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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제 : 어문학분야 > 기타제어문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598-1452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7권 0호 (2017)

자로(子路)의 인물됨과 사승(師承) 관계 고찰

손세제 ( Son Se-j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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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는 공문 십철(孔門十哲) 가운데, 특히 정사(政事) 방면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던 제자였다. 그는 노나라 변 땅 사람으로, 공자보다 아홉살 적었으며, 공자를 만나기 전에는 낭인 생활을 하였다. 그는 공문의 제자들 가운데 누구보다 따뜻한 정을 갖고 있었고, 정의로운 일을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실천했으며, 좋은 물건이 있으면 함께 나누어 쓰고자 했다. 또 누구와도 격의 없이 지냈기 때문에, 세상을 등진 은자들도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는 세련된 교양을 갖춘 사람들로 가득한 공문의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거칠고 조잡했으며 격식보다 실질을 중시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공자에게 ‘온당치 못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성정을 지닌 자로가 공자와 사제관계를 맺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불굴의 노력으로 어려운 가정 환경과 주위의 냉대를 극복하고 성웅(聖雄)의 덕과 인간다움[仁]을 이룬 공자에게서 큰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후 자로는 공자를 ‘주군’으로 받들며, 때로는 보디가드로서 때로는 조언자로서 때로는 공문의 해결사로서, 공자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다. 공자 또한 자로에게서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다. 자신은 문(文)과 예(禮)를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행할 수 없는 것들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자로를 보면서, 자신에게도 인간적이고 순수한 면을 발견하였고, 소위 ‘뜨거운 정열의 사나이’로서의 품성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자로가 자기 곁에 머물도록 배려했다. 자로와 공자는 서로에게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존재였다. 그들은 사제 간이었지만 동지애로 뭉쳐진 사이였다. 그래서 서로에게 이끌려 사제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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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백호 윤휴의 『주례』 이해와 그의 정치관>을 「독주례(讀周禮)」와 「만필(漫筆)」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주지하디시피 백호(白湖) 윤휴(尹?)는 17세기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사이의 1, 2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의 한 가운데 있었던 인물로, 서인들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예제를 설정하려는 데 반해, 그는 고례(古禮)를 바탕으로 조선 사회의 예적(禮的) 질서를 회복시키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특히 윤휴는 17세기 예송논쟁의 와중에서도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으며, 개혁의 모델을 『주례』로부터 새로운 이념과 제도의 원형을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술된 것이 「독주례」이다. 그는 『주례』를 구직(九職), 십윤(十倫), 육경(六卿), 삼공(三公), 삼고(三孤), 십오례(十五禮), 삼십육관(三十六官)으로 이해하고, 『주례』에서 제시하는 군주정치의 핵심을 군왕(郡王)의 ‘수덕(修德)’과 ‘수도(修道)’를 근본으로 한 완비된 제도(制度)에 있었다고 보았다. 아울러 「만필」에서 삼대(三代) 정치의 대요를 건방(建邦), 설관(設官), 분민(分民), 경야(經野), 명형(明刑), 제군(制軍)으로 보았으며, 『주례』의 이념에 입각한 과거제(科擧制)보다는 추천제(推薦制)에 의한 인재선발, 재상정치의 부활, 관직의 재정비를 통한 요·순(堯舜) 삼대의 정치를 회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즉, 「독주례」는 윤휴가 『주례』를 이해한 독서기라면, 「만필」은 『주례』 이념을 구체적으로 현실 정치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시론(試論)이라고 하겠다.

오뢰천 기독사상 중 중국적 수양론

강지연 ( Kang Jiyeon )
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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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국의 기독사상가, 오뢰천(吳雷川)은 당시 비기독교(非基督敎)운동 때 주장된 이론, 기독교 신조를 반대하던 이론에 대응하는데 주력한다. 그는 기독교와 유가사상을 결합해서 중국기독교도들의 강건한 인생관을 정립하고자 했으며, 이로써 사회에 봉사하려고 했다. 고난에 흔들리지 않을 인생관을 세우고, 자기 수양을 하는데 기독교 정신과 전통중국문화는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작업을 위해, 그는 인(仁)의 이타성과 성령을 유비시킨다. 타인에 대한 공평무사한 관심은 도덕성의 기초가 되는데, 이런 점에서 성령의 완전성과 인의 정신은 상통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령이 가진 특성 중 인격성보다 성령의 완전한 능력 등 다른 특성에 집중한 결과이다. 또한 그는 유가의 경(敬), 성(誠)과 기독교의 기도의 공통점을 지적했다. 스스로 완성하고 성숙하게 된다는 성(誠)을 향해 나아가는 태도로서 유교에서 말하는 경(敬)의 태도는 기독교에서 기도를 통해 강건해지는 정신적 태도와 연결될 수 있다. 당시 급변하는 사회 속 고난을 겪는 민중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인생관과 사회개조를 위해 오뢰천은 중국문화의 수양정신과 기독교 정신을 연결하고자 하였고 이것은 서구 기독교의 중국적 토착화 작업으로 평가될 수 있다.

동주 이용희의 민족주의와 사대주의

안외순 ( Ann Woe-soon )
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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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현대 한국국제정치학계의 태두인 동주(東洲) 이용희(李用熙, 1917-1997)의 민족주의와 사대주의 시각을 고찰하였다. 민족주의와 사대주의, 모두 논란이 많은 개념이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양자 중에 전자가 일방적 승리를 거둔 듯하다. 하지만 동주는 현대 국내외 정치/외교에 있어서 민족주의와 사대주의 모두 장단점이 있고, 따라서 양자의 장점을 혼용해서 현대 국내외정치에서 반영할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그는 근대 민족주의에 대해 대내적으로 주권주의 곧 시민민주주의 확립에 큰 기여를 하였지만 대외적으로는 힘의 질서에 기초한 갈등적/배제적 성격을 극복하지 못하여 제국주의 및 신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인식하였다. 반면 사대주의에 대해서는 굴종의 대명사로 표상화 된 것은 개념외적 오염이 심한 것으로서, 사대(事大)/사소(事小)라는 상호주의적 예에 입각한 평화의 원리를 토대로 현실에서 상호 준수하면서 천년이 넘도록 평화적 국제질서를 구축해왔던 하나의 국제질서 원리로 재평가하였다. 그 동력은 힘의 국제질서가 아니라 규범의 국제질서 원리를 추구한데 있다고 보았다. 그 결과 그는 오늘날에도 대내정치는 민족주의에서 시민주권 체제 확보라는 평등 원리를, 대외질서는 사대주의의 평화원리를 결합할 것을 추구하였다. 양자에 대한 이러한 동주의 인식은 근대 중심적 혹은 서구 중심주의를 극복한 지구사적 관점이자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균형적 관점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민족주의와 사대주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1960-70년대 강국 중심의 국제질서와 국내외 지성계를 고려할 때 충분히 독창적이면서도 유의미하다.

兩宋鄕治體系中 “管” 的幾個問題

朱奎澤 ( Kuize Zhu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37권 0호, 2017 pp. 123-145 ( 총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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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시기, “치민지기(백성을 다스리는 기초)”로서의 향촌관리체계는, 통치이념이나 제도설계, 구체적실시 등 어느 면에서든 변혁시대의 특징을 도드라지게 나타냈는데, 그 상황은 날이 갈수록 세세해지고 복잡해졌다. “관”은 송나라시기 향촌하부관리체계 중 비교적 오랫동안 사용된 중요한 제도 중 하나로, 그 독특한 향촌저변의 관리기능을 발휘하였다. 북송 개보7년 향촌체제를 “관”으로 분리한 것을 시작으로 “관”은 송나라시기 농촌사회의 특수한 하부조직으로 자리매김했다. “관”은 그 설치와 소멸, 조직의 편제, 농촌사회 관리방면의 효과 등에서 특별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관”의 실제 제도시행은 모두 세 가지로 상황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관”의 조직과 편제, 둘째 호장과 장정계층의 기형적인 혼합, 셋째 호적의 작성과 편찬, 토지세와 각종세금 나아가 농촌치안의 감독과 관리책임이었다. “관”의 기본기능의 쇠퇴와 소멸은 송대 기타 향촌하부관리조직들과 마찬가지로 점진적인 전개과정을 거쳤다. “관”급 제도의 설립과 폐지, 조직편제, 관리효과 등은 우리가 심도 있는 연구를 할 가치가 충분하다.

근대 조선의 ‘탈중화’와 지역의식의 재구성 - 『독립신문』의 논설을 중심으로 -

김수자 ( Kim Soo Ja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37권 0호, 2017 pp. 147-175 ( 총 29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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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개항하면서 한중일 3국은 조선과 청의 전통적인 조공, 책봉관계, 그리고 자주 개념을 서로 다르게 이해, 해석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일본은 조일수호조약을 체결하면서 사용한 ‘자주국’이라는 용어를 통해 조선이 중국에 대해 자주, 독립국임을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조선은 중국의 속방(屬邦)이나 내치외교는 자주(自主)라고 하는 ‘형식적인’ 종속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조선이 자국의 속국임을 실제화하려 했다. 이와같이 선명하지 않은 관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청나라가 패하면서 종결되었다. 그리고 1899년 대한제국이 중국과 한청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정치적 의미와 중세적 지역의식에서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개화 지식인들은 탈중화의 주요한 방법으로 문명담론을 활용하였다. 문명담론에 의거해 중국적인 것은 거의 예외없이 배격, 부정되었다. 중국의 것이 야만적인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유교문명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하고 부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특히 『독립신문』은 중국을 서양이 갖추고 있는 문명의 양상들이 모두 결여된 어리석고, 천하고, 더러우며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는, 미개화 혹은 야만과 동격화 하였다. 중국은 더 이상 문화의 중심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지역’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을 주변국으로 간주하면서도 동양의 방어를 위해서는 조선과 중국, 일본이 연대하여야 한다는 지역연대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연대의식은 자연스럽게 서양과 대별되는 아시아 지역공동체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선의 위치를 독립국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동시에 자국의 역할을 규정한 것이기도 하였다.

양관삼첩(陽關三疊)의 가창(歌唱) 방식(方式) 고찰(考察)

박종훈 ( Park Chong Hoon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37권 0호, 2017 pp. 177-201 ( 총 25 pages)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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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唐 王維의 송별 작품인 「送元二使安西」와 관련된 ‘陽關三疊’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四庫全書 電子版과 한국고전번역원DB에서 관련 언급을 추출하여 그 제 양상을 소개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왕유의 작품은 후대 시인들에 의해 ‘陽關曲’, ‘渭城曲’ 등으로 불리며 송별의 장소에서 수없이 언급되었고 실제 왕유 작품을 가창하면서 ‘양관삼첩’이라는 독특한 양상을 낳았다. 그러나 ‘양관삼첩’의 가창 방식을 고증할 명확한 자료가 없어, 그 가창에 대한 이견이 분분하다. 그 이견 중 대표적인 것이 宋 蘇軾의 언급이다. 소식은 왕유 작품중 1구를 제외하고 2,3,4구를 再唱하는 것을 삼첩의 양상으로 보았는데, 후대문인들 역시 소식의 견해를 수용한 부분이 적지 않다. 하지만 소식은 양관삼첩의 방식을 소개하면서 白居易의 작품을 근거로 들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꼼꼼히 변증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소식 이후 문인들은 소식의 견해를 큰 틀로 삼고 그 안에서 다양한 변주 양상에 대해 소개한 바 있다. 그 중에서도 2,3,4구를 재창하면서 작품 사이사이에 시인의 정회를 추가한 양상이 눈에 띈다. 또한 李瀷은 『星湖僿說』 「歌詞三疊」에서 1,2,3구의 마지막 3글자만을 재창하는 것을 삼첩이라고 한 바 있다. 다음으로는 세 구를 재창한다는 소식의 논지와 다른 견해를 살펴보았다. 왕유 작품 중 3,4구만을 하나의 덩어리로 삼아 이 부분만을 삼첩한다는 견해도 있었고 매 첩을 할 때마다 왕유 작품의 글자 수를 줄여가면서 가창을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고려 팔관회와 춘천 외바퀴수레싸움의 축제적 상관성을 통한 관광문화콘텐츠 활용

이학주 ( Lee Hak-ju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37권 0호, 2017 pp. 203-226 ( 총 24 pages)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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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춘천의 민속놀이 외바퀴수레싸움과 고려 팔관회의 축제적 상관성을 알아보고, 이를 통한 관광문화콘텐츠로의 활용방안을 찾고자 고찰했다. 이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하며, 전통문화를 활용하여 발전시키고자 하는 필요성 때문이다. 먼저 고려 팔관회의 연희와 외바퀴수레싸움의 상관성을 밝힐 수 있었다. 특히, 외바퀴수레싸움의 주인공이 팔공산 전투에서 고려 태조 왕건을 대신해 어차(御車)를 타고 견훤과 싸우다 죽은 신숭겸임을 다시 입증했다. 아울러 고려 팔관회는 고려의 축제였으며, 이때는 다양한 연희가 행해졌는데, 그 가운데는 외바퀴수레싸움도 있었음을 고찰했다. 다음은 외바퀴수레싸움의 관광문화콘텐츠 활용을 이끌어 내었다. 춘천외바퀴수레싸움은 정월대보름축제와 같은 축제에서 행해진 마을대항수레싸움 놀이였다. 이를 관광문화콘텐츠로 활용할 경우 대략 다섯 가지 정도로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첫째는 춘천의 민속축제행사 소양제등에서, 둘째는 춘천과 가평의 대항으로, 셋째는 신숭겸과 관련이 있는 시도의 대항으로, 넷째는 전국체전과 전국민속축제에서 대항전으로, 다섯째는 세계적인 스포츠가 될 수 있다. 또한 장난감 놀이, 운동회 경기로도 할 수 있으며, 가상현실과 결합해서 4차 산업으로 만들 수 있음을 말했다.

이규보 문학에 나타난 생태 정신과 생태 글쓰기

박수밀 ( Park Sumil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37권 0호, 2017 pp. 229-255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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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이규보(李奎報)의 문학에서 생태 정신을 찾아내고 그의 생태적 사고가 작품에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를 살핀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이규보의 문학 기반을 이해하고 나아가 생태 글쓰기의 개념을 보완해가고자 했다. 먼저는 이규보의 문학 사상과 생태 정신이 어떤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폈다. 이를 바탕으로 이규보의 생태적 사고에 대한 의식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작품에 나타난 생태 글쓰기 양상을 셋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 번째는 이에 대한 이규보의 생태글쓰기 변모 양상을 살펴보았다. 「슬견설」에서 보여준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차원의 글쓰기는 관념론에 머물지 않고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생태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는 쥐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성찰의 글쓰기 양상을 살폈다. 그의 작품에는 쥐와 고양이에 관한 경험을 담은 흥미로운 작품들이 있다. 쥐에 대한 일련의 글쓰기와 쥐에 대한 인식의 변화 과정에는, 인간에게 큰 해를 끼치는 쥐조차 놓아주는 작가의 생태적 성찰이 담겨 있었다. 세 번째는, 매미와 거미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담은 「방선부(放蟬賦)」를 살펴보았다. 「방선부」는 호생지심(好生之心)에 바탕을 두고 우의(寓意)의 방법으로 쓴, 생태적 사고를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이규보의 생태 글쓰기는 오랜 시간의 성찰과 반성을 거치면서 생태적 사유를 심화해간 것이었다. 그는 자연 사물을 도덕의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사물의 생태(生態) 자체를 존중하면서 대상의 연약함을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와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생태 글쓰기 이론을 발전적으로 탐구해가고자 한다.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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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에 조선에 입국한 중국 이민자 중에는 자의에 의해 월경하였다기보다는 혼란한 동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국경을 넘은 유민에 관심을 두고 그들이 이방인으로 혹은 디아스포라로 조선에서 생활터전을 마련하면서 겪게 되는 삶의 모습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강세작은 단순히 유민이 아닌 정착지인 회령은 물론이고 중앙의 관리들에게까지 그의 존재가 알려졌다. 강세작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이에 대한 답변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실제 그의 대한 기록은 박세당의 「강세작전」처럼 사실을 기록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긴 시문와 묘지명도 전한다. 심지어 사후 100년에 전설이 되어 실존인물과 관련하여 남겨진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강세작의 삶이 상황에 따라 여러 형태의 문학으로 새롭게 재해석되어 강한 생명력으로 자라고 있다는 반증이다. 본 연구는 17세기 명나라 유민을 대하는 조선지식인의 인식과 산재한 강세작의 이야기를 일갈하여 문학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살핀다. 아울러 그가 쓴 「자술」과 역사의 기록이 차이가 있음을 인지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역사와 유민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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