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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774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17권 0호 (2014)

특집 : 카프 초기 프롤레타리아 미술 담론

홍지석 ( Ji Suk Hong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7권 0호, 2014 pp. 9-40 ( 총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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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 형성을 주도했던 김복진은 식민지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미술을 구상하면서 유럽과 러시아에서 전위를 표방하고 나선 신흥미술 운동들-미래파, 다다, 표현주의, 구성주의-를 적극 참조했다· 특히 그는 다다와 구성주의에 주목했는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미술이 낡은 것들의 파괴(다다)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건설(구성주의)이라는 두 과제를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곧 균형은 깨지고 김복진은 파괴보다는 건설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전환한다·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서 “삶과 예술의 통합”이라는 구성주의의 슬로건을 현실에서 실천에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실제로 카프 미술가들은 개인주의에 입각한 순정미술을 배격하고 “총과 마차로 그림을 그리는”(임화) 구성주의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이것은 일본에서 다다를 모델로 삼았던 마보가 해체되고 구성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미술의 대안으로 부각된 양상에 대응한다· 이러한 입장 전환은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파괴(다다) 이후에 도래할 프롤레타리아 미술로 표현주의를 내세운 김용준 등의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곧 카프 미술가들의 실천을 이끈 지도 이념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서 구성주의가 표방한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건설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기에 카프미술가들은 “선전-선동”의 예술형식, 즉 포스터나 무대미술 등을 통해 “삶과 예술의 통합”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들은 투쟁의 시기가 종료되면 선전-선동의 예술형식으로부터 구성-건설의 예술실천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일제의 카프탄압과 혁명운동의 실패로 이러한 이상은 현실화될 수 없었고 구성주의가 추구하는 “삶과 예술의 통합”은 미완의 기획으로 남게 되었다·

특집 : 해방 후 재일조선인 사회의 문화 자립 운동과, 아리랑

임경화 ( Kyoung Hwa Lim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7권 0호, 2014 pp. 41-74 ( 총 34 pages)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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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패전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의 일본의 민중문화운동 속에서, 패전 이전에는 거의 주목되지 않았던 조선민요 <아리랑>의 다양한 측면이 부각되어 당시 재일조선인들의 반제, 민족 저항 운동을 뒷받침하는 노래로서의 정치성을 획득해 가는 과정을 밝혔다· 그것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의 투사에 지나지 않았던 애조를 띤 유행가나 전통예능으로서의 패전 이전의 <아리랑>의 이미지를 일신하여 다원화, 탈전통화, 정치화를 도모하는 한편으로, 민족 저항의 노래로서 정전화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프로세스는 정치적 권위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저항운동 속에서 구축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남북한에서의 민족의 노래로서의 <아리랑> 정전화가 국가 주도로 추진되면서 관제화되어 갔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또한 재일조선인들이 <아리랑>을 통해 목소리를 획득해 가는 과정에는 제국 일본의 범죄로부터 눈을 돌리려는 일본 주류 사회에 저항하여 스스로의 식민지주의를 극복하려고 했던 진보적인 일본인들과의 연대운동이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사실도 밝혔다·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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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1950~1960년대 “항미원조” 전쟁영화를 대상으로 중국에서 한국전쟁이 재현되는 양상을 고찰함으로써 신중국의 냉전문화 구성 과정 및 그 균열지점을 짚어보았다· <상감령(上甘령)>·<기습(奇습)>·<영웅의 아들딸(英雄兒女)>은 항미원조 전쟁을 다룬 “17년 시기”의 대표적 작품으로서 제작년도(1956년, 1960년, 1964년)의 사회적 동향을 반영하여 각각 상이한 각도에서 대중정치를 작동시키는 방식을 보여준다· 동일한 전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기억하는 주체에 따라 전쟁의 양상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한국전쟁은 1차적 당사자인 남·북한 외에도 미국과 중국, UN 연합국이 참여한 국제전으로서 각국에서 한국전쟁 이미지는 판이하게 다르다· 한국전쟁은 그 누구의 승리랄 수 없이 휴전협정으로 막을 내렸지만 중국에서는 그간 항미원조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축해왔다· 필자는 중국이 사실상의 패배를 궁극적인 승리로 전환한 점에 착안하여 저들이 그것을 어떻게 회고하는지, 즉 건국 초기의 정치적 상황과 연계하여 한국전쟁을 어떻게 각색하며, 적/우(敵/友) 관계인 미국/북한과 대별하여 자국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한국전쟁을 빌어 어떻게 혁명역사의 계보를 완성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상감령>(1956)에서는 건국 초기, 한국전쟁의 실패를 “승리”로 각색함으로써 일반대중에게서 조국에 대한 자긍심과 애착을 끌어내어 새로운 국민 정체성을 창출해냈다· <기습>(1960)에서는 대약진 시기, 국가의 남성적 은유를 통해 “강한 중국”의 이미지를 개발함으로써 좌초에 부딪힌 경제개발계획의 출로를 모색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재도약을 타진했다· <영웅의 아들딸>(1964)에서는 문혁 전야, 홍위병 세대의 예비교육용으로 혁명역사의 계보를 완성하여 정치적 분열을 무마하고 국민대통합을 시도했다· 요컨대 17년 시기 중국영화는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중국식으로 전유하여 신생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더 나아가 세계 최강대국으로의 도약을 준비하며, 이를 위해 신세대에게 사상교육을 전개했다· 일면 견고해 보이는 전쟁의 기억은 실상 위태롭고도 불완전한 구성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기억은 일반대중의 의식 가운데 강력한 효과를 생산해낸다· 본고에서는 국가 주도의 냉전문화, 그 이면의 정치적 기제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의 작동원리를 밝히고자 했다·本論文以1950~1960年代“抗美援朝”戰爭題材電影爲對象, 通過考察在中國韓國戰爭再現的景象,천述了新中國冷戰文化的形成過程和타的斷裂点。≪上甘령≫、≪奇습≫、≪英雄兒女≫等電影作品是關于抗美援朝戰爭的“17年時期(1949~1966)”的代表性作品, 反映了制作年度(1956年、1960年、1964年)的社會動向, 縱不同的角度展示了發動群衆政治的方式。卽便是相同的戰爭也會根据記憶戰爭的主體, 其戰爭的情景也會截然不同。韓國戰爭是一場除了第一當事人之南朝蘚、北朝蘚之外, 還有美國和中國、聯合國參與的國際戰爭, 在各國韓國戰爭的形象也是截然不同。韓國戰爭在未分勝負的情況下以一張停戰協定落下了戰爭유幕, 但是, 中國一直以來以自己在抗美援朝戰爭取得“衛大的勝利”而自居。筆者縱中國將事實上的失敗전換爲最終勝利的這一点出發, 觀察了他門是如何回고戰爭, 卽즘마聯系建國初期的政治情況而改編韓國戰爭, 즘樣分類활友關系之美國、北朝蘚而建構國家認同感, 즘樣借助韓國戰爭而完成革命歷史的體系。≪上甘령≫, 通過建國初期將韓國戰爭的失敗改編爲“勝利”, 흔起了普通大衆對祖國的自豪感和熱愛之心, 縱而創造了新的人民認同感;≪奇습≫, 在大약進時期通過國家的男子漢隱喩, 開發“强大中國”的形象, 摸索觸礁的經濟開發計획的出路,進而踏進了中華人民共和國的再次飛약;≪英雄兒女≫, 作爲文革前夕、紅위兵一代的預비敎科書, 完成了革命歷史的體系, 平復了政治性分裂, 實現了人民大團結。總而言之, “17年時期”的中國電影, 將韓國戰爭這一歷史性素材전化爲中國式, 打下了新生國家的基초, 籌획약身世界超級大國, 爲此, 對新一代展開了思想敎育。看似牢固的戰爭記憶, 實際上是旣飄搖又不健全的結構體。진管如此, 戰爭的記憶在普通大衆的意신中産出了强力的效果。本論文將通過國家主導的冷戰文化、其內部的政治性机制, 천述타的發動原理。

기획 : 국가형성기 북한의 주체 노선과노동통제 전략의 변화

강진웅 ( Jin Woong Kang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7권 0호, 2014 pp. 109-140 ( 총 32 pages)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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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북한의 주체 노선이 공고화되는 국가형성 과정에서 테일러주의가 노동통제 전략으로서 변용되는 역사적 과정을 탐색한다· 생산력 우선주의의 노선 속에서 소련에 이어 북한 역시 선진과학기술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의 노동 동작과 시간을 통제하는 테일러주의를 수용하여 노동통제 전략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주체 노선의 발전과 함께 소비에트식 테일러주의에서 강조된 인간의 기계화라는 육체노동의 통제 방식은 주체의 초인적 인간을 이상화하는 정신노동의 통제 방식으로 전환되어 갔고 육체노동의 합리적 계산과 보상보다는 개인적 헌신과 사상적 혁신에 의존하는 군중노선이 주체의 노동통제 방식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러한 노동통제 방식의 변화는 노동에서의 생산과 경영의 통합과 아래로부터의 생산의 혁신이라는 개혁적 성과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는 과학적 관리의 후퇴와 경제구조의 왜곡을 낳았다·

기획 : 원한, 노스탤지어, 과학-월남 지식인들과 1960년대 북한학지(學知)의 성립 사정-

장세진 ( Sei Jin Chang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7권 0호, 2014 pp. 141-180 ( 총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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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남한에서 북한연구가 제도적으로 성립되는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1960년대 월남 지식인들의 북한 재현 텍스트에 주목했다· 분석 결과 이 논문에서 밝혀낸 것은 첫째, 월남 지식인 집단이 이 시기에 이르러 분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의 와중에 월남한 일세대 월남 지식인 그룹, 1960년대 간첩 임무를 띠고 남한에 파견되었다 ‘전향’한 소위 귀순자 그룹의 분화는 중요하다· 그들은 북한연구라는 필드의 창시자(founding-father) 역할을 수행한 핵심 주체들이었고 서로 긴밀한 협업 관계를 유지했다· 둘째, 지식과 권력 사이의 충돌과 긴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북한연구의 성립은 1960년대 북한의 비약적인 경제적 성과와 4·19 직후 번성했던 통일 담론에 대처하려는 남한 통치 권력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셋째, 이 시기 북한연구는 대중적인 ‘노스탤지어’의 정서를 ‘지식’, ‘과학’에 대한 요청으로 대체했다· 1960년대 북한은 그리운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아니라 남한과는 매우 이질적인 체제, 따라서 ‘연구’와 ‘지식’이 필요한 대상으로 빠르게 전환된다· 김준엽이 이끄는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는 북한연구의 거점으로 부상한다· 또한 1960년대 남한의 북한 연구는 동시대 미국의 지역연구를 모델로 삼았고, 일본은 북한에 관한 지식 성립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루트가 되었다· 넷째, 비록 소수였지만 북한연구가 제도화되는 과정에 기여한 주류 담론과 미묘한 긴장 관계를 이루는 예외적 담론들이 존재했다· 주로 문학적 재현을 전담으로 하는 소수의 이북 출신 문인들은 남과 북 어디에도 환원되지 않는 경계인의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기획 : 주변부의 근대-남북한의 식민지 반봉건론을 다시 생각한다-

홍종욱 ( Jong Wook Hong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7권 0호, 2014 pp. 181-219 ( 총 39 pages)
7,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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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근대”라는 식민지근대론의 원점으로 돌아가 식민지를 서구와 아시아라는 이질적인 시간과 공간이 겹쳐지는 장소로서 파악한다면, 1980년대 한국의 지식계를 강타했던 식민지반봉건론의 문제의식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두 이론은 근대 혹은 자본주의의 비대칭성, 불균등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1930년대 중반 일본에서 벌어진 “중국통일화논쟁”의 핵심은 식민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근대화론 혹은 식민지탈화론의 입장이었고, 오카미 스에히로의 논의는 식민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정체론에 가까웠다· 나카니시 쓰토무는 양자를 비판하면서 반식민지의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의 제국주의의 이중성과 그에 따른 민중의 저항에 주목하였다· 식민지조선의 인정식은 조선을 “반봉건제” 사회로 보면서 그 정체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오카미와 비슷한 입장이었다· 이에 반해 박문규나 박문병은 식민지라는 규정성을 중시하면서, 제국주의에 의한 봉건제의 유지·강화와 아울러 농촌 사회 분화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한편 전향 이후 인정식은 조선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인정하면서 조선이 식민지라는 사실을 부인하게 된다· 북한의 근대사 시대구분 논쟁은 1962년 “식민지반봉건=근대사”라는 형태로 총화되었는데 이는 사회구성설과 계급투쟁설의 결합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80년대 주체사관이 본격화됨에 따라 계급투쟁설이 전면적으로 채택되어 근현대의 분기점은 1945년 해방에서 1919년 3·1운동으로 변경된다· 주체가 강조되면서 역설적으로 반식민주의가 형해화된 셈이다· 한편 안병직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포함하여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1980년대 안병직의 식민지반봉건론에서는 근대화론이나 사적 유물론의 공식에서 벗어나 식민지 경험을 설명하고자 하는 고민이 엿보인다· 박현채나 가지무라 히데키는 안병직과 달리 한국의 자본주의화를 인정한 위에 그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1989년 안병직은 한국의 NICs적 성장에 주목하여 탈종속의 전망 아래 한국 자본주의의 성공적 발전을 평가하는 글을 발표한다· 이와 같은 방향 전환은 그가 식민성을 해명하는 문제를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중국통일화논쟁에 비유하자면 오카미에서 야나이하라로의 방향 전환에 해당하고, 식민지기 인정식의 전향과도 흡사하다· 안병직과 가지무라 혹은 박현채의 차이는 식민주의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민중의 저항을 인식했는가에 있었다·

일반논문 : 초창기 출판 자본의 역사적 성격과 문고본의 탄생

박진영 ( Jin Young Park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7권 0호, 2014 pp. 223-256 ( 총 34 pages)
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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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출판문화 초창기의 문고본은 영세성을 극복한 대형 민간 자본에 의해 기획되었으며, 정기간행물 발행이나 편집 주체의 등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상이한 성격의 출판 자본인 최남선의 신문관, 다케우치 로쿠노스케의 신문사, 민준호의 동양서원은 종합 교양 월간지를 발행하거나 전문 편집자를 출현시켰다· 신문관의 ‘십전총서’와 ‘육전소설’은 최초의 총서이자 문고본이다· 문고라는 명칭을 처음 내세운 것은 일본인 자본의 잡지사인 신문사의 ‘청년문고’다· 단행본 신소설에 주력한 동양서원의 ‘소설총서’는 본격적인 문학 총서의 효시다· 1910년대 초중반의 단기간에 집중된 문고본 출판은 지성계와 문학을 주도하면서 서로 다른 시대정신과 문화적 상상력을 대별했으나 자생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단명했다· 한국의 총서 기획과 문고본 출판은 초창기 출판계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성립된 산물이지만 문화사적인 연속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재개되었다·

일반논문 : 작가, 매체, 네트워크-1920년대 소설계의 거시적 조망을 위한 시론-

이재연 ( Jae Yon Lee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7권 0호, 2014 pp. 257-301 ( 총 45 pages)
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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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20년대 근대 작가 형성에 있어, 복수로서의 작가가 맺는 인적 관계의 집단적 성격을 사회연결망 분석이라는 틀을 통해 고찰한다· 문단사, 작가론, 문학조직론, 매체론 및 제도사적 접근 등 기존의 여러 연구는 20년대 문학 여명기 작가 형성에 있어 그 형성이 갖는 집단적 성격을 여러 방면에서 탐구하여 왔다· 그러나 아직 개별적 문학 집단들의 인적 연관과 그 관계의 성격을 상대적으로 규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포괄적 연계망은 보여 주지 못하였다· 이러한 방법론적 한계를 뛰어넘고 한편으로 보완하기 위해 본 논문은 계량적 접근을 바탕으로 한 네트워크 분석 방식을 차용한다· 사회학, 인류학에서 발전한 네트워크 분석은 개인과 집단 혹은 집단과 집단 간의 인적관계와 그 구조를 시각화하고 분석하는 데에 유용하다· 1917년부터 1927년까지 신문과 잡지에 투고된 소설 목록을 데이터로 삼아, 본 논문은 소규모 동인의 이합집산으로 이해되던 작가집단을 인적, 매체적 관계가 연결된 거시적 네트워크로 이해하고 그 안에서 근대문학 형성기에 있었던 작가들이 갖는 위치와 역할을 새롭게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논문 : 소설가 이상 씨(MONSIEUR LICHAN)의 글쓰기-「지도의 암실」을 중심으로-

이경훈 ( Kyoung Hoon Lee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17권 0호, 2014 pp. 303-331 ( 총 29 pages)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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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작품의 아버지(기원)로서 저자를 강조했던 이광수나 김동인과 달리 주인공과 소설가의 아이러니한 관계를 제시함으로써 작품에서 텍스트로 나아가는 식민지 문학의 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기를 폭로하면서 은폐하는 텍스트, 즉 구성을 회피하기 위해 사소설적으로 재현하는 동시에 개인적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복잡하게 소설을 조직하는 역설적인 사소설을 도입했다· 그러므로 이상의 삶과 텍스트는 “영도의 글쓰기”로써 “예지”나 로고스를 탐구하는 일과 맞서고 있다· 그것들은 명징하고 초월적이며 위생적인 주체의 위치에 있지 않다· 이는 이상 문학이 난해한 이유이기도 하거니와, 따라서 이상의 텍스트는 “읽히는 것”이기보다는 “쓰이는 것”이며, 소설가와 등장인물의 분리뿐만 아니라 때때로 소설가와 독자의 구분마저 넘어서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의 텍스트가 “쓰이는 것”이라는 말은 그것이 재현과 상관없는 구조라는 뜻이 아니다· 이상은 외부 세계의 반영에 치중하는 “타동사적 인간”으로서의 “작가”가 아니었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삶을 재현(은폐)했다는 의미에서 구성에만 몰입하는 “자동사적 인간”으로서의 “저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이상 글쓰기의 핵심은 자동사와 타동사를 계속 접촉(감염)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상은 언어유희, 외국어 사용, 상호 텍스트적 인용 등을 구사했으며, 이렇게 개인의 사생활을 폭넓은 참조관계와 복잡한 재현(은폐) 체계로 어루만짐으로써 이상 텍스트의 언어는 그 사적 체험을 작가 및 사건 자체에서 소격시킬 뿐 아니라 텍스트에 구멍을 내어 텍스트를 그 내부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상이 종종 사용한 French letter 및 그 파열의 의미다· 그 찢어진 틈과 더불어 이상의 문학은 공포와 쾌락을 동시에 주재하는 “환희의 텍스트”로서 계속 자동하고 타동하면서 여러 번 읽히고 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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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다마가와 이치로의 자전적 소설 『 경성·진해·부산』을 대상으로 식민지 조선 내 도시공간들의 상이한 특성을 드러낸 후, 그것이 일본인 간의 혹은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상호 인식과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가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1905년생 도쿄 출신인 다마가와 이치로는 경찰인 아버지를 따라 1911년에 식민지 조선으로 건너 간 후 대구, 청진, 진해, 진주, 경성, 부산 등 각지를 체험하였다· 부산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도쿄외국어학교에 입학하였고, 부산중학교 졸업 이전이라 해도 상황에 따라 도쿄의 모토마치소학교나 게이카중학교를 다닌 적이 있기 때문에, 그에게 식민지 조선이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처녀지’도, 이제 돌아갈 수 없는 ‘타국의 고향’도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에는 재조일본인이라는 식민자들이 이미 존재했으며, 그가 돌아가고자 했던 고향은 도쿄였다· 따라서 작가의 어린 시절을 재현하는 소설의 주인공 미키치는 재조일본인 사회에 대해 제3자적 관찰자의 시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소설의 주된 배경이 되는 진해, 경성, 부산은 각기 일본인의 독거, 일본인과 조선인의 잡거, 그리고 양자 간의 분거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진해의 군항건설계획은 조선인을 본래의 땅에서 쫓아내고는 노동력으로서만 소환하여 건설의 현장에 배치하였다· 재조일본인 사회는 문명한 식민자를 자처하며 조선인에 대해서도 시혜적 태도를 취하였으나, 미키치가 보기에 그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발견한 또 다른 타자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경성의 잡거적 환경 속에서 미키치는 이민족의 지배와 차별에 분노하는 조선민족과 맞닥뜨리게 된다· 조선인과의 실제적 대면은 ‘일본인다움’을 요구하는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나 가능했고, 대부분의 일본인은 ‘내지인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그들만의 사회 안에 머물기를 선택하였다· 부산에는 이미 왜관 시대에 기원하는 일본인 마을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지배민족으로서의 소외의식은 경계 저편의 조선인 마을을 의구심의 장소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었다· 타자인식은 보이지 않는 경계를 생성하고, 경계는 타자인식을 은폐하는 장치로서 역할하였다· 경계의 저편은 타자가 발견되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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