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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연구검색

The Studies in Korean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어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9-437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40권 0호 (2011)

식민지의 접경, 식민주의의 공백 - 장소로서의 부산 -

허병식 ( Huh Byung-shi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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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는 외부지향적인 항구도시의 발달과 식민사회의 도시계층의 재조직화를 통해 식민국가의 공간과 도시체계에 영향을 미친다. 근대초기 부산은 이러한 맥락에서 식민도시로 탄생했다. 일본은 자신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포구를 택해 근대도시를 형성하였다. 부산이라는 장소는 식민지처럼 지배와 피지배라는 극도의 비대칭적인 관계에서 이질적인 문화들이 서로 만나고 충돌하고 맞서 싸우는 사회적 공간들을 의미하는 접경(contact-zone)으로 대두하였다. 부산을 무대로 식민지 조선과 일본의 지리적, 문화적 인식의 상호작용과 서로 겹치는 이해를 드러내는 장면은 식민지시기 일본과 조선의 문학작품들에서 엿보이고 있다. 염상섭의 『만세전』에서 이인화가 보여주는 시각이 제국-식민지 주체의, 접경에서 가능한 시선이라는 점은 그 발견의 대상이 부산이 제국과 식민지의 접경지대라는 점과 별개로 파악할 수 없다. 이 접경으로부터 스스로를 시선의 대상으로 드러내는 자기민족지(autoethnography)의 공간이 전개된다. 이광수의 「오도답파기행」에서 엿보이는 해운대라는 장소는 식민주의의 공백상태를 짐작하도록 만든다. 식민지적 통치와 한밤의 휴양지라는 예외상태의 절합은 법을 중지시키고 유보시킴으로써 주권의 공백이 발생하는 장소로서 해운대의 사상이 정치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태준의 「석양」에서 여성의 육체에 대한 갈망과 그녀를 앗아간 존재에 대한 질투로 고통받는 매헌이 바라본 해운대의 석양은, 신생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음을 확인하여 무력한 상태에 처한 신체의 공백 혹은 잔여를 상연한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의 확전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변화함으로써, 부산은 대동아공영권 확대를 위한 병참기지의 기점으로서 그 중요성이 더욱 증대된다. 특히 부산항을 통한 수송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철도, 항만 등의 도시 인프라가 새롭게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으로 가는 노동이민이 집결하는 장소이자 일본 유학을 떠나는 청년들이 모여들었던 부산항은 이제 징용으로 끌려가거나 지원병으로 전장에 나아가는 식민지의 청년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고, 그것은 부산이라는 장소가 식민지 청년들이 경험해야 했던 제국/식민의 모순을 대변하는 공간으로 대두하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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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초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론”에 기반하여 통치범위를 아시아 블록 전체로 확장하고, 각 지역을 포섭/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식민지배의 방식도 “차별(이화)”에 따른 제국주의적 방법에서 “포섭(동화)”에 따른 제국적 방법으로 변화되었다. 대동아를 포섭/통합하기 위해서 일본은 “대동아”에 포함된 피식민지들 사이의 “이동”을 증가시키고 다양한 “문화접경지대”를 낳았다. 대표적인 예로 대동아 문학자 대회를 들 수 있다. 이 대회에 참여한 피식민자 대표들은 일본 제국의 문법을 내면화하고 선전하는 스피커들로 단련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대동아 문학자 대회를 둘러싸고 썼던 기행, 후기, 감상, 좌담회 등을 살펴보면 그들의 참여가 단순한 모방이나 경쟁에 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 각자는 자신의 민족이 처해 있는 위치에서 ‘대동아’라는 주어들을 적극적으로 번역/변형시켰다. 즉 조선은 ‘대동아의 중계지’로, 대만은 ‘남방으로의 전진기지이자 협화의 긴역사를 지닌 지역’으로, 만주는 ‘오족협화를 선취한 대동아의 기원’으로, 중국은 미묘한 무관심으로 스스로의 발화위치를 확보하는 동시에, “대동아”라는 주체/주어를 변형시킨다. 그리고 과정 속에는 제국질서에 포섭될 수 없는 잔여(殘餘)들이 남는다. 일본인 보다 더욱 더 일본인이 되거나, 조선이라는 말과 대만의 긴 식민지 경험 앞에서 주저하거나, 우회적 비판을 문학적으로 시도하거나, 스스로를 시골사람이나 병자로 표현하면서. 이러한 잔여의 순간들은 제국질서 속에서 결코 연대할 수 없는 타자와 타자가, 제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나거나 공명하는 순간들을 보여주고 있다.

혼혈/종 역사지식의 재생산 - 1940년대 타이완 문학 속의 <국성야>이야기

장문훈 ( Chang Wen Hs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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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언: 전쟁과 문단 재편重編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타이완 문학에는 두 가지 중대한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첫째는 문학 영역의 재개편인데, 내지(日本)와 타이완의 작가들의 활동 영역이 뚜렷하게 나뉘어 거의 서로 교섭하지 않았던 것이 1939년 <타이완 시인 협회>의 창립 이후에는 일본어 창작을 매개로 양국 작가들 사이에 협력 혹은 합작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두 번째로는 타이완과 내지인 작가들이 선택하는 소재가 점점 근접해진 것이다. 타이완의 민속 소재, 역사 서사물이 타이완에 있는 내지인의 소설작품에서 대량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미 공동의 지식 혹은 기억이 되어 버린 역사물에 대한 재서술은 그 자체가 민족(國族)신화의 창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서로 다른 민족들이 동일한 역사물을 소재로 하여 경쟁적으로 썼다는 사실은 텍스트 비교 연구에도 상당히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국성야> 정성공은 일본과 중국, 타이완에서 모두 다 깊은 민족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사적에 대한 텍스트들은 매우 많은데, 특히 1940년대 타이완에서는 여러 가지 버전이 동시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역사물의 소재가 근대소설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언어의 교체와 그 이전의 이야기버전들이 텍스트 속에서 일으키는 중첩과 착잡(錯雜)은 모두 ‘텍스트’의 형성 및 존재 의미를 탐구·분석하는 데에 유효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본문에서는 ‘내지인’ 작가가 쓴 정성공 이야기의 개작 작품을 주요 텍스트로 삼아, (1) 글쓰기과정에서 일어나는 언어 맥락의 전환 및 (2) 18세기 이래 정성공의 인물 형상화 방식을 일본 사상사 및 문화사상의 논설(論說)을 참조하여 비교·분석하고자 한다. 2. 자리 매김이 불가능한 <국성야> 정성공 타이완의 개척역사를 놓고 말하자면, 정성공이 타이완 서해안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세력을 몰아내고, 한족들에게 타이완 통제권을 확립시킨 공로의 의미는 크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의 중국·일본 및 19세기 이후의 타이완은 그에 대해 각기 상반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정성공은 일본에서 태어났고, 정씨 일족들은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재물을 쌓았다. 또한 일본에 “은을 보내서(寄銀)”, “파병을 요청(乞師)”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정성공의 “혼혈” 형상의 상징성은 그의 실제 혈통보다 큰 의미를 갖는다. 더욱이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바로 청병입관을 하고 있던 명나라 말기 난세였고, 일본에서는 에도(江戶)막부가 시작하여 쇄국체제를 수립하던 혼란기였다. 정성공의 타고난 혈연과 지연은 단일한 정권과 지역에 속하기 어려운 혼잡성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유동하는 동아시아 정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정성공의 행적과 그에 대한 후세의 서술, 이를 고찰하고 재창작하는 과정에는 (1)한인(漢人)중심/만인이족(滿人異族) (2)중화/일본 (3)동양/서양 등 세 가지 조합이 대립과 반영, 상생의 관계로 뒤섞여(揉雜) 있다. 이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일본의 최초 해외 식민지가 된 타이완이 각각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 근거로 서술되었다. 일본에서 정성공은 “국성야(國性爺)”의 이름으로 문인 지식층과 서민 오락생활에 깊이 들어가 있었다. <국성야>의 인물 이미지를 일본의 문화유산이 되게 한 작품은 치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의 정유리(淨琉璃)<국성야회전國性爺合戰>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이 연극은 국성야를 평호 출신인 전쟁의 신으로 그리고 있는데, 중화 영역 내에 있는 만청(滿淸)정권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시하는 한편, 여성인물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구조적인 요소들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국성야”가 “현재는 대명조의 지원군이 되어 쉬지 않고 싸우고 있다”라는 문구에서는 일본이 중국의 국운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중일 관계는 “주종(主從)”관계에서 “병립(幷立)”관계로 변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이후 <국성야>는 1874년 이후 일본이 타이완을 그의 첫 해외 식민지로 얻은 시기에 다시 쓰이게 된다. 일본의 언론은 중일전쟁에서 청나라를 패배시킨 것은 그 후예들이 원수를 갚기 위한 보복과 전승(傳承) 행위였다고 주장하며, 국내 여론을 선동하고 식민지 확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청(淸)”을 국성야/일본의 적대면(敵對)으로 반복적으로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타이완은 “빼앗긴 것”과 “되찾은 것(回歸)”이라는 두 가지 패턴으로 일본 근대 국성야 글쓰기에 반영되었다. 한편, <국성야 후일 모노가타리>에 수록한 또 다른 작품 <타이완 홍루사>는 희곡적인 재현방식과 완전히 달리 “정씨 4대 사적”사료를 읽은 서술자 “나”가 존재하며, “유창하게 읽기 힘든” “한문사료”를 소화한 후 “상냥한” 일본어로 독자들에게 정씨 역사 사실을 다시 서술해준다. <타이완 홍루사>는 여성의 존재가 남성이 주체인 역사에 중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여성의 목소리, 민속 구전 자료 등은 방대하고 복잡한 역사자료에서 부족한 물질과 감정적인 요소를 제공해 준다. 그 밖에 정씨 역사 사실을 서술한 자료 가운데에서 타이완 경영 부분에 대해 가장 많이 기술한 것은 강일승(江日昇)의 <타이완외기>였다. 총 13권으로 된 <타이완 외기> 가운데서 제12권 <미얀마에 가사 계왕(桂王)은 모욕을 당하고, 조상의 교훈을 읽고 (정)성공은 귀천(歸天)했다> 뒷부분이 바로 정씨가의 타이완에서의 흥망성쇠과정이다. 대략 강희 말년에 쓰여진 <타이완 외기>와 기타 사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진영화와 정극장에 대한 서사와 강조 부분이다. 3. 서천만의 <적감기>: 역사에 수록 되고 싶은 욕구 1940년대 이후 타이완 문단을 주도했던 중요한 인물 서천만이 이 시기에 창작한 <적감기>는 <국성야 후일 모노가타리>를 이어 받은 후계작의 방식으로, 정씨 이야기가 1940년대 타이완에서 재차 “혼혈”되어 “역사”지식으로 확립될 가능성을 보여줬다. <적감기>에서는 <타이완 외기>에 없지만 <타이완 홍루사>에만 있는 독창적인 플롯이 존재하는데, 가령 정극장이 죽기 전에 진부인에게 몸을 주의하라고 당부하는 장면이나, 정극장이 피살당할 때 살인자와 나누는 대화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때문에 <타이완 외기>와 <적감기> 사이에는 <국성야 후일 모노가타리>와 <타이완 홍루사>등 일본어 창작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감기>는 1940년 12월1일에 처음 <문예 타이완>에 간행한 후 같은 달 22일에 단행본 <적감기>로 출판되었다. 1942년 12월에는 소설집 <적감기> 형식으로 동경에서 다시 출판하였는데, 이 소설집에는 <운림기 云林記 >, <원소기 元宵記 >, <주씨기 朱氏記 >, <도강기 稻 江記 >, <채류기采硫記 >등 편을 수록했는데, 이는 모두 다 서천만이 초기 타이완 개척사를 소재로 하여 창작한 소설들이었다. 그리고 <타이완의 기차> 뒤에는 <두 명의 독일인 엔지니어>(<二人獨逸人技師 >), <용맥기 龍脈記 >, <타이완 종관 철도 台灣縱貫鐵道 >등 유명전이 타이완 순부(巡撫)로부터 일본 영대(領台)까지 맡고 있을 때, 철로 전신망 등 서양 문명 건설이 타이완에 들어오고, 그 과정에서 서양문화와 동양적 가치를 절충하는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상의 두 계열의 텍스트는 내부 시간과 창작시간이 매우 집중되고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아, 서천만이 의식적으로 진행한 타이완 역사물의 창작이라고 볼 수 있다. <적감기>와 <타이완의 기차>는 각각 두 계열의 시작이고 또한 매우 비슷한 서사 패턴―작가 자신과 매우 중첩되는 서술자 “나”가 있으며, 그리고 책을 통해 상상을 발동하여 과거로 들어가는 시간적인 연결―이 있다. 명청 교체시기인 17세기와 1940년대의 “대동아”라는 상상적 지리를 이어주는 것은 바로 “국성야”이야기, <타이완 외기>와 <국성야 후일 모노가타리>이다. <적감기>는 “나”와 “타이완”의 공통된 역사적 소망을 드러내고, 실제 건축과 공간, 예를 들면 적감루, 개원사, 오비장대, 금정, 산전상점 등은 모두 다 “나”의 시선 속에서 과거부터 오늘까지의 변천감을 나타낸다.―이렇게 가장 좋은 현실 공간과 대상의 묘사는 확실히 <국성야 후일 모노가타리>와 <타이완 외기>에서는 부족했던 부분이다. 서천만은 현지답사를 통해서 강일승과 녹도앵항, 심지어 치카마쓰 몬자에몬에게 선천적으로 부족하였던 “현지” 특성을 그의 작품 안에 생생하게 그려 넣음으로써, 정씨 혈통을 간직하고 동서양을 멀리 내다보는 포부를 가진 정극장을 매개로 하여, “내지인”(타이완 경험을 구비하지 못한 중앙 문단 작가를 상대로 비교)의 국성야 모노가타리 서사에의 우위성을 확인한다. 4. 결어: 역사 - 소설 ― 종교 식자들은 늘 식민자들의 <적감기>의 <타이완 외기>에 대한 의도적인 인용과 글쓰기의 증가가 타이완 역사 해석에 대한 침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씨 일족이 동아(東亞) 해양에서 활약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여태껏 대륙을 기반으로 한 중국 관방의 “정사(正史)”에 들어가 본 적은 없다. 명청(明淸) 사이에서의 정지용의 우유부단함, 반청시기에 강호 막부에 군대와 돈을 지원해달라고 한 정성공의 일화 등은 근대 단일 민족의 정체성을 전제한 행동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정씨 이야기가 여러 정권하에서 텍스트로 사용된 이유는 정성공 자신의 혼혈 신분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정씨 이야기가 예전부터 여러 문체(文體)에서 유전하였고, 그 어느 텍스트도 중심이라고 정할 수 없는 혼종(混種)의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일본인의 서사 맥락 속에서만 “국성야” 정성공의 지식화와 문학화의 관점을 탐구하였다. 타이완인 작가의 텍스트는 일본의 근대문예가 아니라 민간문학과 민속 종교적 층위에 있기 때문에 방법 면에서 반드시 구분을 할 수밖에 없다. 정성공은 타이완 민간에서 신으로 모셔 제사를 받은 지 오래되었고, 역사 사실에서 언급하지 않은 부분에는 영험한 전설이 돌고 있다. <적감기>에서 신비한 진씨 청년으로부터 결말에서 신용(神龍)이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 타이완 “내지인”의 자기 역사 위치 매김 서사도 의외로 종교 숭배 색채로 기울어지었다. 역사 소재하의 소설과 종교는 민족주의 상상과 함께 비단일 대위적인 강렬한 호응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권상로의 불교시가 연구

김기종 ( Kim Ki-j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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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근대 불교시가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의 일환으로, 권상로 불교시가의 내용 및 성격과 그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지금까지의 논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권상로의 불교시가는 작품의 발표연대 및 수록 문헌에 따라 그 내용 및 성격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1910년대의 작품들은 장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잠’과 ‘깨어있음’의 대비를 통해 불교계의 자각 내지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1920년대의 『불교』 수록 작품들은 ‘불타’를 소재로 한 노래와 ‘마음’을 강조한 작품의 비중이 큰데, 전자는 비교적 다양한 소재와 표현으로 되어 있고 청자에 대한 권계 내지 당부가 없다. 후자의 경우는 마음과 자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들 노래의 ‘마음’ ‘자각’은 진리로서의 불타 즉 ‘불성’을 의미한다. 곧 『불교』의 불타와 마음 관련 작품들은 모두 ‘불타’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1930년대의 『석문의범』 소재 시가는 3대 예식과 강연의식 등에서 가창된 것으로, 사실의 제시와 이에 대한 의미 부여로 되어 있다. 이들 노래 중, 「성도가」·「학도권면가」는 석가의 구체적인 공덕과 불성을 제시하고 있는 1920년대 작품들에서 더 나아가, 청자들에게 석가를 본받아 ‘성불’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권상로 불교시가의 성격 및 의의를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지어 살펴보았다. 권상로의 시가작품은 근대 이전의 불교시가와 동시대의 찬불가와 비교할 때, 불교시가의 장르 개척 또는 영역 확대, 현실 대응 매체로서의 성격, 모범으로서의 불타 형상화라는 특징을 보인다. 곧 권상로의 불교시가는 최초의 불교시조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과, 당대 불교계의 시대적 관심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적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찬불가는 1920·30년대 불교계의 찬불가운동을 선도하고 있는 불교문화사적 의의뿐만 아니라, 모범으로서의 불타 형상화를 통해 ‘성불’이라는 대승불교 본연의 목적을 강조하고 있는 불교사상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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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계몽기 ‘傳’이 근대적 변이의 과정을 통하여 1920년대 근대역사소설의 원류적 기반이 되었다는 주장이 학계 일각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온 바 있다. 이 글은 이러한 학설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데 목적이 있다. 본 연구에 앞서 필자는 역사전기소설로서 ‘傳’ 계열의 소설과 근대 역사소설 간의 분절적 국면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記’ 의식의 공유라는 측면에서는 두 글쓰기가 계통적으로 연관되나 담화적 측면에서는 별개의 글쓰기 영역을 구축해갔다는 것이 그 결론이었다. 전계 소설을 포함한 근대 역사전기소설이 역사소설과 동일한 계보를 형성하는 지점은 ‘역사’라는 소재의 공통점에서였고, 그 핵심 인자는 ‘記’ 의식에 있었다. 특히 ‘記’의 상대 개념으로서 ‘作’ 의식과의 긴장을 동력으로 두 글쓰기는 번성을 구가할 수 있었다. 이 두 의식의 상대적 질량은 역사전기소설과 역사소설인가에 따라 달랐고, 또한 그 각각의 텍스트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연속성의 관점에서 이 시기 역사문학의 전개를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이 글은 그와 같은 결론을 텍스트 분석을 통한 실증적 차원에서 검증하고자 기획되었다. 191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傳’의 표제를 달고 신문에 연재된 주요 텍스트들, 예컨대 『金太子傳』, 『李大將傳』, 『林巨正傳』, 『林慶業傳』의 창작동기 및 연재 배경, 그리고 담화적 특질 등에 관한 비교 고찰이 그 주요한 연구 방법이다. 근대 계몽기 ‘傳’이 1910년대 이후 신문연재소설로서 어떠한 변전을 겪었는가를 확인해볼 수 있는 지표로서 이들 텍스트는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그 가운데서도 『李大將傳』은 ‘傳’과 고소설, 그리고 근대적인 역사소설로서의 담화적 다층성을 동시에 지닌 텍스트로 주목된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전기소설과 근대 역사소설 간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근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李大將傳』은 한국근대문학사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텍스트로서 이에 관한 면밀한 분석은 앞서의 가정이 지엽적인 사실에 근거한 것임을 반증하는 데 더없이 유용한 증거가 될 것이다.

「만세전」에 나타난 감시와 검열

한만수 ( Han Man-s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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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의 중편 「萬歲前」(1924)에는 감시와 처벌에 대한 묘사가 12차례나 등장한다. 또한 이 작품은 1922년 연재하다가 압수당한 작품 「묘지」를 되살려 연재를 완료하는 데 성공한 것이므로, 검열을 매우 예민하게 의식하면서 창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이 논문에서는 「만세전」의 감시와 처벌에 대한 묘사가 검열과 어떤 관련을 맺는지를 검토하였으며, 검열 우회를 위한 여러 가지 치밀한 전략이 동원되었음을 밝혀냈다. 첫째, 주인공 이인화는 전혀 불온하지 않은 사람임에도 철저한 미행이 따라다닌다는 작중 설정. 식민지 시기의 미행은 ‘요시찰자’에 한해서 시행했으며, 모든 조선인 유학생을 미행했다는 「만세전」의 설정은 3·1운동 직후에만 잠깐 실행되었을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만세 ‘전’을 다룬다고 해놓고 만세 ‘후’의 현상을 비판하는 셈이니, ‘죽은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위장해서 ‘산 권력’의 검열을 통과했다고 판단한다. 둘째, 7차례에 걸친 검문과 미행에도 불구하고 이인화의 ‘혐의 없음’ 만이 확인된다는 설정. 이 결백성의 주장은 검열관에게 이 작품이 합법적이라는 감각을 전이하는, 검열 우회의 효과가 있다. 그 근거는 대개 다음의 네 가지이다. 1) 이인화가 검문을 통해 압수당한 ‘서류뭉텅이’에는 합법적 서적과 이인화의 소설이 한데 들어가 있다. (현실의) 검문과 (텍스트의) 검열은 환유적으로 동일시되는 셈이다. 2) 경관은 이를 압수하면서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하고도 이행하지 않았지만 이인화는 이에 대해 아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압수와 약속위반에 관심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소설은 불온하지 않다고, 자신에 대한 검문과 미행은 불필요한 과잉 경찰 행위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곳곳에서 자신은 불온분자가 아니라고 직설하기도 한다. 3) 헌병의 검문을 당하면서 이인화는, 미행자가 자신의 ‘혐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일종의 신원보증인이 될 수 있다고 기대하는, 인식의 전도를 보여준다. 4) 이 작품에서 이인화는 ‘나’로 훨씬 압도적으로 불리어 “이인화=나=염상섭”의 동일시를 불러온다. 이 경로를 따라서 이인화의 합법성은 염상섭의 「만세전」으로 전이된다. 위 1), 2), 3)에서 동료 경찰관들로 하여금 이인화의 ‘신원보증’을 서게 했던 바, 이 경로를 통해 염상섭의 작품에 대한 신원보증의 효과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유 없이 검문과 미행을 당하는, 미행경관이 보증을 서는, 주인공=작가의 작품에 대한 검열은 역시 부질없는 일로 인식되는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2년 전의 압수를 경험한 후 검열을 고심해온 염상섭은, 작중인물로 경찰관을 등장시키고 그에게 자신과 작품에 대한 신원보증을 맡기는 묘책을 강구해냈다. 이 작품에서 감시가 일상화되고 과잉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물론 통설대로 식민통치에 대한 비판이지만, 그와 동시에 검열우회에도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을 알아보기 어렵게 흐릿한 몽타주로 만들었으며, 합방을 비판할 때는 어떤 시기에 대한 비판인지를 아주 불분명하게 언표하여 알아보기 어렵게 해두었다. 모두가 검열을 우회하기 위한 장치였다. 「만세전」에 대한 독해는 이렇게 검열의 요인을 고려했을 때 사뭇 다른 것이 된다. 이인화가 늘 감시의 시선을 의식하고 움직였던 것처럼, 이 작품을 쓸 때의 염상섭은 특히 검열을 예민하게 의식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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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는 『무정』(1917)을 통해 문학적인 성공을 거두기 전 중국과 러시아의 시베리아를 여행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후 자신이 경험했던 젊은 날의 여행을 각기 다른 결말을 가진 「어린 벗에게」와 『유정』으로 형상화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어린 벗에게」는 자유, 열정, 희망, 기개 등의 단어로 지칭할 수 있는 사라진 젊은 날의 꿈이며, 『유정』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과 풍화를 견딜 수 있는 공동체(민족)의 꿈이다. 사멸과 불멸 혹은 특수화와 보편화라고 할 수 있는 재현의 방식에서 이광수가 선택한 것은 후자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과 문학을 민족과 국가라는 보편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광수의 문학이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되고 언급되는 까닭 중 하나는 그의 문학적 선택에서 발생하는 기인한 모순과 굴종 때문이다. 그는 불멸의 문학을 지향했지만 정확히 절반의 성공만을 거둔 것이다.

탈식민의 욕망과 상상력의 결여 - 해방기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

박광현 ( Park Kwang-hyo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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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해방기의 남한 사회에서 조선인의 욕망이 ‘대학교’를 둘러싸고 어떻게 분출했고, 또 그로 인한 갈등 양상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제까지 그와 관련한 논의는 ‘국립서울대학교안’에 경도되어 다뤄져 왔다. 그러다 보니, ‘경성대학’을 둘러싼 논의가 간과되어온 측면이 있었다. 당시 미디어는 대학들을 “교수 없고 학생 없는 대학”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도 하루가 멀다고 대학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이렇듯 모순적이기 하지만, 당시는 과거 어느 때도 경험하지 못했던 ‘대학의 시대’라고 불릴만한 시기였다. 그것이 해방기의 욕망 분출의 한 양상이기는 했지만, 한편 그것은 과거 경성제국대학이라는 제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상상력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그러한 점에서 그 시기의 ‘대학교’를 둘러싼 논의를 검토하는 데 있어 식민-탈식민의 연속성이라는 맥락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일 년 남짓 존재했던 경성대학을 둘러싼 논의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면서, 해방기 ‘대학교’를 둘러싼 담론장 안에서 당시 지식인들이 어떻게 고민하고 대응해갔는가를 살펴보았던 것이다.

손창섭의 장편 『인간교실』에 나타난 ‘시선’의 이중구조와 그 의미

곽상인 ( Gwak Sang-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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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손창섭의 장편 『인간교실』에 나타난 시선의 이중 구조와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1964년에 완성된 이 작품에서는 타자와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인물들이 등장하여 ‘맨 얼굴’을 통해 내면에 숨겨진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때 인물들의 훔쳐보는 시선에는, 욕망하지만 소유할 수 없는 신비로운 대상을 은밀히 바라봐야만 하는 고통의 반복이 내재되어 있다. 여기에는 금기가 내재되어 있기에, 대상을 보는 시선 속에 환상을 담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감시하는 시선에는 주체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자아로 만들고자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는 무서운 타자의 응시로 작용해 주체가 상징계에서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어려움을 갖도록 만들기도 한다. 끝으로 본고의 가치는 『인간교실』 분석을 통해 손창섭의 작품세계를 1960년대까지 확장한 데서 찾을 수 있겠다. 대부분의 논자들이 손창섭의 1960년대 장편들을 순수문학의 ‘주변’으로 치부해버렸는데, 인간의 욕망은 시대를 초월한다고 할 수 있는바, 따라서 1960년대의 작품분석이 병행되어야만 손창섭 해석의 스펙트럼은 확장될 것이고, 한국문학사에서의 위치와 작품세계의 독창성도 구축될 것이다.

TV드라마 <다모(茶母)>의 서술 방식과 재현 방식 연구

박미란 ( Park Mi-r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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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은 일상성, 분절적 수용, 현전성, 개인적이고 친밀한 감각이라는 특징을 갖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텔레비전 드라마는 연극이나 영화와는 다른 재현 방식과 형성 원리를 갖추게 되며, 수용자에게는 텔레비전 드라마 고유의 미감을 창출하게 된다. 본 연구는 텔레비전 드라마 <다모>의 서술 방식과 재현 방식을 중심으로 텔레비전 드라마가 지닌 미학적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모>는 발견의 순간을 지연함으로써 시청자에게 긴장을 일으킨다. 발견의 순간을 반복적으로 지연하는 것은 긴 방영 시간 동안 서사를 분절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시청자에게 흥미와 긴장을 일으키고 유지하는 방법으로 기능한다. 또한 <다모>는 등장인물의 자기 고백적인 기억을 회상을 통해 재현함으로써 수용자가 등장인물의 기억과 감정을 인지하고 이를 통해 등장인물에게 공감을 할 수 있도록 만든다. 마지막으로 <다모>는 클로즈업, 음악, 등장인물의 목소리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시청각 이미지를 통해 등장인물의 기억과 등장인물들 사이의 사건 및 감정을 재현하면서 시청자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고 활성화시킬 수 있게 만든다. 이처럼 <다모>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매체적 성격에서 기인하는 서술 방식과 재현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함과 동시에 새로운 구성 방식을 보여주었으며, 이를 통해 시청자에게는 독특한 미감을 창출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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