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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대한민국의 수립 나아가 남북 두 정부의 수립에 따른 분단의 제도화로 귀결된 해방3년의 역사에서 일군의 민족주의 문화지식인에 의해 제기·실천되었던 자주적 통일 민족국가수립 운동을 복원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들이 상상하고 추구하였던 자주적 통일 민족국가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본고가 주목한 것은 첫째, 최선이든 차선이든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뒤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이에 편승/거부하며 민족의 생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했던 국내의 모든 정치·사회문화세력들에게 있어 북조선은 어떤 존재였고, 또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시기에 생산된 일련의 북조선기행기들은 북조선 파악의 민족적 의의에 주안점을 두고 비교적 사실 그대로 북조선 현실의 전모를 소개하려는데 주력함으로써 실제의 확인보다 풍문, 선전, 관념 등에 치우진 북조선인식을 교정하고 자주적 통일 민족국가건설의 정당성과 그 비전을 뒷받침하는데 기여했다. 자주적 통일민족국가의 비전 발견(김동석), 문화적 이상국가(서광제), 동아시아 질서재편의 전략적 거점으로서의 북조선(온락중) 등 북조선의 현실을 직접 확인하고 자기화하는 방식은 다소 다르게 나타나나, 대체로 북조선의 혁명적인 민주주의개혁에 대한 찬사·동경과 함께 그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의 성취를 철저한 민족의 관점으로 접근해 자주적 통일의 자양분, 교두보로 인식·배치하는 태도를 공유하고 있었다. 치열한 계급투쟁의 폭력적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국민국가형성을 과도하게 민족주의적으로 전유함으로써 자신들의 비전을 스스로 제약하는 문제점을 드러냈지만, 이들의 비전은 당시 외세에 의해 부과된 또는 이에 편승해 획책된 단선단정에 의한 분단정부 수립에 대안적 가능성으로서 의의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이 시기 자주적 통일 민족국가건설의 비전을 공유한 지식인들이 전개한 집단적 성명운동의 조건과 논리이다. 단선단정 국면에서 지식인사회는 단정추진세력과 자주적 단일정부수립세력의 대립구도로 재편되고 대다수를 차지한 후자에 의해 남북협상, 외군 철수, 단선단정거부 등을 골자로 한 자주적 통일 민족국가수립을 위한 실천운동이 총력적으로 전개된다. 좌파 및 중도파로 규정할 수 없는 약 400명에 달하는 이 범지식인운동이 사회적으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 극좌/극우 정치노선의 배제, 단독정부수립 기도 반대, 통일자주독립을 목표로 남북협상을 지지·성원한 ‘108인 문화인성명’을 비롯한 일련의 성명서운동이다. 지식인들의 이 같은 운동의 의의는 단순히 단선단정을 저지하거나 남북협상을 지지한 것으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항구적 민족분열과 외세에의 예속 및 내전의 발발 등 장차 단정으로 초래될 민족의 위기상황을 막고 독립국가로서의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려는 민족 총의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이념과 노선은 정당하고 당시 급박하게 돌아가던 엄중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모색 가능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물론 이들의 실천적 지향은 미국이 부과한 질서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또 자신들의 노선을 현실정치화 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허약했던 관계로 대안적 가능성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렇다고 현실정치에 패배한 일군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민족적 양식 내지 도덕적 의지만이 남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자주적 통일국가수립을 주창하고 분투했던 당시 대다수 지식인의 통일운동은 여전히 민족적 과제로 부과되고 있는 자주적 통일국가의 비전을 모색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최선이 차선·차악에 의해 반민족적, 반국가적인 불온으로 매도되고 축출된 오도된 역사 속에서 이들의 이념과 노선은 생환되어 민족통일의 또 다른 대안 모색에 초석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