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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가문화연구(구 한국고시가문화연구)검색

The Studies in Korean Classic Poetry and Cul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2466-1759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42권 0호 (2018)

제영을 통해 본 연자루의 문화적 표상

김신중 ( Kim Shin-ch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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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순천 연자루의 문화적 표상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연자루는 옛 순천읍성의 남문에 있었던 누정으로,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훼철되었고, 1976년 다시 죽도봉공원에 복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주된 연구 대상은 연자루제영과 줄곧 그 중심 소재로 읊조려진 연자루고사이다. 본론의 논의는 크게 셋으로 구분된다. 먼저 제2장에서 연구 대상인 연자루제영의 전승 현황과 주요 내용을 정리하였고, 이어 제3장에서 연자루제영을 통해 연자루고사의 형성과 변이 양상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제4장에서 연자루의 문화적 표상을 규명하였다. 논의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주로 『승평지』를 통해 전해지는 연자루제영은 모두 82편 93수인데, 세월의 무상함이나 이별의 정한을 읊조린 작품이 대부분이다. 또 ‘태수 손억과 관기 호호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연자루고사를 중심 소재로 활용하였다. 때문에 주목되는 것이 연자루고사의 형성과 변이 과정이다. 고려후기의 장일, 조선전기의 서거정, 조선후기의 이수광이 남긴 제영이 그러한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의 작품을 통해 연인의 만남과 이별을 근간으로 성립한 연자루고사의 두 가지 유형과 함께 성격을 밝혔다. 나아가 연자루의 이름과 위치까지도 고려하여, 만남 이별 재회 무상 등을 아우르는 남녀 간의 사랑을 연자루의 문화적 표상으로 규명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연자루라는 누정을 단순히 시문의 산실이나 배경으로 보는 태도에서 벗어나, 그 자체를 표현 대상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정희맹이 경영한 영광의 용산구곡

이종묵 ( Lee Jong-mook )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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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6세기 후반의 문인 정희맹(丁希孟)이 영광의 불갑산 기슭 용산리 고산(孤山) 기슭에 경영한 용산구곡(龍山九曲)에 대한 연구다. 정희맹은 영광의 오룡리(五龍里) 출신인데, 한양에 머물다가 1562년 고향으로 내려와 용산에 죽림정(竹林亭)을 짓고 1566년 추원당(追遠堂)과 견남헌(見南軒)을 지어 본격적인 삶의 공간으로 삼았으며 1589년 용산에 선양정(善養亭)을 지어 용산정사(龍山精舍)를 완성하였다. 이듬해 인근의 풍영정(風詠亭)에서 용계회(龍溪會)를 가졌다. 그리고 용산구곡의 삶을 <용산기(龍山記)>, <용산지(龍山誌)> 등 많은 작품에 담았다. 이에 따라 이 논문에서는 먼저 용산구곡의 산수와 그곳에 둔 누정을 살폈다. 용산구곡은 불갑저수지에서 순량마을에 이르는 불갑천을 따라 설정한 것이다. 1곡에는 류호(柳壕)의 압청당(壓淸堂)과 류익겸(柳益謙)의 침류정(枕流亭), 2곡에는 연덕원(延德院), 3곡에는 박산대(朴山臺), 4곡에는 노산대(魯山臺), 5곡에는 죽림정, 추원당, 견남헌이 있었다. 특히 견남헌에서 보이는 팔경을 따로 두었는데 부곡채궐(富谷采蕨), 중야경전(中野耕田), 응봉망운(鷹峯望雲), 관동착약(寬洞斫藥), 전탄조어(前灘釣魚), 연덕수계(延德修契), 후원습률(後園拾栗), 송대방매(松臺訪梅) 등이 그것이다. 6곡은 선양정인데 이곳의 팔경은 생곡청송(生谷靑松), 입석백학(立石白鶴), 고산조매(孤山早梅), 삼각만종(三角晩鍾), 석교명월(石橋明月), 죽림청풍(竹林淸風), 용암조어(龍巖釣魚), 합탄관창(蛤灘觀漲) 등이다. 7곡은 삼기대(三奇臺) 혹은 벽송대(碧松臺)이고 사선재(私善齋), 매헌(梅軒) 등의 건물이 따로 있었는데 이를 합하여 용산정사라 하였다. 용산정사의 팔경은 택변류(宅邊柳), 이하국(籬下菊), 창외초(窓外蕉), 천저근(泉底芹), 정상동(井上桐), 헌전매(軒前梅), 원중율(園中栗), 옥후송(屋後松)이라 하였다. 연꽃을 심은 군자지(君子池)와 순채를 심은 사인담(舍人潭)도 있었다. 8곡은 용두대(龍頭臺)인데 관어대(觀魚臺), 임의대(臨漪臺), 호호대(浩浩臺), 송매대(松梅臺) 등이라 이름을 붙인 곳이 더 있었고 풍영정(風詠亭), 수죽암(水竹庵) 등의 건물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9곡은 낙모대(落帽臺)다. 정희맹은 진(晉)의 맹가(孟嘉)가 중양절에 환온(桓溫)이 용산(龍山)에서 주연(酒宴)을 가진 고사와 송의 임포(林逋)가 고산(孤山)에서 매처학자(梅妻鶴子)를 거느리고 산 삶을 연결하여 자신의 용산구곡을 이렇게 꾸몄다. 이는 비슷한 시기 이이(李珥)가 해주의 석담(石潭)에 은계정사(銀溪精舍)를 짓고 고산구곡(高山九曲)을 경영하여 향약(鄕約)을 실현한 고사와는 다른 전통을 연 것이다. 송 주희(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이 아닌, 송 양만리(楊萬里)의 삼삼경(三三徑) 고사를 활용하여 구곡경(九曲徑)의 고사를 새로 만들었으며 용계회(龍溪會)를 결성하여 풍류를 즐겼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시와 문, 그림으로 다양하게 남겼다. 잊혀진 공간 용산구곡에서 새로운 풍류의 장을 연 정희맹의 이러한 삶을 조망하였다.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의 생애와 부(賦)에 대한 고찰

양승천 ( Yang Seung-che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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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응정은 조선 중기에 활동한 관료이자 문인으로, 호남지방에서 활발한 문학 활동을 전개한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552년 식년문과에서 을과로 급제를 하였고, 1556년 문과 중시에서 내수외양책에 의한 <남북제승대책>으로 장원을 하였다. 또한 대사성을 두 번이나 지냈고, 문장에도 능하였다. 양응정이 주로 활동했던 시기는 16세기 중엽 명종과 선조 때이다. 목릉성세로 일컬어지는 이 시기는 시와 문장이 찬란한 꽃을 피웠다. 이 시기를 예비하고 주도했던 인물은 주로 호남 출신이거나, 호남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문인이었다. 이들 중에는 목릉성세 터전의 기초를 닦았던 인물도 있고, 그 시대의 주동적인 처지가 되어 이끌었던 인물도 있다. 양응정의 경우는 목릉성세 터전의 기초를 닦았던 인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양응정은 세 편의 부(賦) 작품을 남겼다. <사(射)>, <태백묘(泰伯廟)>, <대장불기재(大匠不棄材)>가 그것이다. <사>는 『예기』 <사의>를 참고하여 지은 것이고, <태백묘>는 『논어』 <태백>을, <대장불기재>는 『맹자』 <진심장 상>을 참고해 지은 것이다. 문학 작품은 작가정신과 의식의 소산이므로, 필연적으로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세 편의 부는 그가 활동했던 16세기 중엽의 명종과 선조 시대를 배경으로, 그의 우국충정이 아늑하게 서려 있다. <사>에서는 시대적 혼란기에 사대부와 선비들의 정신을 진작시킬 중요한 방법으로 활쏘기를 권장하여, 그들이 문무를 겸한 만방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태백묘>에서는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한 조정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을 인용해, 선조의 왕위 계승 문제를 합리화하고 있다. <대장불기재>에서는 임금이 인재를 발굴해 쓰려 할 때는, 혹시라도 인재를 버리는 일이 없이 잘 파악해 적재적소에 골고루 써야 한다는 것이다. 양응정은 많은 부 작품을 남기지 않고, 세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부는 신라 최치원의 <영효> 이후로,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내려오는 우리나라 부의 문학사에서 한 단락을 차지하는데 얼마간의 도움이 되었다고 하겠다.

경덕왕대 향가 4수의 의미와 역할

박인희 ( Park In-h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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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경덕왕 때 지어진 향가 <도솔가>, <제망매가>, <안민가>, <찬기파랑가>를 대상으로 하였다. <도솔가>는 『삼국유사』 감통편에 실렸고, <안민가>는 기이편에 실렸다. 두 노래는 편목의 성격에 부합하는 노래들이다. 그런데 <도솔가>는 <제망매가>와 같이 실려 있고, <안민가>는 <찬기파랑가>가 같이 실려 있다. 이전의 논의에서는 이 노래들이 작가인 월명사와 충담사를 중심으로 다루어졌었다. 본고에서는 작자보다는 <도솔가>와 <안민가>를 짓게 한 경덕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제망매가>와 <찬기파랑가>가 같이 다루어진 이유도 따져보았다. 경덕왕을 중심으로 볼 때 <도솔가>의 창작 동기인 ‘이일병현’은 내물왕계의 등장과 관련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를 고려할 때 <도솔가>는 내물왕계의 등장을 정치적 타협으로 무마시킨 결과로서 경덕왕이 신하들에게 보내는 정치적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안민가>는 혜공왕 출생담과 관련된 노래로서 경덕왕이 왕자, 신하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인데 나라가 태평하려면 신하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 노래였다. 그럼으로써 신하들을 권계하기 위함이었다. 일연이 <제망매가>와 <제망매가>가 지어진 이야기를 소개한 것은 <도솔가>가 지어진 이야기만으로는 감통편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연은 감통편 이야기로서 한계가 있는 <도솔가>가 지어진 이야기에 <제망매가>와 <제망매가>가 지어진 이야기를 소개하여 월명사의 신앙심을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월명사도솔가’조를 감통편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경덕왕이 <찬기파랑가>를 언급한 것은 충담사에게 신하의 역할을 강조하는 <안민가>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경덕왕은 <안민가>를 요구하기 전에 <찬기파랑가>를 언급함으로써 충담사에게 자신이 원하는 노래가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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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胤永(1833~1898)은 신사년(1881, 고종 18) 전국에서 척사운동이 전개되자, 2차례 올린 소장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1881년 9월 함경도 利原으로 유배되어 1883년 봄에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바 있다. 이 시기 지은 작품은 그의 문집인 『后山集』 권1 앞부분과 권2에 순차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賦 4편, 詞 3편을 포함하여 총 93題 115首를 지었다. 본고에서는 이를 토대로, 유배시기 작품과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우선 당대 현실에 대한 인식과 불굴의 신념이 반영되어 있는 작품을 통해, 유배에 대한 천명의식 나아가 척화 및 척사에 대한 정당성을 드러냈다. 또한 국난을 극복했던 이성계와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을 소환했는데, 이 역시 난국의 타개에 대한 신념이 반영된 것이었다. 북관의 인문지리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북관의 史蹟이나 당대 풍습 및 백성들의 생활상을 詩化했다. 유배객이면서도 이러한 부분에 관심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은 척화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마지막으로 문학적 성취와 승화가 담긴 작품을 살펴보았다. 정윤영은 유배객의 처지였지만, 실제 작품을 보면 마치 한 편의 遊覽記를 보는 듯하다. 절경을 대하는 순간의 흥취가 물씬 묻어나고 직면한 풍경을 묘사하면서도 그 속에 당대 현실과 타개에 대한 열망을 우회적으로 담아냈다. 특히, 王維의 작품을 모티브로 해 지은 매화 관련 작품에서는 그의 문학적 성취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유배객의 문학적 성취와 승화는 보통의 유배객과는 다른 접근이다. 이러한 묘사가 가능했던 것 역시 척화 및 척사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왕권 의례요(儀禮謠) <도솔가>의 맥락과 의미

정진희 ( Jeong Jin-hee )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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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솔가>를 왕권 의례요로 활용된 향가로 보고, 활용의 맥락과 의례요적 의미를 고찰한 것이다. 『삼국유사』 <월명사도솔가>조의 기록에 따르면 <도솔가>는 두 개의 해가 뜨는 변고를 해소하기 위해 승려 월명사가 부른 노래이며, <도솔가> 연행으로 ‘꽃’이 소환되어 일괴가 해소되었고, 미륵은 이일병현의 변괴가 해소된 후 동자승의 모습으로 현현했다고 한다. 이 글은 <도솔가>가 산화공덕의 불교적 꽃 의례를 진가(眞假)를 판별하는 꽃을 소환하는 국선지도의 의례로 전환시켜 이일병현의 변괴를 해결했다고 보는 한편 미륵의 현현은 변괴가 해결된 세상을 전륜성왕이 지배하는 이상적 세계로 의미화하는 기호로 보았다. <도솔가>에 나타난 꽃과 미륵은, 불교적 표상이기도 하지만 신라 전래의 국선지도에 기반한 상징적 의미와도 연결되는 표상이기도 한 것이다. <도솔가>는 향가가 왕권을 위한 의례요로 포획될 때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창작되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인바, 왕권의 의례요와 민간 향어 노래의 상관성을 해명하는 하나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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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소장공동파(和蘇長公東坡)>는 유배 초 다산의 이상 공간에 대한 초기 구상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다산은 이 시기 다산초당과 이상 공간에 대한 글들을 통해 유인(幽人)의 삶을 실천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화소장공동파(和蘇長公東坡)>를 통해 다산이 이상적 유인 공간을 보고자 하였다. 이에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무실(務實)의 태도와 가난한 선비[貧士]가 궁핍에 매몰되지 않고 은일을 통해 선비다움을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가 그의 이상적인 유인 공간에 담겨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화소장공동파(和蘇長公東坡)>는 다산초당으로 구현되기 전 다산이 생각한 이상적 유인 공간의 초기 구상에 대한 단면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 그 의미가 크며, 이는 다산의 원림 인식과 이상 공간에 대한 인식을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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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초의 부부화답가인 <노부탄>과 <답부사>를 분석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이 작품들의 작가인 순천김씨와 김약련은 부부 사이임에도 자신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기억과 그것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방식에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노부탄>은 ‘늙은 부인의 탄식’이라는 제목의 뜻 그대로 순천김씨가 자신의 일생을 탄식조로 읊은 것이다. 그런데 작품의 내용은 남편의 과거 뒷바라지와 이를 둘러싼 치산(治産)의 문제로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규방가사 가운데서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자탄가와, 여성의 역할 가운데 특히 치산(治産)의 문제에 집중한 변형 계녀가인 <복선화음가>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답부사>는 부인이 지은 <노부탄>에 대한 김약련의 화답가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상층 남성들의 꿈과 욕망을 집약한 <남아가>를 모델로 삼아 남자로서의 자신의 일생을 과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답부사>는 전체적인 틀에서 <남아가>의 전통을 이었으나 세부적인 측면에서는 <남아가>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남아가>에서 강조되고 있는 신나는 놀이와 유흥, 화려한 관직생활 등에 대한 내용은 대폭 축소된 대신에 <남아가>에서는 간단하게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치사(致仕) 이후의 삶에 대한 내용이 작품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확대되어 있다. <노부탄>과 <답부사>의 이런 차이는 이들 부부 개인의 기억의 차이이자 조선후기 사회에서 통용되어 왔던 문학적 관습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여성문학인 규방가사와 남성문학인 <남아가>의 관습 차이가 발생한 것은 결국 그들의 실제 삶이 그렇게 달랐기 때문이다.

석주 권필의 <감회(感懷) 3수(首)> 연구

황수정 ( Hwang Su-jeong )
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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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석주 권필의 <감회 3수>를 연구한 것이다. <감회 3수>에 나타난 진정성을 고찰하였다. 감회시(感懷詩)는 감구지회(感舊之懷)의 시로 마음에 느낀 생각과 회포(懷抱), 감상(感想) 등 지난날을 생각하며 느낌이 일어 쓴 시를 말한다. 이처럼 감회시는 보통의 느낌과 서정, 또는 제목 달기가 모호한 서정시일 경우 감회의 제목을 달기도 한다. 석주의 <감회 3수>는 시국에 대한 강한 페이소스와 지식인로서의 자세를 담았다. 석주의 감회시에서는 주로 나그네의 회포 등을 다룬 내용이 많다. 그러나 <감회 3수>는 감회에 의탁하여 시국에 대한 근심과 비판을 진솔하게 그려냈다. <감회 3수>에서 보여준 시인의 진솔한 정회(情懷)는 감회시의 진정성을 가늠할 수 있게 하였다. 일반적으로 감회시에서는 세월의 덧없음, 인생무상, 곤궁함, 정치적 불운에 대한 회포를 읊는다. <감회 3수>에서는 시국에 대한 비애감과 냉철한 현실 인식과 풍자, 그리고 지식인의 자세와 절조를 실었다. 백성들의 고충을 눈앞에서 목도하면서, 조선의 산천과 백성에 대한 연민을 표출하였다. <감회 3수>는 세 수의 연작시로써 개인적인 정치적 불운과 침울에만 머물지 않았고, 시대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함께 지식인으로서 절조의 자세를 담은 것이다.

백곡 김득신 시 비평 연구

허윤진 ( Hur Yoon-j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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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7세기의 개성적인 시인이자 비평가인 백곡(柏谷) 김득신(金得臣)의 『종남총지(終南叢志)』 소재 시화 48칙을 대상으로 하여 그의 시 비평을 연구한 것이다. 백곡 김득신의 시 비평은 주제적으로 크게 비평론과 창작론으로 나누어진다. 비평론에서는 비평이 외부적인 요소에 좌우되지 않는 작품에 대한 객관적 가치평가여야 함이 드러난다. 그러한 비평의 객관성은 상이한 비평적 입장들에 대한 비평가의 변증법적 사유 과정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창작론에서는 문학의 타자성이 중시된다. 문학은 창작자 자신의 능력이나 생각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창작자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천기(天機)나 조화(造化) 같은 타자적인 작인의 작용이 필요하며, 또는 창작자 스스로의 도저한 반복적인 독서가 필요하다. 이러한 반복적인 독서는 창작자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앎을 갱신해 가는 과정이다. 독서는 인간이 자신과 세계의 문제 상황을 돌파하여 죽음의 상태를 초월할 수 있는 과정이자 방법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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