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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논집검색

Journal of The Society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어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6-6388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63권 0호 (2011)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이전의 주몽(朱蒙) 신화(神話) -책략적(策略的) 영웅들의 행방-

김흥규 ( Hung Gyu Kim )
민족어문학회|어문논집  63권 0호, 2011 pp. 5-48 ( 총 44 pages)
1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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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414년에 세워진 「廣開土王陵碑」를 핵심 자료로 삼아 그 이전의 주몽 신화가 어떠했는가를 논한 것이다. 「광개토왕릉비」와 『위서』 고구려전은 주몽 전승에서 해모수-하백 대결과 유화 추방이라는 화소들이 5, 6세기보다 뒤에 첨가되었으리라는 추정의 근거로 자주 거론되었다. 그러나, 서사 단위들의 의존 관계를 분석해 보면 이 문헌 증거들의 해석은 역전되어야 한다. 유화가 금와왕의 궁궐에 갇혀 신비로운 빛을 받고 회임하려면, 먼저 수궁으로부터의 추방과 그것을 불가피하게 하는 원인이 있어야 한다. 해모수의 북부여 강림, 詭術에 의한 유화 포획, 혼사를 둘러싼 해모수-하백의 경쟁과 책략 등이 이를 위한 서사단위로 긴밀하게 얽혀 있다. 「광개토왕릉비」가 이 모두를 생략하고 추모왕의 신성한 혈통만을 강조한 것은 비문의 제약과 정치적 수사의 필요성 때문이지, 당시까지의 고구려 건국 신화가 천상에서의 행복한 혼인·출산과 주몽의 북부여 강림 및 여유로운 南行으로 구성되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서두 부분과 함께 책략적 영웅의 모습이 뚜렷한 주몽-비류국왕 대결 단락은 서사 내용과 고구려 정치사의 조응 관계에서 3세기 말 이전의 정착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詭計와 주술로써 비류국왕을 굴복시키는 ``성스러운 탈취``는 주몽 신화의 桂婁部 중심적 시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치적 인식의 지형으로 볼 때 이 단락은 두 개의 동심원으로 이루어진 집단 구획에서 안쪽 원의 ``우리``인 계루부가 그 바깥의 ``저들``인 비류국과 대결하여 승리하고, ``더 큰 우리``라는 外圓에 포섭하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집단 의식의 중층성은 계루부 왕권의 성장이 아직 部 체제의 간극을 해소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정치사적 상황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광개토왕릉비를 이정표로 삼을 때 그 이전의 주몽 전승에 가장 가까운 것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原註로 수록되어 전해지는 ``구삼국사``의 자료다. 『삼국사기』의 주몽 신화는 ``구삼국사``본의 신이한 부분을 덜어내고 축약하면서 『위서』 등을 부분적으로 참고한 재편집본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번역표기의 일관성과 로마자표기

정경일 ( Kyung Il Jung )
민족어문학회|어문논집  63권 0호, 2011 pp. 49-75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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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란 다른 언어권 사이에서 원천언어를 목표언어와 등가를 갖는 기호로 전환하는 과정과 결과물을 말한다. 이때 중요한 것이 고유명사를 표기하는 방법이다. 고유명사가 번역자에 따라 달리 표기되면 독자들은 고유명사의 일관성에 대해 혼란을 느끼게 되고 원천언어의 문화적 정체성을 잃을 수 있다. 한국문학 작품의 번역에 표기된 작가들의 이름을 확인해 보면 동일인임에도 다양한 표기가 나타난다. 이는 작가의 정체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를 드러내는 고유명사들의 번역표기 형태를 한가지로 고정시켜 국내외에 보급하여야 한다. 이것이 번역가나 글 쓰는 이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표기하게 되면 혼란과 불편을 겪게 된다. 고유명사의 경우에는 번역과정에서 의미번역이 이루어지지 않고 음성번역만 이루어지므로 목표언어의 표기방식이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된다.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려면 고유명사들의 번역표기를 고정시켜야 한다. 외국어를 한국어로 변환할 때 적용되는 한국어 표기 규범은 <외래어표기법>이다. 그리고 한국어를 외국어로 변환할 경우에는 <국어의 로마자표기법>이 적용된다. 이들이 우리 언어규범으로 제정되어 있는 이유는 번역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표기상의 다양성과 이로 인한 문화적 정체성의 혼란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관성의 확보를 위해서는 규범표기의 제정, 개별표기의 준수, 번역가에 대한 홍보와 교육 등의 방안이 필요하다.

대상 이동 동사의 낱말밭 연구

정연주 ( Yeon Ju Jeong ) , 이영제 ( Young Je Lee ) , 이화자 ( Hua Zi Li )
민족어문학회|어문논집  63권 0호, 2011 pp. 77-111 ( 총 35 pages)
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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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구조 의미 분석의 방법론에 따라 대상 이동 동사의 의미를 분석하고, 그것을 토대로 대상 이동 동사의 낱말밭을 탐구하였다. 각 동사들은 의미의 초점이 출발점, 이동 과정, 도달점 중 어디에 있는지, 도달 양상이 어떠한지, 이동의 결과로 어떤 상태에 있게 되는지, 이동 양상이 어떠한지, 도달점과 이동 대상의 의미 특성이 어떠한지에 따라 다양하게 분절되고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한국어의 대상 이동 영역의 의미 분절 양상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유사한 동작이라도 도달점과 이동 대상의 의미 특성에 따라 단어들을 다양하게 구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체와 도달점의 상하 관계를 반영하는 어휘가 구별되어 있고, 대상의 도달점이 갖는 성격(운송 수단 여부, 유정물 여부)에 따라 어휘가 구별되어 있다. 또한 단일어 이동 동사에 경로나 방법의 의미가 포합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고, 경로나 방법을 나타내는 어근과 이동을 나타내는 어근이 결합하여 하나의 이동 사건을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더해, 경로나 방법 외에 이동에 결과 상태 의미가 포합되는 유형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본래 의미가 유사하여 의미 자질이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 어휘들이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어 온 결과로 어휘의 의미 자질까지 구별되는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고급 한국어 교재 내 읽기 자료의 텍스트 전형성 연구 -사설,칼럼 텍스트 분석을 바탕으로-

이승연 ( Seung Yeon Lee ) , 장미경 ( Mi Kyung Chang )
민족어문학회|어문논집  63권 0호, 2011 pp. 113-140 ( 총 28 pages)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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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읽기 교육에 있어서 학습자들에게 형식면에서 전형적인 텍스트를 제공하는 것은 그들의 스키마를 개발하고, 글에 대한 이해력을 증진시켜 의사소통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교재 편찬이나 교육 자료 개발을 위해 텍스트를 다룰 때 그 형식상의 특성이 훼손되거나 무시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연구에서는 신문 말뭉치의 사설·칼럼 텍스트 분석을 통해 그 형식적 특성을 외적 형식(지면 구성 및 시각적 장치, 저자 정보, 분량)과 내적 형식(표제 구성과 특징, 논지 전개 방식, 필자-독자 간 거리 및 문체)으로 나누어 추출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현용 한국어 교재에 실린 사설·칼럼 텍스트의 전형성을 검토한 결과를 바탕으로 교재 텍스트가 전형적 특성에서 벗어난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하였다. 그리고 향후 한국어 읽기 교육을 위한 텍스트로 사설·칼럼을 선정하거나 제작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읽기 자료로서 텍스트가 지녀야 할 형식적 틀의 중요성을 환기하고, 학습자들의 형식 스키마를 개발할 수 있는 교육용 텍스트 개발에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0세기 초 한국의 문명전환과 번역 -중역(重譯)과 역술(譯述)의 문제를 중심으로-

김남이 ( Nam Yi Kim )
민족어문학회|어문논집  63권 0호, 2011 pp. 141-172 ( 총 32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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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역``과 ``역술``이라는 20세기 초반 한국의 번역의 특성에 주목하며, 이를 문명의 전환과 소통의 관점에서 살펴본 것이다. 근대계몽기의 ``번역``, 특히 20세기 초의 번역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의 번역과 조금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 그 특징 중의 하나는 ``譯述````譯說``의 방식이다. 번역자의 언술이 일종의 편집 행위(삭제, 축소, 확대)를 거치며 번역 텍스트에 적극 개입하는 경우이다. 다음은 ``重譯``인데, 이 시기의 많은 번역 텍스트들이 서양의 원본을 기점으로 삼아 영어→일어/중국어→(국)한문으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중역과 역술은 20세기 초반의 번역의 특징을 대표하는 한편으로 부정적인 역할 또한 했다. 기점 텍스트에서 목표 텍스트로의 ``전이``와 그 결과의 ``등가성``만을 지표로 삼고 보면, 원본 텍스트대로 번역하지 않을 뿐더러, 번역자가 개입까지 한 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질이 떨어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 것으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역과 역술은 당대 조선 지식인이 외부세계를 ``번역하는(수용/거절/전유)``의 방식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미를 재맥락화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반 한국의 번역은 망국과 구국, 그리고 성장과 자조라는 당대 조선의 분명한 현실적 필요에 따라 텍스트를 재배치하고 구성하는 것을 주된 목표와 의미로 삼고 있었다. 번역은 언어에서 출발해 문화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어니와 20세기 초 한국의 번역 또한 그러한 문화적 소통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져야 한다. 20세기 초반의 번역 텍스트들을 통해 우리는 문명의 전환기에 맞닥뜨린 이 시기에, 서구 대 동양 또는 식민과 피식민과 같은 위계나 영향의 수수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번역`` 또는 문화간의 ``소통``의 국면이 있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시집전상설(詩集傳詳說)』에 보이는 『시경언해(詩經諺解)』에 대한 번역학적 고찰

김수경 ( Su Kyung Kim )
민족어문학회|어문논집  63권 0호, 2011 pp. 173-194 ( 총 22 pages)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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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박문호의 『詩經』 해석을 통해 조선시대 『詩經諺解』에 대한 번역적 특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데 주요 목적이 있다. 박문호는 朱熹 『詩集傳』을 『詩經』 이해의 기준점으로 삼았다. 그러한 까닭에 지역적·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판본을 수집·검토하는 작업을 진행시켜, 『詩集傳』 판본의 정확성을 기반으로 『詩經』 이해 수준을 높이고자 하였다. 구체적인 내용 측면에 있어, 박문호는 『詩經諺解』의 한자 표기음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현실음보다는 정칙음으로 한자음을 교정하려 하였으며, 『詩集傳』의 音註와 訓釋을 적극 반영하려 하였다. 『諺解』의 번역을 분석할 때에는, 『詩經』 텍스트가 지닌 고정 句式·同句의 반복적인 출현 특성을 인식하고 이를 반영하려 하였으며, 시제의 변환·우리말의 효과적 표현 등, 원천텍스트언어에서 대상언어로 변환시키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였다. 박문호의 이러한 인식과 고민은 『諺解』에 반영된 인식과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측면에서 볼 때, 박문호가 『諺解』를 이해하는 시각은, 현재 우리가 『諺解』를 이해하는 데, 그리고 우리가 번역을 이해하는 데 일정한 참고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비지(碑誌)의 찬작(撰作) 성향(性向) 고찰(考察)

박관규 ( Kwan Kyu Pak )
민족어문학회|어문논집  63권 0호, 2011 pp. 195-234 ( 총 40 pages)
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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尤庵 宋時烈(1607~1689)은 17세기 조선의 정치 현장에서 남긴 족적이 뚜렷하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주자학자로서 문장에만 치력한 문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무려 550여 편의 碑誌를 撰作하여 麗末에서 우암 당대-17세기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 名人들의 삶의 애환과 풍취를 인상적으로 그려내었다. 본 논문에서는 17세기 碑誌 撰作의 현장에서 尤庵 碑誌의 위상에 주목, 尤庵 碑誌의 撰作 性向을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우암 비지가 자리하고 있는 당대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우암 및 그 지근의 인물들이 비지의 찬작 과정에서 나눈 제 논의들을 면밀히 조사하고 검토하여 우암 비지의 찬작에 관한 사건의 전말을 밀도 있게 점검, 당대의 시대적인 한계와 조건 속에서 우암 비지가 보여주고 있는 대응의 양상과 고민의 현장을 파악해 보았다. 碑誌는 先祖 및 先賢의 생애와 위업을 기록, 현양하고 기억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어지는 목적성이 강한 한문 문체이다. 따라서 請者의 입장에서는 撰者의 자격과 역량이 매우 중시되었다. 우암의 경우 20세 이후 西人系 學問家, 名門, 名人들과 인적, 학적, 정치적 관계가 면밀해졌을 뿐만 아니라 文筆 역시 당대 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부단히 회자되었다. 특히 그의 나이 53세를 전후하여 王室을 위시하여 그의 주변 지인들에 의하여 부단히 비지의 찬작을 요청 받았으며 또 이 요청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는데, 淸陰 金尙憲과 谿谷 張維의 계보를 이어 당대에 비지 찬작의 일가로 일컬어졌다. 우암은 一世의 是非를 정하는 수단으로써 비지의 기능을 중요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찬자의 조건과 비지의 전개 방향, 세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비지의 공효성, 伸寃의 기능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찬자의 자격으로 우암이 중시한 부분은 단순한 文才에서 더 나아가 찬자의 생애가 유학의 義理를 철저히 담지해야 하며 의리상에 一毫의 하자도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당시 우암이 완성하려 한 비지들이 유학 및 당시의 시대적 의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명인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만큼 문필 능력에서 더 나아가 유학의 소양이 높으며 義理가 분명한 인물이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찬자의 생애 역시 의리 상에 일체의 하자가 없어야 한다는 철저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암은 비지를 찬작한 후 청자의 요청에 따라 교정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작자의 義理 및 墓主의 인상과 인격이 비지 서술의 전개 과정에서 제대로 드러나야 한다는 의식이 주효하였다. 그러나 작품의 교정을 요청하고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청자와 찬자 간의 갈등이 노정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成文濬 및 尹宣擧의 생애를 기록한 「滄浪成公墓碣銘」과 「尹吉甫墓碣銘」을 둘러싼 제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滄浪成公墓碣銘」의 경우는 파산 문하와 사계 문하의 갈들을 해소하기 위한 실마리로 윤선거가 권유한 바 있으며 「尹吉甫墓碣銘」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老少 분기의 주요한 계기로 설명된 바 있었다. 그러나, 「滄浪成公墓碣銘」의 경우는 애초에 윤선거의 주장처럼 문하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계기로써 제시되기는 했지만 그 글이 찬작되기까지 수많은 논의와 갈등을 사전에 배태하고 있었고 「尹吉甫墓碣銘」의 경우는 그 찬작의 경위와 내용이 기존의 통념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음을 제반 자료를 종합했을 때 알 수 있었다. 비지의 찬작과 탈고의 과정에서 당대의 복잡한 논의들이 문예적 측면과 수사적 측면에서 제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논의가 정치적 논의로 확장되거나 정치적 위기의 가능성이 높아지기도 하였다. 문하와 문하, 집안과 집안 사이의 화합과 시비의 가능성, 17세기 서인계 문인 사회의 화합과 분열의 양상 또한 우암의 비지 찬작에 있어서 제기된 주요한 화제였던 것이다.

이광려의 서찰에 관한 일고찰

심경호 ( Kyung Ho Sim )
민족어문학회|어문논집  63권 0호, 2011 pp. 235-291 ( 총 57 pages)
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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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강화학파의 연구를 위해 관련 인물들의 시문집의 정본을 확정하고, 강화학파 내부 및 강화학파 지식인과 동시대 지식인들과의 관계를 고찰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점검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특히 본고는 문중본 『이참봉집』 필사본과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된 『이참봉집(간찰집)』을 자료로 삼아서, 이광려과 타인에게 보낸 서찰들을 모두 조사하고 계년화(系年化)함으로써, 이광려의 행적과 사상의 추이를 개관했다. 이것은 앞서 필자가 이광려와 서무수(徐懋修)의 관계를 조명할 때 사용한 방법을 확장하고 심화한 것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고찰을 거쳐, 이광려의 민생 중시 관념과 고구마 재배 노력에 대해 살폈으며, 이광려의 학술사상의 일단을 분석했다. 이광려는 비록 자신의 몸을 돌보고 가족과 친지의 병을 다스릴 목적에서 우선 갖가지 약방을 조사하고 연구했지만, 일반 민중의 건강 상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약방의 광범위한 효용을 염두에 두었다. 또한 이광려는 고구마를 보급하기 위해 일생 노력하여, 그 노력은 실로 1771년(영조 47)의 12월까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구마 재배는 자신만의 구황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그러한 노력에서 이광려의 민생에 대한 깊은 관심을 살필 수가 있다. 이광려는 양명학에 대하여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했으나, 1756년에 서무수에게 부친 제3편 서찰에서 목민관으로서 ``실심(實心)``을 지니고 백성을 구휼하라고 조언을 한 것에서, 그 기저에는 양명학적 사유가 있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또한 이광려가 서무수에게 보낸 서찰을 보면, 이광려가 학술사상면에서 국사나 국토지리에 깊은 관심을 지녔고, 유가 이외의 불교, 『노자』와 『장자』 등도 깊이 연구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이광려는 『노자』가 세속의 교폐(矯弊)를 목표로 했고, 장자의 인격이 극히 초원(超遠)하고 양결(良潔)하기에 『노자』와 『장자』를 좋아한다고 언급했다. 이것은 이광려가 「노자오칙(老子五則)」을 작성한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정두경 가행(歌行)의 형식미 연구

이남면 ( Nam Myon Lee )
민족어문학회|어문논집  63권 0호, 2011 pp. 293-336 ( 총 44 pages)
1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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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정두경 歌行의 형식미 구명을 목적으로 하였다. 정두경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면서 동시에 우리나라 시인 중 가장 古學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다량의 가행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들은 조선후기 문인들에게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본고에서는 바로 이 우수성이 사상과 주제의식의 훌륭함 때문만이 아니라, 사상과 주제를 도출해내는 방식에서 기인한 바 역시 크다는 인식에 따라 정두경 가행 창작의 실제를 ``변화``와 ``연결``의 측면에서 분석해보았다. ``변화``와 ``연결``은 바로 가행 창작의 성공을 가늠하는 주요한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정두경 가행에 나타나는 변화를 이덕무의 평가를 빌어 ``伸縮의 변화``로 규정하고, 이를 편의상 압운·구식·억양의 변화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정두경의 가행은 압운 방면에서 換韻과 함께 압운 거리의 변화를 통해 기세의 완급을 조절함으로써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정두경은 정형의 법칙을 사용하기보다 끊임없이 변화를 주었는데, 이런 변화는 시의 내용 및 분위기와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 변화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구식 방면에서는 우선 개두에 5언구를 사용하여 간략히 시작을 알리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궁금증을 유발시키거나 전개될 내용을 암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정두경은 인물이나 지역, 사물, 깨달음 등 특정 내용에 한정하여 강조하고 싶을 때 시 중반에 9언구를 돌출시키기도 하고, 역시 시 중반에 갑작스레 5언구를 돌출시켜 환운을 대신하여 시상 전환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정두경은 결미에 의문형의 長句를 사용하여 자신의 격앙된 목소리를 강렬하게 표출시킴으로써 주제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편 억양 방면에서는 ``억→양``, ``양→억``, ``억→양→억``, ``양→억→양``으로 구분하여 살폈는데, ``긴장과 해소``, ``형세의 역전``, ``칭송과 비판``, ``감정의 기복`` 등 다양한 억양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중에는 ``억``과 ``양``의 편폭 차에 따라 후반부를 강조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편폭을 동일하게 하여 ``억``과 ``양`` 모두를 강조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정두경은 시상의 연결도 중시하여 過段을 설정하기도 하고, 이미지나 속성의 유사성을 가지고 두 사물이나 현상을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동일한 위치에 동일한 용어를 중복 사용하여 리듬감을 형성하거나, ``此``자를 사용하여 앞의 내용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조응의 방식을 활용하거나 선련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연결방식은 개별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복합적으로 사용한 경우가 많았음을 확인해보았다.

번역과 조선시형의 창안 -김억을 중심으로-

김문주 ( Mun Joo Kim )
민족어문학회|어문논집  63권 0호, 2011 pp. 337-361 ( 총 25 pages)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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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진행된 외국문학의 수용과정은 한국근대문학의 방향과 양상을 구체화하는 핵심 동인이었다. 이전의 번역자들이 편내용중심(偏內容中心)의 번역을 수행하였던 데 반해, 김억의 번역 활동은 내용과 형식을 함께 존중함으로써 시문학 장르의 실체에 본격적으로 육박해 들어간 최초의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혜성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김억은 당대 번역자들이나 문학인들과 달리 원본(출발어 텍스트)에 대한 강박이 거의 없었으며, 아울러 시란 기표(記標)와 기의(記意)로 분리할 수 없는 문학 장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시는 번역이 불가능하며, 시의 번역은 새로운 시와 시형을 창안하는 작업이라는 인식으로 발전해 간다. 김억은 번역을 통해 새로운 조선의 시를 모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개진된 것이 ``情調``와 ``格調詩``였다. 그는 시의 형식을 정형의 틀로 인식하지 않고 ``인간 내면 운동의 표현``으로 보았으며, 시의 모든 음성적 자질을 시의 내용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주요 요소로 의식하였다. ``情調의 시학``은 시의 음성적 요소를 중시하고 궁극적으로 의미지상주의에 반대하는 김억의 詩觀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이후 원시적 감정 표현의 도야를 강조하는 ``格調詩``로 전환된다. 정조에서 격조로의 변화는 언어의 음성적 자질을 언어 내용의 비물질적 영혼으로 인식하고 시어의 음성적 자질의 가능성을 온전히 개방하려는 태도의 부분적 회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정형시(定型詩)와 자유시 사이에서 정형성(整形性)을 지향하는 김억의 리듬 의식의 산물이자 시의 음성적 자질을 중시했던 시의식의 결과였다. 시의 번역불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김억은 ``창작적 번역``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일련의 이해와 작업을 통해 그는 번역 과정에 내재된 상호주체성과 시적 언어의 고유한 자질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정조의 시학에서 격조시형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보여준 시의 음악성에 대한 그의 이해와 심미적 한계는 한국근대시사의 성취/실패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와 같은 그의 번역 작업은 한국근대시사의 내적 변화 과정을 해명할 수 있는 유력한 기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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