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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연구검색

The Studies in Korean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어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9-437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8권 0호 (2005)

냉전세계질서 속에서의 ‘해방공간’ ― 해방 직후의 남ㆍ북한문학

테어도르휴즈 ( Theodore Hugh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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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의 문학 텍스트가 분열된 민족, 지금까지 다방면으로 한반도에 현재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남/북 이원체제를 생산하는데 어떻게 작용했는가? 이 논문에서 나는 해방직후 시기에 민족 텍스트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통제(주의) 내러티브와 빠르게 양극화되는 냉전 질서가 교차하는 역사의 궤도에서 작용하는 방식을 검토한다. 나는 특히, “가족”의 개념과 연관된 해방 후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 영토의 시각화와 지도그리 기, 세계주의의 형태, 계급, 성, 가족 구조와의 타협에 주의를 기울이며, “남”과 “북”에 연관된 식민 주체의 등장을 추적한다.

수행적 민족성 ― 1930년대 식민지 한국에서의 문화와 계급

이진경 ( Lee Jin-ky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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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반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계급 개념은 한국 민족성이란 개념을 강화시켜주면서도 동시에 이 개념에 도전하는 모순적인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개념은, 한편으로 한국 민족성을 더 한층 본질화했던 문화 민족주의 진영을 탄생케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지구 자본주의의 초-민족적/국가적 구조에 근거해서 구성된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개념은 계급의 이질성을 민족성과 연결시키기도 하고 분리시키기도 하는 단속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논자는 한국 민족성이란 언어, 의복, 관습 그리고 정신과 행동의 경향 등과 같은 수행적 지점들에 속하는 문화적 표준들의 종합이며, 이는 1900년대 이후 한국에서 인종과 민족에 대한 의사-생물학적인 개념들과 밀접히 연결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은 상대적으로 주변적인 계기라 할 수 있는 것, 즉 20년대 후반과 30년대에 나온 식민지 한국 소설에서 표명되는 민족 경계의 횡단의 계기들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이러한 민족적 일탈의 계기들은 한국인성의 퇴적을 외부로 드러내고, 동시에 한국 민족성의 인용 가능성 자체를 드러낸다. 이 논문은 두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거기에서 문화 민족주의 진영에 의한 민족성과 계급의 표명 내용을 마르크스주의 작품에서의 내용과 대조한다. 문화 민족주의 진영을 다루면서, 필자는 두 개의 재현적인 농촌 소설, 이광수의 『흙』과 심훈의 『상록수』를 조명한다. 이 논문의 나머지 절반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 좌파 경향의 진영에서 나온 광범위한 텍스트들을 다룬다. 문화 민족주의적 작품들이 민족성의 수행성을 상류층 사람들과 지식인들에게 한정시키고 있다면, 좌파 작품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유동적이고 유연한 민족 정체성의 지점을 점유할 동기 부여와 잠재성에 대해서 보다 급진적인 그림을 그려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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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개벽』에 황석우가 월평을 쓰면서 시작된 황석우ㆍ현철 사이의 논쟁은, 현진건의 「희생화」에 대한 황석우의 혹평이 현철을 자극하여, 종국에는 논의의 초점이 두 사람 사이의 감정싸움으로 심하게 변질된 것으로 당시 문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현철과 친척 관계에 있는 현진건에 대한 황석우의 비판은 실제로 이 논쟁의 과정 중에서 전혀 중요한 논점으로 다루어진 적이 없다는 점에서 항간의 이러한 구설(口舌)은 실제로 현철과 현진건의 관계에서 유추된 루머에 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이 두 사람의 논쟁에는 1920년대 초반에 있었던 어떤 논쟁보다도 근대시의 개념과 장르적 특징, 민족시 등의 다양한 논점을 비교적 심도 있게 이론적으로 모색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종래의 문학사 연구에서 현철과 황석우의 논쟁은 그 이론적 논의나 비평사적 의의가 거의 간과된 채 일종의 문학사적 초기 현상에 해당되는 인신공격과 초점이 빗나간 인상비판, 현학적, 의도적 오독 등이 난무한 수준 미달의 초기 문단적 해프닝으로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지금까지의 평가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논쟁 중에 드러난 황석우, 현철의 비평적 수사가 지나치게 사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어법,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 논의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의식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논쟁의 형태는 미숙함을 넘어서 실제로 수준 미달의 비평적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평적 글쓰기의 미숙함은 근대문학 초기 비평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롭게 제기될수 있는 비평적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연스럽게 돌출된 결과이다. 따라서 이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현철과 황석우 간의 감정싸움으로 보이지만, 그 내막에는 민족시의 개념과 신시의 정체성 문제가 중요한 논점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논쟁은 상징주의자인 황석우의 서구 지향적 데카당 취향과 현철의 문화론적 민족주의의 상반된 시각이 충돌하면서 빚어진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현철이 쓴 장문의 글 『批評을 알고 批評을 하라』는 이 점에서 신시의 정의에 대해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치밀하고 이론적인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1920~1921년 사이에 이루어진 이러한 논의는 이후 최남선의 ‘시조부흥론’, 김억의 ‘민요 중심의 조선시 구상’, 주요한의 ‘조선시 주장’ 등으로 이어지면서 국민문학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시, 국민문학’ 개념의 정립으로 발전된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을 요한다. 황석우, 현철 간의 논쟁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이러한 신시에 대한 초기의 이론적 모색과 현철의 글에 나타난 신시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서양시와 신시의 차이를 묻는 현철의 질문은 새롭게 건설해야할 민족시의 정체성과 장르적 특성, 그리고 전통적인 시가와 현대시의 연속성 문제 등이 포괄적으로 담겨 있다는 점에서 초기 시단의 문제적 지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김택영, 근대적 각성과 중국문인들의 영향

김동훈 ( Kim Dong-h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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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전환기에 창강 김택영은 중국 망명지에서 강유위, 엄복, 장건 등 계몽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서구 물질문명과 유교 정신문명의 결합, 민족자주의 자본주의 상공업 발전에서 한국식 근대화의 출로를 찾았으며, 진화론적 우주관에 입각하여 조선왕조의 역사교훈을 검토하고 독립적 인격을 갖춘 근대적 사학가로 탈바꿈 했다. 항일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민족자주의 근대화 이상은 친일 지식인들의 일본식 근대화의 지향과 대립되는 의식구도를 보여주었다.

식민지시기 교정쇄 검열제도에 대하여

한만수 ( Han Man-s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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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식민지시기 한국의 검열제도 중 하나로서 교정쇄검열에 주목하고자 했다. 현재 남아있는 교정쇄검열의 증거, 교정쇄 검열제도의 정착과정 및 담론통제 효과 등에 대해 살핀 결과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검열제도는 사전검열과 사후검열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식민지시기 한국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사전검열이었으므로 이런 식의 분류는 별 의미가 없다. 따라서 원고검열-교정쇄검열-납본검열-발매후 검열 등으로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이 중에서 발매후 검열만 사후검열에 속한다. 둘째, 당시 신문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사후검열을 행했다고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사후검열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교정쇄검열의 성격이 강하다. ‘인쇄와 동시에’ 검열을 받아, 그 결과를 지면에 반영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검열당국은 1933년 교정쇄검열을 공식화하였지만, 신문지법 잡지는 적어도 1920년대부터 이를 활용해왔으며, 출판법잡지 역시 검열전 조판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원고검열의 원칙을 회피해왔다. 검열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탓에 잡지가 정해진 발간일자를 못 지키는 일이 잦자, 제작 공정을 최대한 단축시켜 이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여러 증거로 미루어볼 때, 검열당국은 꽤 오랜 기간에 걸쳐 이를 묵인해왔다. 넷째, 1933년에 검열당국은 교정쇄검열제도가 “편법”임을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공식적으로 도입한다. 대신에 검열당국은 그 적용대상을 “온건한” 잡지로 한정지었다. 정시 발간을 필요로 하는 인쇄자본의 요구를 활용하여 담론통제를 노렸던 것이다. 다섯째, 인쇄자본 역시 어느 정도의 자본이 투여된 상태에서 검열 받는가에 따라 검열결과에 따른 자본의 손실이 달라졌으므로, 교정쇄검열로 이행하면서 내부적 검열의 수위를 조정하였을 것이다. 원고검열보다 자본을 많이 투입한 상태에서 검열을 받게 되는 (당시 출판비의 절반 이상은 조판비였는데, 교정쇄검열은 조판비를 투입한 상태에서의 검열이다) 출판법 잡지는 국가검열 이전에 내부적 검열을 강화하였을 것이다. 반면 신문지법 잡지는 납본검열보다 교정쇄검열을 받을 때 더 적은 자본이 투입되므로(인쇄비를 투입하지 않은 단계에서 검열을 받게 된다) 내부검열을 완화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여섯째, 검열당국이 신문지법 잡지의 교정쇄검열을 묵인했던 까닭은 신문지법잡지가 대체로 출판법 잡지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컸다는 점, 교정쇄검열 이후에도 다시 납본검열을 통해 통제할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는 점 등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곱째, 식민지시기 잡지를 읽을 때는 늘 검열의 존재를 상정하여야 한다. 특히 특정 잡지의 특정 호가 교정쇄검열본인지를 확정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만일 교정쇄검열본이라면 당대에는 매우 제한된 독자만이 읽을 수 있었던 판본임을 염두에 두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식민지 시기 한국의 검열문제에 대해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여왔다. 이 문제를 살피면서 필자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인식틀 중 하나는 검열제도와 그 실제 작동양상이란 검열당국과 민간주체들(작가-인쇄자본-독자)의 길항적 관계에 의해 형성되어 갔다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 교정쇄검열제도의 정착과정에 대해 살피면서도 이 같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식인 여성상의 사적고찰 ―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조미숙 ( Jo Mi-soo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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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에서 지식인의 문제를 짚어볼 때, 식민지 치하에서부터 고찰할 수밖에 없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지식인이지만 사회에 대한 비판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많은 압제 속에서 움츠리듯 살아야 했다. 본 논문은 한국의 지식인, 그 고민이 여성상을 통하여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두고있다. 그를 위하여 전통적으로 여성 억압적인 한국 권력의 장 안에서, 하위 장으로서의 문학 장 안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어떻게 그려지고 읽혀 왔는가, 지식인 여성들의 문학작품 내 역할이 어떤 식으로 문학 장을 반영하고 있는가를 부르디외의 장과 아비투스 개념과 연관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그를 위하여 신여성들이 형성하는 신여성상에서 시작하여 1950년대 여성작가들의 여성상까지 김명순, 나혜석, 강경애, 최정희, 박화성, 한무숙, 한말숙 등의 작품속 여성상을 사적으로 고찰하였다. 여성은 여성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문제부터 천착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성의 문제는 성장과정에서의 의식 각성, 섹시즘의 문제, 결혼과 사랑, 성욕의 문제, 결혼 후 모성의 문제, 노년의 문제 등으로 나누어질 수 있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성 작가들의 소설에서 이런 문제들이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여성작가의 여성상을 중심으로 여성 인물들의 자각과정에 주목하였거니와 역사 속 타자였던 여성이 스스로 주체로 인식하고 사회의 제반 아비투스와 대결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타자였던 여성이 주체가 되어 가는 과정에 남성이 매개체로서 설정된다는 점이다. 이 경우 여성은 남성중심의 기존 가치체계를 그대로 이식하여 여성 스스로도 사회의 아비투스를 내면화하고 그 결과 여성을 규정하고 억압하는 것들을 당연시하게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 하나가 모성콤플렉스이다. 모성으로 모든 일이 해결된다는 설정은 모든 문제를 여성에게 미루고 억압을 은폐하는 행위이다. 참된 의미에서 성의 해방이 성적 역할이 없는 남녀관계라 할때 모성에 대한 지나친 미화와 강조는 어머니라는 역할 이외의 여성의 문제에 눈을 가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모성 이외의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하고 있는 식민지 치하와 광복기의 일련의 소설들은 여성문학적 관점에서 매우 의의 있는 작업이다.

‘일민주의’ 파시즘과 정치적 서사성 연구 ― 1950년대 문학을 중심으로 ―

이평전 ( Lee Pyeoung-je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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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민주의’라는 파시즘적 경향을 지닌 정치 이념과 1950년대 소설에 나타난 정치적 서사와 문학 담론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특징적인 것은 식민지 체험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해방ㆍ전쟁 전후 세대들이 어떻게 ‘파시즘’이라는 폭력적 이데올로기를 동원하고, 문학과의 관계 속에서 이를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전쟁을 전후로 문학은 정치와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면서 파시즘적 요소들을 서로에게서 차용해왔다. 이것은 실제로 식민지의 내적 검열의 과정을 거쳐 현실정치의 직접적 억압으로 재생된다. 일민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도의와 윤리’가 곧바로 ‘인격’으로 연결된다거나 가족이나 윤리, 전통, 유기체론과 같은 개념들이 ‘일민주의’의 정치 이념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곧바로 식민지 파시즘을 연상케 하는 것들이다. 또한 이들은 가부장적 구조의 ‘가족’을 상정하고 ‘전통’과 ‘반공’으로 파시즘의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이러한 과정은 1950년대 소설이나 문학 담론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전후 파시즘과 관련한 이 시기 문학연구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민주의’와 같은 실제의 정치체제가 한국전쟁에 대한 문학의 본질적 접근과 성찰의 기회를 제한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전쟁의 영향 관계 속에서만 이 시기 문학작품을 해석하려는 연구 관행을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근대문학에 나타난 ‘만주’ 표상 ― ‘만주국’ 건국 이후의 소설을 중심으로

정종현 ( Jung Jong-hy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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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기 “만주(Manchuria)”는 조선인의 생활권(life sphere)이었다. 만주의 조선인은 종족적 정체성은 조선인, 거주지는 중국, 국적은 중국 혹은 일본을 선택해야 하는 삼중의 정체성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 애스닉 집단이자 경계인의 측면을 지니고 있었던 재만조선인과 그 문학을 현재 대한민국(ROK)이라는 국가정체성과 동일한 주체로 상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근대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한 만주 경험을 해방 이후의 내셔널한 국민국가의 주체성으로 재단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고는 이러한 내셔널한 접근에서 벗어나 식민지 시기에 쓰여진 소설 텍스트에 표상된 다양한 층위의 ‘만주’의 모습과 만주국 이데올로기와의 관계를 구상화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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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관동별곡>을 한역한 청호 이양렬(1581~1616)의 <관동별곡번사>에 대한 문학적 검토이다. 지금까지 <관동별곡번사>는 청음 김상헌(1570~1652), 서포 김만중(1637~1692), 청호 이양렬(1581~1616), 춘담 신승구(1810~1864)의 4편이 전해지고 있다. 이중에서 춘담의 번사는 최근에 필자가 발굴해 낸 것이다. 필자는 이 과정에서 청호가 연대 미상인 점을 착안하여 이 분야의 연구를 위해서 그의 생몰 연대를 밝힐 필요를 느꼈다. 그러다가 최근에 마침내 그의 생몰연대를 찾아냈다. 그는 18세기 인물일 것이라는 연구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16세기 말엽부터 17세기 초엽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전주 이씨의 왕실에서 분가한 영해군의 후손이었고 선조 14년(1581)에 태어나 광해군 8년(1616)에 3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출사하기 이전에 병사한 것으로 보인다. 청호는 서포보다 반세기 이상을 앞서고 청음보다 11년 늦게 태어났지만, 청호가 30세를 전후로 하여 <관동별곡>을 한역한 것으로 미루어본다면 그가 오히려 청음보다 한발 앞서 <관동별곡>을 한역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청호의 <관동별곡번사>를 살펴보면, 다음 몇 가지 특질을 찾을수 있다. 그는 <관동별곡>을 191구의 7언고시체 한시로 한역하였는데, 이것은 청음이나 서포보다 길고 290구에 달하는 춘담에 비해서는 짧다. 그는 대체적으로 4음보 2구를 한시 1구로 한역하거나 2음보 1구를 한시 1구로 한역하고 있다. 그의 한역은 원문에 없는 내용을 일부 첨가하거나 생략하기도 하였지만 원문에 충실한 번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원문을 한역하면서 내용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새로운 어구를 첨가하여 작품의 성격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태도가 엿보인다. 특히 어휘를 바꾸거나 어구 첨가를 통하여 작품을 유가적 포부를 담은 충신연주지사로 전환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아진다. 청호는 한역하면서 원문의 내용이 과장적인 내용이라고 생각되는 어구는 삭제하거나 다른 내용으로 변개시키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는 사실적 표현을 중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청호는 번사를 단순한 번역으로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하고 인식하는 문예 의식도 함께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정의 구조와 윤리 ― 한ㆍ중 교우론에 대한 문학적 사유

박성순 ( Park Sung-s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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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에 건너온 서양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교우관과 16~17세기 明末淸初 師友論의 양상 그리고 18세기 조선 北學派 지식인들의 交友論과 문학을 살피는 것을 주요한 내용을 한다. 수평적인 윤리체계로 받아들여지는 교우론의 중세적 특징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교우론의 현재적 가능성을 전망해 보고자 한다. 16~17세기 명ㆍ청 교체기에는 정치ㆍ사회상의 변모와 맞물려 五倫의 朋友觀과 師友에 관한 논의들이 집중적으로 생산된다. 王陽明을 비롯하여 王心齊, 王龍溪, 何心隱, 李卓吾 등 주로 陽明學派를 중심으로 전개된 사우론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講學運動을 통해 사우와 교우의 중요성을 재조명하는 한편, 義의 실천을 내용으로 하는 교우론을 통해 주자학적인 윤리관의 혁신을 모색하였다. 서양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은 당시 이런 중국 지식인들의 교우론과도 통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이들의 교우론은 수직적 윤리관을 통섭하는 수평적 윤리관이다. 이 횡적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모든 종적 인간관계를 거부하고, 신분이나 민족이나 문화적 차이를 초월하는 인간관계의 윤리적 자각이다. 조선후기 사상사의 추이와 관련하여, 북학파를 중심으로 대두된 교우론은 문학론적으로는 진정성을 추구하는 주체의 모습으로 내면화된다. 우정의 윤리학과 진정성의 추구는 타자와의 상대론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태도로, 기존의 윤리관과 문학관의 수정을 요구하거나 창조력을 부여한다. 우정의 윤리학을 작동시키는 글쓰기는 객관주의적인 상대성의 논리를 체득하고, 삶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적극적으로 묻고 교섭하며, 그 변화 가능성을 노정한다. 우정의 윤리학은 그것의 속성상 본질로의 환원을 경계하는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이미 고정되고 물신화된 정전적 사유방식의 권위를 해체하여 새로운 교양을 발견하는 데 주력한다. 21세기의 윤리는 타자를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목적으로 생각하는 윤리적인 의무, 곧 책임에서 비롯한다. 자유로운 주체는 이런 윤리적 실천 속에서만 기거할 수 있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이러한 윤리는 16~18세기 동아시아의 교우론이 획득한 지평과 방불하다. 교우론의 윤리란 수평적인 대화의 윤리이자, 義를 중심으로 하는 책임의 윤리이기도 한 까닭이다. 공동체의 규범과 습속을 뛰어넘어 자발적이며, 진정한 대화와 타자에 대한 책임을 기반으로 하는 우정의 윤리야말로 동아시아의 연대와 자유로운 주체를 확립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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