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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ARATIV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기타제어문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연3회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5-0910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64권 0호 (2014)

마르크스주의와 자아소외: 『프랑켄슈타인』 읽기

김경순 ( Kyung Soon Kim )
한국비교문학회|비교문학  64권 0호, 2014 pp. 5-23 ( 총 19 pages)
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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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은 19세기 경제적 발전의 초기단계에, 즉 상품이 맹목적으로 숭배되기 시작하였을 무렵에 창작되었다. 소설에서 빅터는 생명의 원인을 탐구하기 위해 우선 질병과 죽음에 의존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과학적 힘을 통해 그러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질병이나 죽음의 고통이 없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인류를 창조함으로써 인류의 은인이 되고자 했던 그의 의도는 이성적 사고 능력 혹은 과학계의 재현 시스템만을 쫓아가는 자신 과잉의 자아를 대변한다. 셸리는 그와 그가 만든 피조물인 괴물과의 관계를 묘사하면서 생명이라는 것은 결코 기계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도 없으며 또한 그러한 속성에서 파생되는 것도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저서 『1844년도 경제적 및 철학적 원고』(Economic and Philosophical Manuscripts of 1844)를 통해 『프랑켄슈타인』의 함의를 살펴보았듯이, 셸리가 창조 행위로서가 아닌 생산과정으로서의 괴물의 창조 경험 과정을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그러한 생산과정 동안 생산자는 불가피하게 그가 만든 대상으로부터 그리고 동료와의 유대로부터 소외된다. 이 점에서 괴물은 소외된 노동자의 상징으로 이해될 수 있다.『프랑켄슈타인』에서 노동자의 소외, 즉 노동자가 외부세계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만들어진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은 결국 자아소외로 이어진다.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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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번역의 과정에 지배문화중심의 문화편향성이 개입됨을 밝히고, 그 편향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해도 서구중심의 일방적 문화편향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번역을 통해 하나가 되는 두 개의 문화가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에 있다. 역사적으로 번역은 일방적으로 지배문화의 영향을 받는 수동적인 작업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문화를 전복하기도 하고 자신의 문화를 지배문화의 위치로 승격시키기도 했던 전략적이며 능동적인 작업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서구중심의 번역,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영미문화중심의 문화편향성이 전 세계의 번역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비서구권인 한국은 어떤 번역 전략을 취해야 할까?본 논문은 서구중심 번역의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한 베누티와 베르만이 그 해법으로 각각 제시한 이국화 번역이 각각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고, 그 중 베르만의 출발텍스트의 살아 있는 ‘문자’를 번역 텍스트 속에서도 ‘살아있도록’ 옮기자는 ‘형태의’ 번역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발견한다. 즉, 베르만처럼 출발 텍스트를 살아 있는 ‘문자’로 파악한다면, 번역의 현장은 더 이상 두 문화 사이의 전장이 아니라 두 문화가 상생하고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일상의 초상, 그리고 쓰레기의 정치학: <웨이스트 랜드>와 무니스의 작품을 중심으로

남수영 ( Soo Young Nam )
한국비교문학회|비교문학  64권 0호, 2014 pp. 57-83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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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는 담론의 생산에 기여하는 역할로 사회적 예술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는 ‘재현 장르’로서 주제의 진실된 재현이라는 소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담론의 생성과 진실된 재현이라는 이 두 가지 요소는 다큐멘터리 정치성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만, 이로 인해 다큐멘터리가 기존의 가치체계와 감각 체계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무시되었다. 이글은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재현의 진실성은 변화 없는 동일성을 전제로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하며, 다큐멘터리에 요구되는 동일성의 미학과 사회학은 현 체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적 장치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다큐멘터리적 재현 안에서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에 얽매이기보다, 예술이 보통의 삶을 담아내는 것의 한계와 가능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민중의 재현들이 주목받고, 또 그를 통해 정당한 인식을 이끌어 내고, 때로는 혁명을 성공시키는 촉발제가 되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새로운 주인공이 기입되는 소위 ‘이름 없는 자’의 고통은 반복 지속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웨이스트 랜드>(Waste Land, 2010, 루시 워커 감독)는 분명 정치적인 영화다. 하지만 그 정치성은 영화가 담아내고 있는 예술적 실험에서 더욱 빛이 발한다. 영화는 소외된 자, 즉 몫을 부여받지 못한 자들을 재현하고 있기에 유의미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의미는, 영화의 재현 주제(subject of representation), 즉 남들이 밑바닥이라고 부르는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의 삶과 사회의 인식을 바꿔나가는 주인공들이 오늘날의 거대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목적 적합성에 의한 가치 체계를 뒤엎을 수 있는 변화 가능성을 몸소 매개하는 역사적 주체라는 데에 있다. 이러한 주장을 위해 이글은 <웨이스트 랜드>가 불러일으키는 카타도어들 삶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논란을, 동일성의 사회학이 지닌 한계로 지적한다. 허구적 동일성에 속박된 분류체계를 벗어나, 우리는 영화와 작가 무니스가 표면화하는 쓰레기의 미학을 재발견하고, 우리를 둘러싼 가시적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의 핵심으로 인식할 수 있다. <웨이스트 랜드>는 수많은 다큐멘터리들이 그러하듯,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민중에 대한 재현이며, 또한 그들만이, 설사 지배 이데올로기와 거대 구조를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둘러싼 가시적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되새기는 담지자(膽智者)라는 것을 증명한다.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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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태평양전쟁 이후, 각각 해방과 패전을 맞이해 연합군에 의한 점령통치에 들어간 한국과 일본에서는 ‘영어’가 새로운 공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국과 일본의 문학작품에서도 낯선 언어인 ‘영어’에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일상에서의 영어의 위상과 미국의 영향력을 그린 작품들이 등장한다. 한국작가 염상섭의 「양과자갑」(1948)이나 『효풍』(1948), 일본작가 고지마 노부오(小島信夫)의 「아메리칸 스쿨(アメリカン·スク一ル)」(1954)은 모두 해방/패전 직후의 영어를 주요 소재로 삼고 있고, 영어 선생님이나 영문학 강사 등 영어와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을 등장시켜 새로운 권력언어로 부상한 영어에 대한 지식인들의 미묘한 태도와 복잡한 심경을 그리고 있다. 이 논문은 전후의 일본과 한국에서 영어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사회풍속도를 비교하고 그것이 양국의 문학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고찰하고자 하였다. 특히 양국의 작품에는 영어 선생님임에도 불구하고 회화나 통역 등 특정한 경우에 한해 영어 사용을 완강히 거부하는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들의 영어거부의 내면에는 제국 혹은 식민지라는 양국의 서로 다른 과거의 체험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아메리칸 스쿨」의 경우, ‘일본어는 일본인의 혈액’이라는 국어관을 신봉하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데, 언어와 정신의 직접적 관련성을 주장하는 이러한 국어관은, 일찍이 일본이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식민지에서 행했던 <국어교육=일본어교육>의 논리이기도 했다. 과거의 일본이 식민지에 적용시켰던 동화정책의 논리가 이번에는 영어와 미국에 대한 불안감으로서 ‘피점령 일본’에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있는 것이다.

비교문학에서 본 독일 문헌학의 현재적 의미- 아우어바흐와 슈피처를 중심으로

이경진 ( Kyoung Jin Lee )
한국비교문학회|비교문학  64권 0호, 2014 pp. 111-132 ( 총 22 pages)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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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비교문학과 세계문학론의 관점에서 독일 문헌학이 어떤 현재적 의미를 담지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비교문학의 대표적인 건립자로 거론되는 에리히 아우어바흐와 레오 슈피처의 공적을 조명한다. 독일 문헌학은 종종 서양의 비교문학, 특히 미국의 비교문학의 기원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최근에 독일 문헌학은 세계문학과 탈식민주의, ‘문화 연구’를 지향하는 현 비교문학의 관점에서 보기에 지나치게 정전중심적이고, 유럽중심적인 학문이 아닌가 의심받고 있다. 예컨대 프랑코 모레티는 세계문학 내지는 비교문학의 중점이 ‘근거리 읽기’에서 ‘원거리 읽기’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문헌학의 정전중심적인 ‘근거리 읽기’ 방법론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식민주의의 정립자 중의 한 사람인 에드워드 사이드 같이 문헌학을 변호하는 입장들도 있다. 사이드는 아우어바흐가 유럽중심적인 시각을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를 그가 겪었던 망명과 고향 상실의 경험에서 찾고 있다. ‘집으로부터의 거리’가 지식인에게 필수적인 외부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교문학의 건립자인 아우어바흐와 슈피처 모두 유럽이 아닌 곳에서 망명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서구 비교문학이 망명과 비유럽에서 기원했다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한편, 에밀리 앱터는 비교문학이 태어난 장소라 할 수 있는 이스탄불이 외부나 변두리가 아니라 오히려 대단히 국제적이고 세계시민적인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면서 ‘외부자’로 남았던 아우어바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문화 교류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슈피처’야말로 세계문학적인 비교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시사한다고 본다. 사이드는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적인 태도가 바로 문헌학적 태도였다고 주장하면서 문헌학과 보수적인 민족주의 및 유럽중심주의와의 연계를 인정하면서도 20세기 초 문헌학에서 보편적이면서도 문화상대주의적인 ‘다른’ 전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아우어바흐와 슈피처는 모두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고 중시하는 민족주의적 전통에 바탕을 둔 세계시민주의적인 비교문학을 구상하였다. 말년의 아우어바흐는 자신의 시대를 ‘문헌학자들의 적기’로 선언하면서 세계문헌학을 제창한다. 그는 세계문헌학의 고향이 더 이상 민족이 아니라 지구이자 세계라고 주장함으로써 인문주의적이면서 세속적 비평의 이념을 정립한다. 슈피처 역시 ‘먼 것에 대한 사랑’을 문헌학자의 모토로 설정함으로써 문헌학에 내재한 비교문학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그는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자문화에 대한 거리 두기, 타문화와의 내적이고 열렬한 씨름 없이는 문헌학이 진정한 문헌학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헌학적 행위의 기초는 바로 말에 대한 사랑이며, 그것은 타자의 텍스트의 살갗에 접촉하는 경험이다. 세계문학의 거시적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비교문학 연구자들이 힘들고 더딘 ‘근거리 읽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모레티의 주장은 비교문학의 목적이 담지하는 중요한 윤리성을 놓칠 수 있다. 즉 타자의 언어에 밀착하여 독해하는 경험은 그 타자의 세계관과 상상력을 배우는 중요한 경험이며 세계화 시대에 이 경험은 더욱 절실하게 요청된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박은 문헌학의 근거리 읽기의 장점은 계승하되, 이 근거리 읽기의 대상을 서구 정전이 아니라 세계문학계에서 주변화된 언어와 문학들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텍스트-언어에 묶인 인문주의’의 유산은 앞으로의 비교문학에서 반드시 계승되어야 하는 문헌학의 유산이라 하겠다.

네그리튀드 운동과 『정당방어』

이석구 ( Suk Koo Rhee )
한국비교문학회|비교문학  64권 0호, 2014 pp. 133-151 ( 총 19 pages)
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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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튀드에 관한 케스틀룻의 선구적인 저서, 『프랑스어 사용 흑인 작가들』을 좇아 대부분의 기성 연구자들은 이 운동이 소위 삼위일체격인 인물들, 즉 상고르, 세제르, 그리고 다마스에 의해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세 인물들이 흑인 문예잡지인 『흑인학생』을 출간함으로써 네그리튀드 운동에 있어 중요한 좌표를 설정하였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기성의 계보론은 네그리튀드의 “어머니들”, 즉 나르달 자매와 쉬잔느 세제르를 제외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 외에도 이 네그리튀드 운동의 계보에서는 『흑인세상 리뷰』와 『정당방어』 등이 빠져있다. 이 흑인 문예잡지들은 상고르와 그의 공동 창간인이 발행한 『흑인학생』보다도 각각 4년 그리고 3년 반 먼저 출판되었다. 이 연구는 『정당방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해 이 잡지가 네그리튀드 운동 혹은 흑인의식운동의 최초 기관지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이 연구는 문화운동으로서 이 잡지의 성격을 드러내는데, 이러한 논거는 케스틀룻과 훗날의 연구자들이 이 잡지를 순전히 정치적인, 즉 계급적인 선전으로만 격하시킨 것과 대조를 이룬다.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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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문학만큼 한국문학사 속에서 광범위하고도 열렬하게 논의된 작가는 드물 것이다. 기존의 이상 연구는 적어도 두 가지 관점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수수께끼같은 이상 텍스트의 ‘참된 의미’는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는 영역을 조명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다. 둘째, 그 결과로 이상 텍스트는 전달의 기능으로 환원되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사유나 의미를 전달하고나 재현하는 한갓 도구로 간주된다. 본고는 발터 벤야민 비평이론 체계적인 출발점을 구성하는 그의 베른대학교 박사논문 『독일 낭만주의 예술비평의 개념』(1919년 완성, 1920년 출간)에서 집중적으로 논구된 초기 낭만주의의 자기반영이론에 의거하여, 기존의 이상 연구 방법론상의 암묵적인 전제를 문제 삼고 이상 텍스트를 벤야민 문예비평의 관점에 의거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문학의 언어를 언어 외적 의미나 사상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한갓 수단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과 내재적으로 관련하는 자기반영적 텍스트로 파악하는 자기반영이론의 근본 전제 하에서 출발하여, 본고는 1934년 발표된 이상의 문제적 텍스트 「오감도 시 제1호」를 분석한다. 이때, 텍스트와 비평, 언어의 전달기능과 표현, 텍스트의 자기실현과 주석은 분리 불가능한 상호 연관관계를 형성하면서 독자와 텍스트 사이를 매개하고 또한 이에 의해 매개되는 상호침투의 무한한 관계망 자체가 절대성 그 자체라는 것이 드러난다.
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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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문학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으로 여겨지던 ‘공포’의 요소는 신환상성문학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는 기존의 환상문학이 현실을 이성의 견고한 축조물로 보고 자연/ 초자연적 질서의 충돌에 의해 그와 같은 실증주의적 현실관을 전복하려 했던 데 반해, 신환상성문학에서는 현실이란 무엇인지 알 수 없거나 혹은 하나의 절대적인 현실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가지적, 다원적 세계관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환상성문학에서는 자연/ 초자연적 질서의 충돌이 아니라 ‘공존’이 전제되는데 이는 현실세계에서 자연/ 초자연을 가르는 이분법적 구도 자체가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특성만으로는 신환상성문학을 정의할 수 없다. 마술적 사실주의나 아메리카의 경이로운 현실과 같은 인접장르들도 마찬가지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환상성문학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이 문학의 서사적 특성과 궁극적인 인식론적 세계관을 보다 정교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환상성이론을 정립한 하이메 알라스라키는 장르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메타포’를 꼽는다. 하지만 신환상성의 메타포는 유와 종과 같은 세계에 대한 이성적 분류를 전제한 아리스토텔레스적 메타포가 아닌 ‘모호함’과 ‘정의할 수 없음’ 그 자체를 하나의 정의로 보는 니체적 메타포이다. 이에 근거하여 알라스라키는 신환상성문학에는 전통적인 환상문학에서 보이던 3가지 요소, 즉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설명의 노력’과 ‘초자연적 현상의 의미’, 그리고 ‘공포의 요소’가 부재하다고 말한다. 본고는 이와 같은 알라스라키의 신환상성이론에 입각하여 두 편의 한국문학작품 - 장정일의 『펠리컨』과 오수연의 『벌레』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이 두 편의 작품이 외형적으로 신환상성의 일부 구성요건들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르가 지향하는 인식론적 지향점과는 거리가 존재함을 확인하였다. ‘펠리컨’이나 ‘벌레’가 의미하는 메타포가 ‘모호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것이 아니라 기존의 이분법적, 이성중심적 세계관에 기저하여 의미의 전이를 추구한 아리스토텔레스적 메타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무한과 최소의 의미들- 루소와 『로빈슨 크루소』를 중심으로

정익순 ( Chung Ik Soon )
한국비교문학회|비교문학  64권 0호, 2014 pp. 222-242 ( 총 21 pages)
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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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가 독자에게 가능 세계를 사유하게 하듯이 루소가 고찰한 자연 상태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루소는 야만적인 자연 상태에 살고 있는 인간을 통해 자연 상태의 인간을 해방시킨다. 로빈슨의 신화가 경제적인 성공의 가치에서 생성되었고 상상력이라는 생명력을 갖는 것은 로빈슨의 내면적 감성과 정신이 변형되고 재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신화의 대상이나 신화 자체가 아니라 가장 작은 신화의 형태와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을 무한이란 수학적 용어와 연관시키면서 출발한다. 『로빈슨 크루소』의 신화소를 통해 최소의 주제를 원시사회와 자연의 개념 속으로 끌어들였고 18세기의 인류학적 관점을 통해 원시인의 주관적 정서를 찾음으로써 로빈슨을 초자연적인 질서 속으로 인도하고 그의 행동을 도덕과 문명의 지식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 상태의 인간을 도덕적 타당성으로 거론하기보다는 원시 상태의 느낌과 반응으로 인간의 본질을 보자는 것이다. 루소가 사유하는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원을 이해하는 방식이 순수해야 한다. 결코 비약하지 않는 자연 속에 누군가 존재한다면 규칙적인 도형처럼 순수한 논리적 사고방식을 찾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자연사 속에 들어가 있는 로빈슨의 행동을 모든 기원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로 현존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에 의해 만들어진 순수사건의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박인환 시에 나타난 "청각적 이미지" 연구- "소리풍경soundscape"을 중심으로

최라영 ( Ra Young Choi )
한국비교문학회|비교문학  64권 0호, 2014 pp. 243-279 ( 총 37 pages)
7,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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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역사와 소리관련용어의 조명은 최근, 건축, 음향, 음악 등의 분야에서 현실의 실제소리와 소리환경과 관련한 연구가 이루어져왔다. 이 관점에서 ‘소리풍경soundscape’은 주로 연구의 한 분야로서의 ‘소리환경sound environment’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문학작품에서 형상화된 ‘소리풍경’은 현실의 소리들이 인물을 자극하고 자각시키거나 혹은 그것이 인물에게 내면화되는 방식이 유의성을 지닌다. ‘소리풍경’이 “청각적 측면에서의 ‘풍경landscape’의 등가물the sonic equivalent of landscape이라고 할 때, ‘풍경’이 단일한 한 시각에서 보여질 수 있는 장면반경an scenery that can be seen in a single view을 뜻한다면, 문학작품에서의 ‘소리풍경’은 청진자들에 의해 지각되고 이해되는 의식, 무의식까지를 포괄할 수 있는 소리환경으로 확장시켜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소리sound’와 관련한 관점에서 박인환의 시편들에서 유의성을 지니는 ‘청각적 이미지’들을 고찰해 보면서 그의 삶과 작품에서 ‘문명’과 ‘전쟁’을 중심으로 그의 시적 상상력과 사유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박인환 시에서는, 문명이 인류에게 가져올 무정형적인 힘의 향방 혹은 문명의 이기가 초래할 것에 관한 불안의식이 ‘고막을 깨뜨릴 듯이 달려오는’ ‘전파’라는 소리풍경으로 형상화되었다. 특징적인 측면은 그는 현재의 일상 속에서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끊임없이 떠올리면서 현세계가 처한 상황에 관하여 인식하려고 하는 점이다. 이와 함께 또하나의 측면은 그가 속한 당대 현실 속에 내재하는 모순과 부조리한 지점을 들추어내어보는 점이다. 이것은 시인과 같은 지식인들, 혹은 당대의 특혜받은 사람들과는 달리, ‘죽음’의 전쟁터로 향하는 ‘농부의 아들들’이 부르는 ‘군대의 합창’을 들으며 자괴감을 느끼는 장면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의 시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폭음’은 전쟁의 특성을 나타내는 ‘소리표지soundmark’이자 전쟁터의 ‘주조음keynote sound’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의 의식, 무의식상에서도 변함없이 들리는 ‘내귀의 폭풍’이라는 특징적 ‘소리풍경’으로 나타난다. 그의 시에는 전쟁의 폭음으로 인해 불면하는 속에서 ‘파멸한다는 것’과 ‘생에 한없는 애착을 갖는 것’, 즉 죽음에의 충동과 생에의 충동이라는 극한적 감정이 교차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응시가 드러나 있다. 박인환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를 통하여 미래의 세계를 비추어보며 또 현상세계와 저 너머의 것의 틈을 비추어보며 문명세계의 표면과 이면을 들추어보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분열적 정신’의 상태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그의 시작방식은 ‘의식의 흐름’의 기법과 유사한데 그것은 그가 듣고 보고 느끼는 통합되지 않는 모순적 국면들에 대한 시선들을 고스란히 담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목마의 방울소리’는 작가가 전쟁으로 고통받고 상처입은 동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잠시의 내적 평안을 갖도록 하는 하나의 ‘소리풍경’이다. 그 소리에는 꿈을 꿀 수조차 없는 절박한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 그럼에도 한 줌의 꿈과 환상을 갖도록 만드는 힘을 지닌다. 이러한 ‘공명’이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으며 그 공명을 내는 방식이란 시인 박인환에게는 바로 ‘시’를 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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