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버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논문검색은 역시 페이퍼서치

한국시가문화연구(구 한국고시가문화연구)검색

The Studies in Korean Classic Poetry and Cul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2466-1759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6권 0호 (2015)

기획특집 : 고전시가와 문화콘텐츠

나경수
6,300
초록보기
개인들의 욕구가 모여 사회적인 문화적 요구로 분출된다. 이 시대는 과거와는 다른 문화적 요구가 나타나고 있다. 이를 충족하기 위해 문화콘텐츠라 는 신개념이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전시가가 겪고 있는 오늘의 문제 중 하나는 그것의 가치에 상관없이 즐기려 하는 사람의 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현전화에 실패한 까닭도 그 한 요인일 수 있다. 한 때 근대서사가 개연성을 앞세워 공격했지만, 오늘날 고소설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환상성이 다시 살아나고 있듯, 서정장르에 속하는 고시가 역시 그것을 재생시키는 현전화의 방식으로서 잃었던 또는 유보해두었던 음악성과 음악을 되살리는 방법이 고안되어야 할 줄로 안다. 다양한 문화콘텐츠적 전략에 따라 우리의 고전시가에 속하는 국문시가, 구비시가, 한문시가의 작품을 현전화하여 오늘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또는 이용 가능한 문화자원으로 재생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형태의 변화보다는 기능적 전환을 통해 현대인이 필요로 하는 문화로 재생시키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천주가사와 순교의 감정

고성혜 ( Seong Hye Ko )
6,800
초록보기
이 글은 입교(入敎)가 곧 죽음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로서 살아갈 것을 선택하였던 이들의 마음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조선에 천주교가 유입되고 집단적 순교가 일어났던 시기와 맞물려 발생한 천주가사를 분석하며 순교할 수 있었던(혹은 순교하는) 그들의 감정은 무엇이었던 것인지 논의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먼저, 순교자에 의해 제작된 천주가사를 대상 텍스트로 삼아 순교의 열망이 구성되는 지점으로 내세관과 원죄의식에 대해 논구했다. 그리고 3장에서 그것이 공동체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폈으며 특히 기쁜 죽음이라는 관념의 역설에 대해 논의하였다. 더불어 매체로써 천주가사가 감정의 연대와 지속 과정에 준 영향도 보았다. 그 결과 천주가사가 제작되어 유통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집단(공동체) 에게 매우 강력한 특정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련의 과정은, 천주가사를 감정의 형성과 전파라는 측면에서 살핀 것이며, 이를 통해 죽음이라는 실존적 사건이 공동체에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가에 대한 논의까지 가능하였다.

石顚(석전) 鼎鎬(정호)의 국토 기행시

김석태 ( Seok Tae Kim )
6,600
초록보기
이 논문은 근대의 불교사상가이자, 교육가, 문학가인 石顚 鼎鎬의 기행시 에 대한 고찰이다. 석전은 우리나라 거의 모든 지방을 두루 여행 하였다. 그여행의 견문과 감회를 다수의 시문으로 남겨 인간의 삶과 여행, 그리고 문학이 한데 어우러진 다양한 기행시문학을 조성하였다. 그의 시작품의 대부분이 기행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여기에서는 제주도, 금강산, 백두산 기행시를 중심으로 석전의 국토 기행시의 내용과 의의를 살펴보았다. 제주 기행시는 선경의 이미지를, 금강산은 불교적 분위기를, 백두산은 웅혼한 기상을 느끼게 한다. 각 지역의 산수자연과 지나온 역사의 감회에 따라 시의 양상도 다른 것이다. 석전의 기행시는 여행 목적지에서의 감상 뿐만아니라 출발에서 돌아오기 까지 여행의 과정을 시로 표현하고 날짜, 동행한 사람 등 시작의 배경이 되는 상황을 적절하게 기록하여 여정을 알게 하였다. 이렇게 시문 자체가 맥락이 있는 여행기로 느껴지게 한 것은 석전의 기행시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석전은 우리 땅 곳곳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 자연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 보았으며 그 감회를 시인이자 수행승의 감성과 시각을 통하여 시로 형상화 하였다.

남언기 <고반원가>의 문학사적 검토

김신중 ( Shin Chung Kim )
6,500
초록보기
남언기의 <고반원가>는 최근에 발굴된 누정은일가사이다. 16세기 후반 호남의 무등산권에 속한, 옛 동복현 사평촌의 고반원을 배경으로 창작되었다. 이 <고반원가>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이 가사문학사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는 지를 검토한 것이 바로 이 글이다. 논의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반원가>가 최근에야 세상에 알려진 작품임을 고려하여, 먼저 작자와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간략히 조감하였다. 작자 남언기는 한양 출신으로, 성장과 수학 과정에서 호남과 밀접한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30대 중반 이후 처가가 있는 사평촌에 정착하여 고반원을 조성하고, <고반원가>를 창작하였다. <고반원가>는 고반원 주인의 한가로운 생활과 고반원 경치의 아름다 움을 노래한 누정은일가사이다. 따라서 이 글은 무엇보다 누정은일가사로서, <고반원가>의 성격에 주목하였다. 특히 16세기 호남의 무등산권이라는 시대와 지역적 배경에 유의하여, 같은 배경을 가진 송순의 <면앙정가>와 정철의 <성산별곡>과의 관계를 주로 해명하였다. 작자와 작중 은일자의 관계, 작품의 내용 구성, 작자의 성격 및 현실인식태도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반원가>가 특히 <면 앙정가>의 맥을 이으면서, 나름대로 독자성도 갖추었음을 밝혔다. 이어 17세기 이후의 누정은일가사와 <고반원가>의 관계를 살폈다. 17세기 의 누정은일가사 역시 16세기에 수립된 전통 위에서 창작되었다. 하지만 17세기를 지나면서 누정은일가사는 그 성격이 은일보다는 향촌의 한거노래로 변모되었고, 18세기에는 작품 창작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16세기의 불안한 정치현실에서 배태된 은일이라는 시대감성이 더 이상 공감을 얻지 못한 결과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고반원가>는 17세기적 변화의 단초를 미리 보 여준 작품이기도 하였다.
7,800
초록보기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은 호남의 ‘사종(詞宗)’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한국문학의 폭과 깊이를 더한 한시의 대가라 할 수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시편만으로도 2천 5백여 수가 된다. 그의 작품 중에는 장자(莊子, 대략 B.C.369~286)와 관련된 요소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장자의 사상을 적극 수용하고,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했던 석천의 인생 태도를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다. 눌재 박상(訥齋 朴祥, 1474~1530)에게 나아가 수학하던 시절, 스승은 석천에게 『장자』를 읽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문장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동생 괴마 임백령(槐馬 林百齡, 미상∼1546)에게 『논어』를 읽으라고 하면서, “이는 족히 관각문(館閣文)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 것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는 바, 남다른 석천의 기질을 스승으로서 일찍이 감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조 사대부들에게 장자사상은 여러 가지 부동한 층위에 의해 비평ㆍ수용되었다. 혹 배척의 대상이었던 ‘이단지서(異端之書)’로, 혹 문장과 수사기교를 학습하는 경서로, 혹 심신을 수양하는 지침서로, 그 상황 및 역할은 시대문화와 수용대상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16세기 조선 사대부의 일원으로서, 석천에게 가장 근본적인 사상은 주자(朱子, 1130~1200)로 대표되는 송대(宋代) 성리학의 수용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사대부층은 문화적으로는 유교적 체질을 공유하는 집단이다. 그러나 실제로 유교 적 체질은 한결같지 않다. 어떤 이는 유교철학의 근본원리를 철저히 추종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오히려 도교적 혹은 불교적 사유방식을 소유해갔다. 대개의 사대부는 이들 양극단 사이에 머물렀다. 현실 정치적으로는 유교사상을 추종하고 내면적으로는 불교나 도가의 수양과 달관을 즐겼다. 다시 말해, 성리학은 도교와 불교의 관념체계를 특유의 시각으로 분석ㆍ변증ㆍ종합하는 사유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석천 또한 이런 인식에서 출발하여, 도교의 집대성인 장자사상에 대해 열정적인 학습 태도를 보여 왔던 것이다. 『장자』에 대한 열정적인 탐독을 통하여 석천은 『장자』 속에 내재된 주요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장자가 살았던 삶의 행적을 부단히 탐구함으로써, 자신의 일생에서 이를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석천에게 『장자』는 정신수양의 교과서이자, 각종 고난과 아픔을 헤쳐 나가는 돌파구였다. 뿐만 아니라, 석천의 ‘호방’하고 ‘비판적 정신이 투철한’ 성격은 현실을 직시함 에 있어, 우언과 풍자를 일삼았던 장자, 즉 인생관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 던 지침서이자 멘토였던 『장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석천의 노장적 취향은 당시대의 문인들뿐만 아니라, 후대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정하는, 석천만의 독특한 하나의 사상체계로 자리 잡았다. 장자사상에 대한 석천의 수용 태도를 보면, 적극적이고, 시종일관 자신이 따라 배워야할 학문 임을 고집하고 있다. 이는 문학 창작 초기에나, 노년시기의 창작 활동에서나, 변함없는 하나의 이념으로 석천의 머리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석천식 ‘소요유(逍遙遊)’는 물외의 세상을 향한 강한 욕망의 표현이었다. 속세의 시시비비(是是非非)로부터 초탈하여, 정신상의 절대적인 자유를 갈망하는 것, 자연과 하나가 되어 무하유(無何有)의 공간에서 무위(無爲)하는 것이야말로 석천 이 바라는, 천지만물과 자아를 초월하는 세계인 것이다. 석천의 명리관은 유교적 신분으로서의 자세이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측면에서 보면 莊子의 일생을 모델로 삼아, 변용된 것이라 생각된다. 명리의 취사 문제로 인해,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에 놓일 때마다, 『장자』의 사상을 지침서로 삼을 수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석천은 명리 앞에서 방황하거나 굴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명리를 떨쳐버림으로써, 장자와 하나가 되어 세속을 초월할 수 있었으며, 무위하는 경지에서 ‘소요유’를 실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석천은 장자의 우언(寓言) 읽기와 우언의 표현수법을 인용하여 시를 짓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는데, 우언을 통하여 창작된 그의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설득력이 한층 돋보이고, 상황의 절심함이 더욱 짙게 묻어나게 되었다. 석천의 문학 창작은 우언을 통해 한층 더 높은 예술적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 니라, 현실비판의식은 더욱 생동하고 강렬한 인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이 되었으리라 본다. 본고에서는 우선, 석천만의 독특한 장자관(莊子觀), 특히 장자 ‘소요유’ 의식에 대한 석천의 인식과 수용태도에 대해 살펴보았다. 다음, 장자의 삶을 거울로 삼아 올바른 처세에 힘썼던 석천의 명리관을 그의 실천과 한시창작을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규명해 보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당시의 시대상황을 장자에게서 이어받은 우언적 표현수법으로 재치 있고 실감나게 풀어나간 석천의 현실비판의식에 대해 구체적인 분석을 진행하였다.

성호기념관 소장 『靑楓□帖(청풍계첩)』 一考(일고)

박종훈 ( Chong Hoon Park )
6,600
초록보기
그간 청풍계나 청풍계와 관련된 연구는 간간히 보고되어 왔다. 그러나 청풍계의 모임을 그림과 시로 기록한 시화첩인 『청풍계첩』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없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1620년 청풍계의 모임을 시와 그림으로 엮은 『청풍계첩』 의 성첩과정과 작품을 살펴보았다. 1620년 김상용이 청풍계를 떠나 원주에 거주하고 있을 때, 김신국, 이상의, 민형남, 이덕형, 최희남, 이경전, 이필영 7인은 상춘의 목적으로 청풍계를 찾았다. 그리고 다음해인 1621년 입춘에 민형남, 이필영이 빠진 상태에서재차 모임을 개최했다. 이쯤 김신국이 1620년 그날의 상춘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옮겨 후대에 전해주자고 제안했으며, 이 제안에 따라 그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고 각자 시작품을 지었다. 실제 그림이 그려지고 시작(詩作)이 이루어진 것은 1년이 지난 1621년이었는데, 『청풍계첩』에 실린 작품 속에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모임에 참여했던 이상의는 성호 이익의 할아버지인데, 이익은 1735년 집안의 유물을 정리하다가 청풍계 모임과 관련된 시화(詩畵)를 발견하고 이를 『청풍계첩』이라는 시화첩으로 엮었다. 이것이 성호기념관에 소장된 『청풍계첩』이다. 이 과정에서 이익은 청풍도 전경을 그린 그림을 임모(臨模)했다고 밝혔다. 이 『청풍계첩』에는 ‘靑楓賞春’이라는 이상의의 친필과 청풍계의 전경을 그려놓은 그림, 김신국의 서문, 이어 7인의 시작품 17수가 수록되어 있다. 각시인의 작품 말미에는 각 시인에 대한 정보가 간략하게 부기되어 있다. 『청풍계첩』에 실린 작품은 유상처에서의 흥취가 주된 내용이다. 이러한 흥취는 탈속의 이미지로 연결되었고 신선 세계로까지 확대되었다. 또한 집단적 혹은 개인적인 자부심의 표출을 위해, 작품 내에서 모임에 함께 했던 이들의 재능을 칭송했다. 자신들의 모임을 왕희지의 난정 모임이나 소식의 서원 모임에 견준 것도 자부심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러한 작품 경향은 조선조 문인들의 시회(詩會)나 아집(雅集)에서 흔하게 보이는 것이라, 『청풍계첩』에 실린 작품만의 특징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7,300
초록보기
이 연구는 조선조 여성문학을 대표하는 두 문학 갈래인 규방가사와 부요에타난 현실대응양상을 비교함으로써 조선조 여성들의 보편적 의식과 계층적 특수성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규방가사와 부요는 가부장적 사회질서 하에서 억압당하고 소외된 여성들의 문학적 형상물이라는 점에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그러나 신분계층에 기인한 현실적 격차는 성적 동질감 이상으로 그들이 각각 향유한 문학 양식에 드러나 있다. 여성의 혼인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출발점이다. 이른바 ‘시집살이’의 시작인 것이다. 혼인을 통해 조선조 여성이 맞닥뜨린 현실적 조건과 이에 대응한 양상은 몇 가지 특징으로 정리된다. 여성은 새롭게 맺는 모든 시족 구성원과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혼인을 통해 배우자인 남편에서 파생한 것이다. 규방가사의 향유층인 사대부 여성에게 혼 인은 남편과의 애정 관계나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문 대 가문으로 성사되는 일이기 때문에 남편과의 개별적이고 대응적인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집살이나 시족 구성원들을 배제한 채 남편만을 서술의 구체적인 모티프로 다루는 경우는 드문 데 비해 부요의 경우 남편은 아내인 평민 여성의 유일한 의지처가 된다. 평민 여성은 시집살이의 보상으로 남편의 애정을 갈구하는 차이를 보인다. 규방가사와 부요 간에 처첩 간의 문제를 형상화는 방식에도 차이가 나타난 다. 남성 중심의 지배체제 유지를 목적으로 처첩이 엄격하게 구별되고 정처의 지위가 법적으로 보장받은 까닭에 규방가사에서 처첩 간의 갈등이 표면화 되는 일이 거의 없다. 다만, 남편이 첩으로 말미암아 가산을 허비하고 가문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에 한하여 비판의 대상으로 등장할 따름이다. 반면 평민 여성에게 첩의 등장은 남편의 배신 행위이며, 궁극적으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상실케 하는 이유가 된다. 결국 부요에서 첩 문제는 죽음이라는 극단적 행위로 종결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유교 질서가 내면화된 사대부 여성일수록 빈곤으로 인해 구고봉양, 봉제사, 접빈객 등 여자소임을 다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정신적 충격을 더 크게 다룬다. 이는 규범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의 괴리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다. 규방가사가 근면과 절약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치산’하는 과정을 강조한 데 비해 부요는 직접적인 생활고, 가난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현실적인 노력이나 의지의 천명 보이지 않고 가난 자체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규방가사와 부요에는 조선조 여성들이 현실을 인식하고 살아낸 다양한 방식들이 형상화되어 있으며, 형상화의 밑바탕에는 현실과 균형을 이루려는 여성의식이 자리해 있다. 따라서 규방가사와 부요는 여성 삶의 다양한 실상이 진솔하게 표출된 생활문학이요, 여성이 살아낸 삶의 체험을 오롯이 담고 있는 체험문학이라 할 수 있다.

강호시조에 나타난 나무의 표상적 의미

이미정 ( Mee Jeong Lee )
7,200
초록보기
본고는 강호시조에 등장하는 ‘나무’를 논의 대상으로, 나무의 종류별 양상에 따른 표상적 의미를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리하여 작품에 나타난 소재적 층위의 모티프 양상과 함께 그 시적 이미지로부터 환기되는 표상적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포괄적 이해에서 나아가 보다 구체적인 국면에서 자연을 이해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작품론적 특징을 규명하는 관점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강호시조에 등장하는 나무에는 우선 특정 나무가 아닌 범칭으로서의 ‘나무’가 있으며, 개체별 작품수에 있어서는 ‘소나무-대나무-버드나무(버들)-오동나무-계수나무-밤나무ㆍ뽕나무’ 순의 빈도로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나무의 종류가 다양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무의 종류별 표현 어휘만큼은 매우 다양하면서도 개성적인 양상을 띤다. 또 그런 만큼 개별 작품에 형상된 시적 이미지와 이를 기반으로 한 표상적 의미가 다채롭게 나타난다. 특히나무ㆍ솔ㆍ대ㆍ버들 등 나무 자체의 개념만을 뜻하는 표현 어휘들보다는, 녹수ㆍ풍송ㆍ한죽ㆍ벽류 등과 같은 복합어 표현 어휘들이 등장하는 작품에서 그 시적 이미지와 표상적 의미가 보다 다채롭게 환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호시조에 등장하는 나무들에 대해 흔히 개체별로 국한된 이미지와 표상 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러한 인식을 뛰어넘을 만큼 다양한 존재로서 표상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소나무의 시적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표상적 의미는 흔히 생각하듯 지조ㆍ절개와 같은 인격화된 존재로서만 형상되지 않고, 장생ㆍ탈속ㆍ청신성ㆍ순일성 등을 환기하는 자연의 사물 가운데 하나로서도 형상된다. 이러한 특징은 대나무 등 여타 나무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의 양상을 띤다. 이와 같은 나무의 시적 이미지와 표상적 의미를 통해 작중 화자의 사유와 정서를 보다 긴밀하면서도 개성적으로 형상화하는 소재로 관여하고 있음을 범칭으로서의 나무, 소나무, 대나무, 버드나무(버들), 오동나무, 계수나무 등이 등장하는 강호시조 작품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자연의 사물 가운데 특히 나무를 작품에 등장시켜 작중 화자의 사유와 정서를 형상화한 강호시조는 나무를 단순한 소재 이상의 매개물로 활용하여 화자가 지향하는 삶과 가치의식을 표상하는 데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초록보기
도연명의 <擬挽歌辭三首>는 주로 조선시대 간행되거나 通行本으로 유통된 도연명 문집을 통해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수용되었다. 중국본의 유입상황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간행된 도연명집의 판본은 전기가 5종, 후기가 2종으로 파악된다. 이밖에 유형원 개인이 편찬한 필사본이 1종 전한다. 또 도연명의 문집은 아니지만, 그의 시와 관련 자료가 수록되어 있는 『精刊補註 東坡和陶詩話』가 전기 <擬挽歌辭> 수용에 一翼을 담당했다. 이 글에선 조선시대 刊本 및 通行本에 수록된 도연명의 <擬挽歌辭三首>에대한 문헌적 검토를 바탕으로, 이 작품이 조선 전기 문인들에게 수용된 경로와 그것이 자만시 창작에 미친 영향을 추정해 보았다. 그 결과 조선 전기에 비해 후기 간본이 가진 한계로 인해 후기 자만시 창작이 편향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으며, 전기의 경우 蘇軾의 和陶詩에 대한 주석과 비평서 성격의 『精刊補注東坡和陶詩話』가 도연명에 대한 재인식은 물론 자만시 창작에 미친영향이 적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문인들의 도연명 <의만가사> 수용 경로가 모두 이같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또 이 글은 <의만가사삼수>에만 초점을 맞추어 검토했던 까닭에 거시적인 부분에선 충분한 논의를 진행시키지 못한 한계가 있다. 이런 문제점들은 앞으로 조선 간본 도연명집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함께 보완될 필요가 있다.
7,700
초록보기
본 논고는 근대전환기에 생존하였던 봉건 지식인인 운인(雲人) 송홍(宋鴻)의 생애를 중심으로 근대전환기에 생존했던 봉건 지식인-유학자들이 시대적 격변기에 어떤 시대의식을 가지고 활동하였는가를 고찰한 것이다. 운인 송홍 (1872-1949)은 근대전환기에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유학자였다. 운인은 봉건적 한문교육을 받은 봉건 지식인이었지만 입헌군주제의 채택을 주장하고 서구의 신교육을 받아들이자는 교육혁신운동을 통하여 나라를 회복 하고 되찾고자 한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활동하였던 改新 儒學者였다. 운인은 자신이 주장하였던 교육혁신운동이 무산되자 1909년 이후 교단에 서서 직접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민족혼을 잊지 않도록 독려하였던 교육자로서 일생을 바쳤다. 특별히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던 인물로 알려졌을 정도로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교육자로 평가되고 있다. 운인 송홍에 대한 연구는 역사학계 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연관하여 이루어지고 있지만 국문학계에서는 아직 전무한 실정이다. 본고에서는 운인 송홍의 詩文을 중심으로 운인의 생애와 활동을 고찰하려고 한다. 이는 운인의 고찰을 통하여서 근대전환기에 봉건지식인들이 어떠한 시대의식과 사회활동을 하였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일 모습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본 논고를 계기로 하여 운인 송홍이 남긴 詩文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근대전환기의 한문학 연구의 저변이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1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