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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774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8권 0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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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의 대외원조와 대한(對韓)원조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한국전쟁 시기까지 군사원조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역사주의적으로 추적한 것이다. 미국의 대외원조는 그 자체가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산물이었으며, 구호원조와 경제원조, 군사원조와 기술원조로 분화되어 유럽과 아시아 남미 등 각각의 지역적 요구와 특성에 맞게 조정되었다. 미국의 대외원조는 마셜 플랜 이후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최우선 과제로 하면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에서 모두 유럽 중심성이 관철되었으며, 한국에서는 미군정기부터 분단정부 수립 이후까지 구호원조가 원조의 핵심적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로 아시아의 원조 비중이 높아졌으며,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상호방위원조계획(MDAP)에서 삭제되었고, 미 국방부의 정규 작전 예산으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현지 미국 대사관이 원조 전체를 관리하는 일반적인 대외원조 관리 체계와 달리 유엔군사령관이 모든 원조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특별한 체계가 자리 잡았다. 이는 한국전쟁의 유산이었으며, 한국전쟁 정전협정 이후에도 1959년 7월 컨트리팀(Country Team)이 등장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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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국제적으로 합의된 ‘지속가능한 개발’이 지닌 냉전적 성격을 그 중요한 요소인 인도주의 구호 단체들 중 하나인 케아(C.A.R.E)의 한국사업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주한 케아는 유럽의 전후 구호를 돕던 미국계 민간자선단체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한국사업에 참여하였다. 케아는 인도주의 구호를 표방하였으나, 몇 가지 점에서 전후 미국의 냉전정책을 수행한 혐의가 있다. 미군정기 사업진출, 주한 케아의 우유급식사업, 그리고 푸드 크루세이드 사업이 대표적이다. 먼저 초기 주한 케아의 한국 사업진출은 미국 국무부 및 군부의 판단과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실제로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쟁 중 케아를 미국 내 한국전쟁 지원을 위한 매개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정권 등장 이후, 새롭게 선택된 한미재단과의 갈등 속에서 주한 케아의 독점적 지위는 훼손되었다. 한편 1950년대 주한 케아의 우유급식사업은 대표적인 인도주의 구호사업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사업은 한국 내에서 유니세프와 주한 케아가 미국 잉여농산물의 분배를 놓고 갈등한 대표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주한 케아는 유니세프의 우유급식사업을 케아의 이름으로 전유할 수 있었고, 동시에 한국정부 및 원조당국의 운송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50년대 중반 주한 케아의 푸드 크루세이드 사업은 주한 케아가 미국의 냉전이익에 복무한 증거이다. 소위 1달러 푸드 크루세이드라고 호명되었던 이 사업은 주로 38도선 인근의 마을들에 지원되었고, 냉전의 전초기지를 유지하는데 집중되었다. 동시에 ‘자조’패키지가 지원되었던 ‘자유의 마을’ 프로젝트들 역시 한국전쟁 당시 이탈한 북한주민들의 남한 재정착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주한 케아는 오늘날 대표적인 인도주의 구호단체이지만, 실제로는 냉전 하 자신의 영리적 목적과 미국의 냉전적 이익을 인도주의 구호라는 이름 하에 절묘하게 잘 동거시킨 민간자선단체였다. 1950년대 주한 케아의 활동은 현대인도주의 구호활동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사고를 제공하는 한 사례가 될 것이다.

중견국 공적개발원조 정책의 결정요인 -스웨덴과 호주의 비교를 중심으로-

최종현 ( Choi Chonghyun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28권 0호, 2020 pp. 97-131 ( 총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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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ODA)는 중견국들이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대외정책 수단의 하나이다. 본 연구는 중견국 ODA 정책에서 나타나는 국가 간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인도주의적 ODA 정책과 현실주의적 ODA 정책을 추진한 국가를 대표하는 사례로서 각각 스웨덴과 호주를 선정하고, 1차 및 2차자료에 근거해 두 사례를 비교 분석한다. 본고는 국내적으로는 정치경제 이념과 대외적으로는 지정학적인 안보 환경이 스웨덴과 호주 ODA 정책의 차이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임을 주장한다. 정치경제 이념의 경우, 스웨덴에서는 정부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사회민주주의적 정의관을 지닌 시민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고, 반대로 호주에서는 자유주의적 정의관의 영향력이 커서 개인들 스스로 경제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는 시민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두 나라 ODA정책의 차이는 부분적으로 이러한 서로 다른 정의관이 대외적으로 확장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스웨덴은 강대국 간 경쟁의 한 가운데 놓여있는 상황에서 자국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중립 노선을 선택했고, 중립을 확실하게 인정받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인도주의적인 ODA 정책을 채택했다. 반면 호주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직접적인 군사 침략 위협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고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 주변 안보 환경에 유의미한 변화를 미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주의 ODA 정책은 큰 틀에서 주변의 안보 확보를 위해 추진되었고, 결과적으로 현실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되었다.

『노동야학』에 나타난 국민 만들기의 논리 -유길준이 본 대한제국의 ‘하등사회’-

이새봄 ( Lee Saebom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28권 0호, 2020 pp. 135-172 ( 총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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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유길준의 『노동야학독본 제일』(勞動夜學讀本 第一, 1908)과 『노동야학 일』(勞動夜學 一, 1909)은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새로운 사회질서 속에서 노동이 갖는 의미를 체계적으로 설명해내고자 한 가장 초기의 시도였다. 이 글에서는 후자, 즉 최근에 발견된 『노동야학』의 독해를 통해 유길준이 1908년 시점에 대한제국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살펴보았다. 먼저 텍스트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유길준이 두 책을 집필한 계기가 된 노동야학회의 설립과 운영 문제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였다. 다음으로 『노동야학독본』과의 대조를 통해 알 수 있는 『노동야학』의 특징을 서술한 뒤, 구체적으로 그의 문제의식을 살펴보았다. 그는 전통적인 유학적 세계관에는 없는 ‘사회’ 개념을 인간관계의 새로운 축으로 설정하고, 『노동야학』이 상정하는 독자를 ‘하등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노동자’라고 말한다. 유길준은 자조(自助)하는 인간으로서의 주체성· 독립성을 노동자들에게 요구하며 ‘직업’을 통한 경제적 자립과 가질 것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행위가 ‘임금’에 대한 충성과 의무이어야 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자조 정신에 입각한 국민 만들기의 과제가 군주와 국가를 향한 무조건적인 복종 논의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유길준의 글 중에서 그의 목소리가 가장 생생하게 전달된 텍스트인 『노동야학』을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이상의 내용을 설명하고, 해당 텍스트의 집필 의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신파성’ 재론을 위한 시론 -‘신파’에 대한 사회적-관계적 접근-

권두현 ( Kwon Doohyun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28권 0호, 2020 pp. 173-220 ( 총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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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금까지 ‘양식’, ‘담론’, ‘미감’으로서 논의된 신파를 ‘정동체계’로서 재론하기 위한 시론적 성격을 지닌다. 신파적 정동체계는 신파적 작품 안팎을 아우르는 차원에, 미학과 윤리학을 포괄하는 차원에 폭넓게 펼쳐져 있다. 신파적 작품의 등장인물과 수용자는 이와 같은 체계를 전제로 마주하며, 정동하고, 정동된다. 신파적 정동체계는 서로 모순적이고 배타적인 정동들의 부딪힘과 뒤얽힘의 체계다. 신파적 정동체계를 사유함에 있어 고려해야 할 요건으로서 이 글은 ‘주체’, ‘제도’, ‘윤리’에 주목하였다. 신파적 정동체계의 주체는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관계적 존재에 해당한다. 주체가 배치되어있는 그 관계는 ‘시장 관계’와 ‘돌봄 관계’의 겹침으로 볼 수 있다. 신파적 정동체계를 이루는 양축인 시장 관계와 돌봄 관계는 종종 가부장제 가족 내에서 충돌하고 뒤얽힌다. 가부장제는 명백한 전통이자 관습인데, 이 관습은 법을 통해 보장될 뿐만 아니라, 역으로 법을 통해 생산되고 고안된다. 이 법은 「조선민사령」에 그 기원을 둔다. 조선민사령으로부터 비롯된 식민지기의 가족법은 관습적 윤리의 표상으로서, 이때의 윤리는 ‘정의 윤리’와 ‘돌봄윤리’를 양축으로 삼는다. 또한 정의 윤리는 ‘법적 정의’와 ‘시적 정의’를 양축으로 삼는다. 법적 정의는 시적 정의를 참조하며 구현되고, 시적 정의 또한 법적 정의를 의식하며 마련되는 것이다. 신파적 작품은 시적 정의의 구현을 통해 법적 정의에 누락된 돌봄 윤리를 드러낸다. 이 글은 신파적 작품의 원형에 해당하는 『불여귀』, 『쌍옥루』, 『장한몽』 등을 통해 이와 같은 이론을 검토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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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 소설사에서 ‘언문일치체’는 근대 소설 문체를 일컫는 다른 표현으로 사고되어 왔다. ‘구어체’라고도 불리는 ‘언문일치체’는 또한 서양 및 일본의 근대 문체, 특히 삼인칭대명사(‘그/그녀’), 과거형 종결표현(‘-었다’)라는 문법적 표지를 (마치 어휘처럼) ‘번역’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또 이 자체가 소설 문장의, 나아가 소설의 근대성을 가늠하는 척도처럼 작용해왔다. 이 글은 ‘언문일치’라는 이념적 지향에 초점을 두고 ‘언문일치체’의 문제를 반성해보기 위해 쓰였다. 이광수의 「무정」은 한글로 쓰인 첫 근대 장편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동시에, ‘언문일치체’로서의 완성도에 비추어 그 한계를 지적받아왔다. 하지만 「무정」을 소위 과도기적 형태로 규정하는 발전론적인 시야 안에서는 한국의 근대 소설과 소설 문장이 형성되어온 과정과 양상은 주제화되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기준이 되어버린 (문학적) 근대성의 문제도 재고하기 어렵다. 소설이라는 양식, 그 언어적 재현 질서가 형성되고 이해되기까지의 방식, 그리고 『매일신보』 연재 장편소설 「무정」의 문장이 구성된 방식은 언문일치 및 소설에 대한 이광수의 인식과 함께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광수는 조선의 현대를 묘사하는 새로운 소설의 문체의 구체적 조건으로 ‘순언문’과 ‘순현대어’를 제시했다. ‘순현대어’는 문명론적인 시간선상 위에서 정위된 ‘소설’과 ‘소설’이 묘사할 ‘현대’에 상응하는 언어적 표상이었다. ‘순현대어’의 실정성은 퇴화하는 흐름에 놓인 ‘문’(즉 중화)적 질서를 변별하는 한편으로 속된 ‘언문’의 잔상을 걷어내는 시간 의식의 공유를 의미했다. 이광수는 「무정」에서 인물과 인물의 사용 언어(대사) 및 언어적 표상을 짝지어 분절된 선형적 시간에 배치함으로써 기축이 되는 현재에 대한 감각을 ‘형식’이라는 인물의 시간경험 및 언어로 형상화하려 했다. ‘순현대어’란 이탈된 언어들, 이탈된 시간 경험들을 감별할 수 있는 의식에 의해 실체처럼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정」은 (네이션적) 균질성을 지향하는 언문일치의 흐름에 조응하고 있었다.

백신애의 방랑과 기행 -여성 사회주의자의 동북아시아 루트와 반제국 서사-

류진희 ( 柳眞熙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28권 0호, 2020 pp. 263-294 ( 총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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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애(1908~1939)는 여성 사회주의자였으며, 동시에 여성작가였다. 식민지기 여성 사회주의자는 비합법 요시찰(要視察)의 대상이었고, 여성 작가는 어디까지나 합법적 매체 장에서 배태된 존재였다. 애초에 이 둘은 섞일 수 없는 존재 양태였다. 물론 백신애 역시 활동기와 집필기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동아시아적 루트를 단속적이나마 기록으로 남긴 유일한 작가이다. 이 글은 백신애의 러시아 방랑, 중국 기행과 관련해 각기 다른 시기에 썼던 소설과 산문 등을 겹쳐 읽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 사이의 지연과 연쇄, 균열과 봉합을 드러내면서, 제국/식민지 체제가 내장하고 있던 모순 자체를 문제 삼고자 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백신애는 교사가 되면서 지역과 중앙을 넘나드는 사회주의 활동가가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 활동을 전심으로 하면서 곧 학교에는 나가지 않게 됐다. 이때 시베리아행이 감행되는데, 이 경험은 이후 원작 소설 「꺼래이」(1934.1-2)와 개작 「꺼래이」(1937), 그리고 일본어 산문 「나의 시베리아행」(1939.4)으로 그려진다. 각기 다른 시기, 같은 경험에 대해 쓰고, 고치고, 회상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단지 모험과 낭만만이 아닌, 그를 초과하는 고난과 사상이 엿보인다. 사실 백신애는 유학과 여행, 그리고 방문 등으로 일본을 많이 다녀왔지만, 이 사회주의 러시아에 비해 제국 일본에 대한 서술은 거의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등으로 인한 1930년대에 급변한 동아시아의 정치적 상황 속, 식민지 조선과의 비교에서 중국 하층계급과의 관계가 다채롭게 모색된다. 즉 「꺼래이」에서와 「청도기행」(1939.5)에서의 ‘쿨리(苦力)’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그러했는데, 단순한 연대감의 표출에서 복잡한 이질감의 표현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식민지 간 차이를 사유하는 것이며, 제대로 말해질 수 없는 저항을 기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을 둘러싼 이러한 음각된 반제국의 상상은 끝까지 견지될 수는 없었다. 1939년 6월 백신애는 자신을 오래 괴롭히던 소화기암으로 운명한다. 결국 말해지지 못했던, 아직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던 상해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에서 그의 얼굴은 이미 병색이 짙었다. 그는 유고로 남은 「여행은 길동무」(1939.7)에서야 사회주의자로서의 자신, 무엇보다 ‘방향전환’ 이후의 고뇌를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고백적 발화가 다른 누구도 아닌 일본인 사회주의자에게로 향했던 것 역시 당대 검열 장을 상기하자면 더 없이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겠다.

1950~60년대 김우종 비평의 속성과 그 궤적 변모 양상

홍래성 ( Hong Raeseong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28권 0호, 2020 pp. 295-333 ( 총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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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제목처럼 1950~60년대 김우종 비평의 속성과 그 궤적 변모 양상을 살펴보고자 했다. 본 논문은 여태껏 김우종에 대한 관심이 충분히 주어지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의 소산으로, 김우종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먼저 김우종의 발자취를 살피고, 다음으로 김우종의 비평적 언설들을 살피는 순서를 밟아나갔다. 일반적으로 김우종은 전후세대 비평가로 분류된다. 그러나, 김우종은 여타의 전후세대 비평가들과 결이 다소 달랐다. 김우종은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발걸음을 옮겨갔다. 처음에는 분석비평에 흥미를 보이더니, 갑자기 고전문학 작품을 재해석하는 데로 역량을 집중시키고, 그 와중에서 비평과 대한 자신의 관점을 표명하는가 하면, 어느샌가 참여문학을 주창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아붓는, 다채로운 행보를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김우종은 문단 내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는 ‘아웃사이더 비평가’였다. 한편, 김우종은 비평적 언설들을 통해 비평관, 전통론, 참여문학과 관련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었다. 김우종은 비평을 자기 갱신의 수단으로 여겼는데, 이는 상당히 독특한 인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김우종은 당시의 논란거리였던 전통에 대한 가치 평가의 문제에도 상당 시간 동안 몰두했는데, 그 끝에 부정적 극복론에서 긍정적 계승론으로 입장을 옮겨갔음이 확인된다. 더하여, 김우종은 이른 시기부터 참여문학을 주창하며 기존 문학의 쇄신을 요구하고 나섰던바, 이와 관련해서는 선구적인 입지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품성론의 역습 -해방 후 동아시아 식민주의의 변형과 존속을 중심으로-

김항 ( Kim Hang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28권 0호, 2020 pp. 335-365 ( 총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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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남한 주사파의 품성론과 전향에 초점을 맞추어 동아시아 차원의 식민주의 존속이 반복되는 양상을 추적한다. 남한 주사파는 사회구성체론과 정세판단에 바탕한 변혁이론이 아니라 변혁 일꾼의 품성을 핵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이 때 품성론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이어지는 계보 속에서 구체화되었으며, 그런 한에서 주사파는 1930년대 반제 반식민 투쟁의 연속성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보했다. 남한 주사파는 탈식민의 계보를 해방 후 냉전 대립으로 망각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서 찾았던 것이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남한 주사파는 대학사회를 중심으로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지만 이후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의 전향으로 상징되듯 쇠퇴의 길을 걷는다. 남한 주사파의 핵심 멤버들이 전향 후 북한 인권운동에 뛰어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전향은 동아시아 냉전체제에서 이뤄진 식민주의의 존속을 고스란히 반복한다. 패전 직후 일본에서 식민주의의 기억을 말소한 방식과 동일한 양상이 주사파의 전향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식민주의의 기억을 인권과 정상시민 등의 보편적 이념으로 은폐하는 양상을 보이며, 남한 주사파의 전향은 이런 측면에서 패전 직후 일본에서 전개된 식민주의의 은폐와 동일한 과정의 반복이다. 즉 남한 주사파는 동아시아 식민주의의 역사 속에서 비극을 반복한 소극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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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91년 이전 민족국가 바깥에서 등장한 세 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의 삶을 살펴보고, 이들에 대한 당대 대중매체의 재현 방식을 반성적으로 살펴보았다. 배봉기, 노수복, 배옥수의 삶은 대중매체를 통해 직· 간접적으로 고국에 알려졌으나 다양한 글쓰기 전략과 텍스트 짜깁기를 통해 상업적으로 활용되고 외설적으로 소비되었다. 결국 이들의 귀향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달성되지 못했다. 배봉기의 귀향의 거부/실패의 원인이 오십여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여성에게 특별히 더 가혹한 가난에 있었다면, 베트남난민이었던 배옥수는 젠더와 국적에 따른 차별에 의해 고국에서 잊혀졌다. 노수복은 비교적 한국의 활동가· 시민단체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그녀 역시 자신을 “중국인”으로 소개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대중매체는 조선인 ‘위안부’를 민족 수난사의 증인으로 호명하는 동시에 순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서사를 통해 이들을 공동체 바깥으로 배제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안과 바깥은 민족국가의 서사일 뿐, 배봉기, 노수복, 배옥수의 삶의 터전은 민족국가의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민족국가의 서사로 말끔히 회수되지 않는 이들의 삶의 현장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적 성격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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