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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연구검색

The Studies in Korean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어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9-437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7권 0호 (2004)

한문화권(漢文化圈) 형성 초기 한시 창수를 통한 동북아 국가간의 문화교류

이혜순 ( Lee Hai-s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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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8·9세기 한자문화권이 형성되던 시기에 통일 신라와 발해 사신들이 일본과 당을 내왕하면서 이루어진 문화교류의 전개 양상과 특성을 한시 창수를 중심으로 살펴보기 위해 시도된 것이다. 신라와 발해 사신들이 일본과 당에서 읊은 시는 별로 남아있지 않으나 양국의 문사들이 이들에게 준 贈送詩들을 통해 그들의 외국체험을 역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8세기 일본과 당 문사들이 신라와 발해 사신들에게 준 시는 대부분 자신들의 나라가 周나라이고 신라와 발해가 제후국이며 조공사라는 자국 중심의 화이론적 세계관이 그 중심을 이룬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들 작품에는 국가를 넘어선 정서적 교감과 문화적 인식이 규견되기도 하는데, 비록 함축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9세기에 들어가서 문화적 동질의식의 맹아와 개별문사들의 지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문학·학문·종교적 측면에서의 교류와 개별적으로 형성된 친밀한 관계가 신라와 발해 사신들을 조공사로 보려했던 완강한 화이론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로 제시된 점이 주목된다. 한시 창수를 통한 문화교류는 한문화권 형성 초기부터 동북아 제국이 정치적 패권주의와 자국 중심주의로 팽팽하게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을 때에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것은 문자와 종교를 공유한다는 점에서의 보편주의가 얼마나 허상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일문자 사용에 의해 가능했던 한시 창수와 고승들의 높은 종교적 세계가 그 보편주의를 유지시키는데 기여한 점도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이 시기 지리적 확대를 통한 문화교류는 대결과 갈등 속에서도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는 유일한 길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인정된다.

혜초의 서역기행과 『왕오천축국전』

정수일 ( Jeong Soo-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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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 전 신라 고승 혜초는 인도를 비롯한 서역을 역방하고 불후의 문명기행기 『왕오천축국전』을 남겨놓았다. 1908년 펠리오에 의해 돈황 막고굴에서 그잔간이 발견된 이래 저자의 약력과 기행의 내용이나 노정 등 기본적인 문제들이 구명되었다. 혜초는 704년 경 신라에서 출생한 후 16살 때 입당하여 719년 광주를 출발해 해로로 동인도에 도착하였다. 4년간의 역방을 마치고 723년 11월 안서도호부 소재지인 구자(현 쿠차)를 거쳐 당의 수도 장안에 돌아왔다. 귀당 후 40여년간 여러 사찰을 전전하면서 주로 밀교 경전의 한역과 연찬에 몰두하다가 780년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하였다. 약 6400자에 달하는 현존 여행기는 나라별로 왕성의 위치와 규모, 대외관계, 기후와 지형, 음식과 의상, 풍습과 언어, 종교 등을 기술하고 있다. 그의 여행노정을 확정하는 데서 중요한 답사지와 전무지의 식별은 시문구(始文句)에 의해 밝혀진다. 즉 답사지에 관해서는 ‘어디서부터 어느 방향으로 얼마 동안 가서 어디에 이르다’라는 시문구(총 23군데)를 쓰고, 전문지는 ‘어디의 어느 방향에 어떤 곳이 있다’라는 식의 객과전 표현만 쓰고 있다. 그리고 노정의 서단은 문면상에서의 시문구와 기술 내용의 정확성 여부를 검토한 결과, 당시 대식국의 예하에 있던 페르시아의 교통요지 니샤푸르(현 마슈하드)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혜초의 서역기행과 그 기록인 『왕오천축국전』은 커다란 문명사적 의미를 지닌다. 혜초는 사상 최초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하고 현지견문록을 남김으로써 문명교류사에서 개척자적 및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멀리 대식까지 다녀온 한국의 첫 세계인으로써 한민족사의 전개에서도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그의 기행문은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이다. 앞으로의 원문의 복원과 현존 잔간본에 대한 정확한 교감과 판독을 완결하며, ‘혜초 평전’도 찬술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 국보급 진서를 프랑스로부터 반환하는 운동을 벌리며, 국보뿐만 아니라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것도 수행해야 할 과제이다.

서세동점기의 서구인과 한국인의 상호 인식

신복룡 ( Shin Bok-ry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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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서세동점기에 만난 서양인과 한국인이 서로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그것이 어떤 적실성과 오해를 안고 있으며, 그것이 후대의 그들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쓴 것이다. [2] 한국이 서구 사회에 알려진 것은 고대사로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지만 문헌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서양에 아려진 것은 1668년에 네덜란드에서 발표된 하멜(H. Hamel)의 『조선표류기』였다. 그러나 근대적 외교로서의 통상이 시작된 것은 1860년대 이후로 보아야 한다. 그들이 한국에 접근한 이유는 (1) 미국에서의 서부 개척 시대의 여진(餘震), (2) 일확천금을 꿈꾸던 모험가들의 탐험심, (3) 복음 전파라는 이름의 백색우월주의가 작용했다. [3] 서양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은 대체로 부정적이었지만 한국인들이 미처 몰랐던 부분에 대한 지적도 많다. (1) 한국인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며, 그 바닥에는 관료의 부패와 지배층의 무능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당쟁(黨爭)을 현대적 의미로서의 정당으로 보려는 시각도 있다. (2) 한국인의 인종에 관해서는 한국인들이 집착하고 있는 단일 민족의 이론을 부인하고 있으며, 인성을 게으름, 사치, 방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그러한 성격은 지배 계급의 부패에서 오는 체념이지 본성은 아니었다고 본다. (3) 여성의 모습에 대해서는 대체로 억압 받는 존재에 대한 연민을 보이고 있지만, 사대부 여성의 존엄성을 높이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4) 물산은 대체로 풍부하지만 해외 수탈을 꺼리기 때문에 자원을 은폐하고 있으며,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생산성을 높이려는 이욕을 상실하고 있다. (5) 대외 관계에서는 해외 탐험가들의 욕심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공도(空島) 정책을 썼고 해양 진출을 억제했는데 이것이 망국의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4] 한국인의 눈에 비친 서양인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한국인들은 외국인에 대하여 배외심이 강하다는 것이 종래의 일반적인 인식이었으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며, 한국인은 외국인에 대하여 섬뜩한 감정과 호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2) 한국인들은 서구 문명의 이기에 대하여 상당한 경이로움을 가지고 그것은 쇄국과 개국에 양면적인 영향을 끼쳤다. (3) 서구 문명에 대한 경이로움은 부분적으로 중화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런 점에서 서세동점은 한국 민족운동사의 한 획선을 이루고 있다. (4) 서구인들의 조선 상륙은 민간 차원에서는 「착한 사마리아인들」이었지만,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망국의 묵시적 방조자들이었다. [5] 요컨대 서세동점기의 한국현대 외교사는 150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한국 현실에 교훈이 되는 부분이 있다. 특히 대한제국 말기의 혼란과 망국의 교훈은 지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어디로 가려는지 알고 싶거든 어디서 왔는지를 돌아보라’(「論語」, 「學而篇」, ‘子曰 告諸往 而知來者’) 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일본지식인(日本知識人)의 조선기행(朝鮮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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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순례와 민족의 자기구성 -근대 국토기행문의 문학사적 의의-

구인모 ( Ku In-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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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30년대 한국의 국토기행문은 단군중심의 단일신화의 서사와 근대인의 자기발견의 글쓰기이다. 이러한 국토기행문은 조선의 독자를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호명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한편 국토기행문은 민족을 둘러싼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가 서로 길항하고 대결하는 공간이기면서도 조선의 지식인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시대적 위기감을 반영한다. 최남선 등이 고안한 단일민족신화가 지닌 종교적 성격은, 이들의 민족 이데올로기가 후진국의 세속종교로서 낭만적 민족주의의 중요한 속성임을 나타낸다. 또한 이광수의 근대 계몽주의의 시선은 제국주의의 인종주의와 제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 30년대 조선의 국토기행문은, 그들이 저마다 구상한 조선의 국민문학의 내용과 형식을 이룬다는 점에서, 또한 1920년대 한국 근대문학의 사상적 단면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식민지에서 근대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지식인의 운명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문학지리학을 위한 출발선상의 토론

조동일 ( Cho Dong-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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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지리학은 문학사학과 대조가 되는 개념이다. 문학을 문학사학에서는 시간, 문학지리학에서는 공간을 주축으로 이해한다. 지금까지는 문학사학만 일방적으로 중요시했다. 이제 문학지리학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문학지리학의 취급대상은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지방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여행문학이다. 지방문학은 고을문학, 산천문학, 사원누정문학 등으로, 여행문학은 국내여행문학, 한국인 외국여행문학, 외국인 한국여행문학 등으로 나누어 진다. 그 가운데 나는 지방문학사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지방문학사 연구의 방향과 과제』라는 책에서 에서 다음 사항을 검토했다. 1. 왜 지방문학사인가? 2. 외국의 사례 검토 2.1. 시대 변화에 관한 논란 2.2. 인도 2.3. 중국 2.4. 미국 2.5. 영국 2.6. 프랑스 2.7. 독일 2.8. 일본 2.9. 비교론. 3. 국내의 사례 검토 3.1. 전반적 동향 3.2. 제주 3.3. 영남 3.4. 호남 3.5. 중부지방 3.6. 서울. 4. 새로운 시도 4.1. 제주도문학사의 연원: 탐라국 건국서사시를 찾아서 4.2. 영남문학사의 특성: 인물전설에 나타난 상하관계 역전 4.3. 호남문학사의 맥락: 남성시가의 여성화자 4.4. 지리산문학사의 영역: 조식의 시문에 나타난 지리산의 의미. 5. 지방문학사 어떻게 쓸 것인가? 그 가운데 제주도문학에 관한 서술의 개요를 구체적인 연구의 본보기로 여기서 들었다.

생태론적(生態論的) 시학(詩學) -<성북동 비둘기>를 위하여-

金甲起 ( Kim Gab-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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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이산 김광섭의 문명 비판적 시 「성북동 비둘기」의 생태학적 담론, 그 가능성을 가늠하기 위한 단편적 시론이다. 워낙 생태학이란 모든 생명체들의 바람직한 생태환경 조성은 물론, 건강한 생존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다. 그러기 위한 최우선적 기본 과제는 法界無盡緣起論에 입각한 상호의존적 공동체 인식과, 同體大悲的 생명존중이다. 有·無情의 생명체는 물론, 무생명체까지도 전 우주 구성의 동등한 일원으로서의 고유한 존재 가치는 그 어떤 것의 피조물이 아니었던 것처럼 구속되지 않을 自然한 독자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 인식된 인간 중심적 사유와, 산업화 사회의 발전, 기계문명의 위력 앞에 스스로 무력해진 인간은 이제 전 인류는 물론, 모든 생명체의 共滅이라는 생태 문제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필자는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를 이러한 현대 문명 앞에 인간의 無明을 스스로 자학한 선지자적 절규로 인식하며, 그 실상을 바르게 읽기 위해 한 세대 전, 동일 지역의 자연을 노래한 임규의 한시와 고려조 김극기의 전원시 「田家四時·1」을 동시 대비하며, 동·서간, 학제간 화두가 된 생태학은 발생론상으 론 自然의 自然性을 부정하고 ‘신의 인간 선택 창조설[창세기]'에 의한 이원론적 사유와, 노동가치설에 의한 자연의 개인 소유화가 무관할 수 없는 1차적 원인이겠지만, 일원론적 전통 사념을 고수해 온 동양도 자연파괴와 그에 따른 생태 위기에 함께 직면해 있음은 인간 無明의 아집이 낳은 위기라 했다. 이러한 현실적 위기의 타개를 위해 필자는 생태학의 담론을 불가의 法界無盡緣起와 同體大悲思想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존중·환경친화적 삶은 현생의 행복을 미래의 공업으로 사유하는 이 시대의 마지막 가치이자, 희망이라고 단언하고, 「성북동 비둘기」의 화자 김광섭의 메시지는 저 인디안 추장의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게 마련.”이라는 예언적 절규에 다름 아니라 했으며, 함께 대비된 임규의 「山居」나 「山堂」의 시정은 정작 13세기 전반고려의 산수 시인 김극기의 시정과 유사할지언정, 30년 후 김광섭의 시정은 상생은 물론, 패자의 추방, 사랑과 평화를 운위하던 신망에 대한 배신, 끝내 공동상실이란 앗고 앗기는 생존경쟁의 터로 황폐화되었다고 피력했다. 아울러 이 같은 현상은 바로 다름 아닌 자연 훼손에 의한 생태계 파괴요, 나아가 인류 공멸의 미래상이자, 전 인류의 공포라 할 때, 인간 중심의 사고, 혹은 실존적 사유라는 미망의 패러다임에서 속히 깨어나야 함은 물론, 구호성 대안이 아닌 실천적 의식 개혁, 나아가 우리의 삶의 전통 속에 내재한 습성과 낯설지 않은 삶의 패턴을 찾아야 할 때임을 인식하게 된다고 단정하고, 남는 과제로 모든 생명체의 바람직한 생태환경, 이를 위해 우리 모두는 새로운 의식과 낯설지 않은 삶의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실행하는 일, 그것이 함께 인식하고 실천해야 할 남는 과제라 했다. 필자는 그 대안으로 먼저 ‘자기를 자기답게 가꾸는 자기 사랑’의 실천, 그리고 그 사랑을 남에게 ‘자기에 대한 사랑과 꼭 같이 베푸는 배려’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그 좋은 귀감은 민족적 지도 이념으로 인화와 자비, 생명존중과 심신 수련에 의한 자기 수양으로 풍월도의 상징이었던 화랑정신의 부활 및 시기와 질투가 아닌 이해와 관용의 미덕, 근검과 절약을 실천하며, 오롯한 기상으로 민족의 자존을 지켜 온 조선조 선비정신의 생활화 등 정신적 혁신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새로 발굴한 고시조집(古時調集) 『고금명작가(古今名作歌)』 의 재검토

구사회 ( Gu Sa-ho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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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今名作歌』는 근래에 충남 아산시 인근에 살고 있는 창원 황씨 집안에서 입수한 고시조집이다. 현재는 선문대학교 중한번역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이 시조집은 이런저런 여러 내용을 기록해놓은 서책에 적혀있었는데,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英祖朝에 昌原 黃氏 집안의 누군가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古今名作歌』는 지금까지 발굴된 고시조집 중에서 초기에 나온 시조집으로 추정된다. 『고금명작가』는 景宗이 승하하고 英祖가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여 통치하던 초기에 전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에 이것이 경종과 영조의 교체기에 나왔다면 『고금명작가』는 시조집 중에서 가장 앞선다는 『靑丘永言(珍本)』에 비견하며 『海東歌謠』보다는 무려 30여 년이나 앞선다. 게다가 이것은 필사본이기 때문에 본래의 『고금명작가』는 『청구영언』보다 한발 앞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것은 『청구영언』이나 『해동가요』처럼 본격적인 형태와 체제를 갖춘 시조집보다 한발 앞서 존재했던 초기 시조집의 형태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시조집이라고 하겠다. 『古今名作歌』에서는 다른 시조집에 실려 있는 동일 작품에 비해 한자를 피하고 국문 위주의 표기법을 고수하고 있고, 18세기 전기의 국어학적 특징을 드러내 주고 있으며, 위와 같은 표기적 특징 외에도 『古今名作歌』는 많은 고어와 고문체를 보이고 있다. 『古今名作歌』는 대체적으로 시조 작품을 시대적으로 배열한 흔적이 보이며 ‘古今’이란 題名에서처럼 이들 시조가 과거의 작품에서부터 당대의 작품까지를 대상으로 편집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여말 시조 작품에서부터 시작하여 18세기 초엽까지 살았던 李彦綱(1648-1711)의 작품<13>이 가장 늦다는 점을 착안할 필요가 있다. 이 시조집이 그가 살았을 때에 나왔다면 본래의 『古今名作歌』는 빠르면 18세기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으로도 보인다. 『古今名作歌』에서는 중국의 악부를 시조로 개작한 사례를 찾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시조와 중국 시가와의 대응방식을 시조와 한시에서 찾았는데, 이보다는 시조와 악부의 대응이 보다 합리적이고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古今名作歌』에는 우리에게 이미 익히 알려진 和答歌 4수가 있고, 이외에도 새로운 화답가 <嶺南歌> 2수가 보인다. 이들 화답가는 동음이의어의 탁월한 언어유희를 통하여 해학성을 획득하고 있다.

무왕설화의 형성과 <서동요>의 비평적 해석

김종진 ( Kim Jong J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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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백제본기 ‘무왕’ 조에 수록된 기술물에 대한 해석은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해석하는 입장과 설화로 파악하는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그동안 서동의 정체에 대해서 무왕설, 동성왕설, 무령왕설, 무강왕설, 원효설, 건마국의 서동설 등의 주장이 제기되었고, 설화로 파악하는 경우에 ‘내복에 산다’형의 설화와 관련하여 논의가 이루어진 바 있다. 그러나 ‘무왕’ 조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도, 단순한 설화도 아닌, 역사와 설화가 통합된 텍스트로 바라볼 때 그 의미가 잘 드러나리라 본다. 본고는 이러한 통합적 인식을 바탕으로 무왕조의 이야기에서 역사와 설화의 만남을 시도한 통합의 주체는 누구이며, 이야기 속에 반영된 그들의 의식은 어떠한가에 대해 고찰하고자 하였다. 무왕이야기는 백제의 무왕과 신라의 진평왕과 관련되므로, 이야기의 배경은 삼국의 쟁패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형성된 시기는 신라와 백제가 병합된 통일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신라의 정권이나 민중에 의해 이야기가 형성 내지는 전승되었을 것인가, 아니면 백제 땅에 사는 백제의 유민들에 의해 형성되고 전승되었을 것인가, 아니면 그 양쪽에서 동시에 향유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본고는 이 가운데 현재에도 무왕이야기가 전승되는 익산과 부여를 아우르는 백제문화권으로 판단하고 설화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삼국유사 무왕조의 이야기에는 망국 후 영웅을 회고하고 기대하는 백제민중의 소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을 제기하였다. 아울러 삼국통일 후 실제의 권력을 행사하는 신라 정권의 권력의 힘을 직간접적으로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백제 유민들의 이중적인 심리상태-즉, 반항과 타협이라는-가 이야기 속에 신라의 진평왕과 선화공주를 등장시킨 계기가 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아울러 이 이야기가 ‘숯구이총각의 생금장’ 모티프와 유사한 점을 들어 당시 민중들의 脫 가난에 대한 소망이 반영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서동요>는 무왕 이야기에서 위기의 고조와 사건 전환의 기능을 지닌 노래로 인용되었다. 그러나 <서동요>는 이 사건과 관련이 없는 독립적인 민요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본고에서는 먼저 <서동요>의 구비적 성격을 확인하면서 어휘 분석을 통해 시적인 의미를 도출해 내었다. 그 결과 작품에 등장하는 선화공주와 서동이라는 인명은, 우리가 배경설화의 전모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당연하게 수용하는 것과 달리,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해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린 아이들이 마음껏 ‘불러제꼈던’ 배경에는, 구체적인 인물을 지칭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죄목도 피해갈 수 있는 참요적인 명명방식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장다리는 한철이요, 미나리는 사철이라’라는 참요에서 보듯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참요에 들어가는 인물의 이름은 간접화되고 불특정한 보통명사로 포장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남 그윽히 얼어두고’는 기존의 해독처럼 단순하게 ‘정을 통하다’, ‘시집가다’의 의미보다는 수줍은 공주의 감성이 무르익는 연모의 정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밤에 몰래 안고가다’에서는 길게 간직했던 연모의 정이 어느 순간 질적으로 비약하는 순간의 행위로 해석하였다. 이에 따라 서동요는, 이야기 속의 서동이 보여주는 적극성 대담성과 대응하는 양상으로, 여성 주인공의 연모의 긴 기다림과 사랑의 대담성을 엿볼 수 있는 시적 내용을 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대학교’의 번역과 수용 -한일 양국 사이의 수용과 대항의 관점에서

박광현 ( Park Kwang-hyo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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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서 university는 사전적인 의미로 대학교라 먼저 번역된 후, 서구 국민국가의 제도를 번역(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최고의 교육-학술의 구체적인 제도로써 수용되었다. 하지만 한일 양국의 그 수용 과정은 시간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인 내용면에서 큰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는 대학교에 관한 사회적 담론이 식민지 권력에 의해 철저히 통제받게 되었다. 본고는 양국 사이의 그런 차이뿐만 아니라, 수용과 대항의 관점에서 대학교에 관한 담론을 살피고 있다. 그것을 통해, 본고는 한국의 식민지 시대의 저항사 기술에서 ‘대학교’가 하나의 좌절된 민족 이데올로기로써 인식되어온 계기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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