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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삼국유사』 「기이」편에 수록된 「원성대왕」조를 고찰한 것이다. 「원성대왕」조는 5개의 단위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존의 논의는 여러 단위담중 일부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 글은 단위담 전반을 대상으로 논의를 확장하여, 「원성대왕」조라는 이름 아래 원성왕이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주지하다시피 원성왕은 신라 하대의 성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원성대왕」조를 구성하는 단위담은 각각 북천신, 만파식적, 호국룡, 여의주 등을 중심 소재로 삼아 원성왕의 왕으로서의 탁월함을 형상화하고 있다.
첫 번째 단위담은 신라의 모태가 되는 사로국 때부터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했던 북천신을 문화적 표상으로 끌어와서, 신라 왕조의 신, 즉 시조로부터 왕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는 원성왕을 보여준다.
두 번째 단위담은 중대 왕권의 상징이자 신물인 만파식적을 원성왕의 아버지인 효양이 원성왕에게 건네주는 것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는 상대의 시조에게 권위를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신라 중대의 계승자로 자리한 원성왕을 강조한다.
세 번째 단위담은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 사람들이 조장한 위기를 극복하고, 호국용들을 구해오는 원성왕이 그려진다. 앞서 두 번째 단위담에서 일본의 침략을 막아낸 것과 더불어 당나라의 사신으로부터 탄복을 자아내는 원성왕의 형상은 복잡한 대외관계 속에서 신라를 지키는 왕의 형상이다. 특히 하서국 사람 2명이 호국용에게 주술을 걸어 잡아가는 형상은 원성왕이 즉위하던 당시 경쟁자였던 김주원이 하서량, 즉 명주로 물러나고 그의 아들과 손자가 각각 원성왕의 손자인 헌강왕 때에 반란을 일으켰던 역사적 사실을 형상화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네 번째 단위담은 자라에게 보시를 베풀었던 사미 묘정이 그 보답으로 자라에게 구슬을 받고, 이 구슬로 인해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당나라 황제까지 만나게 되었는데, 그런데 이 구슬이 당황제가 잃어버렸던 여의주였다는 내용이다. 『장자』 외편에 실린 상망일화를 끌어와서 새롭게 구성된 이 단위담은 불교의 유사(遺事)를 기록하려 한 『삼국유사』의 편찬 의도와 관련하여 불교의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원성왕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성왕 증손자인 애장왕 때에 이르러 원성왕은 신라 왕실의 제사인 오묘(五廟)에서 ‘원성대왕’이라는 이름으로 봉안되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신라 하대의 열조(烈祖)로서 인식되었다. 원성왕 사후에 지속되었던 의례와 당대에 향유되었던 다양한 설화 및 역사적 사실들은 원성왕을 둘러싸고 새로운 신화가 만들어지는 데 일조하였다. 여기에 승려 일연의 편찬의도까지 더해져 역사적 인물이자 동시에 설화적 인물로서의 원성왕이 구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