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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가문화연구(구 한국고시가문화연구)검색

The Studies in Korean Classic Poetry and Cul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2466-1759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47권 0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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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6년에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된 <오련가>의 작품에 대한 성격과 의미지향, 그리고 그 시가 문학사적 위상을 좀 더 새롭게 이해하여 보고자 작성되었다. 해남의 향촌사족이 복길이 지은 <오련가>는 선행 연구의 분석적 성과처럼 相思曲類의 시조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면밀하게 작품을 살펴보면 10수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이복길이 그의 아내인 해미백씨에게 지어 보낸 寄內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작품이 지닌 성격은 더 복잡하다. 이 작품은 창작정황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연구자의 해석적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본고에서는 작자인 이복길을 시적 화자로 해석한 선행연구와는 달리 해미백씨가 시적 화자인 작품으로 판단하였다. 그 근거는 이 작품을 수록한 『전가비보』의 편제와 감성표출의 양상, 시어의 구사 등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이복길의 애정한시에 대해 해미백씨가 화답하는 부부 애정시조적인 성격을 지닌다. 물론 작자는 이복길이지만, 화자를 해미백씨로 설정하였기에 이러한 시적 효용을 지닐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전가비보』에 실린 시 작품들은 장르 혼재적인 부부수창시의 형식을 지니며, 한국고전시가사에서 그 기원을 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식영정에 비친 임억령의 삶과 현판

임준성 ( Lim Jun-s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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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석천 임억령이 성산동에서 지냈던 삶과 식영정 현판의 문화콘텐츠적 가능성에 대해서 소략하나마 시론적 성격을 띠고 논의하기 위한것이다. 임억령은73세의삶을지내오면서 스승인 눌재 박상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고향 해남에서 올라와 당시 동문수학 했던 김윤제가 살던 곳으로 놀러오면서 처음으로 성산동에서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과거에 합격하여 환로생활을 지내면서 담양부사를 끝으로 64세때에고향 해남이 아닌 성산동으로 내려왔다. 그곳에는 첩실인 양씨부인과 두딸이 살고 있었으며, 자신을 따르는 후배 문인들이 있었다. 사위 김성원이 자신을 위해 ‘식영정’을 지어주면서 그곳에서 만년을 보냈다. 그가 성산동의 승경을 노래한 시가 350여 수가 적지 않음을 볼 때 그의 삶에서 성산동은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본고가 주목했던 것은 임억령의 가족, 곧 양씨 부인과 두 딸의 존재였다. 임억령에게 고향이 아닌 성산동은 곧 가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기존의 연구에서 간과하였던 임억령의 성산동 가족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선산임씨족보와 제주양씨족보를 비교 검토하면서 밝히고자 하였다. 그 다음은 식영정 누정의 문화콘텐츠적 가능성이다. 식영정은 전남담양을 대표하는 누정의 하나로 인근의 소쇄원, 환벽당과 함께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 할 정도로 유명하다. 누정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문화활동의 중심공간으로 당대의 인물들이 교유를 나눴던 곳이다. 누정을 중심으로 원근의 자연환경은 물론이고 누정에 걸린 현판은 스토리텔링 요소로도 재구성이 가능한 문화콘텐츠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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俛仰 宋純의 漢詩는 오랫동안 학계의 주목 대상이 되지 못하다가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연구성과를 통해 면앙 한시의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양상은 어느 정도 밝혀졌다. 이제는 작품에 대한 다각적 접근으로 이해의 폭의 확장과 심화가 절실하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의 시문학에 담긴 美的 特質을 화자의 성격 분석을 통해 해명해보고자 한 試論的 고찰이다. 본고는 먼저 면앙 한시를 그가 걸어온 삶의 역정과 연계하여 파악하고, 아울러 시적 화자와 관련한 미적 특질의 대표적 양상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였다. 俛仰 漢詩의 話者와 美的 特質을 ‘自己告白的 話者와 삶의 眞實性’과 ‘觀照的 話者와 自己 正體性’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삶의 진실성과 자기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면앙 시문학이 가지는 미적 특질의 전부는 분명 아닐 것이다. 아울러 이 두 가지 성격이 과연 시작품 속에서 뚜렷하게 구분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다만, 본고는 두 화자가 때로는 유사해 보이면서도 지향하는 바에 있어서 유의할만한 차이가 나타난다고 보고 구분을 시도한 것이다. 이제 축적된 성과들을 기반으로 호남문인 그룹의 성격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재검토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기존 연구를 반성적으로 소화하면서, 새로운 시각의 작품분석을 통해 호남문학의 특징적 제국면을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조선전기와 후기를 연결하는 漢詩史的 脈絡 속에 이들의 文學史的 位相을 재정립하는 것이 남은 과제이다.

면앙정 송순 문화자산의 문화콘텐츠 활용 가능성

박기수 ( Park Ki-soo )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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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면앙정 송순의 문화자산을 기반으로 문화콘텐츠로의 활용가능성을 모색함으로써, 송순의 문화자산을 현재로 소환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향유하기 위한 것이다. 본고에서 말하는 문화자산이란 문화를 매개로 가치를 지속적으로 창출 하고 있거나 창출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고유성, 차별성, 현재성을 가지고 있는 일체의 자산을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송순의 문화자산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문학적 자산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현했던 담양과 지역의 문화생태계를 구현하는 다양한 요소까지 통합적인 관점에서 규명해야 한다. 송순의 문화자산은 크게① 원천스토리를 지니고 있는 송순의 삶 자체, ②시가문학(詩歌文學)의 유산, ③ 학통(學統)과 문통(文統)의 계보학(系譜學)적 유산, ④ 면앙정(俛仰亭)이라는 유형유산, ⑤담양이라는 장소자산으로 나눌 수 있다. 송순의 문화자산을 기반으로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 목적은 송순의 문화자산을 발굴하고 선양해야 한다는 문화적인 가치 창출뿐만아니라 경제적인 가치 창출에도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목적의 성격과 문화자산의 특성을 고려할 때, 그것은 담양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자산을 기반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문화콘텐츠의 지향과 정체성을 결정하는 5W1H는 구현 전략을 마련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5W1H로 송순의 문화자산과 상관하여 담양이 이미 확보하고 있는 자산을 살펴보면, ‘언제 (When), 어디서(Where)’는 어느 정도 구비되어 있지만, ‘누가(Who), 무엇을(What), 어떻게 (How)’의 부분은 상당히 미흡하다. 본고에서는 전략적 차원에서 송순의 문화자산의 문화콘텐츠로의 활용을 5W1H의 각 항목별로 점검하며 전략적 차원에서 반드시 고려해야할 요소에 대하여 제안하였다. 송순의 문화자산이 지닌 가치나 구현 공간으로서 담양이 지니고 있는 자산은 분명하다. 다만, 그것이 문화콘텐츠로 구현하고 지속하기 위한 고민은 거시적 관점에서 단계별로 전개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사업의 정체와 지향을 차별적으로 선점하는 일이 중요 하다.

「어고방(御考榜)」으로 살펴본 정조대 도과시험 고찰

김희태 ( Kim Hee-tae )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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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사민속박물관소장 「어고방(御考榜)」은1798년(정조22) 광주목에서 설행된 과거시험 도과의 합격자 명부로 정조가 직접 내려 ‘어고(御考)’라는 첨지가 있다. 광주목 도과의 시(詩) 과목 시제가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2)의 회방연(1579년, 선조 12)과 관련이 있는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이다. ‘하여면앙정’의 시해(詩解)를 통하여 송순은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문장력은 당세 으뜸이라는 점, 네 분 임금을 섬기면서 정도를 실행하였고 관직에서도 엄정하게 임했다는 점, 고향 면앙정에서 우주를 두루 살피면서 유상 강학하였다는 점 등 임금을 사랑하는 충성심이나 60년 관직의 공정함 등을 강조하였다. 이 같은 면앙의 생평을 축하하고자 문인 제자와 인근고을의 수령들이 참여하였고 모두가 감탄하면서 광영의 자리가 되었고 죽여(竹輿)를 메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호남 선비의 기개를 기리면서 노래하게 한 뜻이 시제에 내포되어 있었다. 정조 임금이 지역인 재선발을 내건 것이라 전라도 각지에서 유생이 참여하여 다섯 과목 중 세 과목을 객사인 광산관(光山館)에서 치렀다. 합격자명부인「어고방」은 69명의호남유생들의 과거 시험에 대한 기록으로 당시의 제도사는 물론 향촌사회사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어고방」에 수록된 69명 가운데 합격자는 53명이다. 가장 점수가 높은 2명(高廷鳳, 任興源)에게는 직부전시(直赴殿試) 자격을 주고 급분(給分) 14푼을 인정하였다. 다음 단계 성적을 받은 사람2명(朴宗民, 鄭冑煥)은 경기전과 조경묘의 참봉(종9품) 벼슬을 주고 급분12푼을인정하였다. 16명의차상(次上) 유생들에게는 『사기영선』, 『주서백선』, 『오륜행실』 등의 서책과 붓과 먹과 종이를 하사하였다. 「어고방」등재자 69명의 직역을 보면, 유학(幼學) 49명(33명, ( )는 합격자 수 , 이하 같다), 생원(生員) 7명(7), 진사(進士) 12명(12), 통덕랑(通德郞) 1명(1)이다. 통덕랑은 정5품 문신의 품계이다. 연령을 보면 최연소 25세부터 최고령 78세까지이다. 20대는 2명, 30대는 12명(7), 40대 20명(11), 50대 21명(21), 60대 12명(12), 70대 2명(2) 등이다. 성씨별로 보면 반남박씨4명(4), 하동정씨4명(3), 순천박씨3명(2), 전주이씨3명(3), 함평이씨 3명(1), 영일정씨 3명(3), 고령신씨 3명(1), 광주김씨 3명(2), 나주임씨 2명(2), 남원양씨 2명(1), 남원윤씨2명(1), 연안이씨2명(2), 풍천노씨2명(1), 울산김씨2명(2), 의령남씨2명(2), 장택고씨 2명(2), 행주기씨 2명(2) 등이다. 1명을 낸 성씨는 25개(19) 성씨이다. 거주지별로 보면, 광주 23명(16), 순창 12명(6), 나주 6명(6), 창평 6명(5), 남원 4명(2), 보성 2명(2), 영광2명(2), 장성2명(2), 장흥2명(2), 고부(1)·고창(1)·능주(1)·담양(1)·동복(1)·익산(1)·함평(1)·해남(1)·화순(1)·흥덕(1) 각 1명이다. 「어고방」은 고정봉에게 사급되었던 문서인데 원래 전하던 문서와 떨어져 있다가 지금은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관련 문서인 수촌 고정봉 고문서도 조사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광주 과거시험을 주제로 특별 기획전이 열렸고 고문서 해설 도록도 간행되었으며 고문서도 기증되었다. 그리고 김재박의 ‘하여면앙정’ 시권, 김치복에게 내린 내사본 『사기영선』등원본문서가 조사된바 있다. 기학경의 ‘하여면앙정’ 시는 문집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최근에는 책(策) 과목의 ‘어제책문’으로 전하는 문서도 소재가 확인되었다. 보다 더 자세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면서 공유화의 길도 모색해 갔으면 한다.

면앙정의 내력과 공간인식 고찰

김현진 ( Kim Hyun-jin )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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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면앙정의 내력과 공간인식을 고찰한 것이다. 정자이름 ‘俛仰’의 의미는 맹자의 ‘君子三樂’에서 차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호연지기를 기반으로 사욕을 극복하여[克己] 부끄럼이 없는[無愧] 삶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바람을 투영한 것이다. 면앙정은 송순이 1533년 현 담양군 봉산면 제월봉에 3칸 초정으로 지은 누정이다. 1552년 1차 중수가 있었다. 이후 정유재란(1597) 때 소실되었는데, 1610년 이전에 복원된 것으로 추정되며, 1654년 후손들이 또 중수하였다. 그 뒤 1700년대와 1800년대는 기문과 제영시를 통해 존재가 확인된다. 그러다1930년에중수하였고, 1972년전라남도지방문화재제6호로지정되었으며, 1979년보수되었다가 1989년 즈음 마지막으로 중수되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전한다. 면앙정의 공간은 네가지로 인식된다. 첫째, 無愧不怍의 지향처이다. 군자지향과자연합일 추구한 송순의 자연 즐김은 道義的 삶과 직결되고, 이는 맹자의 浩然之氣와 결합 된다. 이를 정자명‘면앙’의 의미와 연결해보면, 호연지기를 기반으로 사욕을 극복하여 부끄럼이 없는[無愧]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식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湖南詩壇의 선도 공간이다. 송순의 시조와 가사작품은 호남시단을 비롯한 담양지역 문인들에게 가사작품 창작의 動因이되었고, 그의 면앙정은 호남시단을 이끄는 중추 공간이었다. 셋째, 湖南最勝處와 看人看世의 심미 공간이다. 호남의 최고 조망을 자랑하는 면앙정에 오른 시인들은 그 공간에서 승경을 조망하고 송순을 비롯한 선현들을 회고한 소회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담아내려는 심미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넷째, 御製詩題의 배경처이다. 면앙정은 송순의 과거급제 60주년, 이른바 회방연을 기념하여 모인 호남 대표 사림들이 그를 가마에 태운[荷輿俛仰亭] 고사가 있다. 正祖는 호남의 재주 있는 선비들에게 명성을 드러낼 기회를 주고자 그 고사를 활용하여 道科의 詩題로 삼았다. 이후로 이 일은 후인들에게 지속해서 회자되었다.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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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영조대에 활동한 노봉(蘆峯) 김정(金: 1670∼1737)의삶과그의시에나타난 지향의식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노봉시의 생성배경은 그가 법도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다음은 노봉자신이 특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특이한 능력은, 첫째 그는 어려서부터 국량(局量)이 남달랐다. 둘째 어려서부터 머리가 명석하여 고금의 책을 두루 섭렵하였다. 셋째 그가 일찍 부친상을 당하여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자신의 강한 의지로 극복하였다. 넷째 훌륭한 스승이나 선배를 만나 학문과 정신이 무르익었다는 점이다. 그의 시의 형식적 특징은 첫째 그의 시는 대부분 정형(定型)의 근체시인 절구(絶句)와 율시(律詩)로 이루어졌다. 둘째 그의 시에는 첩자(疊字)를 통하여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셋째 그의 시에 나타난 상황묘사가 사실적(寫實的)이다. 그는 전지적작가(全知的作家) 시점(視點)에서 그가 맞은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난 지향의식(志向意識)은, 첫째 옛 성현을 바탕으로 한 자아(自我) 성찰(省察)이다. 둘째 닫힌 공간에서 열린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셋째 그는 소박한 삶과 고고(高古)한 인품(人禀)을 지향하였다. 넷째 그는 인간의 본분(本分)을 통한 외물(外物)과의 화합을 지향하였다. 그는 인문주의를 추구한 전통 유가(儒家)의 우주관을 지니고 있었다.
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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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다양한 장르에서 유사성을 공유하는 동파와 추사의 작품중 流配詩를 통해 그들의 문학세계와 정신세계를 살펴보았다. 流配詩 중 동파는 술을 주제로 한 시에 집중하고, 추사는 차를 주제로 한시에 집중해고 찰했다. 둘다 기본적으로는 술과 차를 즐겼고, 유·불·도에 두루 통하는 지식인들이지만 술과 벗하며 한과 감흥을 다스린 동파는 불교를 혼융한 도가사상에 친숙하고, 평소 차를 애용한 추사는 불교적 색체가 강하기 때문이다. 동파가 술을 통해 낭만과 취흥을 북돋운 반면 추사는 차를 애용하며 정신의 청정을 다스렸다. 술이 외향적이라면 차는 내향적 성향을 상징한다고 볼 때 두 사람의 기호적 배경에는 각각의 성격이 반영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소식의 시에는 유·불·도를 통섭한 도가적 기풍에 술의 취흥이 배어있으며, 추사의 시에는 불교적 색체가 짙고 차의 신령한 기운이 감돈다. 이 점에 주목하고 본고는 동파의 술에 관한 시와 추사의 차에 관한 시를 텍스트로 삼아 둘의 시 세계를 살펴보았다. 동파와 추사의 정신세계와 사상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데, 시는 중요한 단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의 시에 대한 연구는 동파에게는 그의 문학세계의 지평을 확장하는 작업이며, 추사에게는 書畵에 가려 지금까지 소홀했던 문학적 가치를 재평가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화려한 기교보다 실질을 추구한 추사의 시에는 밀도 깊은 경제적 언어가 시가의 핵심을 이루는데 특히 제주도에서의 시에서 이와 같은 기풍이 돋보인다. 한편 동파의 시에는 우주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낭만주의적 성향이 돋보인다. 이와 같은 시적 경향은 특히 유배지에서 현실과 유리되지 않으면서도 세속에 초연한 달관의 경지를 선보이고 있다. 추사는 기교를 철저히 배제하고 궁극의 실질을 추구하는데 비해 소식은 풍부한 상상력과 기교를 살려 내용과 사유를 적절히 담아내는 활달한 기질을 발휘한다고 볼 수 있다.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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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이후 다섯번이나 병조판서가 될 정도로 실무에 밝은 인물이었지만, 인목대비의 폐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지인 북청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백사는 전체 6수의 시조를 남겼으며, 본고에서는 5수의 작품만을 유배시조로 보아 그 특징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백사의 시조를 분석하기에 앞서 북청 유배의 동인과 북청 유배에 대한 백사의 심정을 살펴보았다. 인목대비의 폐위 사건은 윤유겸의 상소에서 시작되었으며, 윤유겸은 인목대비의 폐위를 주장하기 위해 그녀의 부친인 김제남을 비난하였다. 김제남에게 역적의 죄를 더해 추형(追刑)을 선고하여야 인목대비의 폐위를 주장하기가 쉬웠기 때문이었다. 또한, 『춘추』의 고사를 차용하여 광해가 인목대비와의 관계를 끊고 인목대비가 광해에게‘일반사람’이 되게 하라고 종용하기도 하였다. 이에 백사가 순임금의 이야기를 통해 인목대비를 폐위시켜야 한다는 윤유겸의 상소를 논변(論辨)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백사가 광해에게 효를 강요한 것이 의도된 오역(誤譯)으로 오히려 백사를 유배형에 처하게 한다. 유배시조를 통해 백사는 광해에 대한 자신의 충의를 표현하였으며, 유배자가 되어야만 했던 세태에 대해 비난하기도 하였다. 백사와 그의 문학에 대한 선행연구 중 유배시조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소략하여, 본 연구를 통해 백사의 북청 유배와 시조에 기술된 유배자로서의 백사의 심정을 분석해보고자 하였다.

고산 윤선도 동시(東詩) 「문인폐육아(門人廢蓼莪)」 고찰

임귀남 ( Lim Kwi-nam )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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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詩는 科體詩, 行詩, 功令詩, 東人詩 등으로 불리는데 애초 과거시험용 답안으로 창작되다가 과체시를 포괄한 개념으로 사용한 우리나라만의 특유의 詩體이다. 본 논문은17세기전반시조시가 東詩문학의대표적작가인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東詩 「문인폐육아(門人廢蓼莪)」를 살피는 데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서 먼저 조선 시대 문집에 실린 『시경』 「육아」를 수용한 작품들을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로 나눈다. 그리고 각각 그 시기의 수용 양상을 고찰한다. 이어 윤선도의 한시 속에는『시경』 「육아」편이 어떠한 형태로 구현되었는지, 그의 작품에 실현된 『시경』의 표현 기법과 한시의 대구기법을 위주로 살펴본다. 특히 그의 東詩 「문인폐육아」속에 투영된 왕부의 ‘폐육아(廢蓼莪)’ 고사가 어떻게 시로 형상화가 되었으며 그 정도를 내용분석과 함께 확인하고 이를 통해 작품의 내외적인 특징을 종합·정리하여 효행 문학사에서 윤선도 작품은 어떠한 의의를 점하는지 논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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