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버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논문검색은 역시 페이퍼서치

한국시가문화연구(구 한국고시가문화연구)검색

The Studies in Korean Classic Poetry and Cul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2466-1759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40권 0호 (2017)

조선후기 `무등산권 적벽(赤壁)` 공간의 문학작품 연구

김대현 ( Kim Dae-hyun )
6,500
초록보기
임진왜란이 지난 조선후기에도 무등산권 화순 적벽은 많은 문학 작품의 창작 배경이 되었다. 이는 16세기 적벽이 문학공간으로 인식된 이후에도 여러 문인들에 의하여, 그 문학공간이 계속 확대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조선 후기 17세기 18세기 19세기의 주요한 적벽문학을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7세기 전반에는 우선 창원 정씨 가문의 문학이 주목할 만하다. 그 가문은 16세기부터 적벽과 가까운 곳에 터를 잡으면서, 점점 적벽의 중심부로 들어가며 자리 잡았다. 그래서 17세기 전반엔 적송 정지준이라는 적벽 문인이 나타나게 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안동 김씨 가문의 적벽 문학이 주목할 만하다. 이는 적벽 문학을 경향으로 널리 알리는 큰 역할을 하였다. 문곡 김수항이 진도로 유배를 왔는데, 그의 아들인 농암 김창협 등이 부친을 찾아 왔다가, 적벽을 경유하여 귀향을 한다. 이때 적벽 관련 작품을 남기면서, 그 작품이 이후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후대의 많은 문인들이 농암 김창협의 적벽 시에 차운을 한데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18세기 전반에는 담헌 이하곤의 적벽 문학이 중요하다. 그는 호남 유람 일기인 「南遊錄」을 썼는데, 그 한 부분이 적벽과 관련한 기록이다. 그 뿐 아니라 「赤壁歌」라는 57구의 장편시를 남겨서, 적벽 유람을 기록하고 있다. 이후 18세기 후반에는 다산 정약용의 적벽 관련 작품이 남아 있다. 다산은 부친이 화순 현감으로 오자, 함께 따라와서 화순의 東林寺에서 독서를 한다. 그러면서 무등산도 올라가고, 또 적벽을 유람하기도 한다. 적벽에 가서는 「遊勿染亭記」라는 작품을 비롯하여, 적벽 관련 한시를 몇 수 남겼다. 19세기 전반에는 난고 김립, 즉 김삿갓의 한시가 적벽 문학으로 중요하게 거론될 만하다. 그는 화순에서 마지막 십여 년을 소요하다가 운명을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전해지는 이유 중 하나가 그가 적벽을 방문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적벽이라는 문학공간의 힘이 사회비판적인 그의 발걸음을 끌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그는 적벽 관련 東詩 작품을 몇 수 남기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매천 황현이 그의 나이 41세에 적벽을 유람하고 관련 작품을 남긴다. 한시뿐만 아니라 「赤壁記」라는 작품도 남겨서, 적벽 산문의 전통을 이어 나가고 있다. 이처럼 조선 후기 17세기·18세기·19세기에도 많은 무등산권 적벽 문학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논문은 그 가운데서 일부 중요한 작품들을 시대별로 몇 가지 골라서, 그 내용과 문학 적인 성취를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제국신문』에 수록된 철도 소재 시가 연구

김아연 ( Kim A-yun )
6,800
초록보기
『제국신문』에는 철도 소재 시가 7편이 게재되어 있다. 1903년에 발표된 2편, 1906년에 게시된 5편이 그것이다. 이 글은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의 내용을 발표 시기별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먼저, 1903년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는 러일 전쟁(1904 1905) 이전에 열강들이 대한제국 철도부설권을 경쟁적으로 침탈하려던 정황을 형상화하고, 경의철도부설권을 수호 하려는 대한제국 정부와 민간의 의지를 담고 있다. 다음으로, 1906년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는 한일의정서(1904), 을사늑약(1905)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의 철도부설권을 독점 했고, 철도 건설 현장에서 한국인을 철저하게 배제했으며, 역세권의 이점에 주목하여 용산에 일본인 거주지를 구축한 상황을 재현한 한편, 기적 소리를 청각적 심상으로 활용하여 독자에게 계몽의식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이 글은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조명했다. 첫째,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는 시대의 흐름과 요구에 맞춰 시가가 변모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둘째,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는 신문 매체를 통해 대한제국의 철도부설권 및 국가의 자주성 되찾기 여론을 형성하는 새로운 글쓰기 방식이다. 셋째, 한국 철도문학의 계보학적 측면에서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는 『대한매일신보』 철도 소재 시평가사에 선행하며 1907년부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전에 발표된 『대한매일신보』 철도 소재 시평가사와 상호보완 관계를 맺고 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한 결과, 이 글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첫째,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는 러일 전쟁 발발 전후 대한제국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이에 따라 외세의 철도부설권 침탈이 국제적·정치적·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였음을 말해 준다. 둘째, 『제국신문』철도 소재 시가는 전통 시가의 형식 위에 철도 담론을 공적 영역으로 이끌어냈고 이 계보를 『대한매일신보』철도 소재 시평가사가 계승함으로써, 근대에 전통 시가의 형식이 철도 담론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유효함을 보여준다.

<어부사시사>에 나타난 `자연` 인식과 작품 세계

김용찬 ( Kim Yong-chan )
7,400
초록보기
고산 윤선도는 75수에 달하는 적지 않은 수효의 시조 작품을 남겼으며, 송강 정철과 더불어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최고봉을 차지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국문시가의 주요 갈래인 시조와 가사를 모두 창작한 정철과 달리, 윤선도는 시조 작품만을 남기고 있다. 특히 윤선도의 작품들 중 자연을 대상으로 형상화한 작품들에서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엿보인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강호자연에서의 생활에 대한 자족감과 그로 인한 고양된 흥취가 적절히 발현되고 있는데, 바로 이런 면모가 윤선도를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정점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요인이라 하겠다. 본고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대상으로 작품에 형상화된 `자연` 인식을 살펴보고, 아울러 작품 세계와 작가 의식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보길도가 윤선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작자가 남긴 여러 기록들을 검토함으로써 은거지로 보길도를 선택한 이유는 물론, 그 성격을 따져 작품 속에 형상화된 의미를 천착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에 반영된 사계(四季)의 형상은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각 계절의 특성을 적절히 취해 하루의 일과로 축약하여 이상화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작품 곳곳에 다양한 고사(故事)가 제시되어 있는 바, 이러한 형상을 통해 작가가 표출하고자 한 의미를 탐색하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여겨진다. 이와 함께 <어부사시사>의 작품 세계를 논할 때, 매 작품마다 덧붙은 `후렴`과 전체 작품을 종결짓는 역할을 하는 `어부사 여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후렴`은 병렬적으로 제시된 계절별 10수씩의 작품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유기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어부사 여음`은 <어부사시사> 40수를 통해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연군 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바, 이를 통해 작자가 작품의 주제 의식을 의도적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화자는 자연에서의 자족적인 삶에 대해 노래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자신이 떠나 온 정치 현실에의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본고의 논의를 통해 드러나겠지만, <어부사시사>에 형상화된 자연은 결코 단일한 성격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때문에 작품에 드러난 `자연`에 대한 화자의 인식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의미를 추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라 여겨진다. 이를 위해 먼저 윤선도의 생애와 작품의 창작 동인을 살펴보고, 구체적으로 작품 속에 형상화된 `자연`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검토해 보겠다.

매천(梅泉) 만시(輓詩)의 문예미(文藝美) 연구(硏究)

김진욱 ( Kim Jin-wook )
6,700
초록보기
輓詩는 한시의 하위 장르로써 시적 소재가 죽음이고, 주제가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을 일컫는다. 만시는 이와 같이 `죽음`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창작되어진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시대적 인식과 개인적 인식의 차이에 따라 각각의 작품은 유사성과 차별성을 동시에 갖는다. 작품의 유사성은 典型性으로 장르적 특성을 축적하여 왔고, 차별성은 만시를 문학 작품으로의 가치, 예술 작품으로의 가치를 부여해 왔다. 매천은 만시에 있어서 양적으로 질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남긴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의 만시를 연구하는 작업은 한국 만시의 마지막 모습을 재구한다는 의미와 매천 문학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준다는 의미를 동시에 아우를 것이다. 특히 매천 만시의 문예미를 고찰함으로써 매천 만시의 어떤 점이 그의 작품에 예술성을 부여하고 있는가를 규명 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천재성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문학적 성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토양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아가 만시가 지닌 독특한 문학적 성과를 추출하여 과거 儒者 지식인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규명하는 토대를 만들어 줄 것이다. 만시는 죽음을 접하고 죽음을 소재로 하여 창작한 작품이다. 그래서 감정의 표출이 격하게 일어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과 같이 가까운 이의 죽음을 접하고 그 슬픔을 내면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의례적인 만시가 아닌 경우 만시에서는 감정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빈번하다. 매천의 만시에는 이러한 감정을 내면화 하여 죽음을 객관화 하는 작품이 많다. 매천의 만시에 나타난 죽음은 의례적인 만시의 죽음과는 다르다. 그 귀결점이 모두 객관화된 죽음, 죽음과의 거리두기로 나타났으나 그 과정이 판이하다. 司空圖의 二十四詩品 중 沈着의 의경이 매천 만시의 특성이다. 매천은 당대의 만시와 달리 죽음과의 거리두기, 객관화를 통하여 작품의 眞景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것이 매천 만시의 아름다움이다. 司空圖의 二十四詩品 중 만시에 가장 어울리는 의경이 悲慨일 것이다. 만시는 죽음을 노래하니 당연히 슬퍼하고 개탄하는 심정이 곡진하게 우러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시의 의례적 성격과 관용적 제작 형태가 만시에서 비개의 정서를 찾아보기 어렵게 만든 것이 사실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개가 매천의 만시에서는 훌륭하게 수용되고 있다. 매천의 만시에는 망자에 대한 슬픔과 비탄이 곡진하게 표현되고 있다. 喪事에서는 슬픔이 가장 앞서야 한다. 슬픔이 사라지면 의례만 남게 된다. 만시 역시 슬픔이 가장 앞서야 하는데 이를 잘 보여준 시인이 매천이다. 그러므로 매천 만시의 아름다움은 悲慨에 있다고 하여도 크게 무리가 아닐 것이다. 매천은 만시 창작에 있어 沈着과 悲慨의 의경을 작품 속으로 가져와 그만의 아름다움을 획득하였다.
7,200
초록보기
嚴昕이 36세의 짧은 삶을 살다간 16세기 조선 文壇에서는 朴誾, 李荇, 鄭士龍, 盧守愼 등의 시인이 `海東江西詩派`라는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벌였다. 1539년 봄에 명나라에서는 황태자 탄생을 알리는 使臣團을 조선에 파견했고, 곧이어 5월에 태자 책봉을 알리는 進賀使를 파견했다. 당시 엄흔은 遠接使 蘇世讓의 從事官으로서 蘇世讓과 宣慰使 申光漢 등이 사신단 일행과 수창한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는데, 이 작품들이 그 문집인 『十省堂集』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엄흔의 시는 당대인들에게 누차 높은 평가를 얻은 바 있으나 오늘날의 韓國漢詩史에서는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엄흔의 詩에는 해동강서시파의 특징인 拗體에서의 三平聲과 助辭를 통한 奇字 단련, 人名과 典故를 통한 시어의 확장, 일상생활의 소재로서의 시의 산문화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엄흔의 시는 해동강서시파 시의 특징을 충실히 갖춘바, 엄흔은 해동강서시파 시인의 범주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김정 <우도가>의 이본 고찰

윤치부 ( Yoon Chi-boo )
6,700
초록보기
이 글은 충암 김정이 제주에 유배 왔을 때 제주판관의 처남 방순현이 제주 동쪽에 있는 섬 우도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바탕으로 우도를 노래한 칠언배율의 <우도가>에 대한 이본 연구이다. 이를 통해 그 정본과 이본들의 계통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김정의 <우도가>를 수록한 문헌들로는 크게 김정의 작품들을 수집하여 간행한 충암집류, 제주 지지에 수록된 탐라지류, 제주에 안무어사로 왔던 경험을 기록한 남사록류, 당시 시인 묵객 등의 언행 등에 관한 사실을 듣고 본 대로 기록한 패관잡기류,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한 개인의 평생에 걸쳐 정리한 문학과 역사를 기술한 심재집류 등으로 나누어진다. 충암집류에는 임자본·병자본·임술 ·정해본 등의 이본이 있는데, 오자가 없는 대신 33구 231자의 불완전한 구성으로 제24구 이후에서는 평측과 운자가 통일되지 않아 오언배율의 형식을 벗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24구는 제23구와도 대구가 되지 않았다. 탐라지류에는 이원진의 『탐라지』, 윤시동의『증보탐라지』, 이원조의 『탐라지초본』 등이 있는데, 충암집류와는 달리 제24구가 결구됨으로써 전체적으로 평측과 운자가 압운되고, 문맥상으로도 오히려 탄탄한 구성을 이루었다. 남사록류는 규장각본과 청음유집본이 있는데, 탐라지 계통이었고, 패관잡기류는 전사본과 활자본이 있는데, 충암집 계통이었다. 심재집류는 남사록류처럼 탐라지 계통이었다. 이본들 사이에서는 오자·동자·속자·약자·통자·결자 등을 중심으로 적잖은 변이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두암육가>의 성격과 계보학적 위상

이상원 ( Lee Sang-won )
6,200
초록보기
이 글은 김약련의 <두암육가>의 성격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육가형 시조 내에서 차지하는 이 작품의 계보학적 위상을 살펴본 것이다. <두암육가>는 기본형인 육가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내용적으로 상삼수(上三首)와 하삼수(下三首)로 구분되어 존재한다. 상삼수의 중심 내용은 자탄(自歎)이다. 자신의 육십 인생을 되돌아보며 아무것도 이룬 게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하삼수의 중심 내용은 계자(戒子)다. 자식들에게 젊음을 너무 믿지 말고 착한 일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김약련의 <두암육가>는 안동문화권에 속하는 영주에서 창작된, 육가형 시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다. 안동문화권에서 탄생된 작품이기 때문에 계보학적으로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 계열에 속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으나, 고찰 결과 최학령의 <속문산육가> 계열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이전 시대인 17세기 중반에 창작된 <속문산육가> 계열의 작품인 이중경의 <어부별곡>과 가장 상통하는 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200
초록보기
만남과 이별의 정서를 중심으로 만횡청류와 속요의 교직과 간극을 살펴보았다. 양자의 연행공간에는 공통적으로 주효와 악기, 기생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음란하거나 남녀상열지사의 노랫말이 연행되고 있었다. 속요는 교열·신성의 과정을 거친 후 궁중 안의 군신 앞에서 연행되었고 만횡청류는 풍류장에서 제한을 받지 않고 가창된 노래였다. 특히 풍류장에서 연행된 만횡청류는 노랫말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듯이 음란한 상황을 구체화하려는 경향을 띠기도 했다. 이러한 차이가 양자 간의 교직과 간극을 낳게 한 이유라 할 수 있다. 물론 `성희`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양자 간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속요에서 성희의 부분을 우회적으로 진술했다면 만횡청류에서는 그것을 노골적 혹은 과장적으로 묘사했다.

소세양의 연행시 연구

이월영 ( Lee Weol-young )
6,900
초록보기
본 논문은 양곡 소세양의 연행시를 고찰하였다. 소세양의 시집은 인생 후기의 은둔시가 그 대부분을 채우고 있음을 고려하면, 연행시가 오히려 소세양 시 세계에 대한 해석의 키를 쥐고 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 연행시로 인해 그는 귀국 후 탄핵되었고 그것이 이유가 되어 결국 고향땅 익산에서 은둔하였기 때문이다. 북경으로 가는 길에 지은 시는, 출발부터 여정을 불편해하는 감정을 드러내고, 집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였다. 처처의 노정을 시의 재료[詩料]로 수용하여, 곳곳의 광경을 읊으면서, 그곳에 향수(鄕愁)를 반영하여 형상하였다. 북경에 체류하며 황제와의 만남이 지체된다. 그간 지은 시들에서는 답답함 우울함 그리움의 정서로 일관한다. 북경 거주를 감옥생활로 비유하며, 술과 시, 유람, 동행인들과의 유희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북경 떠날 날만을 학수고대한다. 그 시절은 꽃피는 화려한 봄이었지만, 소세양의 시에서 봄날의 흥치[春興]는 곧 봄날의 근심[春愁]으로 형상되었다. 북경을 떠나면서 지은 시에서는, 새장에서 풀려나 허공을 나는 새로 자신을 비유하며 환희작약하는 정서로 시작한다. 그런데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출발하던 때가 겨울이었는데, 북경을 떠나는 시점은 해도 바뀌고 계절도 바뀌어 봄을 지나 여름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시적 정서는 변한 시절을 보면서 좋은 시절(봄)을 여로에 허비해버린 것에 대한 회한과 인생 무상감으로 변해간다. 귀환 길 마지막 시는, 석양을 바라보며 까닭모를 수심[閑愁]에 잠기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는 미래 발생할 사태를 인지하는 시적 예언[詩讖]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소세양의 연행시는 사행단으로서의 관료의식이 거의 전무하고, 그가 여로에서 가지는 개인적인 정서의 추이를 형상하고 있어, 사실 사행시답지 않다. 그래서 자신의 정서적 가치를 중시하고 거기에 매몰되어 있는 시인의 성향을 그대로 드러낸다. 소세양의 연행시가 귀국 후 탄핵의 빌미가 되었던 것도, 그가 사행단으로서의 책무의식 없이 개인정서에만 매몰되어 유락만을 추구하는 그의 성향을 그대로 반영한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 대한 가치평가는 개인의 정서를 경관과 결합해 형상화한 미감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 종교가사와 공감장

조태성 ( Jo Tae-seong )
6,500
초록보기
공감장은 감성의 사회적 성격을 해명하면서 동시에 한 사회의 변화발전을 담보하는 인간의 감성적 동인을 분석·비판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또한 공감장 개념은 분석적 또는 비판적 개념이자, 동시에 구성적 개념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이런 개념을 토대로 당대 사회의 특정 장(場)의 형성, 특히 종교공감장의 형성과 그 투쟁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19세기 전후 조선은 서학과 동학의 충돌 같은 종교적 대립과 개화파와 척사파 사이의 이념적 대립 등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삶의 전 영역에서 극심한 혼돈의 시기였다. 바꿔 말하면 이 시기는 무수한 장들의 형성과 투쟁, 소멸과 계승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이 글의 본론인 제3장에서는 유교와 불교의 공존, 서학과 동학의 충돌 양상을 가사를 통해 밝히고, 이어 이들 종교공감장이 정치공감장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이 현재 우리 사회의 수많은 공감장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시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애초부터 일종의 `근대(성) 찾기`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근대(성)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을 모색해보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리고 그런 근대(성)를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방식으로서 `공감장`이론을 당대의 종교가사에 적용시켜 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 이론 자체가 아직은 성긴 부분도 있지만, 향후 좀 더 다양한 분야에서의 비판적 시론들을 통해 보다 생산적으로 `그때-거기`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1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