 고전으로부터 적구(摘句) 해왔고, 부분적으로는 선행 악장들의 모티프를 차용하거나 창안을 보태어 작품을 이루어냈는데, 이것이 당대 아악악장들을 제작하던 관행이었다. 변계량은 「풍운뇌우악장」과 함께 「선잠악장」도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제작방법이 비슷한 점으로 미루어 여타 아악악장들도 변계량의 제작일 가능성이 농후하나 아직 속단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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