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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그 텍스트가 구성된 시공간적 맥락을 반영한다. 다수의 신화에서 신의 체계가 가부장적 가족의 형태를 따르는 것은, 신화가 뿌리를 둔 사회가 바로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가부장적인 신의 체계 내에서의 여신과 그 역할에 주목할 수 있다. 이때한 가지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은, 남성 중심 사회 내에서 남성 건국주의 이야기로 구성된 일본 왕권신화에서, 최고신이자 태양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마테라스는 여신이라는 것이다. 이 의문에 주목하여 이 글에서는 아마테라스와, 고조선 건국신화 내의 웅녀를 비교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웅녀는 아마테라스와는 달리 신화 텍스트 내에서 단군을 생산하는 일 외에는 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사라지는데, 한국과 일본의 지역적 인접성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흥미로운 차이가 나타난다. 고조선 건국신화는 기본적으로 국가를 위한, 국가의 신화이다. 따라서 건국주와 그 혈통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웅녀는 건국주 단군의 한쪽 혈통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부각되지 못한다. 이는 웅녀가 피지배층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웅녀가 속했던 집단은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에 퍼져 있었던 ‘곰 문화`의 영향 안에 있었으며, 곰을 시조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이들이 이주민에 의해 지배당하며 고조선이 성립하였고, 그 과정에서 곰이 건국신화 내에 통합된 결과물이 웅녀이다. 웅녀가 곰에서 인간으로 변모한다는 것은 곰을 섬기는 부족이 이민족의 지배 체제 내로 들어간다는 것이고, 특히 인간 가운데에서도 여성이 된다는 것은 남성 중심적인 고대국가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상징이다. 이후 웅녀는 환웅에게 간청하여 아이를 낳고 사라지는데, 이로써 웅녀는 남성의 서사로부터 소외되고 타자화된다. 일본 왕권신화 역시 천황의 권위를 뒷받침하기 위한 국가의 신화이다. 그를 위해 일본 왕권신화는 천황의 근원을 신의 계보에 두고, 그 계보의 정점에 아마테라스를 둔다. 그런데 신화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남성 건국주의 계보를 담고 있음에도, 아마테라스는 여신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대 일본사회의 종교 영역에서 여성의 영향력이 비교적 컸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종교적 영향력에 더하여 일본 왕권신화가 구성되던 당시 천황의 아마테라스에 대한 숭배가 결합하면서 아마테라스가 최고신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더하여 아마테라스는 신화 내에서 여성성을 극도로 탈각한, 오히려 남성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와 같이 여성성을 탈각하여 자기로부터 소외되는 방식을 통하여서만 아마테라스는 남성의 신화 내에서 여성 최고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웅녀에게는 여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적 기제가 없었고, 아마테라스에게는 있었다. 또한 웅녀는 출산과 같이 여성의 영역에 속한 일을 적극적으로 간청해서 수행하고, 아마테라스는 그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다. 이 두 가지 측면에 의하여 웅녀와 아마테라스가 선 자리는 크게 달라졌고, 이는 결국 사회적권력의 방향과 신화의 관계를 보여준다. 방향에 호응하지 못한 웅녀는 사라졌고, 호응하였던 아마테라스는 살아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