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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대한제국 말기의 재일본 유학생들이 간행한 『』태극학보『』에 대한 것으로서, 특히 핵심 연재물이었던 <역사담>의 종합적 분석을 시도한다. <역사담>은 시리즈로 기획된 서구영웅전 번역물이었다. 순서대로 콜럼버스, 비스마르크, 줄리어스 시저, 올리버 크롬웰의 이야기가 실렸다. 총 26호까지 간행된 『태극학보』의 21개호에서 확인되는바, 연재의 지속성과 비중 면에서 <역사담>에 비견될 콘텐츠는 이 잡지에 없었다.
<역사담>을 집필한 박용희는 저본 4종을 모두 박문관(博文館)에서 나온≪세계역사담≫ 총서 내에서 선택하였다. 박용희는 각 저본의 지극히 제한된 정보만을 발췌하여 번역한 반면, 자신의 독자적 발화는 대량으로 삽입해두었다. 그는 <역사담>을 통해 서양의 역사 및 인물에 관한 지식을 소개하는 동시에, 한국의 정치적 현실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발화할 수있었다. 공식적으로 정치 및 시사를 다룰 수 없던 『태극학보』는 몇 가지우회적 장치를 통해 정치적 발화를 시도했는데, 그중 <역사담>은 큰 축을 담당했다.
콜럼버스 전기로부터 시작된 <역사담>은 연재 과정에서 다음 대상 인물을 선택해나갔다. 비스마르크 전기를 통해 한국에 필요한 정치적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발신한 박용희는, 시저 전기를 소략하게 마무리 하고 서둘러 크롬웰 전기 연재에 돌입하게 된다. 망국에 직면한 한국적 현실 속에서 박용희가 선택한 최종적 대안은 개신교를 통한 국민적 역량의 결집이었다. 크롬웰의 삶은 이를 동기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활용되었다. 한편, 사정상 연재를 중단하게 된 박용희를 대신하여 크롬웰전의 번역을 계승한 이는 태극학회의 제3대 회장이자 『태극학보』를 통틀어 가장 많은 기사를 게재한 김낙영이었다. 이를 통해 크롬웰이라는 전략적 선택은 단순히 박용희 개인이 아닌 『태극학보』의 전체적 방향성이기도 했다는 점이 확인된다. 이는 『태극학보』가 왜 그토록 개신교를 강조했는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종교적 신념으로 뭉치면 정치적 결과물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일견 비현실적인 그들의 기대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가속화됨에 따라 강력한 대안의 지위를 점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