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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literary theory and criticism (KLTC)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598-3501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54권 0호 (2012)

김동리 문학의 바이오 휴머니티

권택영 ( Kwon, Teckyoung )
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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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김동리의 대표 단편 들 속에 나타난 공통된 징후들을 살펴보고 그것을 “바이오휴머니티” 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연구이다. 데카르트의 주체는 근대 이후 인본주의의 출발이었다. 인간의 사유를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규정한 그의 철학은 동물과 자연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고 기술과학의 무한한 발달을 통해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다. 그러나 그사이에 자연은 개발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오염되고 인간과 동물, 식물, 무생물의 관계는 유리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자연의 복수를 조금씩 체험하고 있다. 김동리는 거의 한 세기 전에 이미 기술과학의 병폐를 인식하고 자연과 문명이 어떤 관계를 이루어야 평화와 공존이 가능한지 모색하였다. 그는 서구의 합리주의에 대해 저항했던 니체, 하이데거, 토마스 만의 인문학에 심취하면서 동시에 한국인으로 풍속적 믿음체계, 음양의 도사상, 불교를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근대의 메마른 인간중심 합리주의를 고대 자연철학과 연결하여 사유한 그는 자신의 사상을 “구경적 문학,” 혹은 “제삼의 휴머니즘”이라 이름 붙인다. 그리고 문명과 자연의 갈등관계를 작품속의 인물이 보여주는 본능적 갈구와 사회적 요구 사이의 갈등으로 재현한다. 혼인제도, 근친상간, 죽음충동 등의 주제는 샤머니즘. 기독교, 불교, 도사상등과 어우러지고 문학과 현상학의 경계도 무너진다. 등신불과 예수의 처형을 극화한 부활을 대조하여 불교와 기독교의 소통과 조화를 모색한 그는 음양이 조화를 이루듯이 인간이 대상(타자)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 가지 다른 징후들로 재현하였다. 이런 작품세계는 인간을 다시 동물과 자연 속에 위치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고 실패와 비극적 결말을 넘어서는 길을 암시한다. 인간은 동물이면서도 동물이 아니다. 그러기에 진화는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여기에서 김동리 문학을 “바이오휴머니즘”이라는 간결하고 분명한 용어로 다시 규정해본다.

시나리오 「역마」에 나타난 ‘길’의 형상 연구

김남석 ( Kim Namseok )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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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60년대 한국 시나리오의 영상 미학을 이해하고 검토할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역마」가 분석 대상 작품으로 선정되었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1960년대 한국 문예영화 양식의 미학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문예영화 시나리오에서 발견되는 문학적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1960년대 문예영화 시나리오는 언어가 지닌 설명적 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짧고 간결하지만 영화만의 문법을 찾을 수 있는 대목은 매우 드물었다. 당시 문예영화의 성공과 실패는, 영화의 두 가지 추동력인 의미 추구와 형식 기법, 문자성과 역동성, 문예 미학과 영상 미학의 조화와 불균형을 상징하고 그 문제점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이후, 문학성의 극복과 영상 미학의 독자적 개발은 한국 영화의 과제로 남겨진다. 하지만 문예영화 시나리오 「역마」는 다른 작품들과 달랐다. 이 시나리오는 영상 미학의 극대화를 위한 형식적 전략을 구사했다. 1960년대 최금동 김강윤의 각색 작업은 영상미학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때의 영상 미학은 ‘길’의 영상화로 압축될 수 있다.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길, 음향 효과로서의 길, 그리고 인물의 시선으로서의 길이 그것이다. 이러한 길은 사랑하는 남녀 사이의 인연과 운명을 영상으로 보여줄 것이다.

「밀다원 시대」에 나타난 ‘부산’과 ‘밀다원’의 장소감

송명희 ( Song Myunghee )
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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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김동리의 소설 <밀다원 시대>에 재현된 ‘부산’과 ‘밀다원’의 대립적인 장소감에 대해 분석하였다. <밀다원 시대>는 19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온 문인들이 처했던 모습과 실존의식을 보여주는 전후소설이다. 주인공 이중구는 피난처인 부산을 낯선 공간으로 인식하며, 땅끝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밀다원 다방에서는 땅끝의식을 잊어버리고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밀다원은 부산 속의 작은 서울이라 할 수 있는, 서울에서 온 문화예술인의 아지트였던 것이다. 서울에서 피난 온 문인들에게 부산은 결코 친밀한 장소가 아니라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공간이었으며, 그들에게 위안과 친밀감을 주었던 유일한 장소는 밀다원이었다. 이중구는 밀다원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문화예술인들과 피난민 처지를 공유하며 진정한 장소감을 갖게 된다. 이-푸 투안과 에드워드 렐프의 개념대로 표현하자면 <밀다원 시대>의 부산이란 ‘공간’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장소감은 소위 땅끝의식이라 표현된 ‘장소상실’이라 규정할 수 있다. 반면 밀다원은 ‘장소’이며, 주인공의 밀다원에 대한 장소감은 즐겁고 흥분되는 감정상태를 유발하는 ‘장소애’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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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의 소설 「달」, 「늪」, 「진달래」는 달의 월상(月相)과 관계된 우주적 리듬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 이미지를 아름답게 보여준다. 이로써 김동리는 천상의 달과 지상의 인간이 혼융되고 있는 신화적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달」에서는 주인공이 달의 현현에 따라 순환적 생성의 상상력을 추구하는 달 동물(lunar animal)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른 인물들은 신화적 사고를 잘 보여주는 동형성의 원리에 따라 주인공의 분신으로 묘사된다. 「달」에 나타난 신화적 이미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달이의 죽음이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달-물-뱀-죽음-주기적 재생의 순환 구도 속에서 존재론적 전환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늪」에서는 죽은 물의 이미지가 식물적 이미지로 변용된다. 이것은 다시 마음 속 불 이미지로 바뀌어 모태로 회귀하는 죽음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진달래」의 경우는 꽃을 먹고 꽃에 빠져 죽는 인물의 이야기가 신화적 이미지를 통해 「늪」과 동형성을 이루고 있다. 꽃을 먹는 행위는 죽은 어머니와 일치되는 것을 의미하며 주인공 성혜의 죽음은 식물화된 불 이미지를 자신의 내부로 침잠시킴으로써 신화적 세계로 침잠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김동리의 이 세 작품은 다양한 신화적 모티프를 공유하면서 유사한 신화적 공간을 만들어간다. 신화적 인물인 아이는 양성적인 특성을 가지며 어머니에 집착하거나 근친상간적 관계에서 비롯된 죽음에 이른다. 이러한 죽음은 성스러운 공간으로의 이동으로 나타난다. 세 작품에서 인물의 공간 이동은 신화적 이미지로 묘사된 경계 공간으로의 하강 구도를 갖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 작품 모두 내면으로의 하강 구도는 요나적 공간으로의 침잠이다. 김동리는 다양한 신화적 이미지의 사용과 중복·전복의 기법으로 하강을 완곡화하는 물질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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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의 작품세계에서는 현실세계에 대한 절망적 인식과 초월적 힘 앞에서 패배하는 인간의 왜소함이 많이 드러난다. 김동리는, 인간의 힘을 과신하고 진보를 낙관한 근대적 사유의 반대편에 섰으며 또한 한국적 사유와 문화에 천착했다. 그리고 한국적 사유와 문화에 대한 천착은 세계문학 속에 한국 문학을 위치 짓고자 하는 열망으로 연결되었다. 김동리가 세계문학 속의 한국문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증명해보고 싶어 했다면 여기서 필요한 것이 비교문학 그리고 비교문화 관점에서의 연구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신화적 상징과 원형들은 비교문화의 관점에서 연구할 때 이전까지의 연구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의미들을 풍부하게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비교문화의 관점에서, 지금까지의 연구와는 다른 시각에서 김동리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고자 하며, 분석 대상 텍스트는 김동리의 대표작 중 하나인 「까치소리」(1966)와 자크 드미 감독의 프랑스 영화 <쉘부르의 우산>(1964)이다. 두 텍스트는 동시대 다른 문화에서 배태된 작품들로서 유사한 모티프와 상징들을 공유한다. 또한 두 텍스트 모두 유사한 소재들을 통한 비극적인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도 비극의 질감과 밀도가 매우 다르며 전혀 다른 결말을 향해 갔다. 본 논문에서는 소재와 모티프와 주제적 유사함 그리고 동시대라는 배경으로부터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텍스트 내적 요인들과 더불어 그 기반이 되는 문화적 차이를 고찰하려 했다. 「까치소리」에서 주술적 속신으로 상징되는 초자연적 힘 앞에 패배하는 인간의 모습이 형상화 되어 신화적인 세계관을 구축했다면, <쉘부르의 우산>에서는 합리성에 근거한 타협이라는 현실적인 세계관을 형상화 했다. 그리고 이런 차이의 기반에 작가와 감독의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세계관은 동시대 한국과 프랑스의 다른 문화적 맥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본론의 2장에서는 모티프와 주제적 유사성과 차이점을 분석했으며 이러한 유사성과 차이점이 형성하는 각각의 텍스트의 세계관을 고찰했다. 또한 3장에서는 매체와 장르의 다름에 따른 서술기법의 차이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미학의 스펙트럼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텍스트의 내재적 차이뿐만 아니라 텍스트와 상호영향 관계에 있는 문화적 맥락을 보다 정치하게 드러낼 수 있었고, 김동리 문학을 비교문학 비교문화의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었다. 「까치소리」에서는 거대한 운명의 힘 앞에 처절하게 패배하는 인간상이 형상화 되었고 그 비극적인 결말을 이끌어낸 가장 시초의 근원은 한국적 속신에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근대적 의미에서의 인과관계 논리와는 상관이 없다. 한국의 60년대는 근대화와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으나 지나치게 빠른 근대화와 산업화는 문화지체현상을 가져왔으며, 사람들의 의식은 전근대와 근대의 과도기에 머물러 있었다. 작가 김동리는 의도적으로 근대성에 저항했으며 그것은 한국의 신화적 상상력을 찾아 고대로 회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 60년대 프랑스의 지성들은 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진보에 대한 낙관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표출하고 있었다. <쉘부르의 우산> 역시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의해 희생되는 인간 개인의 슬픔과 고통이 스며들듯이 형상화 되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둡지만은 않다. 문화적 맥락을 기반으로 각각의 텍스트에서, 소재와 모티프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차이를 만드는 여러 기제들이 있으나 본 논문에서는 매체적인 특성에 따른 인물화의 방식, 특히 남성 인물의 캐릭터 차이에 주목했다. 이는 곧 여성인물이 종교적 차원으로 형상화 되는가 아니면 단지 첫사랑의 대상으로 형상화 되는가의 차이로 연결된다. 이는 또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원형이 각각의 캐릭터에서 어떻게 다르게 구현되는가의 차이로까지 이어지며, 결국 주술적 세계관과 합리적 세계관이 구축하는 미학의 다른 지평을 보여준다. 김동리의 「까치소리」는 <쉘부르의 우산>과 유사한 모티프와 소재를 가지고 있고, 유사한 내용 전개 양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까치소리」의 신화적 세계관과, 속신과 인과론적으로 연결된 충격적인 결말과 그로 인한 비극적 정서는 결코 만만치 않은 미학적 무게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이는 제3세계의 문학 중에서도 특히 주목받지 못해 온 한국문학의 현 주소를 그대로 알려 준다. 김동리가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사의 한 자리에 위치시키고자 열망했던 그 시대로부터 반세기 가량의 시간이 경과한 현재 시점에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아주 많이 달라졌으나 한국문학은 여전히 세계문학의 변방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그 이유가 한국문학 중 뛰어난 작품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한국문학의 특수성과 세계문학의 보편성을 아우르는 관점에서 주옥같은 작품들을 세계무대에 널리 알리는 데 좀 더 노력해야 할 것이며, 비교문화의 관점에서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 될 수 있다.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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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이광수, 최두선, 안확 등이 1910년대 제시했던 ‘지(知)’ㆍ‘정(情)’ㆍ‘의(意)’ 담론은 ‘감정’에, 지식 및 도덕으로부터 분화된 독립적 위상을 부여했으며 근대문학을 감정과 밀접하게 연관된 영역으로 인식했다. 1920년에 이르면 ‘감정’에 대한 논의는 보다 세분화되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논의의 과정에서 ‘감각’으로 일컬어진 영역에 대한 탐색 또한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에서는 1930년대 문학 관련 담론에 나타난 ‘감각’ 관련 개념의 의의를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기에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ㆍ중반 문학 담론에서 ‘감각’ 관련 논의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 주목하지 않았다. 프로문학에 나타난 감각 관련 담론을 논의한 최근 연구들은 ‘감각’ 관련 연구의 대상을 1920년대 초반의 문학론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연구 역시 1920년대 부각된 ‘감각’ 관련 담론이 1910~1920년대 형성되었던 ‘감정론’과 맺고 있는 관계를 명확하게 부각시키지 못했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기존 연구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본 연구에서는 우선 1900~1920년대 감각 관련 개념의 사용 양상을 통시적으로 분석하며 1920년대 초ㆍ중반 김기진 비평에 나타난 ‘감각’ 개념이 앞의 시기 사용되었던 ‘감각’ 관련 개념과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양상에 주목했다. 1900년대 ‘감각’에 대한 논의는 인간 정신 활동의 특성을 규명하는 글들에서 주되게 진행되었다. 이 글들은 인간의 정신 활동을 다층적 층위로 구분했으며, 그러한 논의들 중 일부는 인간의 정신 활동을 지(智)ㆍ정(情)ㆍ의(意)로 구분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감각’은 한편으로는 지(智), 즉 인식의 측면과 연관된 활동으로 이해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情), 즉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으로 논의되었다. 정신 활동에서 ‘감각’이 차지하는 역할은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지만, 서구의 학문을 수용하여 소개했던 1900년대의 논자들은 ‘감각’을 외부 세계와 교섭하는 자아의 활동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초반에 이르면, ‘감각’ 관련 담론의 지평은 확장되기 시작한다. 우선 ‘감각’ 개념은 ‘미적(美的)인 것’의 본질을 탐색하는 논의들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의들 역시 ‘감각’을, 감각기관을 통해 자아 외부의 사물을 수용하는 활동으로 정의했다. 이 시기의 논의를 대표하는 이광수와 현철, 신식 등은 ‘감각’이 미적(美的) 체험과 관련되었다고 보았지만, ‘감각’만으로는 미적 체험의 본질에 다다를 수 없다고 역설했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청각’, ‘시각’, ‘후각’ 등의 오감(五感)만을 ‘감각’으로 규정하던 시각에서 벗어나 감각의 역동적 역할을 강조하는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김기진의 비평 「감각의 변혁」에서 확인될 수 있다. 김기진 비평에 나타난 ‘감각’ 관련 개념의 의의는 전 시대의 ‘감각’ 개념과의 비교를 통해 보다 명확하게 논의될 수 있다. 첫째, 김기진의 비평은 ‘감각의 변혁’을 주창하며 ‘감각’의 능동적 성격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두 번째, 김기진은 개별 주체의 감각만을 논의했던 전 시대의 문제설정에서 벗어나, ‘대중’이라는 집합적 주체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감각’을 탐색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는 1920년대 후반부터 김기진이 주창했던 대중화 담론에서 맹아적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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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해방기 이전 오장환 시에 나타난 육체와 퇴폐를 모럴과 인륜성 문제에 연결시켜 논의하였다. 육체는 전근대적 인륜성과 식민지 근대의 물화된 현실이란 이중의 억압이 가로놓인 곳이자, 억압에 대한 저항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를 부정하려는 탈향의 선언과 낯선 도시의 타락한 현실을 폭로하려는 데카당스의 고뇌와 절규로 표출된다. 이런 점에서 오장환 초기시에서 낡은 인륜적 질서를 부정하고 도시문명이나 세계정세의 허위성에 저항하는 윤리의 거점으로서 내적 모럴이 지니는 의미가 문제가 된다. 본고는 오장환이 추구했던 내적 모럴을 육체와 퇴폐를 바라보는 분열된 시선을 통해 분석하고, 이를 냉소와 자조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내적 모럴에 대한 탐색은 오장환을 귀향으로 이끌었다. 고향은 이제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을 표상하는 공간이자, 헐벗은 민중들이 식민지적 타자의 얼굴로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바뀐다. 그러니까 ‘탕아의 귀환’은 고향을 자신의 모럴과 새로운 공동체적 인륜성을 합치시킬 공간으로 표상하는 극적 전환을 보여준다. 이는 국가 및 민족 담론이 다양하게 분출되었던 일제말과 해방기의 시대 상황 속에서, 다른 생명파 시인들과 구별되는 정치적, 윤리적 선택을 감행했던 오장환의 시적 실천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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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현진건의 「고향」과 그것의 일본어 번역 「창작번역 조선의 얼굴(創作飜譯朝鮮の顔)」를 비교함으로써 문학 번역의 문제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원작과 거의 동시에 발표된 일본어 번역은 번역자를 명시하지 않은 채 표제에 「창작번역(創作飜譯)」을 병기했다. 창작과 번역 사이의 다양한 관계의 가능성을 내포하는「創作飜譯」은 현진건의 창작과 번역 행위를 둘러싼 인식을 규명하기 위한 재료이다. 문단 활동 초반, 일본어를 매개로 서구 문학의 번역으로‘습작’했던 현진건의 소설 장 구축의 프로세스를 해명하는 단서가 된다. 따라서 일본어번역을 통해 화자의 위치를 반성, 제고하면서 소설 장르의 공통 규범ㆍ규칙ㆍ공공성에 대한 자각이 소거시킨 사적 언어ㆍ해학성ㆍ반어(irony)ㆍ언어의 억압적 상황 등에서 번역 불가능성과 텍스트의 자립성의 문제를 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의 분석을 통하여 원작은 다중언어의 상황을 주제화했다는 새로운 해석이 제출된다. 그러므로 이 글이 식민지의 이중 언어 상황 속에서 이질적 언어와 교섭하면서 형성된 한국 현대문학의 특질 및 번역이 언어와 문학에서 발생시키는 논의로 연계하는 시야를 열어줄 것으로 전망한다.

박완서 소설의 대중성 연구 -1980년대 여성문제 소설 다시 읽기

김양선 ( Kim Yang-sun )
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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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박완서의 80년대 여성문제 소설이 지닌 대중성의 근원을 재독해하고, 이를 가정성의 전복과 ‘복수의 글쓰기’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박완서의 80년대 여성문제 소설 『서 있는 여자』, 『살아있는 날의 시작』,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몇 가지 정형성을 담보하고 있다. 정서적·사회적으로 미성숙한 여성이 연애나 결혼제도를 겪으면서 모종의 각성을 하게 되는 성장서사의 양식이라는 점, 가부장 제도와 근대적 개인, 남성과 여성 간의 선/악의 대립구도를 택한 점, 후발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의 속악성을 특유의 직설적인 언어로 폭로한 점이 그것이다. ‘가정성으로부터의 탈주, 여성의 성장’에서는 박완서 소설의 여성들이 가정성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면서도, 이 여성상에 부과되는 수동적이고 억압적인 측면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사용한 점에 주목했다. 이 여성들은 결혼이나 출산을 계기로 자신의 일과 욕망을 억압당하는 ‘반(反) 성장’의 길을 걷지만, 일부일처제를 벗어난 모성의 구현, 이혼으로 자기만의 방 가지기, 섹슈얼리티의 발현이라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대안적인 성장을 모색한다. 가부장 제도와 근대적 개인, 남성과 여성 간의 선명한 선/악 대립구도는 박완서 소설이 쉽게 읽히는 데 기여한다. 박완서의 여성문제 소설에서는 가부장적인 남성이나 시집과 착하거나 자의식 강한 여성 간의 대조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는 도덕적 양극화와 도식화, 극단적인 행동, 공공연한 악행, 선한 사람들에 대한 박해와 같은 대중소설의 반복적 표현양식을 차용한 것이다. 박완서 소설은 정서적으로 강렬한 동시에 도덕적, 교훈적이어서 여성독자에게 감정이입의 효과를 자아낸다. ‘치욕과 분노의 언어 전략, 복수의 글쓰기’에서는 부르주아 계층의 속악성, 지식인의 이중성, 가부장제도의 폭력성에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이 직설적이고 심지어 선정적이기까지 한 고유의 문체전략으로 드러난다는 점에 주목했다. 여성문제 소설에서 여성인물들이 느끼는 치욕, 참담, 분노와 같은 감정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이런 자본주의적 가부장의 힘을 고발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복수의 글쓰기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박완서의 80년대 여성문제 소설들은 자기 계급의 이중성을 폭로하는 윤리감각을 획득하고, 자의식적이고 도덕적인 여성 개인을 주체의 자리로 부상시켰다는 점에서 계몽과 윤리의 귀환으로 평가할 수 있다.

김훈 소설에서의 시간의 문제 - 『남한산성』을 대상으로

김주언 ( Kim Joo-eon )
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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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훈의 「남한산성」을 무엇보다도 한 편의 시간론의 담론장으로 읽는다. 「남한산성」에서 시간은 서술자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인물의 담론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기표의 현실이고, 나아가 텍스트의 무의식으로 내면화된 심층 무의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작가는 일단 내면성을 중시하는 시간의식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시간 문제를 담론화한다. 영도의 글쓰기로 펼쳐진 시간론은 시간론을 감당할 만한 인물의 사유와 상황 속으로 코드화되는데, 그 구체적인 모습이 영원론과 신생론이다. 시간을 사물의 시간과 사건의 시간으로 구분하는 관점에서 말하자면 크로노스의 시간은 아이온의 시간이 되는 셈이다. 이때 시간은 비로소 역사가 되고 삶이 된다. 결국 작가의 궁극적 선택과 옹호는 전(前)근대적이거나 탈근대적인 우주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입장은 우주적 시간에 대한 신비화로까지 발전하지는 않는다. 다만 진보의 역사적 시간이 상정하는 목적론적 시간관에 거부를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김훈의 시간 인식이 제기하는 문제들의 함의의 함의들을 숙고할 때, 궁극적인 문제는 이런 것이다. 즉, 그렇다면 우리는 김훈의 텍스트에서 영원의 단순 순환 반복이 아니라 의미 있는 차이를 생성하는 반복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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