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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제 : 어문학분야 > 기타제어문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598-1452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1권 0호 (2011)

문학과 문화 : 경기체가(景幾體歌)의 불교문화 수용양상 연구

조평환 ( Pyeong Hwan Cho )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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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 초기에 불교문화를 수용하여 제작 가창한 <彌陀讚> <安養讚> <彌陀經讚> <西方歌> <騎牛牧童歌> 등 다섯 편의 경기체가에 대하여 고찰한 것이다. 연구의 절차는 먼저 護佛弘法의 방편의 일환으로 경기체가를 지은 작가들에 대하여 알아보고, 다음으로 경기체가에 나타난 불교문화의 수용 양상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미타찬> <안양찬> <미타경찬>등 3편의 경기체가를 창작한 涵虛己和, <서방가>를 창작한 義相和尙(가칭), <기우목동가>를 창작한 末繼智은등 세 분은, 억불숭유 정책이 강행된 조선 초기에 활약했던 승려들로 불교홍보 내지 수호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기에 척불정책이 강행된 상황 속에서도 불교 포교를 위한 경기체가를 창작하여 불교수호에 앞장섰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涵虛己和는 護佛論인 『顯正論)』을 통해서 불교의 우수성을 융통성 있게 드러냄과 동시에 儒彿會通사상까지 거론하여, 鄭道傳과는 격이 다른 방법으로 불교의 本旨를 수호하는데 앞장섰던 분으로서, 한국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涵虛己和가 창작한 <미타찬> <안양찬> <미타경찬>과 義相和尙(가칭)이 제작 가창한 <서방가> 등 네 편은 淨土信仰의 主佛인 아미타불과 극락세계의 장엄 수승함을 찬양한 것이고, 末繼智은이 창작한 <기우목동가> 1편은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은 見性涅槃내지 寂滅解脫의 경지를 시화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타찬> <안양찬> <미타경찬> <기우목동가> 등 4편은 변격 형경기체가이고, <서방가> 1편만 정격 형 경기체가인 것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발달사적 측면에서 볼 때 <서방가>는 경기체가의 완성기에 창작된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義相和尙이 제작 가창한 <서방가>의 창작연대가 涵虛己和의 <미타찬> <안양찬> <미타경찬>등과 末繼智은의 <기우목동가>보다 앞서거나 또는 동시대일 것으로 간주하였다.

문학과 문화 : 박세당만시(朴世堂挽詩)의 흐름과 표현 양상

주영아 ( Young Ah Joo )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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挽詩는 죽음을 애도하는 시다.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고인의 사회적 명망을 추앙하고 죽음을 슬퍼하는 시다. 만시는 조선시대에 개인 문집이 많이 성행하면서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을 중심으로 작품의 수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만시의 무분별한 성행은 실제 고인의 행적보다 고인의 일생을 더 높게 과장하거나 추앙하는 병폐를 보이기도 하였다. 본고는 17세기 유학자 박세당이 지은 만시를 중심으로 그 표현 양상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의 만시는 『西溪集』에 104명을 대상으로 지은 작품으로 조선후기 만시에서 보여주는 허위적이고 과장된 것에서 벗어나 가장 원초적인 죽음에 대하여 읊었으며, 많은 만시에서 보이는 상투성에서 벗어나고 있다. 박세당의 만시 104제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표현 양상이 달라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에는 죽음에 대한 인식의 강도가 자신과는 거리가 먼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표현되고 있으며, 사전적이고 일상적인 의미이외의 어떤 것도 표현하려 하지 않았다. 50대 이후에 쓰여진 만시는 고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미련이 드러났으며 살아남은 자의 애통함으로 확장되어 나타났다. 60대 이후 지어진 만시는 연이은 두 아들의 죽음으로 죽은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살아남은 사람의 비통함을 표현하기도 하였고, 좀더 나아가 죽음에 대하여 초월적 시선을 보이기도 하였다. 박세당의 만시 연구를 통해 만시 표현의 다양성을 찾고자 하였다. 고식적이고 상투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는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전대에 나타났던 전형적인 만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만시의 내용이 다양해졌다. 특히 고인의 업적을 추앙하기보다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교감, 남겨진 자의 통한 등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일상과 진솔한 감정이 고스란히 표현되었다.
7,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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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 4월 함봉필에 의해 쓰인 창가 「京仁行歌」를 대상으로 작성되었다. 함봉필은 일제 강점기에 황해도 遂安郡城洞의 면장 신분으로 學生 및 다른 地域代表들과 함께 仁川에 도착하고 나서, 仁川의 近代的風景을 두루 살펴보고, 인천항에 입항해 있던 일본의 군함을 관람한다. 함봉필이 관람한 관함 행사는 4月17日부터 20日까지 총 4일 간 진행되었으며, 관람객은 총 4만 명이었다. 관함 후 함봉필은 경성의 경복궁에서 개최된 가금공진회에 참석하게된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가금의 품종과 그 특성에 대해 감탄하며, 농가마다 새로운 품종들이 널리 보급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표출했다. 가금공진회를 관람하고 나서 그는 바로 옆 창경궁에 설치된 動物園, 植物園, 博物館등을 견학하는데, 이는 근대 시기에 國民國家의 統合을 위해 國家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제도 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일제는 家禽共進會의 관람자들을 무료로 이들 ``三園``에 입장시켜 地方에서 올라온 鄕民들이 앞 다투어 日帝가 만들어낸 근대적 표상들을 직접 경험하게 유도하였다. 이상으로 「京仁行歌」를 통해 서술된 함봉필의 행적과 그의 시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일제 강점기 친일분자로서 함봉필의 他者化된 시각이다. 나름대로 황해도 수안군의 유지였던 咸鳳弼에게서는 향토의 근대적 교육에 대한 관심 등을 엿볼 수 있지만, 「京仁行歌」속 그의 發話態度는 지극히객관적이면서도 민족적 감정이 排除된 냉정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둘째, 宮闕을 무단으로 훼손하고 개최된 共進會라는 行事의 성격이나, 動物園, 植物園등으로 개조된 昌慶宮의 모습에 대한 感懷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作品이 수록된 출처가 조선총독부 기관지라는 점에서 애초부터 그런 발화를 기대할 수 없기는 하나, 역으로 함봉필에게 그런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존재했다면 차라리 언급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럼에도, 咸鳳弼은 아무런 감정의 노출 없이 식민지의 훼손된 宮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전술하고 있는 것이다. 中世時代의 풍경이 내면화와 수양의 대상이었다면, 近代時代의 風景은 소비의 대상으로 변화된다. 그리고 소비의 대상에는 반드시 생산자의 목적이 매개되게 마련이다. 家禽共進會와 三園, 觀艦式등은 日帝의 內鮮一體와 國家·國民통합을 위한 고도의 제국주의적 전략에서 구상된 이벤트이다. 그럼에도, 작자는 이 사실을 認知하지 못한 채, 近代的制度의 한 個人으로 매몰되어 이 작품을 창작한 것이다. 이 점에서 「京仁行歌」는 제도 속에서 소비되는 風景과, 目的을 인지하지 못한 채 風景의 消費者로서 動員된 植民地知識人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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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분단 이전 시기에 북한 지역에서 채록된 이성계·여진족 대결담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성계·여진족 대결담의 하위 유형을 이성계 조상·여진족 대결담과 이성계·여진족 대결담으로 나누어서, 해당 텍스트의 전개 양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이성계·여진족 대결담은 이성계 조상 대에서부터 시작되어 이성계 당대에서 비로소 마무리 되며, 여진족에 대한 대결 승리로 완결되는 전개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성계·여진족 대결담은 <주몽신화>나 <왕건신화> 속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신화소들을 다양하게 동원하고 있는 바, 여진족과의 궁극적인 대결 승리가 이성계의 조선 창업을 정당화 하는 논리로 귀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이성계 신화>의 전설화 된 텍스트로서의 성격을 띄고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이성계 신화>의 설화화 된 텍스트가 하필이면 여진족을 그 대결의 대상으로 하여 대결담의 형태로 형상화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성계 집단이 한반도 동북방의 전통적인 여진족 거주 지역에서 여진족과의 정치적·군사적 헤게모니 다툼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조선 창업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던역사적 맥락을 통해 설명할 수 있었다. <이성계 신화>의 설화적 정착 형태로서의 이성계·여진족 대결담에 내재된 향유층의 신화적 인식 체계는 두 가지 관점으로 정리하였다. 첫번째는 이성계 조선 건국의 대외적인 정당성 확보이고, 두 번째는 조선건국의 신화적 합리화이다. 이상과 같은 작업을 통해 북한 지역 전승 이성계·여진족 대결담의 유형을 분류하고 이성계 신화로서의 북한 지역민의 인식체계를 분석할 수 있었다.

문학과 문화 : 서울 문묘입지의 풍수적 특징 분석

박정해 ( Jeong Hae Park ) , 한동수 ( Dong Soo Han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21권 0호, 2011 pp. 139-179 ( 총 41 pages)
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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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조선 유교의 총본산인 문묘의 풍수입지구성을 규명해 보는 것으로 조선시대 풍수를 연구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한 기타 여러 문헌 속에는 문묘의 터 잡기에 대한 자료가 매우 소략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문헌고찰과 함께 현장답사를 통해 문묘의 역사적 의미와 함께 전반적인 입지풍수를 『地理五訣』의 관점에서 龍·穴·砂·水·向으로 분류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한 국가로서 유학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최고의 역할을 담당한 문묘는 그에 합당한 길지를 선택한다. 국가 중요건축물의 터잡기에는 단순히 풍수적 길지선정에 머무르지 않고 합당한 논리와 상황구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민의 교화와 교육을 책임진 문묘의 주산인 응봉은 우뚝하고 수려한 武曲金星體의 형상으로 ``官星이니 文章, 顯達, 忠正, 貞然이다`` 라는 풍수서의 해석은 설립취지와 정확히 부합하고 있다. 또한 성균관의 명륜당을 혈처에 입지시키고 있어 명분론과 실리론이 상충하는 가운데에서도 미래의 인재를 양성하는 성균관에 보다 실질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반면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을 중앙에 건설함으로 문묘가 통치이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는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문묘의 사격은 穴을 환포하고 보호하는 역할에 충실한 모습으로 물길도 또한 둥글게 환포하여 음양교배를 통한 생기 충만한 공간을 연출하기위한 필요충분조건을 완비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풍미한 호순신의 지리신법은 문묘의 좌향에는 부합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문묘는 풍수적 논리에 의해 터 선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를 적절히 활용하여 건축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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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식생활은 문헌기록, 음식물 유체, 음식물의 획득·가공·소비와 관련된 도구, 민족지적 유추 등 직·간접 자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식생활과 관련된 문헌기록은 三韓時代부터 나타나며 이러한 문헌기록은 과거의 식생활과 전통 식생활문화의 확립과정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선사시대의 식생활은 문헌기록이 없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연구를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본 연구에서는 신석기시대 남해안지역의 東三洞貝塚·大浦貝塚·安島貝塚과 서해안지역의 古南里貝塚·大竹里貝塚에서 출토된 인골에 대한 동위원소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신석기시대 두 지역의 식생활과 유적 점유 계절성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남해안지역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n=11)의 탄소동위원소(δ13C) 값은 -12.7~-14.8‰(-13.4±0.6‰), 질소동위원소(δ15N) 값은 14.4~18.1‰(15.7±1‰)에 분포하며, 서해안지역 유적 인골(n=2)은 δ13C=-16.6 ±1.7‰, δ15N=9.9±1.1‰을 보여 남해안지역 인골의 동위원소 값이 뚜렷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남해안지역 인골의 동위원소 값에서 해양자원의 의존도를 결정하는 δ15N이 특히 높은 것으로 미루어 식생활에서 어패류를 비롯한 해양자원의 비중이 매우 큰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하여 서해안지역 패총의 경우 δ13C와 δ15N 값이 모두 낮으므로 육상자원 특히 C3식물의 의존도가 높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러한 동위원소 자료로 미루어 당시 식생활에 있어서 지역적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동위원소 값과 유적에서 발견된 유구, 유물등의 고고학적 자료로 미루어 남해안지역 패총의 사람들은 패총지역에 연중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나 서해안지역 패총의 사람은 계절적으로 또는 단기간에 걸쳐 패총지역을 방문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역사와 철학 :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왕릉에서 찾을 수 있는 황금비와 금강비

이광연 ( Gwang Yeon Lee ) , 김은미 ( Eun Mi Kim ) , 이유호 ( You Ho Lee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21권 0호, 2011 pp. 215-252 ( 총 38 pages)
7,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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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능은 봉분 주위에 난간석과 난간가로대, 병풍석을 세웠고, 남쪽으로 상석과 문석인을 세웠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구조는 비슷했으며 다만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보다 더 많은 석 조각을 세웠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능은 대부분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기 힘든 것도 있으며 개축된 것도 그 당시의 능 그대로 개축되었는지 의심스럽다. 반면 조선시대의 능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의 능은 모두 황금비와 금강비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능은 훼손이 심하여 정확한 측량이 어렵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 구한 여러 가지 부분의 비율은 1.618:1이라는 황금비와 1.414:1이라는 금강비를 정확하게 만족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사된 비율은 모두가 황금비와 금강비의 근삿값이다. 고려시대의 왕릉인 칠릉떼와 조선시대의 왕릉인 건원릉과 제릉에서 우리는 황금비와 금강비가 의도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우리 조상들은 무리수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리수를 왕릉의 건축에 활용하고 무량수전이나 석굴암 등에 활용하여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우리 조상들의 수학 실력은 대단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와 철학 : 정이천교육론(程伊川敎育論)에 관한 고찰(考察)

이천일 ( Chon Il Lee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21권 0호, 2011 pp. 253-288 ( 총 36 pages)
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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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북송대 신유학자인 이천의 교육론에 대해 그의 대표적 이론인 理체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교육목적론과 교육방법론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천은 당시 신유학의 과제였던 존재원리이면서 신유학적 사유체계의 준거이자 근간인 理를 체계화하였고, 이와 더불어 당시 신유학이 도가와 불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인간이 가진 마음의 문제를 주체적이고 자각적인 태도로 접근하여 마음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함으로써, 유학에서 존재원리로서의 理와 함께 인간의 마음을 신유학에서의 또 하나의 핵심적 주제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천의 교육론은 理를 중심으로 크게 교육목적론과 교육방법론으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이천 교육론의 목적은 선진유학의 전통과 동일하게 ``성인됨``에 두었다. 성인은 당시의 인간들이 가장 높은 곳에서 인간들을 향해 다채로운 모습으로 인간 생활을 살피는 존재이면서, 천리를 간직한 완전한 인간상이다. 동시에 凡人들과는 현격하게 다른 지극히 선한 인격을 가진 인격의 化身으로서 상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천이 제시하고 있는 교육 목적으로서의 성인이 갖는 중요한 점은 그것이 정해진 맑은기를 부여받아 태어나는 성인이 아니라 누구나 배움을 통해서 품부받은 탁한 기질을 선하게 전환시켜 성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는 점이다. 즉 ``열린 성인으로의 전환``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천은 사람이 배움을 통해서 성인이 될 수 있으며, 성인이 되는 배움의 방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마음을 바로잡는(正其心) 함양방법으로서의 居敬과 본성을 기르는(養其性) 진학공부로서의 격물궁리 혹은 格物致知가 그것으로, 이를 통해 자신에게 품부 받은 기질을 선하게 변화시켜 결국 만사만물을 활연히 관통하여 天理를 깨달아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이천이 체계화한 교육론이라 할 수 있다.

역사와 철학 : 한국고대신목신앙에 대한 역철학적 고찰

이선행 ( Sun Haeng Yi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21권 0호, 2011 pp. 289-326 ( 총 38 pages)
7,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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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 신목신앙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단군신화의 신단수와 고구려 동맹제의의 목수신 그리고 마한의 소도신앙의 솟대와 신라의 수림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공통적인 요소는 하늘의 뜻이 이 신목을 통해 인간세상에 내려온다는 것과 인간의 바른 정사를 위해 기도와 제사를 하는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신목을 통해 내려오는 하늘의 뜻은 홍익인간으로 대표되고, 인간세상에 대한 바른 정사는 재세이화와 광명이세 등으로 드러난다. 『주역』에서는 손괘(巽卦) 를 나무와 바람 등으로 상징하고 있는데, 『주역』의 나무로 상징된 손괘 가 들어 있는 괘들은 성인이 밝힌 천도·신도를 군자의 도덕성으로 주체화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바람으로 상징된 괘들은 천도·신도를 자각하고 진덕수업하는 군자가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원리를 중심으로 밝히고 있다. 한국 고대 신목신앙의 내용도 또한 『주역』의 손괘 가 의미하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홍익인간의 의미는 「풍뢰익괘 」로 대표할 수 있고, 웅녀의 신단수아래에서의 기원은 「풍산점괘 」의 원리로 설명되어질 수 있으며, 혁거세의 탄생지인 나정은 「수풍정괘 」의 원리로 풀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천도·신도를 자각하는 과정은 제의에서 행해지는 제사원리로 상징되고 있는데, 제사원리를 담고 있는 「화풍정괘 」·「풍지관괘 」·「풍수환괘 」등을 통해 풀이할 수 있다. 천도·신도를 행하는 것을 표상하는 괘들이 바로 손괘 를 바람으로 상징한 괘들이며, 나아가 풍류도로 표상되는 고유사상의 내용도 바람으로 상징된 손괘 를 포함한 괘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바로 풍류도는 천도를 자각하여 덕으로써 세상을 교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도덕성의 실천원리인 것이다.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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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다산 『논어고금주』에서 해석의 정수인 性, 仁, 恕에 대한 견해와 주자 해석과의 대비를 통하여 다산 경학사상의 특성을 파악해 보았다. 性에 대해 다산은 성을 嗜好로서 파악하고 이를 形軀之嗜好와 靈知之嗜好로 분류한다. 그리고 人物性에 대해서는 기질지성은 人物이 같이얻은 바이지만 도의지성일 것 같으면 오직 사람만이 소유한 것으로 금수 이하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 하여 先儒의 本然之性은 人物이 다 같으나 기질지성은 사람과 짐승이 다르다는 설에 반론을 제기한다. 다산은 仁을 治心養性과 行己修身의 근본으로 보고, 두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향한 사랑이며, 두 사람 사이에서 사람과 사람이 그 본분을 극진히 하는 것으로 보고, 이는 인륜의 완성된덕이라고 파악한다. 특히 인은 결코 心德이나 天理가 아니고 人德이라 규정하고, 인은 行事에서 이루어지며 결코 마음에 있는 이치가 아니라고 한다. 충서에 대해 다산은 일이관지의 ``一``은 바로 恕이고 恕는 근본이 되고행하는 것은 忠으로 이것은 대대적인 것이 아니고, 忠을 실행할 때 恕는이미 오래 전부터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다산은 恕를 推恕와 容恕로 구분한다. 다산의 논어해석에 나타난 경학의 특성으로는 공문의 원의(수사지구관) 회복 역설, 실천의 중시, 주자학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 평등의식을 강조, 경학과 경세학이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되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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