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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비록 곧바로 무산되었지만, 그로 인해 만들어진 해금의 영역은 냉전사회의 ‘균열’로서 주목해볼 만하다. 특히 문학작품에서 금기시된 빨갱이 관련 가족사가 수면 위로 부상하여, 소설이라는 허구적 형식을 거치면서 공론화된다는 점은 의미있게 평가할 대목이다. 1970년 늦은 나이에 전쟁기의 경험을 다룬 『나목』으로 등단한 박완서는 20대 초반에 전쟁을 경험한 자로서 1970년대 초반의 이런 변화에 즉각적으로 소설적 대응을 보인 작가이다. 단편소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1972), 「부처님 근처」(1973), 「카메라와 워커」(1975), 「겨울나들이」(1975), 「돌아온 땅」(1977),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1977), 장편소설 『한발기』(1971.7~1972.11) 등은 전쟁 이후 금지된 것으로서 빨갱이와 연관된 가족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전면화된 소설들이다. 그러나 이 소설들에서 빨갱이라는 판결을 받고 처벌된 사람들은 김원일이나 이병주의 소설처럼 명징한 사상적 정체성을 지녔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소설은 빨갱이 가족들의 삶을 주로 다루지만, 빨갱이로 명명된 자가 누구인가라는 신원을 밝히는 것에는 별달리 주목하지 않는다. 이 점은 박완서 소설이 빨갱이를 다룸으로써 한국사회 냉전관념에 저항하고 있지만, 빨갱이의 신원을 밝히는 소설들과 달리, 한국전쟁의 다른 문제들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단이 장기화되면서 냉전사회적 특수성을 만들어가는 한국사회의 자체적인 구조에 더 관심이 가있기 때문이다.
3개월간 점령당하고, 다시 수복되어 점령 하 인민군의 편이었던 적을 처벌하는 일이 생겨나면서, 전쟁은 다른 전쟁으로 성격이 변한다. 이 다른 전쟁으로의 전환은 내부 전쟁이기도 하고, 환도한 정부가 국민을 구성해내고 국권을 회복하는 정권 창출과정이기도 하였다. 빨갱이 아버지의 신원을 증명하기 위한 아들의 서사가 1970년대 이후 빨갱이 문학의 중심 서사로 해석되었다면, 박완서 소설의 빨갱이 서사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전쟁의 성격을 포착한다. 박완서의 전쟁서사는 도강파/잔류파의 부역 심사와 처벌 프레임에서부터 시작된다. 부역자 혐의, 부역자 처벌의 문제인데, 이는 분단이 장기화되면서 확대재생산되어, 빨갱이 ‘혐의자’의 불안과 공포를 일상화시키는 냉전사회의 특성을 만들어낸다. 부역자 문제가 전쟁 시에 발생했던 민간인 학살과 연결되는 치명적인 문제임에도 1990년대 이후에야 사회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을 생각해볼 때, 냉전사회의 정치적 통제 속에서 미묘하게 존재를 증명하는 ‘문학’의 독특한 사회화 과정을 생각하게 하는 점이다. 부역자 서사로 포착된 사회적 심리는 냉전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겨진 내밀한 속사정과 공포를 보여준다. 내밀한 삶의 양상이라는 소설적 설정으로나마 1970년대에 공적 영역에 진입한 마음이다. 분단작가라는 평가는 이 냉전사회의 속사정이 포착된 심리묘사와 관련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