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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774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10권 0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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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나는 이병주의 소설 『관부연락선』(1968~1970)을 중심으로, 한 (후기)식민지인의 독서편력이 후기식민지 분단국가의 정치적 격동에 대한 해석과 정치적 선택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논했다. 이를 위해 자전적 소설들과 독서편력기를 대상으로, 소설가 이병주가 제국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의 유학 체험을 통해 습득한 쇼와 교양주의와 그 극복 과정에서 만난 책들을 목록화하고 이 목록들이 서사와 삶 안에서 갖는 기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많은 교양주의자들이 그러하듯이 이병주는 사건과 경험을 이미 존재하는 책들에 대조하는 방법을 통해 파악하려 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독해가능성`` 안에서 사유한 전형적 독서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병주가 써야 했던 식민지에서 해방, 전쟁과 분단, 혁명과 반혁명, 전위(前衛)에서 투옥자로의 전락, 정치평론가에서 소설가로의 추방의 경험은 좀처럼 책의 질서 안에서는 포착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 경험을 지도화하기 위해 그의 책읽기와 인용은 늘어가는데, 나는 이를 ``끝낼 수 없는 겹쳐 읽기``로 규정하였으며, 이러한 사건-책의 계속적인 대조 자체가 이병주의 독특한 창작방법론이었음을 밝혔다. 예컨대 청춘의 독서로서 차후의 실천과 전향의 논리를 이끈 미키 기요시와 고바야시 히데오, 식민지말의 학병 경험과 노예 의식을 위무한 도스토예프스키, 해방 정국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의 사상적 편력과 언론인 생활을 지배한 루쉰, 5 · 16군사쿠데타 직후의 투옥과 언론계 축출, 소설가로의 전신(轉身)을 이끌어 낸 사마천-이 이름들이야말로 사건과 경험의 ``전달(불)가능성``과 세계의 ``독해가능성``을 매개한 ``장치``였다. 요컨대 세계를 일종의 책으로 여기기에 ``세계책``이라는 독해가능성 안에서 사유하면서도, 책들로는 결코 수렴되지 않는 사건들로 인해 책세계 속을 헤매는 사람, 그것이 독서인의 제3유형으로서의 ``겹쳐 읽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오직 다른 책들 위에 겹쳐지는 형태로만 적혀질 수 있는 한국현대사의 사건들, 그러나 결코 완전히 겹쳐 읽을 수는 없기에 수효를 더해 가며 동원되어야 하는 책들로 인해, 이병주의 소설들은 일종의 ``실록대하소설``로서 나타나게 되었음을 밝혔다. 책읽기와 겹쳐져 있는 책쓰기야말로 ``전달불가능한 경험``의 전달가능성을 자기 소설의 과제로 삼았던 이병주만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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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한국전쟁이 패전 후 일본 사상사에 어떤 전회의 계기를 마련했는지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때 주목한 것은 극동군사재판(도쿄재판)의 결과에서 비롯된 ``해적서사``이다. 이 서사는 태평양전쟁으로 이르는 근대일본의 발자취를 ``해적선의 서사``로 파악한다. 즉 완전한 무법자로서의 군국주의자들이 영국과 미국에 동조하며 순탄하게 항해했던 평화로운 선박 ``일본호``를 해적선으로 만들어 파국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전후 복구 담론은 이 해적 서사를 어떻게 자기 역사 기억의 토대로 삼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는데, 한국전쟁의 발발로 이 서사는 망각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후 일본의 자기 서사는 해적이라는 계기를 상실하고 냉전체제에서 미국 주도의 서방세계에 가담함으로써 전쟁을 철저히 일탈로서만 바라보았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그런 역사 인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해적이었던 일본이라는 준엄한 자기 인식에서 시민 형성을 꾀하려고 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똑같은 맥락에서 노예의 자기인식이라는 계기를 통해 일본의 진정한 독립을 이루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제대로 상속되는 일 없이 사산되고 말았다. 현대 일본이 처한 아포리아는 이들 사상의 계승 불발에 기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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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냉전의 시작은 사람들이 영토적 주권에 에워싸여 가는 사태임과 동시에 그러한 주권적 존재를 넘어 전개되는 군사적 헤게모니가 영토적 주권을 매개로 확대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일본제국 붕괴 후 주권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상황을, 완전한 주권(독립)과 불완전한 주권(신탁통치, 잠재주권 등)이라는 구분이 아니라 초주권적인 군사적 헤게모니 안에서 사람들이 영토적 주권에 둘러싸이고 분열되어 가는 사태로서 생각했다. 거기에는 일본제국 시대에 사람들이 이미 지리적 영역을 넘어 이동했다는 사실도 함의되어 있다. 따라서 다음으로 논점이 되는 것은 일본제국의 붕괴와 냉전의 시작 사이에서 영토적 주권을 넘어 발견되는 사람들의 관계성에 대한 가능성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오키나와가 냉전 중에 기지의 섬으로 등장하는 과정에 두고 생각했다. 또한 거기에서 민족이라는 말은 영토적 주권에 관련된 용어가 아니라 영토를 넘어선 연대에 관련되어 있다.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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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시기(1950~1953년) 중국은 미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북한을 돕는다는 이른바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保家衛國)`` 운동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중국에게 한국전쟁은 중미전쟁에 다름 아니었는데 미국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미국을 혐오스러운 적국으로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반인들의 미국에 대한 인식과 상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중공중앙은 미국을 적대시하고 천시하며 천시해야 한다는 이른바 ``삼시교육(三視敎育)``을 실시함으로써 본격적인 반미이데올로기를 구축했다. 삼시교육을 중심으로 한 반미대중운동은 미국의 중국침략사를 재구성하여 강조하고 과거 일제침략에 대한 인민들의 고통과 분노를 환기시키는 방법으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고자 했다. 본 논문은 중국당국의 ``삼시교육`` 자료와 몇 가지 대중운동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항미원조전쟁이 중국인들의 미국 상상에 가져온 변화를 추적하고자 하였다. 2절에서는 한국전쟁 직전 대중들의 미국상상이 어떠했는지 살피고, 3절에서는 삼시교육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 정리하였다. 4절에서는 삼시교육을 바탕으로 한 반미대중운동이 다양한 영역에서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반미대중운동이 성공했다는 전제 아래 ``성공``의 몇 가지 문제적 측면을 점검하고자 했다.

일반논문 : 기계의 눈과 우울한 오브제 -기술제국의 시각지배와 식민지의 사진 (무)의식

오혜진 ( Hye Jin Oh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0권 0호, 2011 pp. 165-196 ( 총 32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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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식민지 조선에 사진기가 처음 도입된 1890년대부터 전개된 사진 담론과 그 역사에 함축된 문화사회학적 의미를 비평적으로 해석해보려는 시도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사진은 미신과 오해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첨단의 과학이자 예술의 총체로 일컬어지는 등 중층적인 수용사적 맥락을 지닌 미디어였다. 사진 그 자체가 촉발하는 미학적 특징과 제국의 지배질서 아래 구성된 식민지 미디어 조건의 결부가 이를 가능케 했다. 파국으로 끝나는 사진결혼의 사례, 혹은 사진을 소재로 한 식민지 문학 작품에서 사진은 오독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불안한 텍스트로 나타난다. 사진 그 자체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지만, ``사진적 진실``은 현실의 ``징후``로 읽혀야 했다. ``흔들리는 텍스트``로서 존재하는 사진이 촉발할 수 있는 해석의 가능성을 제국의 지배질서에 부응하도록 규율하는 것은 기술제국 일본의 중요한 과제였다. 거듭된 사진기술의 발달을 과시하던 일본 경찰당국은 요시찰인들의 얼굴과 지문사진을 수집 · 관리하거나, 사진을 신분증명의 수단으로 제도화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을 제국의 시야 내에 가시화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때 제국의 가시영역의 확장이 식민지 시각장의 분할 및 재편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점은 중요하다. 순종 인산 때부터 엄중해진 사진취체법과 중일전쟁기 작동한 총동원보호비밀법(1936)이 초래한 식민지 가시성의 재편은 ``스파이``라는 비국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한편 이러한 시각장의 분할을 통해 성립한 식민지의 ``예술사진``은 기술제국의 시각지배 아래 작동 가능한 ``예술의 규칙``의 최대치를 잘 보여준다. 식민지의 ``예술사진``은 제국의 기술문명의 발달과 그에 따른 가시성의 확대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제국의 규율화된 해석을 통해서만 ``예술``로서 등재될 수 있었다. 따라서 식민지의 예술사진과 선전사진이 겹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진 미디어를 통한 기술제국 일본의 시각지배는 사진 해석의 가능성을 제국이 허용한 해석의 지평 아래 둠으로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반논문 : 「한성신보」에 게재된 소설 「日本名士福富臨淵逸事」에 대해

이토토모코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0권 0호, 2011 pp. 197-217 ( 총 21 pages)
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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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96년 『漢城新報』에 연재 발표된 한글 작품 『日本名士福富臨淵逸事』의 원전을추적해 발견한 후 그것을 소개하고 확정의 근거를 밝힌 것이다. 연구의 결과 『日本名士福富臨淵逸事』의 원전은 陸갈南 『臨淵言行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臨淵言行錄』은 福富臨淵이라는 인물의 언행을 수록한 것으로 谷干城, 千頭淸臣과 같은 福富와 교우가 있던 인물들의 기고로 볼 수 있다. 작품의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福富는 국수주의를 주장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日本名士福富臨淵逸事』를 원전과 대조해, 번역시에 생기는 문제점과 신문 발행인에 인한 작품 게재의 의도를 검토해 봤다. 번역시에 생기는 문제로서는 추가와 관련된 것들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추가라는 것은 원전에서는 볼 수 없는 어구의 설명이 더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日本名士福富臨淵逸事』의 게재 이유가, 『漢城新報』의 다른 한글 읽을거리와 마찬가지로 <韓人啓蒙、社會改良>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大외조약 개정안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가하고 있는 점은, 거기에 발행자의 주장이 들어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영국에 유행하는 문물에 대해 비판적으로 쓴 것은, 그에 대해 독자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주려고 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漢城新報』의 발행은 응본(熊本) 국권당의 인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국권확장을 일대강령으로 해서 국제협조를 부정, 국가의 자주, 독립을 중요시한 인물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명치정부에 의한 구화정책을 동반하는 조약 개정에 반대하고 있었다. 즉 그들의 당의 정신과 『臨淵言行錄』의 편집 겸 발행자인 陸갈南, 그리고 福富의 주장은 명치정부가 조약 개정에 있어서 세운 구화정책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漢城新報』의 발행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사상을 陸갈南의 『臨淵言行錄』을 통해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일반논문 : 『조선문단』과 이광수

이경훈 ( Kyoung Hoon Lee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0권 0호, 2011 pp. 219-256 ( 총 38 pages)
7,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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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는 『창조』에 타자로서 관여하며 잡지에 공적인 성격을 도입했다. 그러나 "평등적 책임" 대신 "이광수 주재"를 내건 『조선문단』에서 춘원의 타자적 역할은 상실되었다. 『조선문단』은 신인 추천을 통해 등장한 신진 작가들을 "기성 문인"들과 경쟁시키며, 동인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고유명사 『조선문단』을 이광수 중심의 보통명사 ``조선문단``으로 확대, 재편하고자 했다. 그리고 최초로 추천된 최서해는 소설가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문단사 사원으로서 방인근과 함께 합평회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방인근과 최서해 이외에 다른 『조선문단』 동인의 합평회 참여는 미미했다. 또 출석자들에게 동등한 발언권을 부여할 뿐 아니라 좌익 문사들의 참여를 꾀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광수 주재"의 포기를 초래했다. 이는 춘원 중심의 "동인"이 해소되고, 최서해가 사상적 경향과 문단적 입지에서 춘원으로부터 이탈하는 일을 가속화했다. 한편 춘원이 추천한 몇몇 신인들은 사회주의 이념에 동조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의도와는 달리 춘원은 신인들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기성 문인"이나 부르주아 작가의 수장으로 재배치되었다. 그 점에서 최서해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이광수 주재"의 한가운데서 이미 그것의 부정과 지양이 시작되었음을 대표적으로 보여주었다. 즉 춘원은 최서해를 등장시킴으로써 『조선문단』과 관련된 문학사적 역할을 완수하고 타자로 복귀했다. 하지만 최서해는 카프에 가입하고 『조선문단』을 떠난 후에도 춘원이 관여하는 『동광』이나 『신민』 등에 소설을 발표했다. 그리고 급기야 카프를 탈퇴하고 매일신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이광수의 문학사적 역할을 희화화하고 스스로의 위치를 말소했다. 이로써 서해는 춘원과 결별하는 동시에 그와 "문예상인"으로서 재회했다.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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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의 ``지나어`` 교육정책이 실시되면서 한자 · 한문으로 매개되어 있는 ``지나어``, ``일본어``, ``조선어``가 식민지 조선이라는 한 공간에 ``공존``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공존``하는 언어들은 일본의 언어정책의 변화에 의해 수시로 변해야 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한자 · 한문으로 매개되어 있는 이 언어들은 일본의 언어정책에 의해 이 시기에 새롭게 분할 · 재편되고 있었다. 이 과정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교과서가 『中等時文』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지나어`` 정책의 실시와 함께 식민지 조선의 중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했던 ``현대 지나어`` 교과서 『中等時文』을 살펴보았다. 총독부에서 발행한 이 교과서를 살펴보면서 식민지 학생들이 "조선어한문"이 아닌 일본의 ``국어한문``과 그 대칭점에 놓인 ``현대 지나어``를 외국어로서 배우게 되는 지점에서의 식민지 조선의 언어상황을 재조명했다. 1937년 8월,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어`` 과목인 「조선어급한문」에서 ``조선어한문``을 폐지하고 조선인들에게 ``조선어한문`` 대신 ``국어한문``을 가르치게 했다. 이것은 한문을 통해 실현되는 조선어와 일본어의 ``쌍형상화 도식``이 소멸되는 것이며 이는 앞으로 다가올 ``조선어과`` 폐지의 전초 단계로서 조선어가 폐지되고 국어만 사용하게 되는 것과 대응된다. ``조선어한문``이 폐지된 후, 7개월이 지난 1938년 4월, 일본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국어한문``의 대칭점에 놓인 ``현대 지나어``를 외국어로서 ``필수학과목(必修學科目)``으로 가르치게 하는 동시에 ``조선어(조선어한문이 폐지된 이후의 조선어)``는 ``수의학과목(隨意學科目)``으로 가르치게 했던 것이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반분짜리 조선어``도 완전히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이렇게 조선어는 지워지며 식민지 조선은 ``국어상용(國語常用)``으로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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