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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연구검색

The Studies in Korean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어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9-437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7권 0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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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부인조를 구성하는 두 부분 서사는 공통적으로 음식 혹은 음식을 먹는 행위와 관련된 경치 좋은 바닷가의 주선으로 서두가 시작되는 데, 전반부의 철쭉꽃의 붉은 빛깔을 바라보는 수로의 시선이 넘치는 시각적 관능을 표출하는 것이라면, 후반부의 그녀의 해중 체험담은 음식에 대한 미각이나 후각의 관능적 체험을 통해 그 기쁨을 표출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전체 서사의 말미에는 ‘수로의 자태와 용모가 세상에 비할 데가 없었다’라는 총체적 결론이 제시됨으로써, 이 서사가 한 여인의 원초적 본능으로서의 관능, 혹은 그 관능적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 시사된다. 각각 두 부분 서사의 공간적 배경인 철쭉꽃이 핀 벼랑 위 바위와 수로가 잡혀 갔던 海中은 공통적으로 사람들이 다가갈 수 없는 공간으로 수로의 관능적 아름다움으로 인한 사건의 내막을 은밀하게 감싸는 서사적 기능을 하지만, 그녀의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관능성의 표출이 이 공간적 은밀함과 철저히 대비됨으로써 이 이야기는 더욱 농후한 에로티시즘의 서사로 강화되고 있다. 동시에 이 서사는 사건의 구체적 정황을 신이로 채색하여, 그 관능적 아름다움을 성적 육체적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속화된 이미지로부터 원초적 아름다움의 세계로 환입함으로써, 사회적 윤리적 맥락에서의 해석을 거부하며 인간 세상의 금기로부터 해방시키고 있다. 「해가」는 에로티시즘의 이미지를 지닌 「구지가」에 아름다운 여인과 해룡의 존재가 부가됨으로써 「구지가」보다 더욱 구체적인 표상으로서의 성적 이미지를 파생한다. 이로써 「해가」 관련 후반부의 서사는 한 여인의 넘치는 육체적 관능에 관한 이야기로서 그 의미소통의 맥락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헌화가」의 문학적 함의는 「구지가」에 그 연원을 둔 「해가」의 에로티시즘의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헌화가」의 ‘암소를 놓게 하시고’는 노옹이 자신의 본분을 버릴 정도로 수로의 철쭉꽃을 향한 열망이 강렬한 것이었음을 의미하고, ‘당신이 아니 부끄러워하시면’은 ‘당신이 아니 부끄러워하시는 분이라면’, ‘당신이 그토록 거침없는 자유분방함을 지녔다면’이라는 의미로서, 수로가 부끄러워 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수로의 그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관능을 노옹이 이미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아름다운 여인 수로의 붉은 철쭉꽃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갈망으로서의 넘치는 시각적 관능의 표출, 그것은 이미 육체적 관능과 함께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서사적 의미소통 구조 속에서 「헌화가」는 노옹이 그 강렬한 관능적 아름다움의 자장에 이끌려 부른 노래라는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해양공간의 설화적 수용과 의미 -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중심으로 -

김승호 ( Kim Seung-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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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에는 해양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설화가 들어있다. 이때 해양의 공간적 의미는 경전에서 숙지된 내용, 혹은 이국에서 전파된 불교설화, 혹은 이 땅에서 자생한 설화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들 설화들은 해양과 지상을 별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보기보다는 언제라도 소통이 가능하며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 용이 본래의 差別性을 벗어나 스스럼없이 섞이고 상호 부조하는 관계로 형상화된다. 이같이 현상은 불교적 종지로 내세운 바, 불성을 지닌 존재들 사이에는 어떤 차별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환기시키는 각성의 효과를 지닌다. 공간의 혼효인 듯싶지만 『三國遺事』 소재 이야기들은 부처의 가르침이나 經典的 훈계를 직설적으로 전하기보다 他者와 구별짓고 我相을 내세우는데 익숙한 존재들의 편협성을 질타하듯, 공간적 경계를 퇴색시키는 일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三國遺事』의 해양설화는 지상의 확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인간과 용과의 관계를 다채롭게 제시하고 있는데 인간과 용의 상호간 매개, 교화, 상생관계를 부각시키는 쪽으로 표징성을 부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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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지켰던 무인들과 그들의 후손이 그 체험을 정리하는 방식과 그렇게 만들어진 ‘기억’이 후대의 역사에서 어떻게 수용되는가를 살펴보았다. 『漢瀋日記抄』의 「南漢日記」는 『丙子錄』과 『丙丁日記』 같은 전쟁 체험 기록과 李時白·池汝海 등의 묘도문자에서 보이는 전투 장면을 가져와 적절히 가감하고, ‘余’라는 1인칭 시점과 ‘大樹’와 ‘遂’와 같은 전지적 시점을 혼용하여 李大樹와 許遂의 활약상을 구현한 서사 작품이다. 일기를 초록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인과관계가 없는 일화를 적절히 배치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두 사람의 충성과 헌신을 적절히 드러냈다. 「扈從十老傳」은 훈련도감 소속의 생존 砲手들의 기득권 유지 목적과 훈련대장 申景禛의 후손 申靖夏의 정치적 필요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작품이다. 화친을 주장하는 勳臣들의 무력 시위에 이용되거나 생존 차원에서 斥和에 반대하여 무신정변을 감행할 것처럼 묘사되었던 훈련도감 병사들이 60년이 지난 뒤 ‘北伐’의 상징적 존재로 인식되는 데에는 병자호란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정치 현실이 존재한다.

7차 통신사 필담집의 시화적 성격 - 『임처사필어(任處士筆語)』를 통하여

허경진 ( Hur Kyoung-jin ) , 初佳男 ( Chu Jian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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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通信使의 日本 使行은 1607년 回答 兼 刷還使로 처음 시작되어, 1811년까지 모두 12차례가 있었다. 그 가운데 1682년 7차 壬戌使行은 兩國 交流의 안정기에 이루어졌으며, 兩國 문학 교류에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이때에 많은 필담을 남겼으며 『任處士筆語』는 바로 그 중에 하나이다. 『任處士筆語』는 日本 文人 任處士가 기록한 필담이다. 7차 통신사 교류 때 만들어진 일본 측의 12개 필담 중의 하나이며, 다른 필담보다 특이한 점이 있다. 淺草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이 필담은 『淺草文庫書目解題』에 실려 있는 42종 필담 가운데 하나로써 연구할 가치가 있다. 『任處士筆語』는 시만 적혀있는 창수집이 아니고, 활동만 기록했던 일기도 아니며, 시, 시평, 시론, 시화, 시담 등 시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와 활동을 기록한 시화이다. 이런 시화적 성격을 가지는 필담은 이전의 6차 통신사 교류 중에 발견되지 않았다. 7차 통신사 필담 중에도 매우 특이한 것이다. 에도시대에 시화의 번성은 통신사 교류까지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이 필담을 통해서 7차 통신사 교류의 구체적인 양상을 볼 수 있다. 일본 측에는 館伴使가 아닌 문인들도 통신사를 찾아와 교유를 청하였다. 조선에서 삼사가 아닌 좀 낮은 신분의 자제군관이나 심지어 삼사를 시봉하는 소동들도 교류에 참여하였다. 上層 인사보다 中下層 인사 간의 교유가 더 활발해졌다. 中下層 문사들이 교유할 때에 나라의 사명, 신분의식의 속박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교유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진정한 문인간의 교류를 이룰 수 있었다.

구전설화의 막내캐릭터와 그 문화적 의의

박상란 ( Park Sang-r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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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설화 중 막내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막내딸, 막내 아들, 막내사위, 막내며느리 유형으로 나누어 서사 구조를 분석한 후 막내캐릭터의 특징과 의의를 논의한 것이다. 막내캐릭터의 특징은 소신 있게 행동하다가 시련을 겪거나 무능하다는 이유로 박대 받다가 성공하는 것이다. 이 중 전자는 막내는 책임감 내지 기존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사회·문화적인 배경에 기인하고 후자는 막내는 가장 유약하면서도 부모의 비호를 받는 탓에 가장 힘 있는 존재라는 형제관이 투영된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막내의 성공은 가정을 재건하는 데로 귀결되는데 이는 가족 중심적인 우리 전통 사회·문화적 배경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바리공주>와 <문전본풀이>에서도 확인되어 막내캐릭터의 신화적 맥락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현대소설과 드라마에서 막내는 순수하고 밝은 존재로 가족에게 위안을 주고 미래의 희망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장자를 우대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며 그런 점에서 현실에 근접해 있는 현대소설, 드라마의 장르적 특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막내캐릭터가 환기하는 여러 가치를 통해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갖는 의의를 논의하였다.

1910년대 초기 『매일신보』의 미디어적 변모와 ‘소설적 실감’의 형성

송민호 ( Song Min-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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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12년 『매일신보』가 그동안의 판매부진을 깨고자 단행했던 쇄신안에 주목하여, 그것이 일종의 상업적인 미디어로서의 변모과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신문 기사의 글쓰기 방식과 소설의 글쓰기가 사실성과 허구성의 차원에서 어떻게 『매일신보』의 지면 내에서 새롭게 배치되었으며 상호작용하였는가 하는 사실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당시 『매일신보』는 기존의 지면을 내용 상 그리고 언어표기 상 분할하여 1, 2면의 정치, 시사 기사들은 국한문혼용으로 표기하여 여전히 지식계층을 위한 일제의 식민 통치 이념을 담아내는 기능을 하도록 하였고, 3, 4면의 사회면(문화면)과 소설은 순한글로 대중적인 흥미성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이렇게 언어적이고 내용적인 차원에서의 지면을 분할한 정책은 『매일신보』로 하여금 고도의 정치적인 이념의 전파수단으로서의 기능과 대중지향적이고 상업적인 오락기능을 동시에 갖는 근대 미디어로서 자리매김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 속에서 당시 『매일신보』 사회면의 기사들은 주제적인 선정성이라든가 실감적인 묘사 등 과거 신문 기사의 글쓰기 경향을 일정 부분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특히 본고에서는 당시의 신문 사회면의 기사 글쓰기가 보여주는 묘사적 서술, 대화체의 도입 등 기존 신문 기사 글쓰기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글쓰기적 변화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였고 그 변화의 지향점에 바로 이해조 혹은 여타의 작가들의 신소설 글쓰기가 일정 부분 전범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당시 『매일신보』 사회면의 기사들은 이렇게 소재나 묘사의 수준에 있어서 당시의 신소설에 방불하는 수준으로 변모해가고 있으면서도 신문이라는 공적 매체의 특성에 따라 ‘사실’이라는 영역을 온전히 점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매일신보』의 변화는 당시 『매일신보』에 지속적으로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던 이해조의 소설관과 연동되는 바가 있다. 이해조는 나날이 역동화하는 ‘사실’을 묘사적인 기법으로 다루어내는 신문 기사와 차별되는 ‘소설’만의 독자성을 변별해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본 고에서는 이해조가 소설을 연재하기 전과 후에 간간히 드러내는 ‘소설’에 대한 개념 규정이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살핌으로써 이러한 이해조의 노력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해 보고자 했다. 물론 이해조의 이러한 고민은 근대소설이 등장하지 않고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국면이 된다. 신문 기사와 구분되는 소설의 독자적인 미학을 추출해 내기에 이해조가 갖고 있던 소설관이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해조의 소설관의 한계이자 신소설 양식의 한계이며 근대소설의 도래를 예비하는 대목이기도 한 것이다.

제국, 민족, 그리고 소수자 작가 - ‘식민지 사소설’과 식민지인 재현 난제

권나영 ( Nayoung Aimee Kw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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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과 일본 문학사의 논쟁적인 지점들이 한 식민지 조선 작가와 그가 쓴 일본어 텍스트들에 집중되었던 역사적 시점을 검토하고자 한다. 식민지 작가 김사량(1914-1950?)이 일본어로 쓴 텍스트로 제국 문단의 주류인 아쿠타가와 문학상의 후보자가 되면서 감행한 “제국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여행”(voyage in)은 제국의 경계를 가로 지르면서 김사량 자신과 그의 텍스트를 비평한 비평가들에게 깊은 불안을 야기했다. ‘경계를 횡단한’ 작가와 텍스트는 식민지 시기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의 시기에서도 제국의 본국과 식민지 사이를 맴돌면서 어느 한 쪽에 명확하게 귀속되지 않는다. 이 논문은 이제까지는 깊이 있게 검토되지 않았던 파편적인 텍스트들로부터 이 ‘경계횡단’에 대해 김사량과 그의 텍스트, 그리고 그의 비평가들이 보여준 징후들을 추적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경계선에 선 작가와 텍스트가 ‘재현 난제’ 의 짐을 지고 있었으며 그들이 겪었던 난제가 전지구적 제국의 맥락에서 식민지인을 재현하는 도전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만주침공 이후의 검열과 민간신문 문예면의 증면, 1929-1936

한만수 ( Han Man-s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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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가장 중요한 문학발표지면이었던 민간신문의 문예면을 기업화된 자본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자본은 권력의 검열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는 점은 그다지 주목된 바 없는 사실이다. 이 글은 문예면 증면의 원인과 효과를 검열 및 자본과의 관련 아래 살펴봄으로써 이 시기 문학의 존재조건을 밝히고 그 의미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다. 문예면은 24년 독립되어 3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증면되었는데, 그 증면의 원인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만주침공을 계기로 일본경제는 소화공황에서 벗어나 활황기에 들어서는데, 조선 민간신문의 광고 수요 또한 폭증한다. 광고를 싣기 위해 증면을 단행하는데, 검열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으므로 탈정치적 지면으로서 문예면의 증면이 선택된다. 문학 원고의 수요가 급증하였으니 발표 작품 역시 급증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30년대 문학작품 총량의 폭증은 일본의 만주침략에 힘입은 전쟁 고원경기의 초과이윤의 일부가 언론자본을 경유하여 조선 작가들에 이전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검열권력은 ‘시사 정치’를 집중적으로 억압하면서 ‘학술 기예’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느슨했는데, 2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민간신문은 政論性을 중요하게 취급했지만 지속적으로 위축된다. 점차 기업적 속성이 강해진 신문자본은 검열 우회와 이윤 확보를 위해 문예면 증면을 선택했으며, 문예면 담당기자 역시 카프나 민족주의자에서 해외문학파로 교체한다. 문학 또한 억압된 정치담론의 대리보충물로서의 성격이 약화되며, 탈정치적 문학이 가치 있는 문학으로 평가되기 시작한다. 정론성의 약화, 그리고 급격한 문예면 증면에 따른 기존 문인의 승인권의 약화에 대해 대부분의 작가들은 비판적이었지만, 이미 문학유통의 매체가 인쇄자본에 의해 장악된 상황이었으므로 그 저항은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자본은 내부적 검열을 시행했고, 작가들은 신문사의 ‘전속 작가’로서(주로 해외문학파), 또는 신문자본이 게재를 거부하지 않는 문학을 산출하는 ‘원료 공급자’로서 생존했다. 1930년대에 대한 평가는 첨예한 논란의 대상이거니와, 대체로 ‘한국근대문학의 양적 질적 황금기’라는 평가가 통설적이다. 하지만, ‘양적 황금기’란 전쟁 고원경기와 검열 때문에 생긴 문학 수요의 급증에 따른 것임을 이 글을 통해 밝혔다. ‘질적 황금기’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한다.

조선 총독부 내무국 사회과의 교화 영화 정책 출현 배경에 관한 고찰

김정민 ( Kim Jung-m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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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에서는 조선 총독부 내무국 사회과의 활동사진반에서 사회교화와 사회시설을 보여주는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에 관해 고찰해 보았다. 활동사진반은 1920년 11월부터 조선의 사정을 내외에 선전할 것을 목적으로 정보위원회 산하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1924년 12월 내무국 사회과로 그 주관 부서가 변경되면서 사회사업 및 민중 교화 영화 제작에 주력하는 경향을 보였다. 일본의 문부성 보통학무국 제4과(1924년 사회교육과)에서는 사회교육을 주창하고 민중 교화에 영화 이용의 중요성을 인식하여1923년부터 문부성 자체 내에서 영화를 제작하고 반포하게 된다. 이후 총독부의 내무국 사회과는 일본 중앙 관청의 영화 이용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어 활동을 전개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는 중앙 관청의 영화 정책에 바로미터를 두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왜 일본에서 사회교육이 주창되었으며, 민중오락인 활동사진이 어떻게 교화의 매체가 되었는지, 그리고 문부성은 어느 국가의 영화 정책을 참고로 하고자 하였는지, 마지막으로 이들을 총합하여 총독부의 활동사진반은 어떤 영화를 제작하였는지에 관해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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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시인’ 혹은 ‘시의 정부’라는 미당 서정주의 호칭은 해방 이후 미당의 시적 영향력의 크기를 나타내는 말이면서 동시에 미당의 시적 기원과 그가 한국시에서 차지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모두 함축하고 있다. 초기 미당의 개인적 고뇌와 자기분열 의식이 해방 이후 ‘국민시인’으로 호명될 만큼의 보편성, 영원성으로 상승하는 과정에는 식민지 말기 미당 서정주의 의식과 체험, 의지, 판단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데, 특히, 「시의 이야기」와 친일행적이 보여주는 ‘순수, 보편, 객관적 현실’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후의 국가, 현실에 대한 시적 양면성의 한 전형에 해당된다. 외부의 압도적인 현실과 억압을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보편성’과 ‘개인적 감각, 시적 형이상학’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기 어려웠던 그에게 ‘현실’이란 “견뎌내야만 하는” 긴 역사 속의 잠시 어려운 ‘한 순간’이었고, 따라서 그의 시적 순수는 열악한 ‘현실’이 아닌 오직 ‘과거와 미래’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특히, 식민지 체험과 전쟁체험은 이런 미당의 ‘순수시 이념’을 역으로 강화시키는 중요한 대타항이었고, 그가 자신의 ‘순수시이념’과 ‘민족적 이상세계’라는 ‘보편 가치’를 쉽사리 하나로 통합시켜버릴 수 있었던 근거였다. 현실의 혼탁함이나 미완, 결핍에 비한다면, 과거와 미래는 현실의 결핍을 보상하는 하나의 이상으로 그의 앞에 현현한다. 이 점에서 미당에게 ‘전통’은 과거이면서 동시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적 이상의 구체적 현현에 해당된다. 이처럼 미당이 영원성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동일성으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순수시’가 현실을 배제한 ‘자족적 공간’ 속에 ‘시의 왕국’을 세움으로써 새로운 ‘시의 모델’을 만들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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