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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기왕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한일 한문학의 역사적 접점을 몇가지예를 들어 한일 한문학의 비교문학 방법에 대해 고찰하여 보았다. 한문학 형성기에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字書, 韻書, 類書 등을 수용하여 각자 언어적 특성에 맞게 활용하였다. 한국은 7세기 무렵 『切韻』계 운서가 수입되었고, 일본은 대개 8세기에 韻語를 사용하게 된 듯하다. 또한 신라는 국학(682)과 독서삼품과(788)를 설치하여 한문학 소양을 갖춘 문인을 양성하였고, 일본의 奈良朝(710~784)는 『學令』에 의하여 유학과 잡학, 문학 교육을 강화 하였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의 지식층은 漢文文言에 의하여 시문을 짓기 위해 한자음의 平仄과 韻屬을 학습하고 암기하여야 하였다. 한국의 경우는 신라 말한문문언 사용 지식층의 형성과 고려 시대 과거 제도의 실시와 더불어 한자음의 평측과 운속을 습득한 문인들이 많이 나왔지만 일본의 헤이안 시대와 나라, 가마쿠라 시대에는 그러한 문인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한국에서 문자생활에 활용한 한문 문체는 문언어법의 고문만이 아니라 다양한 변격한문을 포함한다. 다만 科擧에서 부과되고 공적 생활에서 주로 사용한 문체는 문언어법의 고문 문체였다. 이두식 한문 등 변격한문은 특수한 예를 제외하고는 판각되어 지속적으로 감상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일본에서 준한문이라고 부르는 和漢混合文體가 발달하고, 그 문체로 작성된 문장이 판각되어 유포된 것과 사정이 다르다. 한국에서는 한자음의 평측과 운속을 습득한 문인들이 일본보다 많이 나오기는 하였지만, 한자한문을 활용한 지식활동에서 평측과 압운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데에는 제한이 있었다. 이를테면 조선 전기에 柳希春은 識字敎本으로 『續蒙求』를 엮었으나, 李瀚의 『蒙求』와 달리 압운체계를 구조화하지는 못하였다. 이 『續蒙求』는 1659년에 일본에서 복간되고 享保 연간에는 관판본도 나왔는데, 이후 菅亨의 『本朝蒙求』(1686)을 비롯한 독자적인 『몽구』의 속찬서가 나왔다. 『本朝蒙求』는 나름대로 압운체계를 구조화하였다. 17세기 이후 일본 지식인은 지적 호기심이 왕성하여 그러한 구조화를 실험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압운의 구조를 문자활동에서 능숙하게 활용하는 지식층은 조선만큼 형성되지는 않았다. 한편 조선시대 운서는 『三韻通考』와 같이 3성을 한 면에 제시하고 入聲을 마지막에 두는 방식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奎章全韻』은 4성을 한 면에 배열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聚分韻略』 역시 3성 배열 체제로 이루어져 있다. 양국의 운서에서 3성을 3단으로 우선 배열하는 체제는 서로 다른 경로로 『中原音韻』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의 과거제도는 규범적 지식을 산출하면서 한문학을 발전시켰으나, 지적실험과 감성의 표출을 방해한 면이 있고, 광범한 범위의 사상서나 문예서의 출판과 유통을 제한시킨 면도 있다. 일본의 경우는 에도시대에 출판문화가 발달하고 사상적, 문예적 취향도 다양화되어 조선보다는 광범한 범위의 사상서와 문예서가 속속 간행되었다. 또한 被虜人과 통신사를 통해 조선의 지식세계가 일본에 전해져 에도 문화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양국 지식인은 역할이 달랐으므로, 같은 서적을 열람하더라도 에도 지식인과 조선 지식인의 사상적 지향은 같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