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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억의 『오뇌의 무도』 재판에 새롭게 수록된 프랑스 현대시인 폴 포르(Paul Fort, 1872~1960) 시 번역의 함의를 묻고자 하는 데에서 비롯한다. 김억의 폴 포르 시 번역은 영미권의 프랑스 시 사화집(詞華集)과 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大學, 1892~1981) 등의 일본어 번역시를 저본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특히 호리구치 다이가쿠의 번역시집 『잃어버린 보배(失はれた寶玉)』(1920)가 김억으로 하여금 폴 포르 시를 번역하는 데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저본이었다. 김억은 때로는 일본어 번역시들의 구문을 해체하고 조합한 데에 영역시로 보완하거나, 혹은 당시 일조(日朝)사전의 설명들을 응용하는 등, 일본어 번역시들을 새롭게 고쳐쓰는 방식으로 폴 포르의 시를 중역했다. 이러한 김억의 폴 포르 시 번역은 프랑스 현대 시가 동아시아로 확산되는 복잡한 경로, 근대기 일본에서 이루어진 프랑스 현대시의 정전화 결과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특히 김억의 독특한 중역의 방법은 프랑스어, 영어, 일본어와 같은 타자의 언어들의 혼종과 적층을 조선어로 동화시키는 일이었고, 그 가운데 제국 일본, 세계문학의 중심인 프랑스를 향한 일종의 식민지적 모방(mimicry)의 양상을 드러냈다. 김억의 『오뇌의 무도』가 근대기 한국의 문학청년들에게 오랫동안 창작의 전범이었다는 점에서 이 모방은 중요하다. 그것은 『오뇌의 무도』에서 비롯한 한국근대시가 바로 이 모방의 효과라는 점, 또한 그 모방을 기원으로 한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