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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연구검색

The Studies in Korean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어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9-437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6권 0호 (2009)

시각화의 힘(力量) : 타이베이는 언제 어떻게 현대적인 도시가 되었는가

수수오빈(蘇碩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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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공로/과오’의 시각을 벗어나, 타이베이의 현대도시화가 일본 식민통치 기간에 완성된 것임을 설명하고, 이러한 현대화 과정에 대한 반성을 통해 현대화 과정이 “토지와 인구를 좀 더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1932년의 도시 계획도는 일본 식민 통치 기간에 실현되지 못했지만 신기하게도 수십 년 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1992년 타이베이시 최고급 주택지구 ‘다안(大安)구’에서 타이베이시 최대 공원이 완공 및 공개되었다. 소재지와 원래의 명칭은 바로 1932년 계획도 상에 있던 ‘7호 공원’이었다. 1999년 타이베이시의 주요 상업 지구 난징동루(南京東路)에서도 두 개의 중형 규모의 공원이 완공 및 개방되었는데, 이 역시 소재지와 명칭이 1932년의 계획도에 있던 ‘14호, 15호 공원’이었다. 이성적 과학의 위력은 시간을 초월한다. 이는 타이베이가 일본 식민지 하에서 진정으로 계획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도시였음을 증명한다. 하나의 완전한 현대적 타이베이시가 출현한 것은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사회적’인 연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타이베이에 시행된 계획, 공정, 건설 등으로 인해 도시 공간은 깨끗하고, 가지런하고, 아름다워졌다. 그러나 그 ‘공간’ 깊숙한 곳에는 통치 권력이 은닉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시각화 공간이며, 통치 권력의 진정한 완성을 의미한다.

제국 일본의 ‘만선(滿鮮)’ 관광지와 고도 경주의 표상

나카네 다카유키(中根隆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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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191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걸쳐 성행한 제국 일본의 ‘만선’ 여행과 고도 경주에 대한 묘사 방식을 관광이라는 관점에서 일본인 문학자를 사례로 검토함으로써, 1) 1910년대 후반부터 고양된 ‘만선’ 여행, 2) 청일ㆍ러일전쟁기의 종군기와 ‘만선’ 여행기의 관계성, 3) 고도 경주의 표상, 4) ‘만선’ 여행과 경주 탐방에 있어서의 여행자와 관광사업의 연대에 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1910년대 후반부터 널리 행해지기 시작했던 ‘만선’ 여행은 제국 일본의 확장주의적 문화정책으로서 추진된 관광 사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많은 일본인 문학자도 ‘만선’ 여행에 나아가 그 여행기를 썼다. 그곳에는 ‘만선’ 관광이 청일ㆍ러일 전쟁기의 종군기에서 단초를 보인 듯한 제국주의적인 심성도 엿볼 수 있었다. 경주는 이러한 ‘만선’ 관광 안에서 조선의 고도로서 발견되었다. 경주의 명소와 유적을 방문하여 그곳을 일본의 고도 나라에 비교하는 심상행위는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롯해 기노시타 모쿠타로나 와쓰지 데쓰로 등 다양한 논의를 볼 수 있어 결코 단순한 문제로서는 논할 수 없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지극히 유형적인 표현을 공유하는 여행기도 다수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만선’ 관광이 개인적인 취미에 근거한 여행이고 여행자가 고도 경주에 일상생활과는 다른 본래성을 요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관광여행인 한 그 여정이나 명소와 유적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은 관광 가이드 맵이나 현지의 안내자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고도 경주의 이미지는 관광하는 측과 관광객을 받아들이는 측 사이에서 상호보완적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폐허의 고도와 창조된 신도(神都)

허병식 ( Huh Byung-shi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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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는 백제 멸망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망각된 고도(古都)였다. 1920년대까지 산견되는 백제와 부여의 이미지는 쇠망한 고대왕국의 그것이고, 몰락한 역사의 한 장면에 대한 회한의 정조가 자동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부여라는 도시에 대한 근대적 이미지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29년을 전후한 상황이었다. 그 중요한 계기로는 1915년 발족된 부여고족보존회가 1929년 재단법인으로 변경된 것을 들 수 있다. 이후로 신문기사나 기행문에서 엿보이는 부여에 대한 소개는 경주나 평양에 필적하는 도시로 부여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의도를 전하고 있다. 부여는 이제 경주나 평양에 맞서는 유서깊은 고도로 다시금 조명받고 있다. 부여는 내선일체라는 당대의 국책에 부응하는 장소로 소환되었다. 일본과 조선의 역사에 무언가 의미 있는 관계가 있었다면, 그것은 부여라는 장소를 제외하고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통해 부여의 표상을 새롭게 주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1939년 3월 총독부가 부여신궁 건립계획을 발표하였다. 신도(神都)로 새롭게 탄생한 부여는 더 이상 잊혀진 소읍이 아니라, 과거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는 도시로 재조명된다. 부여를 내선일체를 강화하는 정신적 전당으로 삼고자하는 기획으로 마련된 신도건설은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국책을 수행하기 위한 사명을 부여하였다. 부여를 내선 일체의 영지이자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내선의 ‘피’의 친연성을 증명하는 장소로서의 신도로 건설하고자 했던 1940년대 초반의 움직임에 부응하는 작품으로 김동인의 장편역사소설 『백마강』을 들 수 있다. 친일 문학의 대표격으로 여겨져야 할 『백마강』과 비교해서 현진건의 미완의 장편 『흑치상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민족의 비애를 불러일으키는 몰락한 고대왕국의 이미지와 일본과의 혈통적 친연성의 증거가 되는 고대국가의 이름 사이에서 백제라는 표상은 부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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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미디어를 운동하게 하고, 혁명은 미디어를 ‘혁명’시킨다. 3ㆍ1운동은 신문과 미디어에 대한 감각과 직접적 경험을 결정적으로 발전시켰으며 글쓰기와 읽기에 대한 조선인들에 대한 태도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3ㆍ1운동기의 다양한 미디어의 문제를 통해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이행과정과 1919년 전후 민중의 생활세계가 일부 드러날 수 있다. 미디어는 그 자체로 네트워크의 도구이자, 주체성의 네트워킹이 일어나는 노드(nod)이다. 3ㆍ1운동의 미디어들은 네트워크와 운동을 구조화한 주체성에 대해 새롭게 접근할 통로를 열게 한다. 3.1운동 시기의 지하신문ㆍ격문ㆍ전단의 텍스트들은 상당히 다양한 표기법과 문체를 선택하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3.1운동의 주체들의 다층적인 문해력과 생활세계를 반영한 것이며, 당시의 ‘읽고 쓰기’의 정황을 생생하게 나타낸다. 이들이 창출해낸 ‘표상 공간’이야말로 ‘교양’과 앎의 분배에 대한 증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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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은 1919년 3.1의 아이콘이자 식민지의 수난과 저항을 대표하는 여성 영웅이다. 민족의 희생과 저항의 상징인 유관순 표상은 해방 이후 민족주의 계열, 단독정부 수립파, 이화학원 동문들의 주도로 구성된 것이다. 유관순 기념사업회와 전기간행위원회를 배경으로 하는 1948년의 전영택의 전기,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윤봉춘의 영화 「유관순」(1948)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전승되는 유관순 표상의 골격을 결정하고 대중화한 기원의 텍스트들이다. 전영택과 윤봉춘의 1948년 텍스트를 통해 기독교 미션 이화학당 출신 소녀의 희생은 민족주의적, 기독교적 순교로 의미화되었으며, 민족적 정통성의 도덕적 권위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유관순의 정치적 상징성은 남한 단독정권 수립을 주도한 통치엘리트들이 남한 국가에 민족적 정수를 부여하고자 한 문화적 국가 기획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1959년 개봉된 윤봉춘의 두 번째 「유관순」 영화에서는 경주 등 38선 이남의 역사적 장소와 결부된 유관순 내러티브를 구성함으로써 ‘남한’ 민족을 균질화된 동일자로 구성하는 장소의 정치학이 작동하고 있다. 4ㆍ19 이후의 유관순 표상은 국가(정부)와 시민사회가 갈등하고 길항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1966년 윤봉춘의 세 번째 「유관순」의 시나리오에는 4ㆍ19 이후 자유, 박애 등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시민적 자아상과 한일회담 이후 고양된 내셔널리즘의 열망이 결합된 유관순 표상이 제시되고 있다. 이 시기에도 국가(정부)는 여전히 유관순을 국가주의와 냉전 하의 관주도 민족주의를 선전하는 영웅상으로 제시하였다. 특히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하에서 제작된 1974년 김기덕 감독 제작의 「유관순」에는 국가주의와 가부장의 권위가 결합된 유신 이데올로기가 투사된 유관순 표상이 구성되고 있다. 이 영화의 유관순은 불의에 저항한 영웅이라기 보다는 당대 청소년에게 유신 이념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했던 ‘화랑교육대’의 규율을 내면화한 역할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해방기 연극, 기념과 기억의 정치적 퍼포먼스 - 3·1운동 관련 연극을 중심으로 -

양근애 ( Yang Geun-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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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해방 이후 연극에서 3ㆍ1운동을 기억하는 방식의 특이성과 그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씌어졌다. 해방기의 3ㆍ1운동 관련 연극은 ‘기념 연극제’라는 프로그램 하에서 공연된 것으로 남아 있는 몇 편의 대본을 통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3ㆍ1운동은 식민지 시기 동안 ‘말할 수 없는 역사’였으나 해방 직후에는 해방의 감격을 고취시키고 민족 공동체를 감각적으로 복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동원되었다. 극장은 다양한 기억과 기념이 펼쳐지는 정치적 퍼포먼스의 공간이 되며, 이때의 연극은 문화정치학적인 맥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해방기의 연극은 과거의 역사를 문화적 기억으로 재구성하면서 관객들을 그 기억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퍼포먼스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당대의 실감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해방기 극장 무대 위에서 재현되었던 3ㆍ1운동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민족통합의 이념을 감각적으로 생성해낸다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연극의 집단적이고 사회문화적인 특징에 주목하여 ‘만세소리’를 통해 공유기억을 생성해내는 기념의 정치학에 주목하였다. 식민지 과거와 해방이라는 현재를 긴밀하게 연결시키며 ‘만세의 동시성’을 이루어내고 또 3ㆍ1운동의 기억을 시청각적으로 재현해내려고 한 것은 해방기 연극만의 독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문학의 ‘불편함’에 대하여 – 그로테스크한 경향과 관련하여

정환국 ( Jung Hwan Ku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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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세기 문학의 ‘불편함’에 대해서 논의한 것이다. 불편함이란 텍스트 안의 인물들이 맞닥뜨린 현실과 그 반응이기도 하면서, 이들과 마주한 독자의 심리까지 포함하는 용어이다. 여기서 거론한 「변강쇠가」, 「장끼전」, 「덴동어미화전가」, 「노처녀가(2)」는 모두 19세기의 문제적인 작품들인데, 주인공들은 그들의 심리와 행동을 불편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이들은 대개 병을 앓거나 질병에 노출되어, 이른바 ‘불온한 몸’으로 형상화된다. 이 불온한 몸은 복잡하고 불편한 현실을 대변하는, 말하자면 사회의 병리적 시선이 이들 불온한 몸에 투과된 양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 불온한 몸과 병리적 시선의 맞은 편에 여성을 위치시킴으로써 문제의 심각성이 배가되는 양상이다. 특히 ‘개가(改嫁)’는 다른 어떤 현실보다도 더 문제보다도 현실로 여성들에게 육박해 왔던 바, 이에 대한 반응은 19세기를 이해하는 작은 실마리이기도 하다. 확실히 이들 여성들은 개가를 기존의 질서체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이 지점에서 전통적인 질서의 하나였던 개가는 아주 불편한 이데올로기로 이해되기에 이른다. 이 글은 이와 같은 19세기 몇몇 문학 작품의 불편함을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성격으로 파악하였다. 그로테스크한 성격 중 괴기성(怪奇性)보다는 곤혹스럽고 불편한 지점에 착목한 예이다. 한편 이 글은 19세기 문학의 다면성을 환기하고자 하는 의도와 함께 우리 문학의 그로테스크한 면을 본격적으로 논의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획된 시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 앞으로 이에 대한 관심과 심도 있는 연구가 요청된다.

민속의 경연과 예술화

남근우 ( Nam Kun-w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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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봉산탈춤의 근대’를 논의의 기점으로 삼아 로컬 민속이 각종 경연대회를 거쳐 국가 공인의 내셔널한 문화재로 전화(轉化)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본론에서는 특히 이 민속의 문화재화 과정에서 예술 이전의 민속 사상(事象)들이 구조적으로 예술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제도상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아울러 그 민속의 예술화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한국민속학의 의지와 욕망을 점검해보았다. 그 결과, ‘민속예술’의 전문가로서 경연대회 심사와 무형문화재 지정에 관여한 민속학자들은 경연대회 단계에서부터 스스로도 ‘가늠하기 어려운’ 민속의 원형성과 예술성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딜레마에 봉착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본원적인 딜레마를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채, 민속의 자료화와 그 ‘원형’ 구성에 대한 담론적 권위를 앞세워 경연대회와 무형문화재 제도 운영을 주도함으로써 ‘민속자료’의 ‘무형문화재’화를 초래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 염상섭의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

이종호 ( Yi Jong-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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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제국 일본’ 붕괴 이후에 발생한 대규모의 이동, 이주에 주목하였다. 종전과 해방, 제국의 해체와 냉전 체제의 구축 속에서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이동은 일반적으로 ‘귀환’이라고 명명되고 개념화되어 서술되었고, ‘귀환서사’라는 맥락에서 논의되었다. 해방기의 다층적인 인구 이동 현상을 귀환의 문제로 개념화하고, 민족수난사나 민족적 과제로 설정하여 신생국가건설과 국민통합의 과정으로 간주하는 시도는 일면적인 해석이다. 해방기의 광범위한 이동과 이주를 민족적ㆍ국가적 귀환으로 축소시키거나 포섭하고자하는 시도는, 의도하지 않았다하더라고 그러한 ‘이동성’에 내재해 있는 다양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봉쇄하는 효과를 창출한다. 이러한 ‘이동성’의 복원을 통해서 해방기의 정치적 가능성과 잠재성을 가늠해보고자 하는 것이 이글의 의도이자 문제의식이다. 다시 말해, 이 글에서는 해방기의 이동이라는 사건을 국민국가의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잉여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지점에 주목하여 해방기 이동을 다루는 염상섭의 소설들 ― 「혼란」, 「모략」, 「삼팔선」, 「엉덩이에 남은 발자국」―을 검토하였다. 이러한 염상섭의 소설에서 이동은 국가형성 혹은 국민형성의 자연스러운 과정들로 형상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동하는 자들은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협하고, 불안을 야기하는 골칫덩어리로 형상화되며, 형성되는 국가는 이들을 배제함으로써 체제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50년대 등단제도 연구 – 신춘문예와 추천제를 중심으로 -

이봉범 ( Lee Bong-be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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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는 신문의 신춘문예와 문예지의 추천제 및 대중종합지의 현상문예가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여 상호 경합하는 가운데 등단제도가 복원되고 정착된다. 그것은 매체가 생존전략의 차원에서 문학을 전략적 동반자로 선택한 결과이다. 신춘문예는 시장원칙에 따른 신문들의 무제한적 경쟁체제가 조성되면서 문학을 매개로 한 신문과 독자의 관계를 긴밀하게 만들기 위해, 추천제는 대부분의 잡지가 표방한 대중교양의 확산과 건전한 문화건설에 대중접근성이 가장 큰 문학의 활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독서계의 규모 확장에 따른 문학 수요의 증가도 작용했다. 당대 신춘문예는 선발 종목의 잡종성, 제도 운영의 투명성, 신문의 이해관계의 반영을 보여주는 가운데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해 문인재생산의 제도적 대표성을 부여받았다. 추천제는 규범적 문학 장르로의 집중화를 통해 타 매체와의 차별성을 극대화한 가운데 운영시스템을 탄력적으로 변경해 제도적 결함을 보완해가고 선자의 블록화에 따른 특정 문학경향의 배타적 규범화를 촉진시킨다. 아울러 월평을 중심으로 한 사후 관리시스템을 가동해 대중적 권위를 강화시킨다. 그 과정에서 추천제는 문학의 중앙 집중화와 문단-대학의 연계 구조를 형성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등단제도 상례화의 효과는 문단 규모의 급격한 팽창에서 가시적으로 확인된다. 신인의 대량생산이 문학의 빈곤을 심화시키고 문단의 파쟁을 조장하는 원인으로 간주되어 그 무용론까지 대두된 바 있지만, 문학의 사회적 위상을 제고하고 한국전쟁으로 분산되고 위축되었던 문단재건의 물질적, 제도적 토대를 마련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했다. 물론 등단제도의 제도화가 새로운 문학의 모색과 탄생에 얼마만큼 실질적인 기여를 했는지는 의문이다. 추천제는 오히려 새로운 문학의 출현을 차단하거나 그 가능성을 억제하는 억압의 기제로도 작용했다. 이와 관련해 문단의 재편과정에 추천제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등단제도를 통해 등단한 일부 신인들이 기성문단의 침체와 억압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대의 문학을 주창했지만 신구세대간의 화해불가능성을 확인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그만큼 신인들이 맞닥뜨린 문협정통파를 중심으로 한 기성문단의 벽은 너무나 높고 완고했다. 그것은 뚜렷한 세대교체 및 새로운 문학의 주류화를 성취한 1960년대 신인들의 행보와 정확히 비교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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