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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연구검색

The Studies in Korean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어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9-437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0권 0호 (2006)

‘고향’이라는 이야기ㆍ再說 ― 20세기 후반의 ‘고향’과 관련하여

나리타류이치 ( Narita Ryuich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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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둘러싼 문제는 1930년대에 전환기를 맞이했지만, 1970년 전후로 복잡한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있다. 1930년대의 ‘고향’을 둘러싼 체험이 50년대에 서사화되기 시작하고 70년대에 再記述되어 ‘고향’이라는 이야기는 복잡한 양상을 드러낸다. 본고에서는 1930년대의 체험(體驗)을 근거로 한 ‘제국’의 공간으로서의 고향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20세기 후반의 「고향」 이야기의 일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전쟁과 ‘인양’, 혹은 ‘억류’와 같은 고난을 극복할 때 ‘고향’은 활력의 근거가 된다. 또한 그 체험을 사후적으로 정리하고 서사화할때, 상황과의 관련 속에서 끊임없이 큰 ‘위력’을 발휘하고, 특히 감정의 면에서 사람들을 구속해 나간다. 그리고 아이덴티티의 곤란에 직면하게 만든다. 20세기 후반에도 고향 이야기는 변화를 거듭하고 있으며, 국가와 함께 자본이 ‘고향’의 개념과 관련을 갖기 시작한다.

노래와 고향의 재창조 ― 20세기 전반기 민요운동과 그 외

쓰보이히데토 ( Suboi Hide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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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에 발표된 문부성 창가 「故(ふるさと)」는 어쩌면 어린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는 어른들을 위해 존재하고 오랫동안 불려온 것이다. 고향이란 현재의 장소가 아니며, 입지의 포부 속에서 “언젠가는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의 목적지인 것이다. 지방(고향)에서 도회로 나와 뜻을 이루고 다시 고향으로 귀향한다. 이러한 상승과 하강에 의해 생기는 원이 고향이라는 둥근 원형의 자기만족적이며 조화로운 시간과 공간의 이미지를 빚어낸다. 고향보다 앞서는 「반딧불이의 빛」이 팽창주의적인 국체 이데올로기를 기조로 하면서 학교=고향을 떠나는 장면, 즉 창가 「고향」을 추억하는 모습의 기점을 이루는 장면을 노래한 것 역시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비재(非在)로서의 고향에 윤곽을 부여한 ‘지금- 여기’는 자연에 대해서 인공, 소박과 무위에 대한 기교(기술)와 세련, 혹은 공간적으로는 지방에 대한 도시, 시간적으로는 어린이에 대한 어른에 해당한다. 반대로 말하면 인공=기술적인 아트(art) 혹은 쿤스트(Kunst)를 매개로 함으로써 비로소 고향의 자연(nature)을 발견하고 표상 할 수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창가에 나타난 고향 표상을 분석하는 것을 계기로, 그것과 함께 창조된 민요라는 장르의 성립과정을 고찰하면서 근대일본의 노래 속 ‘고향’의 문제에 대해서 고찰한다.

프로레타리아 소설과 노스탤지어의 시공(時空)

김철 ( Kim Cheo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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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의 대표작인 『고향』 (1933)을 비롯해서 『신개지(新開地)』 (1938), 『처녀지(處女地)』 (1944) 등은 낯선 시간과 장소에 놓인 주인공- 영웅(hero/heroine)이 잃어버린 가능성의 시간들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는 이야기, 다시 말해 근대적 노스탤지어의 표현물이다. 이 소설들을 근대적 노스탤지어의 이야기로 읽음으로써, 이 글은 흔히 프로레타리아 소설로 대표되는 한국의 근대 리얼리즘 문학이 실은 모더니티의 변화된 시간관, 특히 직선적(linear) 진보 이념을 바탕으로 현실(reality)의 존재론적 구속을 통속적 혹은 정신적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를 담고 있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고향』의 원터 마을, 『신개지』의 달내골, 『처녀지』의 정안둔(正安屯)의 시-공간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이 공간은 훼손되지 않은 어떤 순수한 원형의 공간이다. 이 공간 속의 시간은 과거이며 이 공간 속의 인간들은 순박하고 건강한 생명력을 지닌 프로레타리아를 표상한다. 동시에 반대로, 이 공간들은 개조되고 변형되어야 할 공간이다. 따라서 이 공간 속의 시간은 미래이며 이 공간 속의 인간들은 무지의 어둠에 잠긴 미개인들이며 역시 개조되어야 할 대상이다. 노스탤지어적 인물은 예측불가능한 과거, 불가역적 시간에 대한 회한과 고통을 벗어버리고 예측가능한 미래로 몸을 던진다.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을 수행하는 ‘혁명’과 과거를 보존하는 ‘전통’은 모더니티의 충동 속에 동시적으로 공존한다. 근대적 노스탤지어는 혁명(미래)과 전통(과거)에 대한 동시적 그리움이며, 그런 의미에서 모더니티 그 자체이다. 이러한 근대적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힌 지식인-주인공-작가의 시선이 발견한 ‘고향’과 ‘농촌’은 식민지 속의 또다른 식민지이며 프로레타리아는 그들에 의해 다시 식민화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이 미래에의 노스탤지어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식민주의적 노스탤지어(colonial nostalgia)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근대음악과 ‘고향’

민경찬 ( Min Kyung-c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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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고향’을 주제로 한 노래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고, ‘고향’이 근대 노래 속에 어떻게 반영되었으며, 그 음악적 의미와 특징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알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먼저 ‘창가’, ‘독립군가’, ‘동요’, ‘가곡’, ‘대중가요’, ‘북한의 근대음악’ 항으로 나누어 고찰한 다음, ‘고향’을 노래한 근대 노래의 음악적 특징 및 그 의미를 추출해 내었다. 그 결과 ‘고향’을 주제로 한 노래는 근대 이전에는 별로 없다가 근대 노래의 출현과 함께 대량으로 등장하였고, 근대 노래 전 장르에 걸쳐서 나타났고 또 애창이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체적으로는 ‘서정성’을 기조로 하면서 음악적으로는 서양의 장음계를 사용하면서도, 전통음악과의 절충효과를 내기 위하여 5음 음계적으로 사용한 것이 많으며, 3박자와 6박자를 많이 사용하였고 거기에서 오는 리듬감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일본ㆍ중국 등 주변국가의 근대음악과는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이 들도록 하였다. 그런 한편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면서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집단 가창’이 용이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지고 불린 서정적인 노래는 우리 민족이 가장 어둡고 힘든 시기에 민족의 구성원들과 애환을 같이 하였다는 이유 등으로 말미암아 ‘민족의 노래’라는 지위를 얻게 되었고, 많은 노래들이 음악 교과서에 수록되어 근대노래의 정형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고향을 주제로 한 노래는 이제 ‘노래의 고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도서과의 설치와 일제 식민지출판경찰의 체계화, 1926- 1929

정근식 ( Choi Kyeong-hee ) , 최경희 ( Jung Keun-si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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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검열의 체계화과정에 대한 정확하고도 포괄적인 파악을 목적으로 1926년 4월에 신설된 도서과를 중심으로 1920년대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진행된 출판경찰의 체계화과정을 고찰한다. 체계화를 분석하는 지표는 검열담당 기구의 독립, 출판경찰인력의 확충과 분업화, 검열결과 및 관련자료의 정리와 출간, 검열기준의 표준화 등이다. 1920년 이후 1920년대 말까지 나온 일선의 도서과 직원들의 말과 글 및 도서과가 발행한 출판경찰 관계자료들을 분석하고 또 조선출판경찰의 체계화과정을 비슷한 시기의 일본내의 출판경찰의 현황과 비교 고찰함으로써, 1920년대 후반에 진행된 조선의 출판경찰의 다각적인 제도화가 1930년 이후의 출판경찰체제의 초석이 되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일본에서의 도서과의 제도화와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병행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논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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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개벽』이 폐간된 표면적 이유는 사회주의와의 연관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잡지임을 전면적으로 표방했던 『조선지광』은 1932년까지 간행이 허용되었다. 이러한 차별적 현상은 식민지 검열체제가 미디어의 존폐를 매우 복잡한 역학 속에서 결정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이다. 검열체제가 『조선지광』의 지속적 간행을 묵인한 것은 『조선지광』이 검열체제의 통제 아래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주의의 대중적 이미지를 약화시키려는 것, 그리고 사회주의 합법 미디어의 존재를 통해 사회주의가 제국의 식민지 경영에 위협세력임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려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조선지광』은 식민체제가 ‘스스로 생산한 적대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은 그러한 역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개벽』폐간의 실질적 이유가 사회주의 때문이 아니라 대중적 헤게모니에 있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조선지광』을 사회주의 진영만의 매체로 전문화시켰는데 그것은 반일 세력 결집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식민권력의 미디어 정책과 『조선지광』은 의도하지 않은 협력 관계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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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에서 1936년 사이에 식민지시대 한국의 영화산업은 국내영화의 제작과 미국, 영국, 중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 외국영화의 배급 및 상영으로 매우 역동적이었다. 이 시기는 한국 시장에서 할리우드 영화가 맞이한 첫 번째 황금기로 한국시장은 할리우드 영화가 장악하고 있었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할리우드는 전세계로의 입지 확장에 한국을 활용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세계화 작업이 이루어지던 이 시기 동안 조선총독부의 영화검열기구는 자체적으로 재정을 충당해냈다. 조선총독부는 장편 및 비장편으로 이루어진 미국영화 6,700편 및 미국을 제외한 여타국 영화 630편의 검열을 통해 얻은 이익으로 검열기구 운영비용을 충당했으며, 이들 영화 중 대부분이 거의 아무런 수정 없이 검열을 통과했다. 조선총독부의 영화 검열정책은 공산주의나 혁명주의, 후에는 사회주의 주제를 담은 영화를 제한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최소한 1930년대까지는 “서구”를 주제로 한 영화에 대해서는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 내무성은 미국 영화의 수입을 금지하기 시작했고, 조선총독부는 한국 문화에 대한 억압을 강화했다.

일제강점기 언론ㆍ출판법제

김창록 ( Kim Chang-ro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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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신문지 등 정기간행물과 출판물에 관한 제정법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의 언론ㆍ출판에 관한 법제를, 일제 자체의 법제와 강점기 이전 및 이후의 법제와의 관련성을 고려하면서, 일제의 법체계 및 식민지조선의 법체계 전체에 대한 이해 속에서 자리매김함으로써, 일제강점기의 법의 실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나아가 일제강점기 전반의 실체 및 성격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이다. 일제의 언론ㆍ출판법제는, 메이지(明治) 초기에는 ‘장려 중심’이었던 것이 서서히 ‘통제 중심’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 갔다. 1889년의 「大日本帝國憲法」의 제정을 앞두고는 장차 도입될 헌법상의 언론ㆍ출판의 자유에 의해 제약되어 통제의 강도가 약화되는 방향으로 재정비되었으며, 헌법 제정 이후에는 헌법에 의해 도입된 제국의회에 의해 다시 한번 약화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개선’은, 일제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점차 제국주의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원점으로 되돌려졌고, 1930년대 이후의 파시즘기에는 다수의 특별법에 의해 통제의 강도가 더욱 강화되었다. 한반도의 언론ㆍ출판법제는 우선 러일전쟁 당시의 일본군의 군사법령이라고 하는 비정상적인 형태로 일제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일제의 영향은, 언론ㆍ출판의 자유를 포함한 인민의 권리의 보장보다는 군권의 강화에 골몰했던 대한 제국의 「新聞紙法」과 「出版法」에서, 일제의 경험 중 가장 강도 높은 통제적 요소가 도입되는 형태로 구체화되었으며, 그것이 1930년대 이후의 추가적인 통제법령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식민지조선인에 대한 언론ㆍ출판법제의 근간을 이루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언론ㆍ출판법제는, 한반도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는 상대적으로 통제의 강도가 약한 통감부의 「新聞紙規則」과 「出版規則」이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최악의 통제’에 더하여 ‘차별적 통제’라고 하는 추가적인 문제성을 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언론ㆍ출판법제는, 뒤이은 미군정기에도, 「新聞紙法」의 경우처럼 법령 그 자체가 효력을 지속하거나, 사실상 동일한 통제적 요소를 담은 미군정의 법령에 의해 대체되는 형태로, 그 모습을 이어갔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의 언론ㆍ출판법제는 ‘식민지 지배국의 최악의 경험의 집약적 반영, 차별 그리고 식민지 이후에의 연장’으로 특징지워진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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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주민의 통합책이었던 황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친일행적과, 해방 후의 재일조선인문학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해석의 전략이 맞물리면서 장혁주와 그의 문학에 대한 평가는 그 ‘친일성’이 강조, 비판되어 왔다. 이 평가는 사실 그 자체로서 타당하기 때문에 대표적인 친일문학자 장혁주를 논의하는 작업은 이 기존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아직까지 한일 양국의 어느 쪽에 있어서도 민감한 사안임을 의식해야만 한다. 다만 장혁주에 대한 유형화된 평가는 그 결과를 명료히 제시해주는 반면에, 그만큼 그 결과에 이르기 까지의 ‘장혁주의 과정’을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에 뻔한 것으로 재단해버리는 획일적인 담론으로 흐르기 쉬웠음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본고는 장혁주 개인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식민지기의 역사적, 현실적 상황과 조건 속에서 영위된,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던 장혁주의 ‘과정’을 재검토하고자 한다. 도쿄 이주 이후 발표한 작품과 글 속에서 그 자신을 포함한 재일조선인의 혼종적인 정체성과 문화를 모색하고 있던 장혁주는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조선에 귀속하는 것으로 상정했던 여타 작가들과 다른 지점에 서있었다. 본고는 식민지 후반기의 장혁주의 문학과 글을 통해 그의 정체성의 모색의 흔적을 살핌으로서 그의 모색이 전시총동원 체제와 황민화운동의 강화라는 역사적 조건하에서 어떠한 형태로 연속하면서, 동시에 변용해 갔는지 그 이행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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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3세기 후반 백련결사(白蓮結社)에 참여한 지식인들의 생각과 감정을 살펴볼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천책(天頙)이 주도했던 백련결사는 당시 유교적 고려지식인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유경(柳璥), 이장용(李藏用) 등이 그들이다. 그 결과 유교적 지식인과 불교적 지식인 사이에 시적(詩的)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때 지어진 시를 ‘연사시(蓮社詩)’라고 부른다. 그들은 이 시를 통하여 불도(佛道)에 대하여 찬양하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자연을 선망(羨望)하기도 했으며, 백성에 대한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비록 사회적 행동을 하는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서로 집단적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고려후기 문명의식(文明意識)과 동인의식(東人意識)의 시발점이었다. 이처럼 당시 고려지식인들이 원간섭기를 살아가면서, 사대(事大)와 민족, 현실과 명분(名分) 사이에서 고려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헌신하며 시를 통해 정감적 교류를 도모했던 것은 문학사적으로 의미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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