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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時代부터 우리 나라 선인들은 白居易의 시를 읽으며 살아 왔다. 백거이는 唐代여느 시인과는 달리 자신이 新羅를 잘 알았고, 자신의 시가新羅에서 전사되어 널리 유행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 쪽 기록은 없지만, 그 당시 신라 文學家들과 교유했을 가능성도 없지않다. 1200년 경 高麗武臣亂직후에 그의 시문집인 『白樂天集』이 처음으로 고려에 전래되어 많은 문인들이 관심을 갖고 읽고, 그들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白居易는 儒學을 공부했으면서 佛敎에 심취하여 유불을 혼융한 문학적 경향을 가졌는데, 이런 점이 유학을 공부했으면서 불교가 국교인 高麗시대를 살아가는 文學家들의 성향에 들어맞았기 때문에 환영을 받았다. 高麗武臣亂직후에 활동한 林椿, 李奎報등이 백거이의 詩文을 가장 좋아하고많이 배우려고 했다. 고려말에 『古文眞寶』가 도입되어 조선시대 書塾의 필수교재가 되었다. 『고문진보』에는 백거이의 「長恨歌」, 「琵琶行」등 7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후 白居易문학은 더욱더 朝鮮의 문단의 저변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조선 중기의 許筠, 權필, 李安訥등이 특히 백거이를 좋아했는데,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許筠의 「老客婦怨」같은 작품은 백거이의 「母別子」와 내용이 흡사하고, 權필의 「忠州石」은 백거이의 「靑石」과 주제도 흡사하고, 풍자의 대상도 동일하다. 임진왜란 등을 겪고 사상적으로 혼란한시기에 사상적으로 포용적인 백거이 시가 이들의 취향에 맞지 않았나 하는생각이 든다. 高麗의 武臣亂직후와 조선조의 壬辰倭亂직후에 白居易시가 그 당대를 대표하는 문학가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것은, 白居易의 諷刺性보다는 그 達觀的경향이 더 큰 이유라 할 수 있다.백거이 시는 강한 諷刺性을 가진 시와 閒靜한 정취를 담은 閑適詩가 서로 대조를 이루는데, 둘 다 우리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져 우리 나라 문학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고려 중기 이후로 白居易의 시가, 杜甫, 李白, 蘇軾의 詩정도의 인기는 누리지 못해도 꾸준히 우리 나라 문학가들의 사랑을 받았고, 문학의 典範이 되었다. 그의 시는 평이하고 澹泊하고 솔직하다는 논평을 많이 들었는데, 평이하고 담박한 점으로 인하여 대체로 긍정적으로 白居易시를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