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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한반도에의 蘇軾(東坡,1036~1101) 시문집 전래과정을 검증함과 동시에, 그의 시문이 高麗 문단에서 유행하게 된 요인을 구명한 것이다. 특히 고려문인이 소식의 존재를 인식했던 시기와 그 과정, 그리고 그의 어느 시문집이 어떤 과정을 거쳐 고려조에 전래했으며, 또한 언제쯤부터 널리 유포되어 알려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역사문헌자료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고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문단에의 소식 초기 수용 양상을 규명했다. 지금까지의 선행 연구에서는 소식의 존재가 고려 문단에 알려지게 된 사실에 대하여, 원풍 3년(1080) 金富軾(1075~1151)의 부친 金覲이 북송에 가는 사절단에 참가하고, 귀국하여 갓 태어난 3남과 4남의 이름에 蘇軾·蘇轍 형제의 `軾`자와 `轍`자를 차용했다고 추정되어 왔다. 이러한 선행 연구에 대해서 필자는, 그보다 7년 전의 熙寧 6년(1073) 金良鑑 일행의 고려 사절단이 杭州 지역을 통과할 때, 당시 항주의 通判에 재직하고 있던 소식을 만난 역사 사실에 근거해, 소식의 존재는 김근이 북송에 출발하기 이전에 이미 고려 문단에 알려져 있었던 사실을 검증해 냈다. 또한 희녕 9년(1076) 崔思諒 일행의 사절단이 항주 지역을 통과할 때, 저잣거리에서 소식의 시문집을 구입해 가지고 돌아온 사실과 함께, 이 시문집이 항주에 있는 어느 서점이 영리를 목적으로, 소식이 항주 통판 재임 중에 지은 시문을 임의로 편찬하여 간행한 『錢塘集』이었던 사실도 밝혀냈다. 紹聖 원년(1094)부터 북송에서 新法黨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자, 舊法黨의 중심인물이었던 소식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지고, 심지어는 그의 시문집이나 그 판목까지 소각되기에 이르렀지만, 구법당 정권이 부활하는 建炎 원년(1127) 이후가 되면, 소식은 다시 송나라에서 최고의 시인으로서 평가되었다. 당시 고려조는 북송의 신법당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양국간의 정치적인 관계가 고려 문인들의 소식 수용 양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김부식이 宣和 7년(1125)에 지은 大覺國師 義天의 묘지명에서, 소식의 시를 은밀히 인용하면서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던 사실, 그리고 權適이 建炎 원년(1127) 이후에 지은 시에서, 소식 시문에의 탄압 사건을 거론하면서 이전 은혜를 입었던 북송의 徽宗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사실을 그러한 예로써 제시했다. 당시 고려 지식인들은 소식 시문을 계속 은밀하게 애독하면서도, 북송과의 외교관계 등을 고려하여 북송 말기까지는 그의 이름을 표면에 드러내어 찬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송 조정이 금나라에 패하여 남쪽으로 달아나게 되자, 소식의 시문집 등을 소각한 북송의 휘종 및 신법당 정권을 성토하는 등, 중국의 정권 교체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서 고려 문단에서의 소식 문학의 수용은, 북송에서의 신법당과 구법당의 정권 교체 및 고려와 북송과의 외교관계의 변화에 의해서 크게 좌우되었던 사실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