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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Mun Hak Bo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229-4136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6권 0호 (2012)

왕희지(王羲之) 난정수계(蘭亭修계)의 수용 양상과 시사(詩社)에 끼친 영향

박철상 ( Chul Sang Park )
우리한문학회|한문학보  26권 0호, 2012 pp. 3-32 ( 총 30 pages)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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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晋나라 永和9년(서기 353년)에 왕희지를 비롯한 42명의 문사들이 蘭亭修계를 거행한 뒤로 난정수계는 文士雅會의 모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수용하였다. 특히 <蘭亭敍>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줄곧 서법의 전범이 되었다. 이는 신라시대 이래로 왕희지체를 善書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蘭亭故事는 癸丑년이나 上巳日의 문인들 雅會에서 시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였다. <蘭亭記>나 <蘭亭詩>에 등장하는 글자나 구절을 集字하여 시를 짓기도 하고, <蘭亭記>에 등장하는 글자만으로 집자체시를 짓기도 하는 등 蘭亭修계는 詩作을 통해다양한 형식으로 수용되었다. 난정수계는 그림을 통해서도 수용되었다. 그림의 경우에는 글씨나 시문처럼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림을 통해서 蘭亭修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문사들의 雅會중에는 蘭亭修계의 뜻을 잇고자 하는 모임들도 있었다. 물론 실질적으로 蘭亭修계의 고사를 표방한 모임은 많이 있었지만, 명칭까지 난정수계를 표방한 모임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난정수계는 왕실의 유흥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正祖는 奎章閣을 설치하고, 賞花釣魚의 故事를 모방하여 봄마다 閣臣과 內苑에서 꽃구경하고 낚시질하는 것을 정례화 했다. 1788년부터 시작된 이 모임은 閣臣이 주관하였고, 閣臣이 아닌 사람은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다 계축년(1793, 정조17) 3월에 이르러 蘭亭修계의 고사를 본떠서 그 숫자를 더욱 확대했는데, 이때에는 각신이 아닌 선비들까지 참여시켰다. 이는 蘭亭修계의 숫자에 일치시키려 한 점도 있었지만, <蘭亭記>의 ``少長咸集’의 의미에 부합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정조의 계축년 內苑賞花모임은 왕희지의 蘭亭修계가 있었던 永和9년의 계축년 3월과 부합함으로써 그 의미가 부여되었고,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이는 궁중의 賞花釣魚의 고사와 蘭亭修계의 고사를 일치시킨 일로 정조의 통치행위의 일단으로도 이해할 수있는 부분이다. 이는 이후 난정수계의 수용양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정조의 知遇를 입은 여항인들이 중심이 된 玉溪詩社는 난정수계를 모방하여 성대한 시회를 열었다. 이는 19세기 여항인들의 詩社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난정수계는 그 자체가 이벤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어일반적인 시사의 경우에는 지속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는 어려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에 한 번밖에 癸丑년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詩社에서 난정수계의 의미는 이벤트적 성격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죽란시사(竹欄詩社)의 재조명(再照明)

김봉남 ( Bong Nam Kim )
우리한문학회|한문학보  26권 0호, 2012 pp. 33-72 ( 총 40 pages)
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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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죽란시사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을 재검토하여 기존 연구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점을 부연하고 기존 연구와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점을 제시하여 죽란시사의 면모를 재조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장에서는 죽란의 의미와 죽란 설치의 이유와 설치시점 등에 대해 논의하였고, 3장에서는 죽란시사의 결성시점과 결성 배경, 죽란시사의 성격과 의미 등에 대하여 논의하였으며, 4장에서는 죽란시사의 시와 흥취에 대해 논의하였다. 죽란의 의미에 있어서 기존의 ‘대 난간’으로 번역하는 것 대신 ‘대 울타리’로 풀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죽란은 다산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였다. 죽란 설치 시점은 다산의 나이 33살인 1794년 7월8일이거나 그 이전으로 추정되며, 죽란을 설치한 이유는 퇴청한 뒤 휴식을 취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즉 宦路에서 느낀 고단하고 우울한 심신을 위로하고 정화하기 위해서였다. 죽란시사의 결성시점은 1796년 5월 중순에서 6월 중순 사이로 볼 수 있으며, 죽란시사 결성 배경과 이유는 당시 다산이 무직 상태에 있으면서 進退를 고뇌하던 차에 도리어 와해된 남인 인사들을 규합하여 친목와 결속을 도모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산과 채홍원이 주동이 되고 총 15명의 남인의 인사가 참여한 죽란시사는, 단순한 친목도모를 넘어서 남인 蔡黨의 인사들을 규합하고 결속하는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가슴에 맺힌 울결과 분노를 표출하고 위로하며 동지애를 쌓아갔던 모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아회도의 조형성과 그 표상

송희경 ( Hee Kyung Song )
우리한문학회|한문학보  26권 0호, 2012 pp. 73-99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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雅會는 성대하고 형식적이며 출사를 기념하는 太平연飮의 公會와는 다른, 시문풍류에 치중한 비공식적인 私會이다. 본 논문에서 규정한 雅會는 모임이 자발적이며, 풍류적 성격을 띠고 있되, 참석자들이 대화를 비롯한作詩·彈琴·圍碁·書畵제작과 감상·煎茶·飮酒등의 행위를 하는 모임이다. 문인들은 모임에서 풍류를 통하여 ``雅``를 실현하려 했고, 이에 그들이 선택한 유희는 ``琴棋書畵``였다. 고상하고 우아한 군자의 삶을 지향한문인들은 동료와 품위 있고 운치 있는 모임을 즐기기 위하여 평소 존경하였던 과거의 은일 고사들의 행위를 모방하였고, 금기서화를 친목도모의 풍류에 응용하여 실천했다. 18세기 후반에 아회도를 많이 제작한 인물은 金弘道(1745-1806이후) 이다. 金弘道는 사대부 뿐 만 아니라 여항인의 아회에 참석하여, 아회인과 함께 어울리면서 모임 장면을 그렸다. 그는 역사적 高士인물의 여러 도상을 차용하여, 고금의 조화를 화면에 실현하였다. 즉 이상적인 아회인을 창출하기 위하여 전형적인 고사 인물상을 빌려왔고, 이를 동시대의 실물 풍속과 결합하여 새로운 풍류상을 창조한 것이다. 雅會는 기본적으로 문인들이 주도하여 형성된 문화 현상이었다. 따라서 문인의 성격, 예술적 취향, 여가 활용의 방법에 따라 아회의 현장 분위기도달랐다. 고결함과 순수함을 추구하였던 문인들은 인간의 교류에서 바르고 도덕적이며 조화로운 관계가 형성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관계는 ``俗``되지 않은 ``우아``한 예술 행위와 유희에 의하여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회도는 이상적인 군자들의 도덕성과 탈속적인 市隱者의 풍류성을 모임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문인들의 시각 창작물이었다.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의 시사(詩社)활동과 그 정치적 활용

백승호 ( Seung Ho Baek )
우리한문학회|한문학보  26권 0호, 2012 pp. 101-127 ( 총 27 pages)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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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은 문학을 정치적으로 잘 활용한 인물이다. 그는 시사 활동을 통해 동당 후학들의 문학적 능력을 배양하고, 그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관로에 진출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가 정치적인 시련을 당해 재야에 있을 때에는 시회에서 古詩라는 원형적 형태의 시를 수창하였는데, 이는 본인들의 시회가 교유를 위한 문자 응수가 아니라 문학의 본질에 가까운 시를 짓는 시회라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또한 시회에서의 고시 수창은 참여자의 문학적 역량을 보이고, 고시 형식이 갖는 경세제민의 뜻을 세상에 보이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사는 혈연과 사승 관계를 통해 맺어진 결집력이 강한 모임이었고, 소인배가 아닌 지조 있는 군자들의 결사라는 점을 강조한 사대부 문인 결사이었다.

동아시아 삼국간의 "이성적 대화"에 관한 성찰

임형택 ( Hyong Taek Lim )
우리한문학회|한문학보  26권 0호, 2012 pp. 129-163 ( 총 35 pages)
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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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동아시아 삼국이 어떻게 과거의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의 안녕과 평화를 모색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16세기 이후 흔들린조공질서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심각한 문제의식과 사상적 각성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성적 대화’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극복하는 핵심은 과거 삼국의 이성적 대화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글에서는 한일 지식인 사이에 싹튼 ‘이성적 대화’에 주목한다. 먼저 오규소라이(荻生조徠)의 대외 인식과 조선관에 대해검토하고, 조선통신사행을 계기로 이루어진 한일 지식인 사이의 지식교류의 실상을 살펴보았다.

동아시아 학술교류의 회고와 전망

장백위 ( Bo Wei Chang )
우리한문학회|한문학보  26권 0호, 2012 pp. 165-192 ( 총 28 pages)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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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학술 교류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살펴보려면, 먼저 동아시아학술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회고와 반성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의 현대 학술은 서양 학술 관념의 충격과 계발 하에 형성되었으며, 19세기 이래 범세계적 범위에서의 漢學연구는, 漢學(Sinology)에서 中國學(China Studies)으로의 변환이 있었다 하더라고, 결국에는 모두 서양학술 구조의 일부분이었다. 구미의 漢學연구 학계에서 漢學家들이 기꺼이 인정하는 중국학자들의 작업 가치는, 주로 문헌의 정리나 고증 상에만 체현되며, 이론과 방법론적측면에 대해서는 그들 나름대로 구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전통 이외의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에 대해 우리는 냉정하게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혹시 연구 작업 과정에서 문헌 수집과 정리만을 중시하고 문제제기나 분석은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만약 우리의 연구 작업에서, 과제선택·이론가설·사고체계·주제의 의의 및 가치 등이 모두 구미 漢學에서 빌려온 것이라면, 어떻게 과분하게 그들의 주목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방법으로서의 중국’을 주장한 일본의 미조구치 유조와 한국의 백낙청, 대만의 陳光興선생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이들은 여영시선생의 주장처럼 중국이나 아시아를 주체로 삼아 다시 다양한 내재적 실마리를 바탕으로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일본의靜永健선생이 지적한 것처럼 ‘같은 시기 동일문화권 내 주변지역의 문화정치의 連動’에 대해서도 주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중국 이외의 자료에서 중국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域外漢籍硏究’를 제안한다. 域外漢籍은 풍부하고 방대한 학술 자원으로, 우리에게 무수하고 신선한 학술 화제를 제시해주며 새로운 학술방법과 학술이념을 마련해준다. 그러한 까닭에 역외한적은 이미 고전학문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빠져서는 안 될 자료이며, 그 자체 또한 고전학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新資料이든 新觀念이든간에 그것들은 舊資料·舊觀念과 서로 맞물려 호응하고 參證하는 관계이지, 서로 대립하고 공격하거나 대체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료는 관념의 통솔을 받으며, 방법은 연구 대상과 연구 목적에 의해 결정된다. 동아시아 지식인은 서양문명에 대한 대응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동아시아 문명 간의 대화를 홀대하였다. 문학 방면에 있어서도, 동아시아 문학을 제쳐두고 멀리있는 문학에만 관심을 가졌다. 동아시아 지식인이 동아시아내의 교류와 대화는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 삼국 교류의 미래는 이러한 시야와 시각에서 관찰되고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홍대용의 『건정동회우록(乾淨동會友錄)』과 그 개변(改變)

부마진
우리한문학회|한문학보  26권 0호, 2012 pp. 193-263 ( 총 71 pages)
1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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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의 『乾淨동會友錄』과 『乾淨筆譚』은 18세기 동아시아가 낳은 奇書이다. 필자는 이 책들이 前近代조선과 중국의 교류에 관한 중요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동시대 조선, 중국 그리고 일본의 정신적 위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본다. 확실히 『乾淨동會友錄』의 등장은 조선에서 역사적인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乾淨동會友錄』의 텍스트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 책이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필자는 최근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서 사료조사를 한 결과 『乾淨동會友錄』 1책을 발견했다. 이번에 발견된 것은 전 3책 중 1책에 불과하지만,홍대용 본인의 자필본 즉 개인소장본으로써 개정판 『乾淨筆譚』의 기초가되고 20세기에 『乾淨동筆談』이 편찬되었을 때에도 그 토대가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본고는 『乾淨동會友錄』, 『乾淨筆譚』, 『乾淨동筆談』 세 자료의 텍스트연구를 중심으로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乾淨동會友錄』은 홍대용의개인소장본 秘本으로 세상에 나왔다. 『乾淨筆譚』은 『乾淨동會友錄』의 개정판으로 홍대용이 정본으로 공개할 것을 전제로 다시 편찬한 것이었다. 한편, 『乾淨동筆談』은 겨우 1939년에 출현한 자료에 불과하며 현재로서는홍대용 자신이 이 서명을 붙였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다. 확실히 『乾淨동筆談』은 『乾淨筆譚』에 비교하면 내용은 많지만 매우 엉성하며, 『乾淨동會友錄』을 기초로 편찬되기는 했지만 홍대용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음이 명백하다. 본고에서는 이상과 같은 내용을 텍스트에 의거해서 서술하였다. 그리고 『乾淨동會友錄』과 『乾淨筆譚』, 『乾淨동筆談』에서 개변된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홍대용이 『乾淨동會友錄』이라는 서명을 왜 『乾淨筆譚』으로 바꾸었는가 하는 문제도 살펴보았다.

한국한문학(韓國漢文學)에서의 백거이문학(白居易文學)의 수용양상(受容樣相)

허권수 ( Kweon Soo Heo )
우리한문학회|한문학보  26권 0호, 2012 pp. 265-299 ( 총 35 pages)
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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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時代부터 우리 나라 선인들은 白居易의 시를 읽으며 살아 왔다. 백거이는 唐代여느 시인과는 달리 자신이 新羅를 잘 알았고, 자신의 시가新羅에서 전사되어 널리 유행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 쪽 기록은 없지만, 그 당시 신라 文學家들과 교유했을 가능성도 없지않다. 1200년 경 高麗武臣亂직후에 그의 시문집인 『白樂天集』이 처음으로 고려에 전래되어 많은 문인들이 관심을 갖고 읽고, 그들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白居易는 儒學을 공부했으면서 佛敎에 심취하여 유불을 혼융한 문학적 경향을 가졌는데, 이런 점이 유학을 공부했으면서 불교가 국교인 高麗시대를 살아가는 文學家들의 성향에 들어맞았기 때문에 환영을 받았다. 高麗武臣亂직후에 활동한 林椿, 李奎報등이 백거이의 詩文을 가장 좋아하고많이 배우려고 했다. 고려말에 『古文眞寶』가 도입되어 조선시대 書塾의 필수교재가 되었다. 『고문진보』에는 백거이의 「長恨歌」, 「琵琶行」등 7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후 白居易문학은 더욱더 朝鮮의 문단의 저변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조선 중기의 許筠, 權필, 李安訥등이 특히 백거이를 좋아했는데,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許筠의 「老客婦怨」같은 작품은 백거이의 「母別子」와 내용이 흡사하고, 權필의 「忠州石」은 백거이의 「靑石」과 주제도 흡사하고, 풍자의 대상도 동일하다. 임진왜란 등을 겪고 사상적으로 혼란한시기에 사상적으로 포용적인 백거이 시가 이들의 취향에 맞지 않았나 하는생각이 든다. 高麗의 武臣亂직후와 조선조의 壬辰倭亂직후에 白居易시가 그 당대를 대표하는 문학가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것은, 白居易의 諷刺性보다는 그 達觀的경향이 더 큰 이유라 할 수 있다.백거이 시는 강한 諷刺性을 가진 시와 閒靜한 정취를 담은 閑適詩가 서로 대조를 이루는데, 둘 다 우리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져 우리 나라 문학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고려 중기 이후로 白居易의 시가, 杜甫, 李白, 蘇軾의 詩정도의 인기는 누리지 못해도 꾸준히 우리 나라 문학가들의 사랑을 받았고, 문학의 典範이 되었다. 그의 시는 평이하고 澹泊하고 솔직하다는 논평을 많이 들었는데, 평이하고 담박한 점으로 인하여 대체로 긍정적으로 白居易시를 받아들였다.

괴담배상열(槐潭裵相說)의 『중용(中庸)』 분절설(分節說)

최석기 ( Seok Ki Choi )
우리한문학회|한문학보  26권 0호, 2012 pp. 301-333 ( 총 33 pages)
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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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相說(1759~1789)은 李象靖의 문인으로 四書와 성리서에 침잠하여 경학과 성리학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이상정의 通看의 시각을 수용하여 경서해석에 있어서도 대전본을 텍스트로 하여 주자의 주석에만 천착하던 풍조에서 벗어나 朱子의 衆說을 모두 수집하고, 주자 이후 諸儒들의 설을 두루 채집하여 폭넓게 해석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四書纂要-中庸』에는 「中庸圖」와 「中庸總論」등이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해 『중용』분절설의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배상열의 「中庸圖」는 張顯光의 「中庸之圖」를 근본으로 하면서 제1장의 그림만 權近의 그림으로 대체한 것이다. 둘째, 배상열이 권근의 『入學圖說』에 있는 「中庸分節辨議」를 그대로 인용해 놓고 있는 것을 보면, 권근의 5대절설을 자신의 5대절설의 논거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中庸總論」에 史伯璿의 설을 그대로 인용해 놓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5대절설의 논거를 사백선의 설에서 찾은 것임을 말해준다. 이는 종래 「중용장구서」의 ``支分節解’에 천착해 분절설을 제기하던 시각에서 벗어나, 각 대절의 요지를 파악해 그 연관성을 검토하는 데 더 비중을 두는 시각이다. 배상열의 분절설이 갖는 경학사적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독중용법」의 6대절설 및 『중용장구』 장하주의 4단락설을 모두 따르지 않고장현광의 5대절설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독자적인 5대절설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해석의 장을 열어놓았다. 둘째, 權近과 張顯光의 5대절설을 수용하면서 史伯璿의 설에서 논거를 찾아 자신의 설을 완성한것은 饒魯의 6대절설 및 「독중용법」의 6대절설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셋째, 18세기 韓元震이후 4대지설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 속에서 5대절설을 제시하여 4대절설이 꼭 주자의 정설이라고 볼 수 없다는 시각을 제공하였다. 넷째, 배상열은 대전본 위주로 경직된 해석을 하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주자 이후의 다양한 설을 섭렵하여 通看의 시각을 마련하였다. 다섯째, 『중용』 분절설에 새로운 논의를 제공함으로써 이후 영남에서 李震相·郭鍾錫등이 독자적으로 새로운 분절설을 제기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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