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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774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7권 0호 (2009)

창립 무렵의 신문관(新文館)

박진영 ( Jin Young Park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7권 0호, 2009 pp. 9-46 ( 총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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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관은 1908년 6월 최남선이 창립한 근대적인 출판사다. 신문관의 관리와 경영은 출판 사업과 분리되었으며 편집과 인쇄, 판매 부문이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또한 청년 학우회와 조선 광문회는 최남선과 신문관을 구심점으로 삼아 적극적인 문화 계몽 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신문관의 창립 경위와 실상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연구는 신문관이 창립된 시기와 사옥의 위치를 실증적으로 추적하는 일에 초점을 두었다. 또 신문관의 창립 과정과 운영에 간여한 협력자와 주변 인물을 조사하고, 신문관의 기반 및 출판 활동을 둘러싼 역사적 조건을 검토했다. 이로써 회고와 증언에 의존하면서 빚어진 잘못을 바로잡았으며, 신문관이 담당한 역할과 성과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계몽 운동 주체의 변화와 "청년"의 구상 -이광수의 「용동」,「농촌계발」,『무정』을 중심으로-

김효진 ( Hyo Jin Kim ) , 김영민 ( Young Min Kim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7권 0호, 2009 pp. 47-87 ( 총 41 pages)
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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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기본적 과제는 이광수가 쓴 세 편의 글인 「용동」·「농촌계발」·『무정』의 상호연관성과 차별성을 밝히는 것이다. 단편산문 「용동」은 서사적논설인 「농촌계발」로 재구성되고, 「농촌계발」의 주제의식은 『무정』에서 반복·확산된다. 세 편의 글은 반봉건성과 계몽의식을 노정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그러나 「용동」과 「농촌계발」에서는 서사가 논설의 일부로 활용되는 반면, 『무정』은 서사가 전면화되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형식적으로 차이가 난다. 「용동」·「농촌계발」·『무정』의 서사를 이끄는 중심 인물의 변화는 계몽운동의 주체에 대한 이광수의 인식과 그 변화 과정을 반영한다. 이는 또한 문명의 이상을 내면화한 `청년`의 범주를 결정짓는 경계가 세밀해져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용동」의 계몽운동 주체인 `이참봉`은 외적으로는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듯하지만, 실은 여전히 `상속`과 `증여`의 세계 속에 머무는 낡은 인물이다. 그에 비해 「농촌계발」에서 계몽운동을 선도하는 인물 `김일`의 언설과 행동은 `새로운 시대`가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농촌계발」에서 `청년`은 조선 전체를 문명국으로 만들어야 할 사명을 띤 집단적 주체로 호명된다. 『무정』에 등장한 `형식`과 `영채`·`선형`·`병욱` 등 청년 `집단`은 「농촌계발」이 남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고안된 문학적 장치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영채`, `선형`에 대한 `형식`의 구원은 이들을 신교육에 적의(適宜)한 대상으로 각성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점에서, 『무정』의 연애 서사가 궁극적으로는 여성을 `신-청년`이라는 새로운 인간상 안에 포합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모습일 뿐, 『무정』 속의 `자유연애`는 남성 중심주의와 부딪치면서 표류한다. `영채`의 순결성 훼손이 `형식`에 의해 육체의 문제로만 소급되어 의미화되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광수는 「용동」과 「농촌계발」 그리고 『무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서사를 통해, 조선을 변화시킬 새로운 계몽 주체로 집단적 `청년`을 부각시키려 했다. 하지만 『무정』에서의 `청년`은 남성 젠더적으로 구상된 인간상의 범주에 머물게 된다. 실질적으로는 `신-청년`의 범주에서 여성이 제외되고 있는 것이다.

김동인 문학과 일본의 관련 양상 -「여인」에 대하여-

하타노세쓰코 , 최주한(역)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7권 0호, 2009 pp. 89-139 ( 총 51 pages)
1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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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자신이 자전(自傳)이라 부르기도 한 터라, 지금까지 「여인」의 내용은 사실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 본고에서는 「여인」의 텍스트 가운데서 일본이 무대로 되어 있는 처음의 연재 3회분 `메리`, `나카지마 요시에`, `만조지 아키코`장을 가능한 한 실증적으로 고찰하고자 했다. 그 결과 `메리`장과 `나타시마 요시에`장의 경우, 적어도 지리적 서술은 사실에 입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음으로 `만조지 아키코`장에 등장하는 F화백 후지시마 타케지(藤島武二)에 대해서 연보 및 제자들의 회상과 비교하여 검토해 본 결과, 김동인이 후지시마의 문하생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음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만조지 아키코라는 여성도 김동인이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러면 그녀는 김동인에게 무엇을 의미했던 것일까. 「여인」의 주인공을 매료시키는 동시에 혐오하게 만드는 아키코라는 여성은 자아의 벽에 틀어박혀 있던 김동인이 마음속에서 찾고 있던 `타자`이자, 영화나 박람회 등의 문화적 치장으로 식민지의 청년을 매혹시킨 대도시 `도쿄` 이 두 가지를 의미하고 있으며, 「여인」의 주인공이 아키코에게 품는 양가적인 감정은 작자가 `타자`와 `도쿄`에 대해 품었던 양가 감정의 투영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추론이었다. 마지막으로 본고에서는 김동인이 자기를 후지시마의 제자로 내세운 이유를 고찰했다. 텍스트에 나오는 `단순미`, `구성미`라는 말을 단서로 하여 이 두 예술가의 창작론에 공통적인 `단순화`라는 말을 비교 검토하고, 김동인이 소설 창작에 불가결하다고 간주한 `단순화`는 후지시마가 창작할 때 화면 구성의 제일의(第一義)라고 역설한 `단순화`에서 채용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따라서 김동인이 후지시마에게 미학을 배웠다고 말한 것은, 직접적인 지도를 받은 것은 아니더라도 그의 회화론에서 간접적으로 배웠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소문"에 대응하여 형성되는 "신여성"의 기표 -나혜석의 단편 「경희」(1918)를 중심으로-

손혜민 ( Hye Min Sohn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7권 0호, 2009 pp. 141-168 ( 총 28 pages)
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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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18년에 발표된 나혜석의 단편 「경희」를 `신여성`의 자기정체성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으로 독해하고, `소문`의 모티프에 주목하여 당대 `신여성` 담론이 주조되는 양상을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신여성`은 조선의 담론장에 등장한 이래, `소문`의 대상이자 `소문`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소문`들이 당대 `신여성`에 대한 대중의 인식/욕망을 드러낼 뿐 아니라 `신여성`의 상을 형성하는 데 주요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경희」의 서사에서 `소문`의 수사가 활용되는 방식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희」의 서사는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욕망이 투영된 일련의 `소문`들을 제시하고 이를 부정하는 방식을 통하여 `진정한` `신여성`의 상을 구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까닭에 「경희」가 제기하는 `신여성`의 덕목은 스스로 타자화하고자 했던 식민지 남성지식인들의 담론과 친연성을 지니는 동시에, `현모양처 이념`과 동궤에 놓이게 된다. 작품 속에서 `구여성`을 통하여 `소문`이 말하여지는 발화/유통 구조는 `소문`의 배면에 존재하는 남성주체의 시선을 은폐하고 구여성-남성의 연대를 조장하는 `소문`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또한 「경희」에서 `소문`이 신문 등 근대적 제도와 매체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당대 `여학생/신여성`에 대한 소문이 공적담론을 공고히 하는 데 복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경희」에서 `신여성`의 자기규정은 끊임없는 타자의 부정을 통하여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 이는 `경희`가 계몽의 언술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타자에 의해 이야기되어질 뿐 스스로를 대변하지 못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 때문에 `경희`는 `신여성`의 기표에 합당한 `신여성`의 내용을 발견하기 위하여 내적 성찰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경희`의 내적 번민은 개인적 차원에 근거한 `직분`의 윤리를 통하여 봉합되어 버린다. 이는 당대의 `신여성` 담론이 `소문`으로 대변되는 남성주체들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처럼 「경희」에서 암시하고 있는 바, `신여성` 담론을 추동한 것은 `신여성`을 둘러싼 남성주체들의 욕망이었다. 그러나 「경희」는 계몽의 기치 아래 신여성-구여성의 연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소문`에 가담한 구여성들을 계몽의 논리 안으로 포획하고자 한 「경희」의 시도는 `소문`을 전유하는 새로운 방식에 다름 아니다. 나혜석의 「경희」는 저항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여성적 발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폭력적 불교 -한국 불교와 태평양 전쟁, 1937~1945-

블라디미르티호노프 ( Vladimir Tikhonov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7권 0호, 2009 pp. 169-204 ( 총 36 pages)
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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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태평양 전쟁 시기의 한국 제도권 불교의 전쟁협력의 이념적 기반을 주된 주제로 다룬다. 모두(冒頭) 부분에서는 식민지 불교의 제도적 틀을 먼저 고찰하여 특히 사찰령(1911년) 등 총독부의 각종 법률에 주목한다. 이 고찰의 결론은, 불교가 사실상 식민지 행정체계의 일부분으로 체제에 편입된 대가로 식민지의 "종교 시장"에서의 나름의 특권적 입장을 굳혔으며 포교소와 근대적 학교의 점차적 증설 등 양적, 물적 차원에서의 "근대화"를 이루게 됐다는 것이다. 단, 총독부와의 유착으로 근대 민족주의적 명분 쌓기에 실패했으며, 그 속에서는 한용운 (1879~1944) 등으로 대표됐던 극소수의 민족주의적 내지 자유주의적 반대파가 철저히 고립돼 무력화됐다. 이미 1930년대 초반부터 총독부의 각종 대중동원 켐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제도권 불교는, 태평양 전쟁 발발(1937년)로 그 대(對)정부 협력을 더욱더 가중시켰다. 사찰 승려들은 전시의 가장 근본적인 "의례적 서비스"(전장에서의 전몰을 "명예롭고 정토왕생에 이로운" 것으로 만들려는 전몰 군속 위령제 등)를 제공했으며 전쟁헌금 모금자 내지 일본어 교사, 선전 요원 등의 역할로 일본제국을 섬겼다. 이념적으로는 이와 같은 대(對)국가 봉사는 일제를 "기독교적 적국"들을 상대로 "법전(法戰)", "성전(聖戰)"을 벌여 결국 전세계를 의롭게 통일시키려는 불교국가로 보는 시각에 의해서 정당화됐다. 대승불교의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등 전체 및 개체 사이의 관계론들이 일제의 전체주의(전시 일본에서 이 용어가 긍정적 의미로 쓰였다)의 철학적 기반으로 이해됐으며, 전장 체험은 "육바라밀 실행", "보살다운 자기헌신" 등으로 설명되어졌다. 이와 같은 태평양전쟁 긍정론의 골자는 물론 당대 일본의 우파 내지 어용 이념가로부터 차용된 것임에 틀림없지만 식민지 조선 제도권 불교의 지도자들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승리의 경우에는 한국 불교의 대내외적 위상이 제고되리라고 확신하는 등 전쟁에 대한 자기 나름의 자율적인 기대와 계획들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태평양 전쟁 시의 전시 협력으로 한국의 제도권 불교에서 대(對)국가 전시협력, 또한 군대 당국과의 협조 관계와 국가가 벌이는 전쟁에 대한 무조건 긍정 등이 당당하게 착근됐으며, 이와 같은 국가, 군대와의 협력은 1945년의 일제 패망 이후, 대한민국 시절에도 계속 지속돼 현재까지도 그 어떤 약화의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제 말기 프로파간다 영화에 나타난수행적 의례와 신체의 구성

하신애 ( Shin Ae Ha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7권 0호, 2009 pp. 205-234 ( 총 30 pages)
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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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제 말기 프로파간다 영화에 나타난 제국 국민의 정체성 형성 과정을 `수행적 의례`라는 신체적 형식으로 포착하고자 했다. 특히 수행적 의례가 그 대상의 분할에 따라 궁성요배, 군인맹세, 열병식, 군가의 합창 등을 비롯한 근대 제국적 의례와 부락제, 조선 민요, 조선 춤 등을 비롯한 조선 민속 의례라는 두 가지 방향성을 띤 채 활용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이처럼 이원화된 의례의 수행을 바탕으로 하여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요구되었던 두 가지 `유용한 신체`의 형상이 전선-후방, 제국-로컬이라는 위계 하에 분리-배치되어 스크린 상에 나타나는 과정들을 살펴보았다. 본 연구는 향토적이며 민속적인 의례를 통해 유포되는 프로파간다가 근대적이며 제국적인 의례를 통해 유포되는 프로파간다만큼이나 황민화 및 식민 동일시의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는 측면에서 제국-로컬 간의 관계를 재조명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제국·전선에 대응되는 로컬 혹은 후방에 배치된 피식민자의 경우, 스크린 상에서 이들은 근대적이며 제국적인 의례가 아니라 오히려 향토적이며 민속적인 의례를 통해 `대군의 방패`와 대쌍을 이루는 또 다른 `유용한 신체`로 구성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때 이들이 수행하는 민속 의례란 그간의 논의에서 다루어졌듯이 엑조티시즘이나 로컬리즘의 고정된 대상으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의도 하에 재(再)맥락화되어 황민화 및 식민 동일시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전시체제기에 포획된 피식민자의 신체를 `제국 국민`의 신체로 구성해내기 위한 훈련의 의례란 단지 근대적이며 제국적인 의례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이 시기 황민화 기획의 특성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근대적이며 제국적인 의례를 통해 유포되는 프로파간다만큼이나 민속 의례를 통해 유포되는 프로파간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일랜드"의 전유, 그 욕망의 "이동(移動)"을 따라서

김모란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7권 0호, 2009 pp. 235-272 ( 총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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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쿠치 칸(菊地寬)과 마해송을 소재로 한 최근의 소설과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제국일본과 식민지조선의 근대가 경험한 영국/아일랜드와의 접합은, 제국일본이나 식민지 조선 어느 한 쪽의 주체화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이 둘의 상호작용의 결과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일본과 식민지조선에서 `아일랜드`라는 것이 어떻게 기능하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조망하는 기존의 분석의 틀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그를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근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근대 유럽에서 `켈트`라는 타자가 주목받게 된 계기로까지 소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계기로서 아놀드의 켈트론에 주목하여, 이러한 켈트론이 제국일본에서 어떠한 켈트, 혹은 아일랜드 담론을 재생산하게 되었는가를 먼저 고찰하고자 한다. 그 후에 기쿠치 칸의 경우를 중심으로 아일랜드에 대한 일본의 모순된 시선을 살펴보고, 이어서 조선에서의 아일랜드라는 문제로까지 그 논의를 이어갈 것이다. 본 논문에서 기쿠치는 유럽을 기원으로 하는 켈트 담론과 제국일본의 아일랜드에 대한 모순된 시선, 그리고 조선으로 옮겨진 `아일랜드`의 재현이라는 꿈을 잇는, 하나의 연결 고리인 셈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 연결 고리를 따라 세 개의 시공간을 횡단하며, `켈트` 혹은 `아일랜드`의 전유에 대한 욕망이 각각의 시공간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그들 사이의 연속과 단절, 혹은 반복과 변용에 대해서 고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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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창서관판 『삼봉이네 집』의 개작양상을 통해 `식민지 검열`(일제·작가 자신)이 어떻게 원본 텍스트를 훼손하고 변형하는지를 살펴보았다. 1930년대 이광수의 『군상(群像)』 3부작의 하나로 1930년 11월 29일부터 1931년 4월 24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삼봉이네 집』은 1935년 일제의 총독부에 의해 "불허가 출판"처분을 받는다. 1941년의 이광수의 개작을 통해 "삼봉의 가족이 거주하는 토지에 대한 일본의 수탈과 그들의 분노"는 은폐되고 소설은 일본의 수탈에 의한 조선 "농촌파멸의 한 이야기"에서 일본의 식민지 통치와는 무관한 평범한 조선 "농촌 청년의 한 이야기"로 변한다. 이광수는 만주에서의 이데올로기적인 부분 즉 공산주의 사상과 관련된 언술 등 거의 10회 분량을 삭제한다. 그리고 삼봉이는 만주국에서 만주국의 국민으로 "새로운 결심을 하고 새 살림을 하게 된"것으로 결말을 고친다. 이광수는 만주국에 대한 일본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입장에서 만주, 만주국에서 사는 조선인들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1930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삼봉이네 집』은 `식민지 검열`을 거쳐 내용과 모양이 완전히 달라진 1941년 영창서관판 『삼봉이네 집』으로 변형되었다. 『삼봉이네 집』은 해방 이후에도 여러 종류의 텍스트들이 생겨났다. `식민지 검열`은 식민지 시기의 텍스트 변형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텍스트 변형에도 흔적을 남겼다. `식민지 검열`은 결코 식민지 시기에만 한정될 수 없는 복잡한 문제였다. 때문에 이 글을 통해 필자가 재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식민지시기의 한국문학연구에서 판본, 즉 텍스트 확정의 중요성이었다. 정확한 연구를 위해서는 텍스트비평이 우선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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