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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제 : 어문학분야 > 기타제어문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598-1452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38권 0호 (2018)

호순신 『지리신법』의 논리성과 한계성 분석-문헌고찰을 중심으로-

박정해 ( Park Jeong H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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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호순신의 『지리신법(地理新法)』이 갖는 역사적 사실과 논리 구성의 특징을 살펴본다. 호순신의 『지리신법』은 동기감응론을 조상과 자손간이 아닌 인간과 땅의 관계에서 찾고 있다. 조상과 자손으로 귀착시키는 것이 당연시 되는 상황에서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 구성과 포태법조차도 일반적인 이기 풍수서와는 다른 각도에서 활용하고 있으며, 오행과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 팔괘(八卦), 구성(九星) 등을 포태법의 하위개념으로 활용하고 있다. 오행의 활용도 정오행(正五行)이 아닌 대오행(洪範五行)을 활용하고 있으며, 십간십이지를 각각 독립된 범주가 아니라 하나의 범주로 보아 십간을 양(陽), 십이지를 음(陰)에 배속시키고 있다. 호순신의 『지리신법』이 갖는 또 다른 특징적인 모습으로는, 형세론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면서도, 수법(水法)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내룡(來龍)이 갖는 특징적인 모습과 득수와 파구를 사국(四局)과 구성(九星) 그리고 포태법으로 엮어간 나름의 논리구성은 당시에는 획기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지리신법』은 기존의 논리체계를 바탕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음양론과 길흉론이라는 단순한 논리체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성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수법(水法)을 도입하는 등 이기풍수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데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현대 풍수의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 정종 후릉(厚陵)의 수개와 그 영향

장경희 ( Jang Kyung Hee )
7,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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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제2대 정종(定宗)과 그의 비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의 무덤인 후릉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후릉이 조선 후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다음과 같이 밝혀 보았다. 첫째, 숙종은 정종을 조선 제2대 국왕으로서 정통성을 인정하였다. 그의 사후 300여 년이 지나 숙종은 정종이라는 묘호를 올렸고, 국왕의 상징물을 제작했으며 왕실 사당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조선 숙종은 1692년 후릉을 수리한 후 1693년 친행하였다. 이에 따라 후릉의 구조나 배치, 수량 및 크기 등이 주목을 받았고, 이후 다른 왕릉을 조성할 때 전례로써 참고하였다. 1698년 숙종은 ‘단종’에게 묘호를 올리고, 1699년 단종의 장릉(莊陵)과 정안왕후의 사릉(思陵)을 추봉 하였다. 아울러 숙종 계비 인현왕후의 명릉(明陵)을 조성할 때에도 후릉을 전례로 삼았다. 셋째, 후릉은 숙종 말기에 조성된 왕릉의 양식에 영향을 끼쳤다. 후릉은 단종의 장릉과 정순왕후의 사릉을 비롯하여 숙종의 명릉, 경종의 의릉 및 숙종의 세 번째 왕비인 인원왕후의 명릉을 조성할 때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들 왕릉은 후릉의 석조각을 참고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왕릉의 석인상들은 170㎝의 등신대로서 전후 시기의 것보다 50-80㎝ 정도로 작았다. 한편 양식적으로는 조각이 섬세하고 표정이 사실적인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정종의 후릉은 비록 조선 초기의 국왕이고 왕릉임에도 불구하고 숙종에 의해 재발견되어 17세기 말 18세기 초 왕릉의 양식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묘지명의 변천과 문체 확립

남종진 ( Nam Jongjin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38권 0호, 2018 pp. 111-136 ( 총 26 pages)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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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에서 묘지명(墓誌銘)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으며 또 그 문체적 안정성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묘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송나라 이래로 여러 기록이 있지만 대개 사실관계를 고증할 수 없고 또 그대로 신뢰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묘전(墓磚), 와편(瓦片), 신좌(神坐), 곽명(槨銘), 묘기(墓記) 등의 부장품에 대상 인물의 신원기록이 있는 자료를 활용하면 묘지명의 성립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여러 견해가 있으나 현존 자료 가운데는 후한 때의 <가무중처마강묘기(賈武仲妻馬姜墓記)>가 후대 묘지명의 격식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이후 묘지명이 확산되고 정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위(魏), 진(晉) 시기에 몇 차례 묘비(墓碑) 사용을 금지하고 또 사회 혼란에 편승한 잦은 도굴 때문에 사람들이 묘비 대신 묘지를 사용하면서 묘지명의 사용이 늘어났다. 하지만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묘지명의 명칭, 묘지석의 형태, 기술의 범위, 행문의 격식은 여전히 불안정하였는데, 남북조시대에 이르자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특히 북조의 후위, 북제, 북주에 이르러 묘지명 사용이 확산되면서 괄목할만한 변화가 생겼다. 5세기 중반에는 ‘묘지’ 또는 ‘묘지명’이라는 말이 제목에 널리 사용되었고, 또 기본적으로 정방형의 묘지석을 사용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아울러 묘지명에 기술하는 내용도 확대되어 신원 사항, 이력 사항, 상장(喪葬) 관계를 두루 기록하게 되었고, 또 ‘지(誌)’와 ‘명(銘)’을 나란히 운용하여 인물의 신원과 행적을 기록하는 한편 인물에 대한 송찬을 말미에 덧붙임으로써 명실상부한 묘지명의 행문 격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中國傳統思想視域下的膳食養生理論體系建構

담흥용 ( Tan Xingyong ) , 잠단길 ( Cen Danjie ) , 소정송 ( Su Zhengsong ) , 종길 ( Zhongjie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38권 0호, 2018 pp. 137-159 ( 총 23 pages)
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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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선식양생의 개념과 선식양생의 이론 체계 형성 과정의 탐색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한다. 중국 전통문화 속의 先秦사상, 중국의 양생 문화 및 식 문화 등은 선식양생이론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어준다. 특히 선진 사상의 儒家, 道家는 매우 중요한 양생관의 기초가 되어 주었다. 예를 들어 『周易』의 ‘居安思危’의 사상은 선식양생과 맞물려 예방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아울러 선식양생 의 이론체계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中醫양생학은 선식양생 이론의 특색이 되었으며, 중국만의 특유한 이론 체계를 형성케 하였다. 중국의 음식 문화는 줄곧 미각을 추구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았다. 양생을 목적으로 선식의 목표를 세웠으며, 선식양생으로 하여금 안과 밖이 통일된 예술의 미가 나타나게 하였다. 결국 이것을 토대로 선식양생의 원칙과 방법을 다듬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해방 후 동관왕묘의 변화과정 연구

김재명 ( Kim Jai Myung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38권 0호, 2018 pp. 161-198 ( 총 38 pages)
7,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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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동관왕묘가 해방 이후 근·현대기에 공원화되면서 건물이 훼철되는 과정을 밝혀 향후 원형을 복원할 때 참고가 되고자 한다. 동관왕묘는 1602년 조선 선조와 명 신종(만력제)에 의해 한중 합작으로 조성되었다. 조선 후기 숙종 이후 국왕이 이곳에 친림하면서 관우에 대한 향사가 끊이지 않았고, 정전을 비롯한 건물도 계속 수개하면서 관우 사당으로서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8년 관왕묘에 대한 국가 제사가 폐지되고 일제 강점기에 국가적 관리에서도 벗어났다. 그러다 해방 이후 1960년대에 동관왕묘의 지반이 주위보다 낮아 침수가 되자 지반을 높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 1970년대에도 계속 문제가 되자, 1974년부터 시작된 동묘 전체의 지반을 높이고 기존 건물을 해체 보수하게 되었다. 이후 1975년 ‘동묘 공원화 사업’과 맞물려 동관왕묘의 지반과 건물 및 시설이 오늘과 같이 변화되었다. 이전과 달라진 동관왕묘의 변화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관왕묘의 지반이 조선후기보다 60cm 정도 높아졌다. 둘째, 정전과 동서무의 건물 내외부의 재료가 교체되었다. 셋째, 내삼문 좌우의 담장이 헐렸다. 넷째, 재실과 인접한 관리용 건물을 헐었고, 관리사무소와 매표소를 신축하였다. 다섯째, 어막대(御幕臺) 위에 화장실과 집수조(集水槽)를 설치하였다. 여섯째, 외부 담은 자연석담에서 사괴석담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관우의 사당이던 동관왕묘가 1970년대에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묘사(廟祀)로서의 원형이 훼손되었는데, 향후 그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공원 지정을 해제해서 원래대로 복원해야 할 것이다.

『논어』의 인(仁)에 대한 다산(茶山)의 정의와 해석 - 주자와 비교를 통하여 -

임헌규 ( Heongyu Lim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38권 0호, 2018 pp. 199-229 ( 총 31 pages)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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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이 인간(人)에게 필수(需)적인 것을 배우고(學) 가르치는 것 (敎)을 중시한 儒家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仁이다.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에서 仁은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주도 개념이기 때문에, 朱子는 “『논어』란 단지 仁에 대해 설했다.”고 말했으며, 다산 정약용 또한 “仁이란 한 글자는 (『논어』) 20편의 主宰이다.”라고 말하였다. 『논어』를 살펴보면, 공자는 仁을 인간의 보편 덕으로 정립하였지만, 정작 仁이 무엇인지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접근했기 때문에, 후대에 다양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주자는 「인설」이라는 글을 통해 仁을 마음의 덕이지 사랑의 이치(心之德而愛之理)라고 정의하고, 나아가 자신의 정의를 『논어집주』를 주석하는데 적용하여 仁개념 전개의 역사에서 정점을 차지한다고 평가된다. 한국 유학의 집대성자 茶山丁若鏞은 주자 및 당시 성리학자들의 仁 개념 정의에 만족하지 못하고, 『논어고금주』를 집필하면서, 최소 36차례에 걸쳐 仁에 대한 재정의를 시도하고, 그에 기반하여 『논어』원문을 주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산이 인을 1)두 사람(二+人), 2)嚮人之愛, 그리고 3)人倫(至善)之成(至)德-孝悌忠信總(成)名 등으로 정의했다는 점을 제시하면서, 그의 정의와 해설을 주로 주자의 것과 비교하여 살펴봄으로서 그 특징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다문화시대 동아시아 전통에 기초한 공존 가치

안외순 ( Ahn Woe Soon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38권 0호, 2018 pp. 261-294 ( 총 34 pages)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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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현대 한국 다문화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로 한국의 주류문화에 다문화인들이 일방적으로 적응하게 하는 일방적 동화주의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서 동아시아 전통사상인 유교사상과 역사현실과 그 정책을 살펴보았다. 한국의 다문화사회 일방주의의 피해자들이 대부분 아시아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문화적 갈등 혹은 충돌의 당사자들이 대부분 시부모와 이주결혼여성이라는 점 등 전통적 가치관에 보다 익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연구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2장에서는 유교의 핵심 가치관인 인(仁)과 서(恕)의 다문화주의적 성격을 검토하였다. 공자에 의해 인과 서는 기본적으로 자신과 타인을 동일한 기준으로 바라보는 이른바 ‘동일률의 원칙’에 입각한 배려의 가치로 천명되었다. 조선의 다산 정약용은 이를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함께 사는 법’으로 정의하면서, 가정과 국가의 평화를 도모하고 세계평화를 구현하는 가치로 평가하였다. 3장에서는 ‘다름’에 대한 유교사상의 구체적인 대응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특히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전통을 통해 살펴보았다. ‘군자는 다른 사람과 조화하되 뇌동하지 않는다. 소인은 다른 사람과 뇌동하되 화합하지 못 한다’는 공자의 언명 이래 화이부동은 유교문명권에서 다양하고도 상이한 의사표현의 자유와 그 수용의 정치공동체의 상징이자 인간다운 삶을 실천하는 하나의 독트린이 되었다. 4장에서는 동아시아권에서도 대표적인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의 다문화 역사와 현실을 살펴보았다. 조선시대 다문화인은 ‘향화인(向化人)’과 ‘황조인(皇朝人)’ 두 종류였다. 조선 정부는 기본적으로 이들에게 혜택 중심의 정책을 취하여 기본적인 의식주는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관직과 작위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고려할 때 더 이상 전통가치와 역사의 이름으로 다문화인을 배척하거나 그 문화를 부정하는 왜곡은 불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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