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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ES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중어중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6-294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64권 0호 (2010)

계찰관악(季札觀樂)을 통해 본 `악(樂)`의 의미와 지향

김학주 , 김순희 , 이현정
한국중국어문학회|중국문학  64권 0호, 2010 pp. 1-24 ( 총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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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稿從季札在魯襄公二十九年所欣賞的`樂`, 爲何表現爲`觀`一說的疑問点出發, 闡示了`周樂`里不僅有歌者, 同時也有舞者和唱者的演出。 《詩經》里的詩, 從字面上看, ?只是詩而已。 但看當時演出情況, 就可知扮裝之人的特定動作或者隨舞而歌的歌詞。 卽先秦時期的`樂`是詩·歌·舞熔於一體的綜合藝術形態的槪念。 儒家的`樂`, 其意思一般多伴隨着禮而表露出來。 到禮樂制度整理完善的周朝, 在樂中的`舞`的地位更達到了穩固。 周公和孔子把樂舞當作打好政治, 經濟, 社會, 文化基礎的, 體現禮的重要手段。 `樂`的作用超過單純的歌舞槪念, 進一步達到了敎化人和社會的總體品行的地位 季札所批評的六種舞, 與周公所定立的`六代舞`實際上相同。 孔子也對`樂`進行了批評, 他的論評也和季札一樣, 在`六代舞`中,把<韶?>爲最理想, 最高的作品。 通過以上論述, 闡明了中國古代`樂`的綜合藝術性―視覺的效果不亞於聽覺的效果。 也可以考察了儒學所追求的`樂`的意義和中國`樂`的意義。 現在中國的戱曲與西歐的演劇槪念不同。 ?是以唱, 念, 做, 打構成的。 這就從始於先秦時期`樂`里, 已可尋起源。 淸代以後越來越强化演劇化因素的中國地方戱和民間演戱―秧歌, ?花落等―都是這樣基礎上形成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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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方修辭學起源于古希臘的演說技術。 這時的技術包括立論和修?詞句的藝術。 演說在古希臘被廣泛運用于政治, 經濟上的訴訟, 說服就成爲演說的主要目的, 而論證也在說服中起着重要作用。亞里斯多德承襲古希臘的傳統修辭, 以說服和論證爲主要?架設計了演講論辯修辭理論。 他的修辭學注重於聽衆心里, 構思過程, 論辯, 文體風格等說服和論證方面。 從此西方修辭學本身也經歷了內涵意義上的不斷擴展。 但亞氏修辭學在意思上基本與當時中國以文辭修辭硏究爲主的傳統修辭槪念有一定的差異。在中國的傳統修辭的視角看, 古代中國修辭與西方的說服爲主的修辭有一定的差異。 但先秦時期諸子的相關論述中我們不難發現以說服爲重点的修辭思想, 韓非子的<說難>和<難言>被?多人理解爲正面宣傳說服技巧的典范。 中國古代修辭雖涉及說服修辭, 但這種修辭不同于古希臘對公衆演講和辯論, 尤其是以君主爲唯一對象的說服不同于公共演說。 因此, 這兩篇都通過對君主心里和說服的語境的分析, 說明說服的艱難和危險。 在這種特殊的說服環境下, 韓非子提出了說者必鬚具備的基本素質。 說者必鬚要證明自己是可以信賴的人而且有倫理道德的品德和善良的態度, 使聽者處于互相信賴的心理狀態, 這樣才能比較容易地說服聽者。 說者先要充分洞察聽者的心里期盼, 恰當地調整言辭來說服他。

도연명(陶淵明)의 고독의식 탐원(探源)

노상균
한국중국어문학회|중국문학  64권 0호, 2010 pp. 51-74 ( 총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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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論文將陶淵明作品里所一貫潛流的主要意識看爲孤獨意識, 竝以三個遞層的階段, 卽本性及世界觀所緻的孤獨感, “淹留無成”的自我省察所致的孤獨情緖和知音的不存在所致的窮極的孤獨意識, 來深入分析出他內心深處所潛流的孤獨意識的根源. 他的本性屬於旣耿直又內向的這一類型, 竝愛好自然朴素的生活, 厭惡複雜多端的政治及社會現象, 由此産生“稟氣寡所諧”的和他人及社會之間的隔?, 這便是産生孤獨情緖的第一層原因. 在歸去田園之后, 雖能過本性所愛好的“孤閑”的生活, 但“淹留無成”的自我省察所致的慨嘆和孤獨情緖壓倒這一“閒”的價値, 尤其是他對有限生命的憂慮感特別敏銳, 因此不斷努力去尋求生命的價値和存在意義, 竝追求生命的無限. 但是因爲他身處在窮僻的田園里, 所以根本無法實現他“功成辭歸”的政治理想, 而且“躬耕”這一謀生之道造成一生的“飢寒”, 由此帶來心理上的慙愧和悲哀, 使他惟能選擇“庶以善自名”的立德之路, 竝以此做爲他的生命價値及存在意義. 但是這究竟不是他所抱的“平生之誌”, 而且“善”這一道德價値本身具有抽象性及不確定性, 所以難免産生“誰當爲汝譽?”的懷疑和憂慮感, 這便是引起他內心深處所潛流的孤獨意識的深層原因. 使陶淵明無法脫離於這一孤獨情緖的窮極的原因可謂是知音的不存在. 這是因爲在這現實社會里無人理解他的孤獨一生和他所苦苦追求的生命價値這一冷酷的事實導致存在的無限脆弱和絶對的孤獨, 所以他終於哀歎“孟公不在玆, 終以?吾情”的存在主義的憂慮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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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白詩<烏棲曲>是唐代大詩人賀知章極讚?`可以哭鬼神`的著名作品. 這句`可以哭鬼神`的話?也是賀知章讀李白詩<蜀道難>之後送給李白的`天上(謫仙)人`之讚詞和稱號成爲有力的根據和解明說明李白??可能沒有社會·文化·歷史的背景被薦擧到首都長安擔當供奉翰林的中央官職的. 而再者, 成了道破詩人李白和李白詩之總體性質的最有名定義世世遺傳至今. 可是不管?有沒有這樣的名聲和意義, 李白詩<烏棲曲>被秉斷需要?以前不同的新理解和解析. 因爲從前至今對李白詩<烏棲曲>的理解和解析把李白詩<烏棲曲>之文學性不必要的掛拉到詩人李白的名譽, 因而把李白詩<烏棲曲>認爲當于《詩經》美刺說的詩作, 把李白變成傳統的《詩經》詩人的外樣. 雖然那位鬼爲李白駁斥唐代政治黑暗預示未來不祥的非凡風貌哭了, 基于這樣理解的李白詩<烏棲曲>停在只有幾個含蓄表現沒有特別長處的單純虛擬歷史故事. 對李白詩<烏棲曲>的新理解應從新解析出發, 這新解析應充分照顧<烏棲曲>的眞正文學性. 所以解析<烏棲曲>必需認之幾個先決條件. 李白詩<烏棲曲>: 第一是個樂府詩, 第二是個故事詩, 所以第三擁有詩之話者和登場人物(焦點話者), 第四西施爲登場人物在李白詩裏包辦特別重要的文學個性. 檢討這些項目以後, 李白詩<烏棲曲>終能發顯基名聲和意義的新意思的. 一. 李白詩<烏棲曲>是個樂府詩. ?多<烏棲曲>被作成于李白詩<烏棲曲>以前的. 所以李白詩<烏棲曲>是傳統樂府<烏棲曲>之慣習裏作成的還是詩人李白固有創作的判斷能明確李白詩<烏棲曲>的文學意義. 李白詩<烏棲曲>其基本主題和詩的主要素材都來由古樂府詩<烏棲曲>的. 因此李白詩<烏棲曲>?可能有?原來的<烏棲曲>同一內容和影響. 二. <烏棲曲>是個故事詩. ?的基本故事是由一男一女在夜裏(或著晩上)相會談戀愛, 凌晨(早上)悲痛離別的造成. 所有樂府詩<烏棲曲>都惑著利用一切基本故事結構或著利用見面·戀愛·離別等的故事結構個別因素的. 李白詩<烏棲曲>也按著樂府詩<烏棲曲>的一切基本故事結構展開詩的內容, 把故事的主角變成從前沒有的新人物吳王和西施創造了新奇的<烏棲曲>. 三. 樂府詩的話者不是固定的. 李白詩包含樂府詩的全體有?多種類的話者, 詩裏登場人物不是話者也能說話. 卽李白詩有獨尊話者和焦點話者都能登場說話. 所以在李白詩<烏棲曲>裏說話的存在自由換身絶不是奇怪的. 以前樂府詩<烏棲曲>的故事結構爲最後的離別傷心的人主要是女的. 所以把李白詩<烏棲曲>之最後歎息者辨爲女性登場人物西施的分析是自然幾乎理所當然的. 四. 西施是個歷史人物, 可是西施被引用惑登場在李白詩的是個特別文學人物. 通常歷史人物西施是誘惑吳王破滅吳國的傾國之色之尤物. 所以有些硏究者理解李白詩<烏棲曲>的內容也是警告吳王和西施的亡國失正. 可是總體李白詩的文學人物西施不是爲政治謀略寃枉利用的悲運女人. ?是身分上昇到君王之側最上地位完成自己的任務以後一下舍得離開的神秘攻城身退偉人似的人物. 所以李白詩?有具備美貌·本事·高潔·思念的文學人物西施. 西施飮酒?古代著名飮酒家飮酒差不多. 李白詩<烏棲曲>的西施當然也?古代偉大人物詩頌時間的過去·人生的無常·酒會的終結·愛情的可惜等差不多. 綜合以上的探討到頭, 李白詩<烏棲曲>終于是李白詩的傑作之一. ?擁有傳統樂府詩<烏棲曲>的故事結構變換其女主角爲特色文學人物西施, 再獲得含蓄複合的多種文學意義和感動完全超越離別惑解散的單純悲哀. 西施對吳王(而且讀者包含我們)發的一聲最後歎氣感動十分强烈足于哭唐詩之鬼神, 這是千古獨有李白善手的一大詩作.

중국의 함몰형(陷沒型) 홍수전설 시탐(試探)

이주노
한국중국어문학회|중국문학  64권 0호, 2010 pp. 107-147 ( 총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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這篇文章以由局地的陷沒與?着?發生的洪水的兩個母題構成的傳說爲硏究對象, 而且以文獻資料和口碑資料爲硏究文本. 在這篇文章里考察陷沒型洪水傳說的變樣, 以及造成變異型的主要話素的文化含意. 總的來說, 中國的陷沒型洪水傳說以歷陽型爲中軸, 而中軸有三個階段, 卽雛形階段, 定型階段和變異階段. 這些階段的中軸都有各自的類似型. 各階段的主要關鍵是災難的前兆體現在?兒, 也就是說, 城門?, 石龜和石獅子. 根據故事的出處, 陷沒型洪水傳說的傳承時期如下: 雛形階段的`伊尹生空桑`的故事是至遲在戰國末出現而從後漢代到南北朝時期盛行的. 而定型階段的故事是至遲在後漢末出現而經過南北朝時期在唐宋代盛行的. 變異階段的故事里, 石龜登場的變異型是至遲在晉代出現而一直到唐宋代盛行的, 而石獅子登場的變異型是在明代以後盛行的. 陷沒型洪水傳說的地域分布是如下的: 定型階段的故事是主要以現在的安徽省, 浙江省, 四川省和河北省爲空間背景. 四川省是地震頻頻發生的地域, 而其他三個省是洪水頻繁發生的長江或黃河流域. 變異階段的故事里, 石龜登場的故事是以位置於長江流 域的安徽省和縣及巢湖市爲空間背景的, 而石獅子登場的故事, 除現有的空間背景外, 在上海市, 湖北省, 江蘇省, 河南省, 東北地區等也被搜集整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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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n though certain human activities and products of such activities from any time in history can be labeled as `literary`, strictly speaking, `literature`(文學) as we know, read, and enjoy today, `literature` in the narrow sense of the word is very much a modern institution. In this essay I have traced the status of `literature` in Chinese language magazines published in mid 19th century. By doing so I was able to catch some evidences that lead to a deeper understanding of the properties of modern Chinese literature. In early missionary publications, in midst of knowledge formation circled around Christian doctrine, geography, astronomy, and natural sciences, relative absence of `literature` is undeniable. Whereas in the case of Yinghuan suoji(《瀛??記》), and similar magazines published by Shanghai based publisher-entrepreneur Earnest major, and edited by a group of Jiangnan(江南) intellects, pursuit of something `literary` results in relative absence of new knowledge. It can be argued that `literature` that was forming on inevitable basis of age long tradition of classical literature which in most part corresponded with Confucian or Taoist ideals, could not but was in tension with new/modern knowledge that had its source in the modern Western civilization and Christianity. Such status and character of `literature` inherent from it`s birth may have caused it`s relatively conservative stance compared to other social and intellectual aspects of modern China, but on the other hand, it may be interpreted as having given modern Chinese literature a strong potential of overcoming or rethinking the `Modern`.

소설 《얼해화(?海花)》속의 `화(花)`의 의미(意味) 분석(分析)

위행복
한국중국어문학회|중국문학  64권 0호, 2010 pp. 177-197 ( 총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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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析修改本 《?海花》, 可以看出傅彩云不僅不能算是作品裏的主人公, 甚至作爲線索人物, 也沒有起到?大的作用. 雖然也有部分情節是圍繞傅彩雲展開的, 但那是與政治變動或文化推移分別展開的. 傅彩雲在一定程度上算是稍有些分量的作中人物, 但是?和主導政治或文化變遷的人物群沒有交遊. 《?海花》是以政治小說或歷史小說爲目標創作的, 所以以傅彩雲看爲`?海花`之`花`的觀点是不正確的. 只看修改本《?海花》的話, 好像傳統官僚層是作品的中心人物似的. 但是假如當初計劃的共60回的《?海花》完成的話,情況可能會不同. 根据小說林本第1回發布的60回的回目來看, 保守派或洋務派的人物群只能在作品的前半部裏占主要人物的位置, 變法派和革命派人物一定會被設定爲后半部的主要人物群. 幷且曾樸在中把作中人物分爲舊學時代·甲午時代·政變時代·庚子時代·革新時代·海外運動等六類, 由此也可以看出傳統官僚層沒有被設定爲60回本主《?海花》的主要人物群. 《?海花》是以煽揚革命爲目的的進步思想爲基礎的作品, 沒有理由把不能接受新潮流的傳統官僚層設定爲`?海花`之`花`. 那?`?海花`的`花`到底意味着什??? `?海`是腐敗無能的統治勢力和列强橫行的中國, 在這裏盛開的`?海花`爲革命的成功, 就是在`奴樂島`上開出的`自由之花`. 《?海花》是由投身于革命運動的金松岑和支持革命的曾樸發起和創作, 支持革命的思想貫徹到了全部作品中的. 作品在第1回的開篇就表達了鮮明的反帝反封建思想. 看小說林本第1回上預告的60個回目就可以知道作品是計劃以共和革命的成功作爲結局的. `?海花`的`花`就是第1回開篇裏提到的“自由花”.

桃源鄕意象的型塑在韓國的流傳與?變

노우정
한국중국어문학회|중국문학  64권 0호, 2010 pp. 199-217 ( 총 1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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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의 “도화원(桃花源)”은 풍부한 문화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 한중 양국에 점차 많은 화신(化神)이 출현하게 되었다. 중국의 후대시인들은 도화원의 현실성을 의심하였고, 이로 인해 중국시인들 사이에서 도화원이 신선세계인지를 두고 논쟁이 일어났다. 왕유, 한유, 왕안석, 소식은 도연명의 도화원에 묘사된 선계(仙界)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제기하였다. 한국의 경우, 고려중기 무인정권시대 진화와 이인로는 도원향의 실존성에 주목하여 현실공간에서 도원향을 찾았다. 무신정권이후 도원 향을 동경한 작품은 출현하지 않다가, 고려후기 이색이 도원을 선계로 묘사하였으나, 이색의 도원에 대한 태도는 진화와 이인로와는 다르게 관조적이다. 조선초기 도원향은 점차 실지화된 경향이 있으나, 조선중기에 들어서자 흥기한 단학과 도가 사상의 영향으로 몽환적 경향도 나타난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도원향은 이미 현실의 공간으로 변모하였고, 민중은 청학동지도의 도원향을 찾아나서는 현상이 출 현하였다. 한국문인이 도연명의 도화원을 수용하고 변용한 요인은 한국의 풍경에 대한 자부심, 한국 고유의 전설에 대한 인식, 두보(杜甫) 시의 `方丈三韓外`之句의 영향, 선계에 대한 동경과 신선사상의 영향, 한국문인의 현실인식태도 및 지식인으로서 사회 개조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한국 시화 속의 한유 시 평가 연구

김지영
한국중국어문학회|중국문학  64권 0호, 2010 pp. 219-245 ( 총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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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文學史對於韓愈的古文成就, 沒有人低?或懷疑. 但對韓愈的詩, 却是自古至今褒貶不一. 原因就是韓愈詩歌具有散文的特徵,卽以文爲詩. 在中國詩壇韓愈獨創的作詩法對後代詩人生産了不小的影響. 韓國文人也認識到了韓愈詩的這些特徵, 韓國的詩話, ?多的評論都記錄韓愈的作詩法. 本文探討韓國詩話應考察韓國文人對於韓愈詩有什?樣的評價. 韓國詩話作家論述韓愈詩, ?中國作家的評價相比, 角度不同, 理解各異, 其中頗多精闢之見, 可爲當今的文學批評提供新的視角和闡釋維度, 亦可見韓國漢詩中韓國文人對韓愈詩的接收與批評. 韓國詩話中論韓愈詩的詩話如下: 如高麗詩話中的《補閑集》(崔滋著), 《?翁稗說》 (李齊賢著), 朝鮮詩話中的《東人詩話》(徐居正著), 《體意聲三字注解》(尹春年著), 《鶴山樵談》(許筠著),《芝峰類說》(李?光著), 《霽湖詩話》(梁慶遇著), 《星湖僿說》(李瀷著), 《溪穀漫筆》(張維著) 等等. 韓國詩話中最多論及韓愈詩的是《芝峰類說》和《星湖僿說》. 韓國詩話中最初論韓愈詩是高麗時期崔滋的《補閑集》. 《補閑集·序》記錄: “學詩者, 對律句體子美, 樂章體太白, 古詩體韓蘇, 若文辭, 則各體皆備於韓文, 熟讀深思, 可得其體.” 朝鮮中期李?光的《芝峰類說》記錄: “唐之文體, 至昌黎始變而古矣. 唐之詩, 之昌黎始變而文矣.)” 朝鮮後期李瀷的《星湖僿說》記錄: “又如韓退之筆力, 往往有冗卑下乘 之語, 然細詳之, 非退之之不及, 乃故爲此, 延綿氣脈以待激昻奮發, 比如山勢??峻必 有低, 過峽則??天秀自露......如是看, 方得退之筆套.” 通過分析筆者發現韓國文人對於韓愈詩的特徵具有較爲正確的把握, 崔滋敍述了韓愈詩對於韓國文人的影響, 李?光言及到韓愈詩如何改變傳統中國詩的作詩法, 李瀷用自身的言語表現了韓愈詩的作詩特徵.

十九世紀朝鮮詩壇的性靈觀與淸朝袁枚之關系

최일의
한국중국어문학회|중국문학  64권 0호, 2010 pp. 247-262 ( 총 16 pages)
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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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9세기 조선시인들이 펼쳤던 성령관이 청대 원매와 과연 어떤 연관 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 조선의 학문적인 경향은 실학의 시대로 불릴 만큼 국가사회의 발전과 국민의 실제 생활에 유익한 것들을 논의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이에 따라 당시 지식인들은 그동안 경시해왔던 청대의 문물제도에 대해서도 적극 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농업·수공업 등을 통한 생산력이 급격히 발전 함에 따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중인층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봉건적인 전통 신분질서가 흔들리면서 중인층에서도 한시를 짓고 한시에 관한 이론을 펼치는 시인들이 다수 출현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단에서 원매와 그의 문학을 최초로 수용한 것으로 간주되는 문헌상 기록 은 1778년에 출간된 이덕무의 《청비록》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덕무를 위시한 한시 사가들은 1778년부터 직접 외교사절의 신분으로 연경에 가서 중국시인들과 교류하였고 학술전적과 문학작품을 구입해 읽음으로써 청대 시단의 상황을 정확히 인지 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즈음부터 당시 중국시단에서 성령설로써 명성을 떨치고 있던 원매의 시와 시론은 조선시단에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는데, 19세기 초 기와 중기 사이에 이르면 이미 광범위하게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19세기 양반사족들의 성령관은 주로 이옥·홍석주·김정희·조두순 등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중 남녀 간의 애정을 중시한 이옥의 성령관은 원매의 관점과 매 우 유사하였으며, 특히 그가 편찬한 《백가시화초》는 비록 백가란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오직 《수원시화》하나만을 초록한 것이어서, 이옥은 원매의 성령 관을 조선시단에 널리 선양한 인물이라고 간주할 수 있었다. 김정희의 성령관도 원 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것이 분명하였는데, 다만 성령을 그대로 가감 없이 표 출하기보다는 우아한 격조로 손질하여 바로잡은 성령만을 표현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원매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세기 중인층 시인의 성령관은 주로 장혼·장지완·조희룡·정지윤·최성환 등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 장혼·장지완 등의 성령관은 당시에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던 예교주의 관점을 준수하고자 하는 토대 위에서 제시된 것이었 기에 진실한 감정의 표현이라는 측면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조희룡· 정지윤·최성환 등의 성령관은 원매가 제시한 진실한 감정과 독창적인 개성의 표 현이라는 성령관과 상당히 유사하였다. 특히 최성환이 《성령집》의 서문에서 밝힌 성령관은 상당 부분 원매 《수원시화》의 내용을 직접 그대로 인용하고 있고, 또 이 시선집에 원매의 시를 다량으로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19세기에 이르러 조선시인들이 원매의 시와 시론을 수용하고 나아가 그의 성령관과 유사한 시론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첫째, 1791년 정조의 문체반정 이후, 조선시인들은 원굉도의 성령관을 자유롭게 주창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원매의 성령관을 대안으로 수용하여 당시 문단에 팽배하였던 의고주의적인 문학론을 배척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로 삼고자 하였기 때문이 아닐 까 생각된다. 둘째, 특히 19세기에 들어 새롭게 등장한 중인층 시인들은 성령관을 창작근거로 삼아 신분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비통한 심리를 시에 표현하고 자 하였고 아울러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찬 양반사회의 실상을 극복하고자 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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