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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정주 시의 완성도와 현실인식의 균열에 따른 기존의 이원적 평가체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서정주의 시에 대해 일반화된 평가 기준의 하나는 ‘근대와의 격차’이다. 그런데 공동체의 상실에 따른 현대사회의 비인간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는 현 시점에서, ‘근대와의 격차’는 오히려 적극적인 읽기의 대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물론 모든 전통 서정시가 이러한 독법을 지지해 주지는 않는다. 서정주의 시, 특히 산업화 시대에 출간된 『질마재 신화』는 한국의 ‘오래된 공동체’의 ‘비밀’을 탐구하고 기록한 문제적인 텍스트로서, 현대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체의 직접적인 모델’이라기보다는 “공동체의 ‘원리’의 모델”로서 그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부각된다. 현대사회가 ‘질마재’로 회귀할 수는 없지만, ‘질마재의 운영 원리’를 계승하고 재창조하는 것은 가능하고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의 토대는 한국의 전통 마을공동체와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마을 구성원들의 삶이다. 서정주는 어릴 적 살았던 ‘질마재’의 실제 체험을 복원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오래된 공동체’의 지속의 비밀을 현재의 삶에서 전유하고픈 열망을 드러낸다. 질마재 연작시들이 공동으로 수행하는 작업은 오래된 마을공동체의 운영 원리에 대한 탐구이다. 질마재에서 사람들과 사물, 장소 들은 ‘하늘’과 더불어 마을-우주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공동체의 존재-육체로서 세계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감각하는 공동감각을 육화하고 있다. 공동체적 삶의 제일 전제조건인 공동감각은, 질마재 사람들이 분유(분할과 공유)하고 있는 무당의 능력을 통해 현실적으로 발현된다. 일제와 군사독재가 주도한 근대화의 과정에서 전통 마을공동체의 수호자였던 무당(무교)이 몰락하면서, 무당이 공동체를 위해 했던 윤리적이며 미학적인 역할(혼교, 경계 초월, 치유, 생명력 고양 등)을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가진 것이다.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는 현대사회에서 공동체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과 운용원리에 대한 시사점을 내장한, 한국의 전통 마을공동체를 형상화한 텍스트로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