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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제 : 어문학분야 > 기타제어문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598-1452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41권 0호 (2019)

『삼국유사』의 <처용랑과 망해사> 서사 연구

손승희 ( Sone Seunghee )
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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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삼국유사』의 「기이」편 <처용랑과 망해사>의 서사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처용설화의 역사상 위치를 찾아 제의 텍스트로서 당대 사회적인 가치를 복원시키려 한다. 그러한 시도는 처용의 주술적인 위력의 연원을 찾아가는 논의를 거쳐서 무속적인 처용 신화를 탈신비화하고 역사상의 이야기로 다시 읽는다는 도전적인 의미를 갖는다. 『삼국유사』의 「기이」편의 사료 배열을 보면 『삼국유사』를 의식하고 집필한 흔적이 역력한 만큼, <처용랑과 망해사>를 『삼국유사』 권 제 11, 「신라본기」의 제 11대 신라 헌강왕대의 정치사에 비추어 읽어 본다. 발생 초기부터 원시 종합예술로서 주술적 양상을 띠었던 처용가, 처용무, 처용 신화, 처용 야사의 기록으로서의 정착된 처용설화를 재조명한다. <처용랑과 망해사>에서 처용가와 처용무는 방역과 주술적인 치료를 목적으로 한 행위 예술의 역할을 한다. 처용의 이름 유래, <처용랑과 망해사>의 서사 구조 및 제의 의식을 구성하는 춤의 요소 사이에 연결고리가 발견된다. 예를 들어, <처용랑과 망해사>를 두고,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역병의 퇴치 이야기로 읽어 낸 서양 학자의 상상력도 예술과 주술의 혼합성을 전제로 자연재해에 대응하는 제의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처용 이야기를 민간 설화/ 민속 신화에서 역사로 복원하면서,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흐름이 혼합된 <처용랑과 망해사>를 당대 사회의 맥락에서 다시 읽어 낼 수 있다. 이렇게 처용의 역사화 논의를 마치면서 <처용랑과 망해사>의 제의 서사적 측면에 중점을 둔 본고에 얹어서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는 처용 다시 읽기의 후속 논의를 기대한다.
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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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부부가 주고받은 화답 형태의 가사 작품 <노부탄>과 <답부사>를 대상으로 아내의 주체적 면모가 가사 작품에 드러나는 양상과 남편에게 수용되면서 부부관계가 구성되고 조율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두 가사 작품이 지닌 가치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노부탄>의 시적 화자는 가정경제와 가정경영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을 갖고 치산의 필요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남편을 설득하면서 18세기 이후 사회경제적 가치의 중요성이 확산되던 시기의 모습과 가정경제를 책임지던 아내의 적극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시적 화자의 모습은 여성의 주체성과도 연결지어 파악할 수 있다. 자율적 주체의 개념을 ‘자기-규율’과 ‘자기-결정’, ‘자기-통치’라고 한다면, <노부탄>의 시적 화자는 자신의 의지에 따른 분명한 가치관을 갖고 이에 따라 행위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통제하는 주체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노부탄>과 <답부사>에서 보여준 시적 화자의 주체적 면모는 부부관계를 조율하는 것에서 나아가 가족담론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김약련은 두 가사 작품을 기록함으로써 부부의 대화가 사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가족 담론으로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답부사>를 통해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각각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가족관계가 구성된다는 그의 가족관을 드러냈다. <노부탄>과 <답부사>를 통해 ‘열쇠꾸러미’로 상징되는 가족경제의 주축인 여성이 가족경영 과정에서 남편의 유교적 가치관을 설득하는 과정과 그 속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주체적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사를 통해 부부간의 대화가 문학적으로 표출되고 기록됨으로써 가정 내에서 또는 부부관계 구성에서 여성의 지위를 확인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두 작품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죽석관 서영보의 문학관 연구

최일영 ( Choi Il Young )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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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후기의 경화세족이자 관각문인이었던 竹石館 徐榮輔의 문학관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서영보는 명문가의 일원으로, 중앙 고위직에서부터 지방관에 이르기까지 여러 실무직을 맡았고 학술적 교유와 저술 활동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적인 면모에 대해 논의된 것이 드물다. 따라서 서영보의 문학적 면모를 면밀하게 밝힐 필요가 있는데, 이에 앞서 그의 문학관에 대해 우선적으로 검토하려는 것이다. Ⅱ장에서는 서영보의 문학관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는 교유 관계를 살펴보았다. 편의상 수학기의 교유와 사환기의 교유로 구분하였는데, 수학기에는 주로 소론계 및 강화학파 인물들과의 교유가 빈번하였고, 이후 사환기에는 초계문신 출신의 관각문인들과 정치적으로 또 문학적으로 깊은 교유 관계를 맺었다. Ⅲ장에서는 서영보의 문학관에 대해 다루었다. 먼저 서영보는 문장과 정치가 서로 통한다는 일종의 시운론의 입장을 밝혔는데, 이는 정치 참여가 가능하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관각문인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문학관이다. 아울러 時運의 전제와 天稟의 함양을 바탕으로 天機가 발현되어야 문학의 지극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소론계 문인들이 공유하였던 修養 및 自得의 학문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서영보의 문학관으로 거론된 두 가지 관점이 다소 진부하고 특별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다수의 경화세족 관각문인들의 문학관을 참신하거나 개성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 서영보를 비롯한 조선후기에 주류를 이루었던 경화세족 관각문인들의 문학적 면모를 자세하게 밝히는 연구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정조의 독서론 고찰

박수밀 ( Park Su Mil )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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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이른바 책의 정치를 펼친 정조의 독서론에 초점을 두어 정조의 독서 목적과 독서 방법을 규명하고 나아가 문체반정을 일으킨 정조의 책에 대한 태도를 살피고자 한 것이다. 정조는 글에는 그 시대의 정치와 문화가 담겨 있으므로 문체를 통해 그 시대의 풍속과 도덕, 윤리를 살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에 뜻을 두고 책을 읽지 않으면 내면을 망치고 풍속을 병들게 한다고 생각해서 패관잡기를 물리쳤다. 특히 패관소설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해친다고 보았다. 정조는 책의 내용뿐 아니라 책의 형태도 문제 삼았다. 누워서 보는 중국 본과 중국 책상을 엄격하게 막았다. 하지만 정조는 사학(邪學)으로 불린 서학(西學)에는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서학에 물든 사람은 가르치고 이끌어서 바른 도(道)로 돌아오게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정조는 서학에 물든 자는 망민이 아닌 교민(敎民)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정학(正學)을 하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물리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음으로는 독서의 방법을 살펴보았다. 정조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없애고 글을 읽는 활법(活法)의 독서를 강조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통치자의 시각에서 글을 바라보았기에 유익한 책과 해로운 책의 경계는 분명하게 구별했다. 또한 정조는 배워야 할 과목의 내용과 분량을 정해 놓고 공부하는 과정(課程)의 독서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며, 세자 시절부터 반드시 초록(抄錄)을 했다. 정조는 초록을 박문약례의 한 방법으로 이해했으며 초록을 통해 중요한 대목을 기록하고 글의 흐름을 파악했다. 나아가 정조는 박람강기보다는 정독(精讀)을 지향했다. 다음으로는 정조의 독서 내용과 범주를 살펴보았다. 정조는 도덕과 치세(治世)를 위한 학문으로써 실(實)을 추구했으며 이에 따라 실용서도 적극 읽었다. 육경학과 제자서 및 주자서를 정학(正學)으로 세우면서도 탁상공론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의 서적을 적극 수용했다. 정조는 군주였기에 정통성 지키기라는 통치자의 시각에서 책을 읽었다.

근대계몽기 석정 이정직의 문학사상

이승용 ( Lee Seung Yong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41권 0호, 2019 pp. 115-148 ( 총 34 pages)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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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석정 이정직의 특정 문학 작품에 대한 분석 평가가 아닌, 그가 바라본 문학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석정의 시문(詩文)에 대한 상당수의 논문이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상에 대한 종합적 고찰이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석정의 문학사상은 한마디로 법고(法古), 포폄과 입언(立言)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구한말 지식인이자 교육자로서 문학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함으로써 세상에 참여하였다. 그 문학사상의 기저를 이룬 것은 폭넓은 독서, 강론 활동, 입언 의지이다. 그는 문학을 문사(文辭)에 한정하지 않고 정사(政事)를 포함한 폭넓은 범위로 보았다. 그의 문(文)은 고문에 바탕을 두고 바름[正]을 추구하였으며, 법고의 근간을 육경(六經)에 두고 문도일치(文道一致)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가 문학의 길을 걸은 이유는 선비로서 시무(時務)를 알아야 하고, 문(文)을 통해서 천하의 실상에 대응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석정이 남긴 문고(文藁)의 상당수는 치세(治世)와 관련된 논(論)과 설(說)이다. 그는 문학으로 제자들과 강론을 전개하였고, 중국 고전의 역사적 사안에 대해 포폄을 전개하였다. 이치를 규명해 냄으로써 후대에 치세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는 문장을 통해 세상을 바르게 하고자 한 그의 의지이다. 공자의 춘추대의 정신을 시대에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격동의 혼란기를 살아간 지식인으로 우환의식(憂患意識)을 가지고 살았으며, 이를 문장으로 입언(立言)하였다. 이에 석정의 문학사상을 법고(法古)와 문도일치의 인식, 시무(時務)와 치세지도의 포폄, 문학과 후세모범의 입언(立言)으로 체계화하였다. 또한 문론의 법고를 시론의 평담론(平淡論)과 연계, 문장이 도학(道學)과 정사(政事)의 내포한다는 점, 고전을 통한 입언과 고자(古者)의 관계를 밝혔다.
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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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일제 강점기 1920년대 조선학과 민족학의 지식 지형 형성 과정에서 전설 채록 활동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조선학’이라는 용어는 1926년 전후 식민시대 조선인의 ‘자기 알기’를 위한 지적 운동으로 출발한 것으로, ‘조선심’, ‘조선정신’, ‘조선사상’ 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 이 시기는 1920년대 전반기부터 활발했던 민족운동과 문화운동의 분위기 하에서 ‘좀 더 조선적인 것’을 강조하는 시대사조가 팽배해 있었으며, 신화와 전설은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아일보』 1927년 8월 20일부터 12월 28일까지 69회에 걸쳐 채록된 ‘전설의 조선’은 1910년대부터 존재했던 ‘동화 채록’과는 다른 관점에서 그 당시 구전 전설 채록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구전 전설 채록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조선학과 민족학이라는 지식 지형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며, 조선학은 본질적으로 역사학을 뒷받침하고자 하는 데서 출발했으나, ‘조선심’, ‘조선사상’을 강조하는 인류학, 문화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20년대 전반기부터 활발했던 민족운동과 문화운동은 조선 학의 뿌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속에서 신화와 전설의 가치를 재인식하게 되었다. 『동아일보』 ‘전설의 조선’에는 총52편의 전설이 채록되었는데, 인물과 시대의 혼란, 구전 채록 형식에서 비롯된 다듬어지지 않은 문체 등의 한계를 보이기도 하지만, 필자가 전국적이라는 점, 고증적인 태도와 민족생활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채록했다는 점 등에서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손진태의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번역과 그 성격

유정란 ( Yu Jeongran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41권 0호, 2019 pp. 185-218 ( 총 34 pages)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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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남창(南滄) 손진태(孫晋泰)가 1927년 번역한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텍스트의 특징적 양상을 살피고 번역을 둘러싼 문화 정치적 역학들에 대해 검토하고자 했다. 손진태는 조선의 국문학, 구체적으로는 시가(詩歌) 문학 방면에 많은 업적을 남기고 있다. 그중에서도 번역문화사 방면에서 중요한 작업을 수행한 바 있는데 바로 <농가월령가>를 번역하여 잡지 『동양』에 게재한 것이다. 본고는 <농가월령가> 번역이 외지인 손진태에 의해 일본에서 수행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 지식인들과는 사정이 달랐다는 점을 시야에 넣고 번역문 <농가월령가>의 성격을 살피고자 한 것이다. 우선 손진태의 학문 여정과 <농가월령가> 번역의 계기를 짚어보았다. 그는 일찍이 조선의 민족성과 그 정신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조선의 문학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가월령가>를 발견한 손진태는 작품의 민족생활사 방면을 강조하며 번역해 일본에 소개한다. 번역의 구체적인 양상은 크게 형태상의 변형과 내용상의 변형 두 가지로 정리된다. 구(句)의 분리, 원문의 적극적 해석을 통한 수정 및 첨가 등이 시도되었는데 ‘조선적인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번역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농가월령가> 번역의 성격을 가늠하기 위해 손진태의 시조론과 번역의 수용 맥락을 아울러 살폈다. 그 결과 <농가월령가> 번역문은 식민지 조선의 민족 생활을 연구하는 자료로 제국 일본에 제공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손진태의 번역이 제국 일본의 민족지(民族誌) 구축작업에 연동한 지점을 밝힌 것이다.
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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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6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 가운데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정치인식을 비교 고찰함으로써 그들의 개인적인 정치적 삶과 처지는 달라도 시국의 문제와 그 해결방식을 바라보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했던 점을 확인하였다. 남명과 율곡은 35세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일생의 삶과 처신에서 일견 많은 차이가 있다. 남명은 일생을 ‘재야의 비판적 지식인’인 ‘처사(處士)’로서의 삶을 살았다면 율곡은 일찍부터 중앙정치 무대에 진출하여 중요 요직을 거치면서 개혁정치를 펼쳤던 ‘출사(出仕)’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명은 평생토록 재야에서 부당한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고, 율곡은 현실정치 속에서 평생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는 면에서 각각 다른 세계의 대표적인 실천가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 글에서는 선조 초기에 저술된 남명의 <무진봉사(戊辰封事)>와 율곡의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중심으로 구성과 체계성 여부에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선조에게 폐정(弊政)을 개혁함으로써 왕도정치를 실현할 것을 요구하되 그 기본 구조는 군주인 선조(宣祖)의 명선(明善)과 성신(誠身)(수기(修己)), 용현(用賢), 그리고 안민(安民) 정책의 구조로 되어 있고, 군주의 명선과 성신(수기)의 실천이 다름 아닌 폐정을 개혁하는 데 달려있다고 보는 인식이 동일하다는 점을 밝혔다.

다산학에서의 예법과 인간 - 『소학지언』과 『심경밀험』을 중심으로-

이기원 ( Lee Giwon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41권 0호, 2019 pp. 255-283 ( 총 29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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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성인의 도의 내용을 예악에서 찾으면서 예법에 의한 인성의 수신과 규율, 정치 및 국가 제도 개혁을 추구했다. 정약용은 육경과 사서 연구를 완성하고 난후 『소학지언』과 『심경밀험』을 저술했다. 『소학지언』과 『심경밀험』에는 예법적 측면에서 심신의 내외적 수신을 위한 방법과 실천이 제시되어 있다. 정약용이 강조한 성인의 도는 사람이 따라서 가야하는 길인데 이 길은 예법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윤리 도덕의 실천적 언명은 예법을 근간으로 할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소학지언』은 ‘도예’와 관련된 예법의 습관화에 중점을 두었으며, 『심경밀험』은 ‘영명한 인간’의 회복을 위한 예법을 강조했다. 정약용은 예법을 내면화할 때 신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신독 역시 타인과의 관계위에서 성립한다. 타인과의 관계는 ‘행사’를 통해 실제적인 것으로 드러날 때 의미를 갖는다. 정약용은 경세서에서 구상된 예법에 의한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 예법을 체득한 유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예법을 체득한 유자가 사회 문화와 정치의 담당자로서 위상을 가질 수 있다.

한중(韓中) 관우의례(關羽儀禮) 비교 연구

상기숙 ( Sang Key Sook )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동방학  41권 0호, 2019 pp. 285-316 ( 총 32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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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양국 관우의례는 대동소이하고 모두 역대 통치자들에 의해 황권강화와 국태안민에 활용되었다. 관우는 무신ㆍ수호신ㆍ재신의 신격에서 점차 만능신으로 자리 매김한다. 치제는 관민이 관우의 생졸일, 수봉일, 명절과 절기를 중심으로 거행한다. 한국의 관우신앙은 임진왜란 때 명장들에 의해 관왕묘가 건립되면서 시작된다. 중국의 관우신앙은 송대부터 출발하며 지위는 후→공→왕을 거쳐 명대에 제까지 오른다. 관우묘는 소사에서 중사로 승격되고 이후 국가제전에서 문묘와 대등해진다. 한국의 관성교는 유일신이자 만능신으로 전내무 중심의 전승체계가 독특하다. 현행 한국의 관왕묘 의례는 서울의 남묘ㆍ동묘ㆍ성제묘ㆍ관성묘를 대상으로 한다. 제사는 매년 음력 1월 1일ㆍ1월 7일ㆍ경칩ㆍ청명ㆍ4월 8일ㆍ단오ㆍ5월 13일ㆍ6월 24일ㆍ추석ㆍ상강ㆍ10월 19일ㆍ매월 삭망 등 13여 일 거행한다. 시간은 8시, 12시, 15시, 17~18시경, 22시로 일정치 않다. 유불도 요소를 지니며 특히 무속적 성격이 강하다. 관사는 조선조의 규범을 완전히 계승하지 않았고, 민사에서 일부 전승되며 주재자는 대개 무속인과 상인이다. 현행 중국의 관제묘 의례는 3대 관림인 낙양관림ㆍ당양관릉ㆍ해주관제묘를 대상으로 한다. 현행 ‘금추대전’은 명청대 의례를 재현하고 관민이 함께 주도한다. 국가사전으로 태뢰의 예를 따르며 명대에 춘추ㆍ사맹ㆍ5월 13일ㆍ동지ㆍ제석; 청대에는 1월 1일ㆍ9월 13일을 포함시킨다. 민사에선 1월 삭망ㆍ13일이 첨가되며, 해주 관사는 4월8일ㆍ6월 24일로 확대 거행한다. 이중 농사철인 4월 8일이 가장 성대하다. 관사는 유불도, 민사는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특히 도교적 성격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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