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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연구검색

The Studies in Korean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어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9-437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3권 0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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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만주에 유입된 조선인 농민의 문제를 당시의 식민지 조선의 문학자, 특히 이기영(1895-1984)이나 한설야(1900-?) 등, 식민지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다하면서, 해방 후에도 북한의 문예정책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던 문학자들이 어떤 이미지로 작품화했는지에 대해서 검토했다. 만주국의 총동원 체제의 문제, 혹은 거기서 농민들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루이즈 영(Louise Young)이 지적하는 ‘재발명된 농본주의’(reinventing agrarianism)라는 개념이 유용하다. 만주의, 혹은 만주를 둘러싼 문화 표상에서 많이 강조된 농본주의는 원래 일본 국내에서 주장되어 온 것과 달리, 이민과 농촌 개혁 운동이 결합된 형태로 주장되었고, 또 그것 때문에 농본주의자들은 만주를 이상 달성을 위한 공간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사회정책적인 면에서는 계급차이나 소작제도의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배려되기 시작했고, 자본주의 근대를 반유토피아적인 개념이 아니라 바로 유토피아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식민지 조선의 구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작가들은 만주를 둘러싸고 출현하게 된 이러한 새로운 사태에 대해 스스로의 문학활동을 연장시키는 형태로 대처해 나갔다. 본고에서는 이기영의 장편 대지의 아들(1939~40)과 장편 처녀지(1944), 한설야의 일본어 중편 대륙(1939)을 검토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 작품들은 모두 기묘하게도 남녀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되면서 매우 금욕적인 인간상이 이상적인 것으로 강조된다. 그리고 작품 중의 인간관계의 구성이 (이것은 실제 만주국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것인데) 민족이나 계급(농촌의 경우는 지주와 소작인)을 무화해 나가는 형태로 제시되는 것도 특징적이다. 그리고 이들 소설에서는 무엇보다도, 만주라는 공간이 인간을 갱생개조하는 장소라고 강조되고 있다. 조선인 농민은 현실에서도 픽션에서도 조선이라는 고향에서 쫓겨났을 때에는 일본 식민지 정책의 희생자이다. 서사화의 범위가 여기까지라면 종래의 농본주의를 고수함으로써 대립갈등형의 서사구조를 지키면서 저항적인 민족주의를 계속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무대가 만주로 옮겨지면 적어도 허구의 수준에서는 현지 중국인 농민과의 마찰갈등을 잉태하면서도 이상적인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유트피아니즘의 체현자로서 그려진다. 만주에 건너간 그러한 조선인의 주체를 정립시키고 있는 것은 고향에서 땅을 빼앗긴 희생자로서의 기억이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만주 황야의 어려운 환경도 견딜 수 있게 하는 인내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만주에서의 조선인 농민의 노고가 해방 후의 한국에서도 자주 애환 어린 서사로서 민족주의적으로 재생산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두만강을 건너가면서 ‘식민지적 무의식’은 ‘식민주의적 의식’으로 바뀐다. 이러한 주체 의식의 아이러니컬한 질적 변화는 민족주의의 저항성이 제국의 논리 하에서 순치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작가들은 이야기의 내용에 있어서 그 이전의 프롤레타리아 농민문학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무대만큼은 조선으로부터 만주로 옮기면서, 그 땅의 조선인 농민이나 지식인들의 어려운 처지를 일상적인 것으로 묘사했으며 그것을 등장인물에게 극복하게 하려고 했다. 또한 실제로 행복한 형태로든 불행한 형태로든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문학 작품에서의 계급관계, 생산관계의 이러한 극복은 과거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전매특허였는데, 그 극복이 제국에 의해서 찬양되는 사태를 맞이하면서 그들은 얼마나 그 통합의 논리를 자각하고 있었을까?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계급이나 민족의 차이가 국가주의에 의해서 위장적으로 무화되어 가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그들이 취한 태도가, 조선이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도 그들의 거취에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끼쳐 갔다는 사실이 아닌가 싶다.

딱지본 대중소설에 나타난 ‘만주’ 표상

정종현 ( Jung Jong-hy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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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만주 체험을 다룬 십여 편의 딱지본 대중소설을 대상으로 하여 식민지 조선 대중들에게 유통된 만주에 대한 정형화된 표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주조되었는가, 또 그것이 지식인 담론 및 지배 이데올로기와는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가 등의 문제를 검토했다. 중국인(淸人)을 이주조선인에 대한 박해자이자 야만족으로 표상하고 일본인과 영사경찰력을 보호자이자 문명의 상징인 법률의 공정한 집행자로 묘사하는 것은 딱지본 대중소설의 전형적인 서술방식이다. 이러한 만주(人) 표상은 청일전쟁 이후 중화질서 체계가 해체되고 전통적인 중국 표상에 대한 급격한 전도가 이루어지며 형성되었다. 이러한 중국인(만주인) 표상은 한국 소설의 중요한 서사적 관습의 하나인 ‘여인수난사’와 결합되어 중국인에 대한 민족적인 적대의식을 정서적으로 고취시켰다. 중국인은 조선여인을 겁탈하려는 지주 혹은 악한으로 표상되었으며, 이를 통해 중국인과 조선인의 가해자/피해자 상은 더욱 고착되었다. 딱지본 대중소설을 통해 유포된 수난자 의식은 만보산 사건에서 촉발된 조선인의 화교 공격에서 드러나듯이. 강렬한 민족적 적대감으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만주 표상과 인식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내면화한 것이며, 일본과 조선의 지배/피지배의 모순을 중국/조선 간의 종족 갈등으로 은폐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제국의 국민으로 신생하려는 식민지 조선의 식민주의적 의식의 발현이 기도 했는데, 개척을 통해 만주에 이상촌을 건설한다는 만주관련 딱지 본 대중소설의 결말은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만주국 극영화의 제상(諸相) - 만주영화협회의 제작 방향 변화를 중심으로 -

강태웅 ( Kang Tae-wo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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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영화협회(이하 만영으로 줄임)에 관한 종래의 연구는 만영의 연혁, 만영에서 활동한 구성원들의 개인사, 제작된 영화들의 줄거리 요약에 중심을 두어왔고, 만영의 역할 또한 선전을 위한 국책영화 제작이라는 평면적인 기술로 일관하고 있다. 왜 이러한 극영화가 제작되었는가라는 만영 내부의 시각에 대한 고찰이 부족했다. 본고는 만영에서 단행된 극영화제작방향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만영이 산출한 극영화의 제상(諸相)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극영화제작의 방향성은 ‘오락중시’와 ‘만인(滿人)중심’, 두 가지로 요약될 수가 있다. ‘오락중시’는, 대중에 다가가지 못하는 선전성이 농후한 작품보다는 우선 많은 이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오락성 있는 영화제작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만인중심’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한 가지는 제작자체를 ‘만인’에게 담당시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작품내용을 만주문화의 전통 위에 쌓는 것이었다. 만영의 극영화 제작방향의 변화는 단순히 관객동원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복합민족국가’인 만주국에서 만영이 다민족을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한다면 그러한 경험을 통해 ‘동양의 헐리웃’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만영의 포부가 들어있던 것이다. 또한 대중에 대한 파급력이 강한 영화를 통하여 만주국의 ‘독립적인’ 문화를 만들어내어 ‘만주’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일조하게 하여, 대중 저변으로부터의 내셔널리즘을 환기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만주음악연구(滿洲音樂硏究)1 - 만주국의 음악정책 전개 -

魯棟銀 ( Noh Dong-e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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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32~1945년간 존재한 중국 동북지역의 만주국(滿州國)의 음악정책을 연구한 만주음악연구이다. 특히, 만주국이 1941년에 발표 한 ‘예문지도요강’(藝文指導要綱) 내용과 성격, 그리고 그 요강에 따른 악단조직과 만주국 건국10주년 경축음악 전개 등의 만주국 음악정책을 중심으로 전개양상을 다룬다. 이 글 1에 이어서 2에서는 만주국 음악정책에 따라 조선출신 음악가들의 활동을 비롯하여 독립운동현장의 항일(抗日)음악전개상황을 연구하고자 한다. 이 연구들은 조선출신 음악인들이 시기 일본의 소위 대동아공영권(大東亞 共榮圈) 수립에 따른 만주 국의 음악정책에 따라 활동하며 국내 악단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 왔고, 또 만주국과 교류하며 일제의 만주국 건설과 그 개발에 따른 이민정책은 물론 남 · 중 · 북지(南 · 中 · 北支)의 생산현장과 관동군 위문공연을 비롯한 일본국민음악을 수립하려는 정책에 이바지할 뿐만 아니 라, 더욱이 이 지역은 조선인들의 항일음악을 창출한 지역이어서 앞으로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 만주음악을 연구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본 주제로 접근한 국내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일본의 경우 최근에 발표된 이와노 유우이찌(岩野裕一)의 『만주-알려지지 않은 음악사, 왕도락토의 교향악』(滿洲-知られざる音樂史, 王道樂土の交響樂) 등을 비롯하여 중국측 연구가 있어도 모두 본격화되지 않은 상태이다. 전전(戰前)의 대표적인 근대만주음악연구는 전전(戰前)의 대표적인 음악 논저는 타나베 히사오(田邊尙雄)가 대동아공영권의 문화건설에 입각한 대동아음악연구의 일환으로 연구한 『대동아 음악』(大東亞の音樂)이 있다. 그리고, 쯔나시로 에이조오(綱代榮三)가 만주국 당시 만주음악과 관련한 논저로서 『만주에 있어서 음악』(滿洲二於ケル音樂)이 있다. 본 논문은 크게 두 개의 장으로 접근하였다. 하나의 장은 만주국 음악정책의 근간인 ‘예문지도요강’의 발표배경과 내용 및 성격이다. 또 하나의 장은 그 요강에 따라 만주국이 악단을 조직하고 전개하는 양상을 다룬다. 두 번째의 장에서는 신경음악협회와 그 산하의 신경교향악단, 그리고 만주작곡가협회의 조직 구성으로서 소속회원들의 작품발표와 만주국이 10주년을 기념하는 경축가 제정 및 국가제정 끝으로 만주국이 10주년을 경축하는 작품발표회 등으로 이루어졌다. 부록으로 ‘예문지 도요강’ 일어 전문과 번역문을 게재하였다. 만주국은 1941년 3월에 발표한 ‘예문지도요강’(藝文指導要綱)에 따라 악단을 정비하고 새로운 체제로서 ‘5족협화의 왕도낙토’를 건국상징으로 삼으려는 실제적인 문화예술정책을 전개한다. 이 요강은 일본의 정보국과 같은 만주국 총무청(總務廳) 홍보소가 만주국의 행정기구로서 국무원과 만주협화회 그리고 관동군의 지원하에 이루어져서 일만(日滿)의 ‘대동아 문화공영권’을 구축할 수 있었던 요강이었다. 이 요강에 따라, 1941년 7월부터 ‘만주극단협회’ 결성을 필두로 ‘만주문예가협회’, ‘만주악단협회’, ‘만주미술가협회’ 그리고 이러한 예문단체의 연락 사무기관으로서 통합적인 ‘만주예문연맹’(滿洲藝文聯盟)이 차례대로 결성되었으며, 만주예문연맹이 만주국과 함께 고도국방국가 구축이라는 신체제 음악을 전개할 수 있었다. 또, 음악용어통일과 신경음악 원(新京音難完)의 ‘악원양성소’(樂員養成所) 발족, 만주국가 제정, 만주국 건국10주년 기념행사 주관 등이 이루어지면서 만주악단협회 소속의 ‘만주작곡가협회’가 중심이 되어 일본과 조선의 음악인들이 만주내외에서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에 의한 아시아 신체제를 통일적으로 구축하고 있었으니 모두 ‘예문지도요강의 실현이었다. 이 실현에 따라 5족협화의 음악인들, 특히 김동진을 비롯한 조선음악인들이 활동하였다. 그 실현은 목적하는 바는 다름아닌 조선 · 일본 · 중국 · 몽골 · 러시아 등 5족의 체 제를 두고 일본음악중심으로 개편함으로써 일본국민 음악을 수립하려는 만주국의 문화예술정책의 실현이자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의 실현장이었다. 모두가 만주국의 왕도국가음악의 완성하여 궁극적으로 일만 국민음악(曰滿 國民音樂) 수립함으로서 대동아음악공영권을 구축하려 했다.

‘제국’의 전파 네트워크와 만주의 라디오 방송

서재길 ( Seo Jae-k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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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만주에서의 라디오 방송의 출현과 그 발전 과정을 실증적으로 정리하고 식민지 라디오 방송이 지닌 역사적 성격을 문화론적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주로 1930년대 후반 중일 전쟁 전후 시기 만주의 라디오 방송을 대상으로 하여 당시의 라디오 방송이 지닌 중층 인 의미망들을 수용자 연구를 통해서 분석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만주에서의 라디오 방송은 일본의 조차지였던 관동주 관동청과 중국의 동삼성 정부에서 각각 시작되었으나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 관동군에 의해 통합된다. ‘만주국’ 건국 이후 일본과 만주국이 합작한 ‘만주전전’이 설립됨에 따라 만주지역의 라디오 방송은 만주전전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된다. 1934년의 신경의 대출력 방송국(100kW) 건설과 1936년의 이중방송 개시는 만주의 라디오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가 된다. 또한 중일전쟁 발발과 더불어 ‘전파 전쟁’의 도구로서의 라디오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각 지역 방송망이 확장됨에 따라 청취자는 급속도로 증가한다. 그러나 ‘제국’의 전파 네트워크는 일본의 패전을 의미하는 ‘옥음방송’을 끝으로 그 역사적 종말을 고하게 된다. 만주전전의 라디오 방송은 만주라는 복합공간의 특성에 걸맞게 다양한 언어로 된 프로그램이 편성되었고, 각각의 언어 공동체가 라디오 방송에 대응하는 태도 역시 중층적인 양상을 드러냈다.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살고 있던 일본인 청취자들에게는 ‘제국으로서의 일체감’을 확인하게 하였고, 조선인 청취자들에게는 조선어를 매개로 한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였다. 한편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제2방송의 경우 뉴스와 강연을 중시한 권력의 의도와는 달리 청취자들은 연예오락 프로그램을 선호하였고 라디오는 대중문화를 생산, 유통하는 근대적 대중매체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라디오를 정치군사적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청취자 확보였던 까닭에 만주전전에서는 보급형 수신기 판매, 공동 청취제, 전기료 할인 등 다양한 방책을 강구하였고 그 결과로 만주의 라디오 청취자는 급격하게 증가한다. 또한 청취자 기호 조사를 통해 중국인 청취자들의 기호를 파악하고 이를 프로그램 편성에 반영하기도 한다. 뉴스 중심의 편성을 지향한 방송 주체와는 달리 만주의 중국인 라디오 청취자들이 즐겨들은 것은 라디오드라마를 중심으로 한 연예 오락 프로그램이었다는 것이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결국 만주에서의 라디오 수용 현상 속에서 우리는 효율적인 전시 동원 및 교화의 도구로 라디오를 활용하려 한 권력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라디오 대중문화의 발전이라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식민지 공공영역’으로 성립된 만주의 라디오 방송은 식민지인의 문화적 주체성과 자율성을 보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권력의 의도가 전일적으로 관철되는 공간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楚玉’과 ‘옹녀’-19세기 비극적 자아의 초상

정환국 ( Jung Hwan-ku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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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세기의 작품 「포의교집」과 「변강쇠가」의 여주인공 초옥과 옹녀를 통해 19세기 비극적 자아의 상을 그려 본 것이다. 더불어 두 작품을 ‘19세기’라는 복잡한 시기를 읽는 유용한 자료로 거론해 보자는 데 초점이 놓여 있다. 「포의교집」과 「변강쇠가」는 그 성립과정과 내용 또한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두 주인공, 초옥과 옹녀는 19세기 시정사회와 유랑사회에서 기존의 생활방식을 벗어난 탈주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또한 두 작품에는 기존 이데올로기의 핵심적 사안 중에 하나인 ‘정절’이 은근히 문제적 사안으로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초옥과 옹녀는 기존의 정절론을 여지없이 재해석하거나 거부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면모가 그녀들을 당대 사회에서 고립시키는 요인이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초옥과 옹녀는 이 탈주를 통해서 이전과 다른 차원의 고독한 자아로 탄생한다. 이들은 현실과 치열한 분투를 통해서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으며, 거기서 철저한 고독을 체화한다는 점에서 기존 전기소설적인 고독성과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들의 고독성(또는 비극성)은 전대 소설의 고독성과도 다르며, 향후 근대 공간에서 형성된 ‘여성’과도 변별된다. 결국 초옥과 옹녀는 19세기 사회라는 독자적인 시기의 인물로 이해될 필요가 있으며, 그녀들 또한 19세기 사회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요구한다.

이광수 소설에 나타난 사랑과 계몽의 기획 - 이광수의 『유정』을 중심으로 -

박혜경 ( Park Hye-ky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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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에게 情이란 인간의 내면세계라는 새로운 드라마의 장을 열어준 근대문학의 주요한 터전이었으며, 사랑과 연애는 그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가장 드라마틱한 문학의 소재였다. 유정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고양상태, 혹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토로하는 형식을 통해 자기존재의 도덕적 정당성을 추구하려는 주인공의 靈적 사랑의 여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유정의 주인공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남정임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갈망하는 영혼의 고양된 에너지이다. 시베리아의 원시적인 자연 풍광은 최석에게 남정임과의 사랑이 불러일으킨 세상의 오해를 넘어서 남정임에 대한 사랑 을 초극하기 위한 내적인 투쟁의 장소이다. 최석은 그를 주체의 위기 속으로 몰아넣은 세상의 추문과 맞서기 위해 스스로 도덕적 영웅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 시베리아의 원시적 자연 속에서 문명의 이름으로 자기 안의 자연과 싸우는 최석의 내적 투쟁은 자연에 대한 이성의 통제를 통해 주체의 도덕적 자기완성에 이르려는 근대문명의 계몽적 프로젝트를 닮아 있다. 그러나 최석의 자아발견의 여정에서 정임은 일루젼이나 이데아와 같은 관념의 자리로 승화되는 동시에 배제된다. 정임은 부재, 혹은 공백의 형식을 통해서만 최석의 내적 투쟁의 드라마에 동참할 자격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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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라는 특화된 존재의 탄생은 문학장이라는 자율화된 공간에서 활동하는 주체에 대한 구체적 모델을 생산하고 규범화하는 문제에 해당된다. 이 논문은 1920년대 문학장에서 예술가라는 특화된 존재가 탄생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자화상’, ‘초상’의 문제를 ‘죽음’이라는 관념의 인식에 비추어 접근하고 있는 연구이다. 1920년대는 죽음, 소외, 고독, 동경 등 추상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정서의 울림이 큰 새로운 관념이 중심을 차지한 시대였다. 이런 관념은 추상적인 만큼 그러한 관념을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주체와 감각화하는 주체의 능동적인 반응이 그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결정권을 갖게 된다. 이 점에서 1920년대 시에 나타나는 ‘죽음’의 이미지는 전근대적인 공동체성 혹은 집단성이 탈각된 개체화된 죽음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런 개체화된 ‘죽음’은 주체로 하여금, 소멸에 대한 위기감, 불안, 단절감 등을 부여하며 동시에 ‘영원성’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불러 일으킨다. 군중으로부터 격리됨으로써 개체화된 단자의 소외와 죽음을 감지한 근대 예술가에게 죽음이란 삶에 대한 열정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좌절, 충동적인 자살을 불러일으키는 심리적 원인이다. 자아의 낭만적인 확장 욕구를 ‘열정’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 자아의 낭만적 확장의 전제가 되는 ‘개체성’, ‘군중과의 격리’로부터 오는 소외, 불안감, 외로움, 무기력을 느끼는 신청년의 양면적인 모습은 1920년대 시의 전형적인 형태를 구성하는 요건이다. 특히, 식민지 지식인에게 개체의 독립은 거대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더불어 미미하고 무력한 식민지 지식인의 근원적 결핍을 깨닫게 하는 원인이다. 1920년대 시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는 이 점에서 식민지 청년 예술가의 ‘자아’가 놓인 한 극단적 상태를 보여주며, ‘죽음’을 미학화하는 자아의 형상화는 식민지 예술가의 ‘자화상’이면서 동시에 예술적 규범, 미적 기억의 방식 등을 구성하는 전범이 된다. 예술의 존재 방식과 문학장의 자율성 원리가 ‘죽음’, ‘불안’, ‘소외’를 특화하면서 예술적 삶의 한 정점에 ‘죽음’을 위치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미학적인 실천’에 해당된다. 즉, 이장희와 같은 한 예술가의 죽음에 대한 의미부여는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려는 문학적 신념의 공유에 의해서 ‘예술적 순교’, ‘미의 완성’으로 종결된다. 이런 죽음에 대한 기억의 방식은 1920년대 문학장의 한 아비투스로 자리잡음으로써 시, 미, 예술에 대한 신념을 단단하게 구축할 뿐만 아니라, 삶과 예술의 상관관계를 새로운 미적 형식으로 구성한다. 즉, 일상의 미학화 혹은 문학의 일상화는 ‘죽음’, ‘고독’, ‘소외’ 등을 ‘미적인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예술가의 초상’ 즉 ‘예술적 삶’의 유형을 고안하고 창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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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총력전 시기 일제의 사상관리의 실상에 문인들의 회고를 통해 접근해보려 했다. 총력전 시기 일제의 사상관리가 훨씬 강화되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러한 총체적인 억압의 실상을 확인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한 억압이 비공식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러한 억압을 회상하고 있는 문인들의 회고는 주목해볼 만하다. 특히 ‘어쩔 수 없이 쓰여지거나’ 또는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작품들을 언급하는 텍스트들은 이러한 총체적인 사상관리의 실상에 다가가보는 데 좋은 안내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첫 번째 회고는 계용묵의 경우이다. 계용묵은 「시골 노파」, 「묘예」, 「불로초」의 세 작품을 일제의 강압이 강화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협력을 가장한 작품으로 들고 있는데, 이러한 어쩔 수 없음의 배경에 문인투서사건에 의해 검거되었던 경험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한편으로 강화되면서도 검열관의 부패 등으로 틈을 보이는 권력의 이중적인 모습을 객관적으로 회고하고 있기도 한데, 이 또한 당대 실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는 채만식의 경우인데, 채만식의 경우에도 「여인전기」라는 작품이 쓰여지게 되는 배경에는, 개성에서의 수감 경험이 놓여져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는 사실에 바탕한 것이긴 하지만 한 편으로는 신체제 논리에 대한 적극적인 선택이라는 상황을 은폐하는 방식의 회고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유치진의 경우에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의 해명이 이루어진다. 현대극장의 설립을 종용했던 권력의 개입은 강압적일 뿐만 아니라 치밀하기도 한 것으로 드러난다. 때문에 다른 연극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은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극단을 맡게 되고, 그 공연 레퍼토리로서 세 편의 희곡을 쓰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 중 「대추나무」와 같은 작품은 총독부가 주는 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친일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회고는 친일 행위에 대한 합리화가 적극적으로 행해진다고 했을 때의 논리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유치진의 해명 또는 자기 변명은 별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극연좌를 해체하고 현대극장을 창설하기까지에 작용했을 권력의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세 사람의 회고가 단지 변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식민지 시기 작가의 자기 검열은 발표가능성 이전에 체형가능성을 먼저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식민지에서의 사상관리가 적극적인 방식으로 변해가는 총력전 시기라는 상황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곧 여러 가지 명목에서의 체형가능성과 연결되어지는 상황이었음을 이 사례들은 보여주고 있다. 식민지 문인들에게 덧씌어진 억압과 그에 따른 자기 검열의 문제가 단순히 행정적인 절차로서의 검열이 아닌 통치행위 전반과의 연관 속에서 고려되어야 함을 이 사례들은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 말기 전선 기행문에 나타난 재현의 정치학

한민주 ( Han Min-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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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부터 전시체제 하에 있는 기행문의 성격은 前史와는 다른 재현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 연구는 재현의 양상을 통해 일제말기(1938~1945년대) 식민지 지식인의 여행 체험과 戰地로서의 국외 여행지에 대한 記述이 어떻게 정치적 심미화의 재현 과정을 거쳐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일반적인 기행문에 대한 이해는 한 대상을 지시하는 어떤 단어와 문장이 현실성을 확보하고, 그것이 현실 그 자체라고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행문 재현의 일반적 이해가 이데올로기 동원의 수사가 될 수 있다. 특히나 戰地의 긴장감과 전투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해야 하는 ‘보고문학’으로서의 기행문학에 있어 현실감은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연구는 일제 말기 전선 기행문에 나타난 재현의 세 가지 양상을 경이, 전형, 과학과 감수성의 차원에서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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