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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식민지시기 한국의 검열제도 중 하나로서 교정쇄검열에 주목하고자 했다. 현재 남아있는 교정쇄검열의 증거, 교정쇄 검열제도의 정착과정 및 담론통제 효과 등에 대해 살핀 결과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검열제도는 사전검열과 사후검열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식민지시기 한국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사전검열이었으므로 이런 식의 분류는 별 의미가 없다. 따라서 원고검열-교정쇄검열-납본검열-발매후 검열 등으로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이 중에서 발매후 검열만 사후검열에 속한다. 둘째, 당시 신문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사후검열을 행했다고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사후검열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교정쇄검열의 성격이 강하다. ‘인쇄와 동시에’ 검열을 받아, 그 결과를 지면에 반영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검열당국은 1933년 교정쇄검열을 공식화하였지만, 신문지법 잡지는 적어도 1920년대부터 이를 활용해왔으며, 출판법잡지 역시 검열전 조판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원고검열의 원칙을 회피해왔다. 검열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탓에 잡지가 정해진 발간일자를 못 지키는 일이 잦자, 제작 공정을 최대한 단축시켜 이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여러 증거로 미루어볼 때, 검열당국은 꽤 오랜 기간에 걸쳐 이를 묵인해왔다. 넷째, 1933년에 검열당국은 교정쇄검열제도가 “편법”임을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공식적으로 도입한다. 대신에 검열당국은 그 적용대상을 “온건한” 잡지로 한정지었다. 정시 발간을 필요로 하는 인쇄자본의 요구를 활용하여 담론통제를 노렸던 것이다. 다섯째, 인쇄자본 역시 어느 정도의 자본이 투여된 상태에서 검열 받는가에 따라 검열결과에 따른 자본의 손실이 달라졌으므로, 교정쇄검열로 이행하면서 내부적 검열의 수위를 조정하였을 것이다. 원고검열보다 자본을 많이 투입한 상태에서 검열을 받게 되는 (당시 출판비의 절반 이상은 조판비였는데, 교정쇄검열은 조판비를 투입한 상태에서의 검열이다) 출판법 잡지는 국가검열 이전에 내부적 검열을 강화하였을 것이다. 반면 신문지법 잡지는 납본검열보다 교정쇄검열을 받을 때 더 적은 자본이 투입되므로(인쇄비를 투입하지 않은 단계에서 검열을 받게 된다) 내부검열을 완화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여섯째, 검열당국이 신문지법 잡지의 교정쇄검열을 묵인했던 까닭은 신문지법잡지가 대체로 출판법 잡지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컸다는 점, 교정쇄검열 이후에도 다시 납본검열을 통해 통제할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는 점 등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곱째, 식민지시기 잡지를 읽을 때는 늘 검열의 존재를 상정하여야 한다. 특히 특정 잡지의 특정 호가 교정쇄검열본인지를 확정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만일 교정쇄검열본이라면 당대에는 매우 제한된 독자만이 읽을 수 있었던 판본임을 염두에 두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식민지 시기 한국의 검열문제에 대해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여왔다. 이 문제를 살피면서 필자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인식틀 중 하나는 검열제도와 그 실제 작동양상이란 검열당국과 민간주체들(작가-인쇄자본-독자)의 길항적 관계에 의해 형성되어 갔다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 교정쇄검열제도의 정착과정에 대해 살피면서도 이 같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