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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774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11권 0호 (2011)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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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사키 토시오(山崎俊夫, 1891~1979)는 메이지 말기 한국 근대문학 초창기의 대표적인 문학자 이광수·홍명희와 친구였던 인물이다. 같은 해에 메이지학원 중학을 졸업한 후 완전히 다른 인생을 보낸 이광수와 야마사키는 1942년에 동경에서 열린 1회 대동아문학자대회를 계기로 32년만에 재회해서 구교를 돈독히 했다. 그 14년 후에 쓴 어떤 수필에 야마사키는 이광수와 재회했던 일을 자세히 기록하고 남기고 있다. 한편 대회 직후 이광수가 "분가쿠카이(文學界)"에 발표한 기행문 「삼경인상기(三京印象記)」에는 야마사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필자는 이광수가 야마사키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에 의문을 가지고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추측해 보았다. 야마사키와의 재회라는 사적인 감격을 공식적인 감격과 나란히 쓰는 것에 위화감을 느낀 이광수가 마음의 영역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이 제1의 추측이다. 제2의 추측은 일본문단에 진출할 것을 생각하고 있던 이광수에게 대동아문학자대회와 「삼경인상기」는 문인들과 인맥을 만들 선전(promotion)의 장이었고 거기서 야마사키에 언급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 제3의 추측은 일본문단의 대부인 기쿠치와 야마사키의 관계를 알게 된 이광수가 야마사키에 언급할 것을 기피했다는 것. 마지막 추측은 제1의 추측과는 반대로, 대동아정신을 구현하는 이광수=카야마미쓰로(香山光郞)가 현재의 자기 마음의 영역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 즉 지금의 香山가 아니라 과거의 이보경(李寶鏡)을 보려고 하는 야마사키 앞에서 이광수는 내선일체의 연기에 의한 가면을 계속 쓰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유를 추측하는 과정을 통해 이 시기 이광수가 어떤 자세로 살고 있었는지 고찰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의외에도 ``적극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일반논문 : 박태원 소설의 고전 수용 양상과 고전 새로 쓰기의 방법론

김미지 ( Mi Ji Kim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1권 0호, 2011 pp. 31-59 ( 총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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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기 모더니스트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던 박태원은 월북 이후 86년 작고할 때까지 오랜 세월 창작을 멈추지 않으며 다양한 장르와 주제 그리고 기법의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그의 작품 세계는 실험적인 모더니즘 소설에서부터 탐정물, 아동물, 번역물, 통속물 등을 망라하며 해방 이후부터 월북 후에는 리얼리즘적 성격이 강한 역사소설을 다수 집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의 다채로운 작품 세계는 다각도의 접근 방법으로 규명이 가능하고, 따라서 일관성이나 통일성보다는 변모나 변화를 중심으로 설명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50여 년의 오랜 작품 활동의 여정에서도 일관되게 흐르는 작가 정신과 방법론 역시 존재했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전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었다. 박태원은 고전을 현대소설의 맥락에 자유롭게 끌어들이고 활용하는 한편, 고전의 재창조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해방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고전의 독서 체험과 소양을 바탕으로 소설의 언어 안에 고문과 고사 등을 유희적으로 인유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소설언어의 새로움을 추구하거나, 고전(소설)에 등장하는 이야기체를 차용하여 작중 인물과, 작가, 독자 그리고 작품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드는 서술의 실험을 보여준다. 그리고 해방 이후의 역사소설 홍길동전 과 월북 이후의 고전 현대화 작업인심청전 에서는 원전을 해체하여 재가공하면서 원전과의 대결을 통한 고전의 재창작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그 방법과 기법 그리고 배경에는 차이가 있지만 고전을 현대소설의 영역 안에 자유롭게 편입시키며 고전과 현대의 경계를 넘나들고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 현대소설의 경계를 새로이 실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반논문 : 1930년대 대만문학 맥락 속의 장혁주

최말순 ( Mal Soon Choi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1권 0호, 2011 pp. 61-92 ( 총 32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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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1930년대 대만문단에서 언급된 장혁주 관련 문장을 찾아보고 어떠한 맥락에서 그가 대만문인들의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의 문단활동에 대한 대만문인들의 인식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다. 본문에서 제기한 논점은 30년대 대만좌익문학운동의 맥락과 프로문학 퇴조기의 일본문단 상황이 장혁주 언급과 관련된배경이라는 점이다. 장혁주의 문학경향을 닮고자 했던 뤼허루어(呂赫若)나 장혁주를 가장 많이 언급한 양쿠이(楊逵)나 리우지에(劉捷)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일본의 문예잡지를 통해 장혁주의 「아귀도」나 「백양목」등을 접했을 것이며, 장혁주 작품에 대한 일본 프로문인들의 찬사를 보면서 동일한 식민지 문인으로서 중앙문단에 진출하여 식민지의 모순을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의 실현 가능성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또한 30년대 식민지 문인들의 일본문단 진출이란 현상이 대만에서 장혁주를 언급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며 이 현상의 배후에는 30년대 프로문학 위기와 문예부흥이란 일본문단의 상황과 대만, 조선에서의 일본어 사용 작가들의 등장이란 객관적사실이 있다. 문예부흥기의 일본문단이 문예 잡지의 투고형식으로 일본의 도시문학과는 다른 내용과 색채를 가진 작품을 등단시키면서, 또 출판과 유통의 대외 전파로 인해 기타 외지를 포함한 식민지문학이 문예의 한 영역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추세의 주역이었던 장혁주는 30년대 중반부터 전쟁시기까지 일본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때문에 중앙문단 진출을 열망하던 대만문인들에게 충분히참고할 만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양쿠이(楊逵), 짱원환(張文環), 롱잉쭝(龍瑛宗) 등대만문인들의 이러한 열망의 배후에는 30년대 대만문단의 상황, 즉 좌익문학에 대한 위기의식과 문학적 돌파, 일본어 세대의 증가, 일본유학 등 작가의 개인적 경험등이 자리하고 있다.

일반논문 :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그늘, 지식인의 전향

홍종욱 ( Jong Wook Hong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1권 0호, 2011 pp. 93-134 ( 총 42 pages)
1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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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이 주도의 전문학교는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대학``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지만, 연구자를 길러내는 학문재생산의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경성제대 또한 조선어에 기반한 조선인이 중심이 된 학문재생산의 장이 될 수는 없었다. 1930년대 초반 이후 본격화되는 조선 연구는 주체적 아카데미즘 형성의 기회였다. 조선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조선 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이 더해졌는데, 이는 반제민족통일전선의 사상적 근거로 평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좁은 의미의 아카데미즘을 벗어나고자 했지만 그들의 갖고 있는 무기는 역시 학문이었고, 그런 면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학계와 사회운동에 각각 한 쪽 발을 디딘 채로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다. 한편 지식인에 대한 당국의 간섭은 날로 심해져 갔는데, 조선인 아카데미즘이 띠고 있던 강한 사회성이나 정치성은 탄압의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기도 했다. 본고에서는 위와 같은 지식인의 존재 양태를 아카데미즘의 결여로서가 아니라 ``식민지 아카데미즘``으로 파악 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에서는 지식인들이 대거 ``전시변혁``의 체제 협력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시국 참여``의 길은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막혀 있었다. 전시기 조선에서 일어나 대표적인 지식인 탄압 사건으로는 ``연희전문 경제연구회 사건``과 ``원산민족해방전선 사건``을 들 수 있다. 연전 사건의 백남운, 이순탁, 노동규의 전향서를 살펴보면 통제경제론과 민족협화론이 전향의 논리로 채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조선 연구의 문제 의식을 굴절된형태로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원산 사건의 이강국과 최용달은 적어도 1940년 단계까지는 전향을 거부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들이 조선 연구에 비판적이었던 점과 관련이 있다. 전향을 조선이라는 주체가 민족협화라는 회로를 통해 일본이라는 주체로 포섭되는 과정으로 본다면, 이들이 시종일관 국제주의의 입장을 고수했던 점이 비전향을 가능케 한 것이다.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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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근 한국과 일본의 인류학분야에서 재평가가 가해지고 있는 아카마쓰치조(赤松智城)에 대한 논의이다. 교토제국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 초빙된 아카마쓰 치조는 1930년대를 중심으로 식민지조선의 민속신앙연구에 전념하여 그 후의 인류학, 종교학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식민지 종교연구자의 한 사람이다. 아카마쓰에 대한 선행연구에서는 그가 식민주의적 전형적인 일본인 학자이던가, 또는 식민지권력의 종교정책과는 거리를 두는 문화적 저항을 실천한 학자라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이항대립적인 접근법을 지양하고 아카마쓰와 같은 지식인의 학문적 영위가 당시의 맥락에서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그것이 일본제국의 유지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지에 대해 분석한다. 아카마쓰의 조선민속과 민간신앙에 대한 연구는 물론 그의 학문적 입장과는 별개의 문제로, 19세기말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서양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한 조선연구와 필연적으로 경쟁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바로 유일신 개념을 둘러싼 이론적 경쟁이었다. 서양 기독교 선교사들은 조선의 민간신앙에 다신적 경향이 깊은 것은 중국의 영향이며 조선에는 고유한 유일신 신앙이 고대로부터 이어져오고 있으며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유일신 개념과 서로 이어진다고 주장한 한편, 아카마쓰는 조선의 무속과 같은 민간신앙은 타민족의 그것과 차이가 없는 원시적 신앙에 머물러 있으나 그 안에는 불교나 조상숭배와 같은 좋은 요소가 있으므로 그것을 살려 훌륭한 종교로 인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논쟁의 역사적 의미는 그것이 심전개발운동이라는 황민화 정책의 가운데서 진행되었다는 점이 상징적으로 묘사하듯, 그 이론적 중심에 있던 아카마쓰의 조선민간신앙에 대한 입장은 조선의 무속을 근대화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그 존재를 유지시키는 학문적 이론으로 작용했다. 물론 그것이 사회의 저변까지 규율하는 제국적 학문의 하나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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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좌/우의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분기점으로서 단정 수립 이후 시행된 전향에 주목하고, ``전향``의 제도적 특성을 분석하여 ``전향``이 내포한 ``국민/국가 만들기``의 내적 논리를 논증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박영준의 작품에 새겨진 ``전향``의 문학적 의미를 되묻고자 했다. 단정 수립 이후의 ``전향``이란 국민국가 건설기에 국가가 폭력의 합법적 사용을 통하여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과정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제도였으며, ``반공``이외의 사상적 가능성을 말소하는 계기적 사건이었다. 이 시기에 ``전향``을 강요받은 이 시기 박영준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인들은 체제선택을 강요받고 ``전향``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국민 되기``의 자기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전향``의 선택은 그러나 이처럼 단일하게 의미화될 수 없다. 좌/우의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았던 박영준은 ``전향``을 전후하여 ``무력함``을 내세워 주체의 구성에 자발적으로 실패하는 서사들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박영준의 작품 속에서 ``정치``에 대응하여 주어지는 ``생활``의 윤리는 ``전향``에 대한 박영준 개인의 회의를 투영한 것으로 독해된다. 선택을 연기하고 무기력하게 생활의 문제를 마주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국가``나 ``민족``, ``정치``에 대한 회의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전향``이라는 사건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국가``의 문제로 전환하여 ``국민/국가``라는 새로운 사상을 제출하는 일종의 정치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발표된 박영준의 작품은 이처럼 국가와 민족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해지고, 획일적 이념이 강제되는 상황에서 ``전향``의 강제가 야기하는 문학자의 번민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반논문 : 냉전의 최전선에서의 글쓰기 -최인훈의 광장 과 우베 욘존의 야콥을 둘러싼 추측들 에서의 개인과 분단국가

비르깃수잔네가이펠 ( Birgit Susanne Geipel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1권 0호, 2011 pp. 193-229 ( 총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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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하에서, 특히 한국과 독일같은 분단국가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대립되는 이데올로기가 충돌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글을 쓰는 것을 내포한다. 객관적 접근을 시도하는 작가들이 적을 뿐만 아니라, 국가 이데올로기가 형성한 사회에의 개인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작품들은 더욱 더 적다. 우베 욘존의 야콥을 둘러싼 추측들(1959, Mutmassungen uber Jakob) 과 최인훈의 광장 (1960, Kwangjang)은 그 중 하나이다. 두 작품은 모두 분단 초기에 쓰여졌으며, 개인이 사회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추구한다. 주인공들은 분단국가의 경계를 넘음으로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하는 국가들의 서로 다른 상황을 경험한다. 최인훈의 소설에서, 북한과 남한의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대립은 ``광장과 방``의 은유로 그려지는데, 이는 중심사상을 구성하고 개인의 내적 혼란을 명료화한다. 폐쇄된 방과 개방된 광장의 이분법은 개인과 사회 간의 긴장을 의미한다. 동일하게, 욘존의 소설 역시 자유의 상대성과 개인과 사회간의 우선순위 충돌의 문제에 접근한다. 두 주인공 중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고, 개인을 위한 공간은 발견되지 않으며, 어느 이데올로기 내에서도 이상적 믿음은 끝내 공허하다. 두 주인공 모두 결국 죽음을 맞이 한다. 최인훈과 우베 욘존의 소설들은 공통적인 주제과 분단국가에서의 개인들이 처해진 상황을 접근하는 방식에서 연결되지만, 초점이 서로 다르다. 욘존에게 서쪽과 동쪽간의 봉쇄는 이데올로기와 객관적 사실에 대해 전체적으로 의심하게 만드는 배경임에 반해, 최인훈의 작품은 한국의 상황과 강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국가의 분단을 개인의 딜레마의 핵심적 문제로 정의한다. 따라서, 두 소설은 결과적으로는 똑같이 비극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최인훈의 광장 에서는 희망이 존재한다.

Bibliographical Information on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Information Report

( Kris Hallin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1권 0호, 2011 pp. 233-236 ( 총 4 pages)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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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과 쟁점 : 『한국영화전사』, 그 이후 -최근 식민지 말기 영화 연구의 성과와 한계

이화진 ( Hwa Jin Lee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1권 0호, 2011 pp. 239-261 ( 총 23 pages)
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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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근의 식민지 말기 영화 연구가 기존 영화사 서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어떠한 시도들을 해왔는지 검토한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상자료 원의 필름 발굴에 힘입어 연구가 더욱 활성화된 식민지 말기 영화 연구는 한국영화전사 로 대표되는 기존 영화사가 ``민족영화``를 신화화해온 것을 비판하면서, ``한국영화``라는 범주의 동질성을 해체하고, ``일제의 억압과 조선인의 수난 혹은 저항``이라는 이분법을 상대화하며, 트랜스내셔널한 시각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창해왔다. 지난 수년 간 이 분야에서는 선전영화를 역사적 맥락에서 독해하고, 텍스트의 균열과 혼잡성, 서사적 전략과 스타일 상의 특징들을 분석하는 연구들이 풍부하게 이루어졌으며, 스타덤과 젠더 정치, 외화관람의 문화적 실천성, 이동영사의 관람성등에 대한 성과들도 제출되었다. 이 분야 연구는 대상과 영역을 확대해가며 지금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지만, 실증에 함몰된 반복되는 패턴의 연구를 양산하며 답보에 처한 듯하다. 앞으로 영화사 연구의 새로운 층을 열기 위해서는 이론화가 절실히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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