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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bang Korean Classics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6-668x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6권 0호 (2008)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의 의식(意識)의 변천(變遷)에 관한 고찰(考察)

원주용 ( Ju Yong Won )
동방한문학회|동방한문학  36권 0호, 2008 pp. 7-34 ( 총 28 pages)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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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梅堂 李詹(1345~1405)이 생존했던 시기는 高麗에서 朝鮮建國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환기인 麗末鮮初로, 주지하듯이 종래의 불교를 배척하고 性理學을 도입하여 성리학의 정치이념에 따라 유교국가를 건설해 가는 思想的인 점에서나 歷史的인 측면에서 중요한 전환기이다. 왕조의 교체에 따른 이러한 역사적 전환기에 당시 지식인들은 자신의 出處에 대한 심각한 苦惱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말선초에 관한 연구는 일정정도 성과를 달성했다고 할 수 있으나, 대부분 고려왕조를 위해 절의를 지킨 사람이나 새왕조의 건설에 적극 참여하여 업적을 이룬 인물들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新興士大夫로서 왕조교체기에 자신의 出處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던 이들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이 글은 이들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雙梅堂의 작품을 통해 그 일면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雙梅堂은 14세기 말 정국이 혼란한 상황에서 이인임 등 집권파와 투쟁하기도 하고 신왕조에서는 예문관 대제학까지 역임했다. 쌍매당의 文에 나타난 의식은 儒者로서 義·孝·忠·直 등 儒家的 德目을 함양하였으나, 왕권의 쇠약과 臣權의 강화 등 당시의 時政에 대한 懷疑를 품게 됨과 동시에 여러 차례의 귀양으로 점차 자신의 신념에 대한 회의와 갈등을 일으켜, 처한 현실에 대응하여 살고자 하는 `隨遇而安`의 자세로 의식이 변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쌍매당의 변화된 의식에 대해 지금까지 부정적 시각으로 평가해 왔었다. 결론적인 측면에만 논점을 두어 쌍매당이 두 왕조를 섬긴 것을 두고 과연 "이중성을 지녔으며, 시대의 변화에 따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麗末에 벼슬했다가 개국한 조선에 벼슬한 이들을 모두 일괄적으로 이중성을 지닌 자로 치부해버려야 하는 것인가? 쌍매당의 이러한 일련의 변화된 과정을 통해 여말선초 혼란한 政局의 한 가운데를 살아가면서 신흥사대부로서 出處에 대해 얼마나 고뇌했어야 했는지 당시 지식인의 의식을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채수(蔡壽) 누정기(樓亭記) 연구(硏究)

안세현 ( Se Hyun Ahn )
동방한문학회|동방한문학  36권 0호, 2008 pp. 33-72 ( 총 40 pages)
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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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蔡壽(1449~1515)의 누정기를 조선전기 누정기 창작의 전통 내에서 검토하여 채수 누정기가 지닌 특징적인 면모, 특히 자연 인식의 태도와 서술 방식의 특징을 부각시키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먼저 채수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徐居正(1420~1488),成俔(1439~1504) 金宗直(1431~1492) 등의 누정기를 중심으로 조선전기 누정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자연 인식 태도와 서술 방식을 정리하였다. 자연 인식 태도는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산수 경물에 내재된 理法, 곧 도덕성을 궁구하고 이를 심성 수양의 계기로 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산수 경물을 정사나 민생과 연관시켜 善政 및 民利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들 누정기에 묘사되고 있는 산수 경물은 누정 주위에 실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성리학적 자연관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상당히 관념화된 상징물들이다. 이러한 가운데 채수의 누정기에 보이는 자연 인식의 태도는 성리학적이지 않으며 다분히 장자적이다. 채수에게는 자연물을 통해 理法을 발견하려는 의식도, 이를 도덕적 수양과 연결시키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으며, 玩物喪志에 대한 경계 없이 산수 경물의 奇觀을 感受하며 정신적 悅樂을 추구하였다. 또한 채수는 역사적 무상성에서 오는 비애를 지금-여기에서의 즐김을 통해 초극하려고 하거나 자연 경물이 특정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즐기는 자의 것이라는 자유의 정신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채수의 누정기에 그려지고 있는 자연물은 누정 주변에 실제하는 것이며 그 묘사 또한 상당히 구체적이다. 본고는 채수의 누정기와 여타 누정기를 지나치게 대립적인 구도에서 도식화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 이는 채수 누정기의 특이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간 한문 산문의 연구에 있어서 조선후기의 산문에 편중된 감이 없지 않았는데, 앞으로 조선전기 산문에 대한 면밀한 고찰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본고가 이에 조그마한 보탬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남사록』에 나타난 청음(淸陰) 금상헌(金尙憲)의 작가의식(作家意識)

황만기 ( Man Ki Hwang )
동방한문학회|동방한문학  36권 0호, 2008 pp. 73-104 ( 총 32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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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남사록에 기록된 몇 가지 특징점을 토대로 김상헌의 작가의식을 도출 하고자 시도된 것이다. 김상헌은 1601년 32세의 나이로 제주도 안무어사로 차출되었다. 제주 토착민이었던 길운절이 모반을 꾀하려다가 스스로 자수를 해왔기에 이에 대한 진상조사와 함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주도민을 위무하고 군왕의 덕음이 이곳까지 미치고 있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도성을 떠나 복명할 때까지의 6개월간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 남사록이다. 본고에서는 남사록에 기록된 제주도의 세 가지 특징점을 중점적으로 다루어 이들 기록에서 나타난 김상헌의 작가의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男兒選好의 시대적 통념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女兒選好의 기이한 현상을 기록하여 제주도에서 자행되는 공납폐단의 현실을 고발하려는 社會意識이 깔려 있다. 둘째, 백두산을 제외한 우리나라 최고봉인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에 대한 사실적 기록을 통해 誇張이나 浪漫 따위는 전혀 용납되지 않는 김상헌의 實錄意識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셋째, 제주도의 자랑거리인 모흥혈에 대한 神異性을 기록함으로 인해 제주도는 한낱 섬나라가 아니라,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수한 민족임을 자각케 하는 김상헌의 歷史意識을 살펴볼 수 있다. 이들 기록들을 통해서 남사록은 단순한 기행록의 성격을 넘어선 김상헌의 철저한 작가의식의 소산물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정약용(丁若鏞)의 신형묘합적(神形妙合的) 예술론(藝術論)

리원형 ( Won Hyung Lee )
동방한문학회|동방한문학  36권 0호, 2008 pp. 105-129 ( 총 25 pages)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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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주된 목적은 丁若鏞의 藝術論이 `神形妙合的 특성`을 갖는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존의 연구는 정약용의 書畵를 두고 `寫實主義`로 규정하거나, `精神主義`로 규정한다. 물론 정약용의 예술은 사실성·현실성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사실주의`로도, 形보다 神을 우위에 둔다는 점에서 `정신주의`로도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들은 정약용이 정신[神]의 가치를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형상[形]과의 묘합적 관계로 파악한다는 점에 비추어 봤을 때 균형을 잃은 시각으로 보인다. 필자는 정약용의 예술이 궁극적으로는 `정신`을 드러내려는 것이었고, 그것을 사실적·현실적 `형식`을 통해 발현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神形妙合的 예술론`으로 규정한다. 정약용의 신형묘합적 예술론은 첫째 조선 후기 문인들의 예술적 인식에 대한 지평을 확장시켜준다는 점에서, 둘째 예술이 단순히 형상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거나 또는 정신성만을 강조하는 수단으로만 인식될 수 없다는 점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예술에 대한 담론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금선신(金善臣)의 생애(生涯)와 그의 저작(著作)에 관한 일고(一考)

신로사 ( Ro Sa Shin )
동방한문학회|동방한문학  36권 0호, 2008 pp. 129-155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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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후기 문인 김선신의 생애와 그의 작품에 관한 고찰이다. 김선신은 해외 경험이 드물었던 19세기 초 중국과 일본을 모두 경험하였고, 나아가 양국의 문인들과 학문적, 문학적으로 교류를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김선신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1811년 통신사를 연구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김선신의 생애와 저작을 고찰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김선신은 1805년 瀋陽에 다녀왔는데, 연행을 다녀온 형 김선민과 벗 이의성을 통해 유득공으로부터 중국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1811년에는 文才를 인정받아 통신사의 正使 書記가 되었다. 대마도에 가서 저명한 일본 학자들과 만나 필담을 나누고 序文을 써주는 등 교류를 하였다. 古賀精里와는 같은 주자학자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고 宋學·漢學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1822년에는 金魯敬의 군관으로 그의 아들이자 벗인 金命喜와 함께 燕行에 참가하여, 이들과 함께 吳崇梁·曹江·葉志詵·李璋煜 등 중국 문인들과 교분을 맺었다. 김선신은 연행이후에도 이들과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김선신이 이들 중국문인들과 漢學·宋學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는 점이 주목할만 하다. 김선신의 경우를 통해서 한·중·일 삼국 문인들의 知的·學問的 교류의 일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국내 문인들 중에서는 김정희 김명희 형제 그리고 김려와 김선 형제와 매우 절친했다. 이외에 신재식, 이명오, 조면호 등의 인물과도 교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정희를 일본에 소개하거나 김정희에게 일본에 관한 정보를 전하는 등 김선신이 당대의 문인들과 일정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김선신이 남긴 작품의 양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통해서 1811년 통신사와 당시 문인 교류를 알 수 있다. 『청산도유록』은 1811년 통신사를 연구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博對馬島賦」는 문학적으로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조선 문인들 뿐만 아니라, 중국 문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읽혔졌다. 김선신에 대한 연구는 조선문인들 사이의 교류뿐만 아니라, 그 당시 조선과 일본, 조선과 중국 문인들 사이의 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전(傳)"에 대한 문예적(文藝的) 고찰(考察)

나종선 ( Jong Seon Na )
동방한문학회|동방한문학  36권 0호, 2008 pp. 155-181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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艮齋(1841~1922)는 평생 학문 연구와 강학에 몰두하였다. 그는 조선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던 성리학적 이념과 가치, 그리고 이에 基盤한 질서체제에 대해 강한 신념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구한말은 대내외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는데, 간재는 당대의 사회문제를 극복하고자 위정척사의 이념을 견지하였다. 간재는 `傳`을 14편을 지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윤리의식을 유교의 사회사상에 입각하여 교화하고자 하는 나름의 대응책을 제시한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한 방법은 윤리도덕의 고양이었다. 또한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은 윤리의 정립인 것이다. 간재가 난세를 당하여 `自靖`을 택한 명분을 후진 교육에 둔 것도 바로 이러한 그의 윤리 철학에 근거한 것이다. 교육은 인간의 지식을 증진시키고, 도덕을 배양 시킬 수 있으며, 실제로 일생동안 함께 하여야 할 동반자이다. 간재는 교육으로 인간의 기질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심성을 고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병폐를 구할 수 있는 윤리를 세울 수 있다고 한다. 간재는 세상을 교화하는 주체가 되는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修己와 治人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 진정한 선비만이 교화를 담당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간재 자신이 그 역할을 自任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의도로 하여 `孝`와 `烈`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여 윤리를 세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간재의 `烈`에 대한 입전의도는 여성의 `重義精神`을 표현하고 宣揚하고자 하였다. 孝에 대하여는 세상이 바뀌어도 결코 변해서는 안 될 가치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효도라고 하였다. 간재는 `傳`을 지어 士族이나 平賤民, 吏族을 막론하고 유학적 忠·孝·烈의 윤리사상과 이념에 符合되는 행동을 한 인물이 있으면 立傳을 통해 그것을 표창하고, 人民을 敎化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의도적으로 그러한 價値規範을 인민들에게 鼓吹, 勸奬하려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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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사는 임난 후 통신사행으로 왕래하면서 본 富士山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사행 자체가 조선의 문사 자신이 전해들은 부사산 정보의 진위 여부를 직접 확인해보는 중요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통신사행의 사행길이 거의 비슷하여 掛川 주변에서 먼발치로 부사산을 대면하고는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러한 상황이 오랜 기간 반복되자, 조선의 문사는 부사산을 통해 일본을 이해하는 인식 체계를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을 이해하는 중심에 부사산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조선 문사에게 부사산은 크게 仙界的 面貌와 頂上의 白雪이라는 양면에서 인식되었는데, 사행이 누적됨에 따라 그 인식의 양상도 변모하였다. 앞의 것이 盲信에서 懷疑로, 뒤의 것이 疑訝에서 確信으로 변해갔으니 상반되게 두 가지는 拮抗 관계에 있었다. 부사산의 선계적 면모를 형성하는 데에는 扶桑이라는 지역적 특색이 유효하게 작용하였다. 가려고 하여도 갈 수 없다는 점에서 부상은 선계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맹신으로 쉬이 경도되었다. 그러한 맹신이 꽤 오랜 동안 이어지다가 幕府에서 통신사행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 하였을 때에 잠시 부정되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으로의 통신사행이 잇따르자 부사산을 선계로 맹신하던 인식이 점차 회의로 변해가게 되었다. 갈 수 없었기에 전해들은 것만을 믿어 이루어진 부사산의 선계적 면모에 대한 맹신은 조선 문사가 통신사행으로 빈번하게 방문하여 직접 확인을 거치게 됨에 따라 회의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통신사행의 내적 요인 외에도 당대를 주도했던 실학적 분위기가 조선 문사로 하여금 부사산의 선계적 면모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외면하지 못하게 하였다. 흰빛으로 선계인 백옥경을 연상시키면서도 그것과 분명한 선을 그은 頂上의 白雪을, 손과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었던 조선의 문사는 한편으로는 용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아해 하였다. 부사산의 눈을 표면적으로 용인하면서도 이면적으로 의아해 하는 기조는 4차~11차 통신사행까지 유지되는데, 9차 통신사행의 申維翰에 이르러 그 전환점을 맞게 된다. 높은 곳이면 기온이 낮아져 눈이 쌓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상식에 기초한 판단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상식적 판단에 의해 부사산 정상의 눈이 조선 문사에게 확신되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부사산의 눈을 확신하는 조선 문사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10차와 11차 통신사행에 이르러서도 부사산 정상의 눈이 실증되기는 하였으나 의아함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였다. 의혹의 해소를 저해한 것은 아마도 부사산이 남쪽에 위치하여 무더위에 눈이 남아 있을 수 없다는 단순한 상식 때문이었던 듯하다. 부사산의 눈을 의아해 한 조선의 문사가 높은 곳에 눈이 쌓인다는 상식을 모를 리 없었을 진대,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는 눈이 모두 녹는다는 상식에만 집착하여 산이 높으면 남쪽이라도 무더위를 견뎌낸 눈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의 문사가 부사산의 선계적 면모에 대하여 맹신에서 회의로 옮겨 간 것과 정상의 백설을 두고 의아에서 확신으로 변해간 것은 일본을 제대로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태도가 성숙되어 갔음을, 부사산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광한루기(廣寒樓記)」평비(評批) 분석(1) -소엄주인(小廣主人)의 서문(序文)과 독법(讀法)-

정길수 ( Kil Soo Chung )
동방한문학회|동방한문학  36권 0호, 2008 pp. 213-245 ( 총 33 pages)
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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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寒樓記」는 「춘향가」 혹은 「춘향전」을 한문으로 改作한 작품이다. 19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우리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비평 방식을 취하고 있어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본고에서는 「광한루기」의 주요 비평가인 小廣主人의 評批 중 序文과 讀法을 분석하였다. 小廣主人의 서문을 분석한 결과 小廣主人의 중국 소설이나 희곡에 대한, 특히 『西廂記』에 대한 이해 수준은 대단히 낮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小廣主人은 몇 가지 측면에서 「광한루기」와 『西廂記』를 비교하며 「광한루기」가 우월한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보았지만, 기실 『西廂記』를 읽은 것이 아니라 희곡 『西廂記』의 모태가 되는 唐代의 傳奇小說 「鶯鶯傳」을 읽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바, 『西廂記』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고, 따라서 두 작품의 정밀하고 심층적인 비교를 할 수 없었다. 결국 小廣主人은 『西廂記』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근거하여 `윤리적 잣대`에 의해 두 작품의 주인공을 비교하고 우열을 매김으로써 그 자신 비판했던 `冬烘先生`과 유사한 가치 판단 태도를 보여주고 말았다. 한편 小廣主人의 讀法 중 주요 조목들은 『西廂記』에 붙인 金聖嘆의 序文과 讀法의 모방 내지는 단순한 변주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小廣主人 讀法의 제1조목은 金聖嘆의 서문에 깃들어 있는 문제의식을 탈각시킨 채 주요 어구만 끌어온 것으로 피상적인 모방과 변주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따름이었다. 제3조목 이하 冬烘先生에 관한 언급은 金聖嘆의 讀法 및 回評 내용의 단순 재생산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적어도 서문과 讀法에 관한 한 小廣主人의 評批는 『西廂記』와 金聖嘆의 『西廂記』 評批 전체에 대한 이해 없이 『西廂記』의 서문과 讀法 등 金聖嘆의 일부 評批만을 독서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피상적인 수준의 비평으로 판단된다.

명대(明代) "신화(新話)"류(類) 소설의 소설사적 의미

이시찬 ( Si Chan Lee )
동방한문학회|동방한문학  36권 0호, 2008 pp. 245-272 ( 총 28 pages)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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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전등신화』를 비롯하여 명대에 유행한 `新話`類 소설들의 소설사적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을 주요한 내용으로 삼고 있다. `新話`類 소설은 대체로 전기소설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백화소설의 발전과는 분명 다른 궤적을 밟고 있다. 즉 소위 문언소설을 주로 향유하는 계층인 사대부 문인들의 글쓰기 방식과 문학작품 속에 구현된 주제의식은 통속적인 것을 지향하는 백화소설과 비교해 보았을 때, 해당 시기의 전반적인 사회상을 표현하기보다는 사대부 문인들의 소일거리가 될 만한 기이한 내용들이 주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대의 `新話`類 소설들은 이러한 주제의식을 탈피하여 당시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元代의 「嬌紅記」가 작품을 통해 시대의 아픈 단면을 보여주려는 시도가 있었다. 瞿佑를 비롯한 일련의 명대 소설가들은 개별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다수의 창작물을 책으로 엮어 `新話`類 소설의 전통을 계승해 나갔다. 또한 이러한 소설쓰기 방식은 조선의 소설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는데, 김시습의 깊은 철학적 사고와 더불어 『金鰲新話』에 구현된 사회비판적인 주제의식은 소설이 단순히 오락적인 기능을 뛰어 넘어 그 사회에 문제의식을 던지고 반향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성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唐宋 傳奇小說의 관심이 주로 `기이한 것을 전한다`라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명대에 본격적으로 유행한 `神話`類 소설들은 `기이함`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사회와 현실의 문제점을 함께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실로 크다고 하겠다.

소식문학초기수용양상고(蘇軾文學初期受容樣相考)

정선모 ( Sun Mo Jung )
동방한문학회|동방한문학  36권 0호, 2008 pp. 273-325 ( 총 53 pages)
1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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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한반도에의 蘇軾(東坡,1036~1101) 시문집 전래과정을 검증함과 동시에, 그의 시문이 高麗 문단에서 유행하게 된 요인을 구명한 것이다. 특히 고려문인이 소식의 존재를 인식했던 시기와 그 과정, 그리고 그의 어느 시문집이 어떤 과정을 거쳐 고려조에 전래했으며, 또한 언제쯤부터 널리 유포되어 알려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역사문헌자료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고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문단에의 소식 초기 수용 양상을 규명했다. 지금까지의 선행 연구에서는 소식의 존재가 고려 문단에 알려지게 된 사실에 대하여, 원풍 3년(1080) 金富軾(1075~1151)의 부친 金覲이 북송에 가는 사절단에 참가하고, 귀국하여 갓 태어난 3남과 4남의 이름에 蘇軾·蘇轍 형제의 `軾`자와 `轍`자를 차용했다고 추정되어 왔다. 이러한 선행 연구에 대해서 필자는, 그보다 7년 전의 熙寧 6년(1073) 金良鑑 일행의 고려 사절단이 杭州 지역을 통과할 때, 당시 항주의 通判에 재직하고 있던 소식을 만난 역사 사실에 근거해, 소식의 존재는 김근이 북송에 출발하기 이전에 이미 고려 문단에 알려져 있었던 사실을 검증해 냈다. 또한 희녕 9년(1076) 崔思諒 일행의 사절단이 항주 지역을 통과할 때, 저잣거리에서 소식의 시문집을 구입해 가지고 돌아온 사실과 함께, 이 시문집이 항주에 있는 어느 서점이 영리를 목적으로, 소식이 항주 통판 재임 중에 지은 시문을 임의로 편찬하여 간행한 『錢塘集』이었던 사실도 밝혀냈다. 紹聖 원년(1094)부터 북송에서 新法黨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자, 舊法黨의 중심인물이었던 소식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지고, 심지어는 그의 시문집이나 그 판목까지 소각되기에 이르렀지만, 구법당 정권이 부활하는 建炎 원년(1127) 이후가 되면, 소식은 다시 송나라에서 최고의 시인으로서 평가되었다. 당시 고려조는 북송의 신법당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양국간의 정치적인 관계가 고려 문인들의 소식 수용 양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김부식이 宣和 7년(1125)에 지은 大覺國師 義天의 묘지명에서, 소식의 시를 은밀히 인용하면서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던 사실, 그리고 權適이 建炎 원년(1127) 이후에 지은 시에서, 소식 시문에의 탄압 사건을 거론하면서 이전 은혜를 입었던 북송의 徽宗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사실을 그러한 예로써 제시했다. 당시 고려 지식인들은 소식 시문을 계속 은밀하게 애독하면서도, 북송과의 외교관계 등을 고려하여 북송 말기까지는 그의 이름을 표면에 드러내어 찬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송 조정이 금나라에 패하여 남쪽으로 달아나게 되자, 소식의 시문집 등을 소각한 북송의 휘종 및 신법당 정권을 성토하는 등, 중국의 정권 교체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서 고려 문단에서의 소식 문학의 수용은, 북송에서의 신법당과 구법당의 정권 교체 및 고려와 북송과의 외교관계의 변화에 의해서 크게 좌우되었던 사실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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