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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society of East Asia comparative literature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
  • - 해외 등재 : -
  • - ISSN : 2288-8330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5권 0호 (2015)

고대한국(古代韓國)의 동요관(童謠觀)과 천인상관사상(天人相關思想)

岡山善一郞 ( Okayam Zenichir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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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찰은 『고려사』 <오행지>에서 전개되는 동요관을 중심으로 하여 『삼국유사』와 『고려사』의 동요를 재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한국 동요사에 있어서 동요의 발생과 의의, 그리고 그 목적 등에 대해 논리적으로 밝히고 있는 문헌은 『고려사』 <오행지>이다. 그래서 한국의 고전 동요를 연구할 때는 먼저 『고려사』 동요관의 파악이 요구된다. 그런데 동요란 명칭은 고대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漢書』를 비롯한 많은 사서에서는 <오행지>를 두어 동요를 다루어왔다. 그런데 『漢書』 <오행지>의 동요관이 『고려사』 <오행지>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이 사실은, 『고려사』의 동요관은 기본적으로 고려시대의 동요관이지만 고대한국의 동요관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그래서 한국문학사의 시대구분과는 달리 『삼국유사』와 『고려사』를 한 시대로 묶어 고대 동요사를 설정해 보았다. 『고려사』 <오행지>는 서문부터 동요의 발생론까지도 『漢書』<오행지>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먼저 『漢書』를 중심으로 한 고대중국의 동요관부터 검토하였다. 이 방법이야말로 고대한국의 동요관의 특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고려사』의 동요와 『漢書』를 중심으로 한 고대중국의 동요와의 비교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同異점를 찾을 수 있었으며, 고대한국의 동요에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였다. 『고려사』와 『漢書』의 <오행지>의 공통점은, 동요의 발생과 예언이라는 목적은 천인상관 사상에 의거한 것이라는 점이다. 구체적으로는 <金行>·<言事>의 오행사상에 의한 동요론인 것이다. 그리고 동요뿐만이 아니라 <오행지>의 異變은 거의가 前兆·예언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수록되어 있다. 한편 고대중국의 동요는 <詩妖>란 의미에서 다루었지만, 『고려사』에서는 동요를 <訛言>·<妖言>으로 취급하였다. 『漢書』의 <오행지>의 동요는 거의가 오행사상에 의해 그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으며 그 내용은 國亡과 같은 사건과 관련되어 있지만, 『고려사』<오행지>에서는 萬壽山謠나 木子謠처럼 인과관계보다는 결과만을 제시하여, 童謠의 내용이 天의 뜻에 의해 일어난 사건처럼다루고 있는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사회적 사건을 비판하는 내용의 동요는 오행사상과는 직접적인 관계없이 초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고려사』의 동요론에 입각한 각 동요들에 대한 분석은 본문의 참조를 바라며 생략하겠다.

사회적 권력 관계와 여신의 자리 -고조선 건국신화와 일본 왕권신화를 중심으로-

박광은 ( Park Gwang-e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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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그 텍스트가 구성된 시공간적 맥락을 반영한다. 다수의 신화에서 신의 체계가 가부장적 가족의 형태를 따르는 것은, 신화가 뿌리를 둔 사회가 바로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가부장적인 신의 체계 내에서의 여신과 그 역할에 주목할 수 있다. 이때한 가지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은, 남성 중심 사회 내에서 남성 건국주의 이야기로 구성된 일본 왕권신화에서, 최고신이자 태양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마테라스는 여신이라는 것이다. 이 의문에 주목하여 이 글에서는 아마테라스와, 고조선 건국신화 내의 웅녀를 비교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웅녀는 아마테라스와는 달리 신화 텍스트 내에서 단군을 생산하는 일 외에는 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사라지는데, 한국과 일본의 지역적 인접성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흥미로운 차이가 나타난다. 고조선 건국신화는 기본적으로 국가를 위한, 국가의 신화이다. 따라서 건국주와 그 혈통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웅녀는 건국주 단군의 한쪽 혈통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부각되지 못한다. 이는 웅녀가 피지배층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웅녀가 속했던 집단은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에 퍼져 있었던 ‘곰 문화`의 영향 안에 있었으며, 곰을 시조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이들이 이주민에 의해 지배당하며 고조선이 성립하였고, 그 과정에서 곰이 건국신화 내에 통합된 결과물이 웅녀이다. 웅녀가 곰에서 인간으로 변모한다는 것은 곰을 섬기는 부족이 이민족의 지배 체제 내로 들어간다는 것이고, 특히 인간 가운데에서도 여성이 된다는 것은 남성 중심적인 고대국가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상징이다. 이후 웅녀는 환웅에게 간청하여 아이를 낳고 사라지는데, 이로써 웅녀는 남성의 서사로부터 소외되고 타자화된다. 일본 왕권신화 역시 천황의 권위를 뒷받침하기 위한 국가의 신화이다. 그를 위해 일본 왕권신화는 천황의 근원을 신의 계보에 두고, 그 계보의 정점에 아마테라스를 둔다. 그런데 신화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남성 건국주의 계보를 담고 있음에도, 아마테라스는 여신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대 일본사회의 종교 영역에서 여성의 영향력이 비교적 컸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종교적 영향력에 더하여 일본 왕권신화가 구성되던 당시 천황의 아마테라스에 대한 숭배가 결합하면서 아마테라스가 최고신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더하여 아마테라스는 신화 내에서 여성성을 극도로 탈각한, 오히려 남성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와 같이 여성성을 탈각하여 자기로부터 소외되는 방식을 통하여서만 아마테라스는 남성의 신화 내에서 여성 최고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웅녀에게는 여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적 기제가 없었고, 아마테라스에게는 있었다. 또한 웅녀는 출산과 같이 여성의 영역에 속한 일을 적극적으로 간청해서 수행하고, 아마테라스는 그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다. 이 두 가지 측면에 의하여 웅녀와 아마테라스가 선 자리는 크게 달라졌고, 이는 결국 사회적권력의 방향과 신화의 관계를 보여준다. 방향에 호응하지 못한 웅녀는 사라졌고, 호응하였던 아마테라스는 살아남은 것이다.

From a secondary place to a central one -On Yan Emperor`s Gaining Increasing Respect-

황소영 ( Huang Xiaol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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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을 흔히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 일컫는데, ``염황`이란 염제(炎帝)와 황제(黃帝)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때 염제와 황제는 중국인의 시조이자 중화문명(中華文明)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존재이다. 그러나 중국인이 처음부터 그들을 염황자손으로 자칭했던 것은 아니다. 황제가 처음부터 조상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던 데 비해 염제는 조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황제처럼 그 이미지가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염제는 어떠한 인식의 변화를 거쳐 지금의 위상에 다다른 것인가? 본고는 20세기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나타난 중국의 염제 연구를 중심으로 중국이 염제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그 원인에 대하여 고찰했다. 우선청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지식인들의 염제에 대한 인식을 검토했는데, 이들이 고전문헌을 그대로 믿거나 아예 부정하는 두 가지 태도로 한편으로는 염제를 반신반인의 존재로 여기고 한편으로는 상상의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 학자들은 시조의 존재로서 황제에만 치중하고 염제는 거의 언급하지 않거나 언급해도 그리 중시하지 않았다. 즉 염제는 황제의 부수적인 존재, 주변부적인 존재로 지속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 개혁 개방(改革開放)전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염제는 조상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우선 ``염황자손`이란 용어의 정착 과정을 통해 이를 고찰했다. 이 시대 전에 ``황제자손(黃帝子孫)`, ``황염자손(黃炎子孫)`이라는 용어도 ``염황자손`과 함께 사용되었는데 이 시대에 와서 점점 ``염황자손`이란 용어로 대체되어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염제의 조상으로서의 성격을 인정해준 징표이다. 이외에 여행사업의 발전과 더불어 염제 고장에 대한 연구와 염제 고장으로 가정한 지역에서 하는 학술대회와 홍보활동 등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것은 염제 고장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여행 사업을 통해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염제의 부상 원인은 아래 몇 가지로 꼽을 수 있다. 첫째, 염제와 신농(神農)이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 대부분 중국학자에게 인정을 받았다. 이것은 염제의 중국인의 시조와 논경, 문명의 시조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해준다. 둘째, 의고학파의 관점에 대한 수정의 일환으로 새로운 각도에서 염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염제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염제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염제신농씨가 중국 상고 농업 문명의 시조가 되고 중국인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다. 셋째, 염제의 부상은 그와 황제, 이 둘 사이의 이원론적인 성격과도 연관된다. 이 둘 사이의 이원론은 전 시대의 중황경염(重黃輕炎)의 원인으로 나타나지만 개혁 개방 이후로부터 염제가 부상되고 호명된 원인으로 전환되었다. 넷째, 고고학의 발견은 염제의 논경 시조로서의 역할을 재확인해주며 중국 문명의 역사를 위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하여 중국이 유구한 문명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즉 염제는 문명의 표상을 넘어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뒤쳐지지 않는 유구한 문명의 표상으로 부상되고 호명되었다. 다섯째, 개혁 개방을 실시하는 동시에 그로 인한 외국 문화의 유입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염황이제(炎黃二帝)를 내세우며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 역시염제 부상의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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