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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반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1975-7743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9권 0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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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은 일반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시민 투쟁으로 정의된다.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해석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일반론에 기초해 있다는 점을 문제 삼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본고에서는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이 선택한 저항 의례를 중심으로 4월혁명에 재접근함으로써 학생들의 사유한 자유민주주의의 구체적 실체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것은 4월혁명기를 중심으로 대학생들이 정치적인 것을 상상하는 방식과 이들의 사유를 통어하는 당대의 담론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정치적인 것이 구성되는 양상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일이다. 또한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에 정향되어 있던 이 시기의 정치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 시위 과정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강화되는가를 고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 본고에서는 학생들이 특정한 방향에서 노래와 구호, 행진, 시위 등의 저항 의례를 실행했으며, 이를 통해 시위의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민족주의 담론을 동원해 대의 민주주의를 지지하였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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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위 ``단카이(團塊) 세대``의 청년문화(youth culture)의 특징을 당시에 유행했던 대중만화를 중심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60년대의 정치적 ``반란``은 동시에 문화적 ``반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공공언설권에서 배제된 파괴와 폭력의 욕망(혁명성)을 표출할 수 있는 대안적 미디어로서 만화 미디어가 대두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카이 세대에게 만화 미디어는 지배문화와는 다른 이질적인 미디어 언설권이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차원에서이다. 하나는 그 내용면에서 지배 미디어에서 다룰 수 없는, 그렇게 때문에 지배문화에 적대할 수밖에 없는 혁명적 열기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담아내는 대안적 미디어로서이다. 물론 텔레비전 등과 같은 지배 미디어에서도 단카이 세대를 겨냥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였지만, 이런 프로그램들은 단카이 세대의 양적인 비중에 주목해 성인기 진입을 목전에 둔 청년기의 일과성의 ``일탈`` 현상으로 문화적 ``반란``을 자리매김했을 뿐이다. 두 번째는 그 형식면에서 만화라는 이미지 미디어가 활자 중심의 지배 미디어에 대한 대항 미디어로 대두되었다는 차원에서이다. 이는 텔레비전이나 만화 같은 이미지 미디어를 소비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이미지 세대가 하나의 층으로 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만화 미디어는 그 내용과 형식면에서 활자 중심의 지배 미디어에 대항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화 미디어의 대항적 성격은 그것이 소비사회의 산물이라는 점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이는 만화 미디어를 특정한 연령층(단카이 세대)이 소비자로서 시장에서 구입한다는 측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미디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소비문화적 요소를 만화 미디어가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비문화적 요소와 반체제적 폭력/파괴의 욕구를 병치시키고 이를 이미지로 담아낸다는 의미에서 만화 미디어는 대항적 미디어였다. 하지만 소비사회의 본격적인 출현에 의해 소비문화가 지배문화에 의해 포섭되거나 하위문화로 서열화됨에 만화 미디어가 가지는 대항적 성격은 점점 퇴색해갈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반체제적 금욕주의와 소비문화의 갈등이었던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적군파 ``숙청`` 사건은 1960년대에 일시적으로 병존했던 반(反)체제적 금욕주의와 소비문화의 최종적인 ``파탄``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일의 조』의 야부키 조의 죽음도 반체제적 금욕주의의 종말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무이 전』이 학생운동의 급격한 쇠퇴와 함께 1971년에 막을 내리게 된 것은 이 만화에서 읽어냈던 역사, 투쟁 같은 단어들이 1970년대의 학생들에게 더 이상 가슴을 뛰게 하는 단어로 다가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일의 조』가 격렬한 혁명성의 비극적 서사로서가 아니라 빈민가 출신의 성장 이야기로 ``둔갑``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만화는 그 형식면에서 미디어의 한 장르로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지만, 그 내용면에서는 ``혁명성``을 상실하면서 지배문화의 하위문화로 자리 잡게 된다. 따라서 만화를 중심으로 하는 단카이 세대의 문화적 반란은 그 내용에서가 아니라 이미지 문화라는 형식면에서의 반란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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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타이완의 감독 허우샤오셴은 초기영화인 <펑궤이에서 온 소년>과 <연연풍진>을 통하여 1960년대와 1970년대 타이완 청년들의 삶과 정서, 감각의 궤적을 되묻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다. 허우는 고도산업화 시대의 타이완을 살아가는 청년들을 혼란과 고독 등의 정서로 포착한다. 이를 거스르고 극복할 힘의 소재(所在)를 찾는 것이 허우 영화의 목표 중의 하나였고, 그것이 ``포스트 경제 기적`` 시기 타이완에서 허우 영화가 가지는 정치성이다. 본고는 산업화와 근대화의 변동기에 청년들이 도시로 이동하고 또 도시와 고향을 왕래하는 궤적 속에서 새로운 감각과 정치의 장소를 구체적으로 발견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청년들은 도시와 고향 사이의 넘나듦을 통하여 도시와 고향이라는 이중적인 시공간을 해체하고 재조직하여 현재적으로 공존하는 청년들의 공간인 새로운 로컬을 형성했다. 허우의 영화에서 특권적으로 등장하는 도시의 ``거리``와 고향의 ``풍경``은 청년들이 구축한 트랜스로컬리티의 감각이 빛나는 장소이다. 영화속 청년들은 개발과 발전의 이데올로기에 영합하지 않고 이를 거스르고 재사고하는 새로운 공간을 트랜스로컬한 사고로부터 생성시킨다. 그 과정에서 1970년대 점화했던 ``향토`` 개념이 재해석되고 재정치화되고 있다. 1960~70년대 경제개발기 고단한 타이완의 노동자 청년이 발견한 삶의 장소와 감각은 도시와 고향을 오가는 청년의 등장이라는, 이동성이 심화되는 조건 및 그 주체의 형성과 관련이 있다.

특집논문 : 청년 그리고 정치적인 것 ; 청년 세대 영화의 정치적 상상력

김선아 ( Sun Ah Kim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9권 0호, 2010 pp. 105-135 ( 총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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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가장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한 시기는 80년대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청년세대는 이전의 한국영화와 단절을 선언하면서 영화와 혁명과 민중을 함께 이야기했다. <파업전야>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청년세대 영화일 것이다. 청년세대의 문화는 ``특정한 역사와 문화의 시기에 지배 문화에 대한 대응과 저항을 보여주는 특정 하위문화의 연령, 스타일, 그리고 행동``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의 청년세대 영화는 지배적인 상업영화에 대한 저항과 대응을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적극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영화가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던 90년대를 거쳐 주류 영화가 된 후 현재의 새로운 청년 세대의 영화가 등장한다. 본 논문은 독립영화에서 코리안 뉴 웨이브로 이어지는 과거의 청년 영화가 아니라 현재, 정확하게 2000년대 이후의 청년 세대의 영화를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 현재 청년세대의 영화는 과거 80년대 청년 세대의 영화를 엄숙주의와 아마추어리즘으로 규정하고 단절하면서 동시에 기존 상업영화의 기술과 장르를 흡수하는 모순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모순적 움직임 속에서 청년 세대 영화는 이전과는 다른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민중과 혁명을 위한 청년 영화가 상상했던 ``그 정치``가 아니라 사회와 영화 매체에 대한 ``자의식성``을 바탕으로 한 아이러니한 영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청년 세대는 영화를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회적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양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들 영화에서 영화라는 매체는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인간의 ``못난 감정``을 표현하는 기계 장치이다. 청년 세대 영화는 또한 이전의 정치적인 무기로 영화를 고려했던 청년 세대의 영화보다 훨씬 더 다층적이면서도 보다 자의식적인 미학을 통해 영화 매체를 난국에 처해있는 개인의 감정이 공적으로 보편화되는 접합의 장소에 놓고 있다. 과거 청년 세대가 보여줬던 정치적 영화에 대한 피로감을 드러내면서 냉소적 아이러니로 빠지거나, 현실과 장르간의 변증법적 관계에 놓인 장르영화가 아닌 현실을 과잉현실화한 장르영화에 매몰되지 않는다면 오늘날 젊은 감독들의 영화는 삶이 아닌 영화 미학을 정치적인 표현의 토대로 삼은 새로운 세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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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와 세대를 둘러싼 담론들은 사회학에서 언론학, 역사학, 문학, 문화연구 등의 학문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저널리즘과 광고, 마케팅, 그리고 대중문화 등의 영역에서도 주기적으로 등장해왔다. 세대는 한국사회의 급속한 사회문화적인 변동과 탈전통화, 그리고 소비자본주의의 심화와 같은 과정들을 압축적으로 포착하(려)는 키워드 혹은 상징으로 종종 사용되어왔다. 세대담론들 중에는 "4·19세대"나 "386세대" 관련 논의들과 같은 주요한 역사적 사건과 정치적인 지향점을 일정하게 공유하는 집단의 특성을 이들의 역사사회적인 역할과 체험의 공유 그리고 주체성의 측면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작업들이 있다, 또한 "신세대"나 "P세대", "X세대"와 같은 청년세대의 특징과 이들과 기성세대와의 차이를 주로 문화적인 감성과 습속의 형성 그리고 대안적인 가치의 표출을 중심으로 논하는 작업들은 종종 기성세대와 차별화되는 이 특정세대가 발현하는 감정구조와 행동에 주목하였다. 나아가서 "Web2.0세대"나 "IT세대" 혹은 "N세대" 등의 사례들이 예시하듯이, 정보테크놀로지의 사용과 이를 매개로 한 실천상을 보여주는 청년세대의 특질에 초점을 맞춘 학문적인 작업과 저널리즘과 대중문화가 재현하는 사례들 또한 다수 존재한다. 부연하면 세대담론은 복잡다단한 사회, 문화, 정치적인 차원의 변화상을 포착할 수 있는 느슨하지만 유용한 개념화의 도구로 종종 상당수의 연구자와 비평가 그리고 저널리스트를 포함한 담론생산자들에 의해 채용되어 왔다. 그럼에도 세대라는 개념 혹은 이론적인 구성물이 갖고 있는 의미의 복수성과 개념적인 유동성, 정의 하기의 어려움, 그리고 과도한 일반화 등의 문제점들로 인해서 세대담론에 대한 연구는 상당한 한계를 노출하기도 한다. 세대 관련한 다수의 신조어들과 개념들이 양산되었지만, 동시에 세대의 개념과 세대담론의 명과 암을 정치하게 분석하는 작업들은 아직 상대적으로 희소하다. 이 글은 그간 매우 다기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제기되어 온 세대담론을 기존에 수행된 주요 작업들을 중심으로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특히 199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신세대"담론과 2000년대에 등장한 "촛불세대" 관련 담론들을 정리·비교함으로써, 향후 진행될 세대 관련 연구와 담론생산에 일정한 방향성과 모색의 지점들을 조심스럽게 제시하고자 한다. 동시에 이 과정에서 본 작업은 그간 주로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천착되어 온 "세대의 정치학"과 인문학 부문에서 시도되어 온 "세대의 문화정치학"을 결합시키고자 하는 시도 또한 담는다. 이 작업은 "신세대"와 "촛불세대" 관련 담론들의 함의와 이들 담론의 형성에 개입하고 있는 일련의 해석적인 관점과 맥락적인 요인들을 짚어보고, 세대 관련 연구들이 보다 활성화될 수 있는 일련의 제언들을 제공하고자 한다.

기획논문 : 시적인 것에 대한 시론(試論)적 고찰 -황지우의 시론(詩論)에 기대어

강동호 ( Dong Ho Kang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9권 0호, 2010 pp. 183-219 ( 총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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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론사에서 ``시적인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 끈질기게 개진된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시적인 것을 논리적인 언어로 풀어내기 보다는 주관(이들은 대개 감성적 천재이다)의 정서적 소요사태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한 한국의 낭만주의적 인식은 시작(詩作)을 ``제작``의 관점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천재적 영감``의 소산 또는 영감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시적인 것``의 존재론적 기반을 탐사하는 일은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시``, ``시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시적인 것``이라는 개념들 사이의 관계성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물음이 진지하게 시도될 때 비로소 한국 현대시사에 덧대어 끈질기게 생장(生葬)하고 있는 시에 대한 오래된 낭만주의의 망령을 걷어내고 시적인 것의 주추(유물론)를 새롭게 재구성해볼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시적인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개진하기 위한 이론적 지반을 탐색하려는 일종의 시론(試論)적 텍스트이다. 이러한 난제를 감당하기 위한 예비적 작업으로 본고는 우선 황지우의 시론들을 해체적인 방식으로 읽으려고 한다. 이 글이 황지우를 독해하면서 이끌어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시적인 것``은 특정 존재(개별자)의 본질을 구성해줄 수 있는 존재론적 형상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으로 있는 것이나, 그것 자체가 플라톤적 보편자는 아니라는 점에서 이데아적 실체론과 거리를 둔다. 아울러 시의 객관성/실재성/보편성을 범주적 차원의 사유로 대체한다는 것은 시적인 것을 실체론적인 존재론의 영역도 아니고, 발생학적 인과론의 영역도 아닌 곳에 ``시적인 것``에 대한 보편적 최소 정의를 입안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위상학적 공간은 최근의 탈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공통적으로 지시하는 근원적 차이와 존재론적으로 일맥상통한다.

기획논문 : "삶의 시 되기"와 "시의 삶 되기" -영화 <시>와 <하하하>를 통해 본 미학의 정치

심보선 ( Bo Seon Shim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사이間SAI  9권 0호, 2010 pp. 221-257 ( 총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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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시>와 <하하하>에서 다루어지는 시를 랑시에르의 미학 논의를 빌려와 분석하였다. 두 영화가 드러내는 시를 자율성 이후의 시, 부르디외식의 사회적 위상학이 식별할 수 없는 시로 명명하고 그것의 존재 양상을 살펴본다. 또한 이때 두 영화에서 드러나는 시의 기능과 가치, 가능성과 한계를 그것이 수반하는 주체화와 사회관계와 연관하여 미학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미학의 정치란 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문제 삼음으로써 공통의 것을 재분배하고 재형성하는 사유이자 실천이다. 먼저 <시>의 시는 자율적 문학 장에 속하지 않은 시를 쓸 수 없는 자가 삶을 감성화하는, 즉 ``삶의 시 되기``를 기획하는 미학적 정치의 수단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와 같은 미학적 정치는 감각의 충격이 주는 극단적 이질성으로까지 삶의 시 되기를 밀어붙이면서 해방의 약속을 포기하고-영화에서는 미자의 사라짐-타자성의 힘-영화에서는 소녀의 죽음-을 증언하는데 그치고 만다. <하하하>의 시는 자율적 문학 장의 구성원들이 쓰는 진정성 없는 시를 드러낸다. 이때의 시가 수행하는 미학의 정치는 공통의 삶의 상징들을 제공하는 관계 구성적 기능과 가치의 측면에서 ``시의 삶 되기``로 명명될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와 같은 미학의 정치는 감각의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이르지 못하며 다만 서로에게서 ``좋은 것``만 발견하고 이를 인정해주는 사적 친교 및 연애 관계의 구성에 그치고 만다. 본 논문은 <시>와 <하하하>에서의 시가 수행하는 미학의 정치의 한계를 랑시에르가 언급한 바 있는, 탈정치화하는 세계의 특성으로서의 "윤리적 전환"과 관련하여 분석하였다. 두 영화에서 시는 궁극적으로 당위와 권리를 형상화하는 정치적 상상력을 주어진 사실과 존재에 체류하는 윤리적 규범성으로 환원시키고, 결과적으로 감각의 재분배 활동을 중도에 그만둠으로써, 미학의 정치를 완수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본 논문은 <시>와 <하하하>에서 드러나는 시의 가능성과 한계를 밝히면서 미학의 정치가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종결하지 않고 삶의 형태와 미의 형태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영구적 진자운동임을, "지금 여기"의 현실성을 "지금 여기가 아닌 곳"의 가능성으로 대체하려는 끝없는, 그리고 불가능한 투쟁임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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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실업소설 부란극림전(實業小說 富蘭克林傳)』과 『강철대왕전(鋼鐵大王傳)』의 번역 대본을 제시하고 텍스트 간의 비교 고찰을 통해 1910년대 초 서양 위인 전기물의 수용 양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데에 있다. 아울러 이 두 텍스트의 번역자 및 감수자로 표기되어 있는 이시후와 김용준, 그리고 현순의 사적 및 그들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 시기 번역물 출판의 양상에 대한 보다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이 논문의 또 다른 목적이다. 『실업소설 부란극림전(實業小說 富蘭克林傳)』(1911)은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The Autobiography of Benjamin Franklin)』의 일역판인 모치즈키 고자부로(望月興三郎)의 『ベンジャミン·フランクリン自敍傳』(1889)이다. 『實業小說 富蘭克林傳』은 번역자의 의도에 따라 내용이 생략·압축되는 등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의 경우는 일역본과 상반되는 내용으로의 개작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번역자 이시후는 대체로 의역을 택하되 자신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는 방향으로 개작을 병행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이시후가 이해조의 부친 이철용이 설립한 신야의숙의 교사로 재직하였음을 새로이 확인하였다. 그는 민간의 교육운동취지에 공감하고 이에 동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신야의숙을 찾아갔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학교의 교사로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해조 또한 이미 신야의숙 시절부터 이 학교의 사무원으로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개교 시점인 1906년 2월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관계는 이때부터 청성제일학교가 폐교되던 1911년 9월까지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이해조의 작품들과 이시후의 『부란극림전』이 보급서관을 통해 함께 발간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해조를 매개로 사주 김용준과 이시후의 관계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철대왕전(鋼鐵大王傳)』의 번역 대본은 이사무 이시이(石井勇)가 지은 『最近米國成功十傑』(1903)이라는 책에 수록된 「鋼鐵大王カ一ネギ一」다. 이 두 텍스트의 동일성 역시 목차 및 내용 비교를 통해 사실로 확인된다. 이 텍스트는 충실한 직역이자 축어역에 가깝다. 이해조의 작품이지만 그 저작자로 김용준이 표기되어 있는 사실 및 감수자로 표기된 현순의 이력 등을 감안할 때 이 텍스트의 번역자로 표기된 보급서관 사주 김용준이 실제 번역자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현순은 1899년부터 1902년까지 3년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순천당학교(順天堂學校)에서 수학하였고, 1903년부터 1907년까지 하와이 한인감리교회 목사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는 상동교회 내에 설립되었던 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의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1910년 봄부터 원장으로 취임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현순이 일어와 영어에 모두 능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비록 감수자로 표기되어 있긴 하지만 그가 직접 번역을 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김용준이 아닌 또 다른 무명의 번역자에 의해 번역된 원고를 감수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그러나 현재로선 사실 관계를 확증할 만한 자료가 부재하여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보급서관의 사주인 김용준이 이들 작품의 번역에 깊숙이 관여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오히려 이시후와 현순이 『부란극림전과』 『강철대왕전』을 직접 번역한 주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따라서 김용준이 사주로 있던 보급서관의 출판 활동을 포함하여 사주가 저작자로 표기되어 있는 여타의 근대 초기 저작물들의 창작 및 번역 양상에 대한 정밀한 재고찰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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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17년째인 1927년, 북경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위건공(魏建功)은 일본인에 의해 설립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에 중국어 교사로 초빙되어, 일년 수개월 서울에 체재했다. 내한(來韓)전부터도 중국의 문예주간지 『어사』(語絲)에 수필 등을 발표했던 그는, 서울 체재 중에도 이 잡지에 수필 발표를 계속했다. 연재 형식인 「교한쇄담」(僑韓쇄談)을 비롯한 일련의 수필들은, 반식민지 상태에 있던 중국에서 온 그가,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조선,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어 있던 당시의 한국 사회 상황을 보며 행한 사색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겨우 24세의 위건공이 한국 체재중에 한국 인식의 현저한 변화와 진화의 과정을 겪었다고 가정하고, 각각의 수필을 깊게 파고들어, 그 과정을 추적해 보려했다. 한일합병 백주년을 맞이한 지금, 위건공의 진지한 관찰과 사색은 일한중 삼국관계의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의 삼국의 양호한 관계의 바람직한 자세를 생각할 때 참고로 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여겨진다.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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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중일전쟁 발발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실시된 총독부의 ``지나어`` 교육정책과 그에 호응하여 일어난 식민지 조선에서의 ``지나어`` 붐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의 ``지나어`` 능력이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려 했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인을 전쟁에 필요한 ``새로운 주체``, 즉 ``제국의 주체``로 갱생시키기 위하여 ``지나어`` 정책을 비롯한 일련의 황민화 정책을 실시한다. 하지만 중일전쟁은 조선인들에게 여러 가지 새로운 욕망을 품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일본이 ``병참기기``로 서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전시동원체제가 강화되면서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거리는 급속히 좁혀졌고 식민지 조선인들의 욕망은 한없이 부풀려졌다. 때문에 일본이 필요한, 일본이 호명하는 ``제국의 주체``는 식민지 조선인들이 욕망하는 ``제국의 주체``와 완전히 일치할 수가 없었다. 일부 식민지 조선인들은 새롭게 펼쳐진 ``대동아``라는 ``무대``위에서 중국인들에게도 일본인들에게도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심리, 그리고 그들에게 져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다. 식민지 조선인들이 욕망한 ``제국의 주체``는 일본이 전쟁에 필요로 호명하는 ``제국의 주체``와는 어긋나는 ``대동아의 지정학``에서 일본인, 중국인들을 능가하는 새로운 ``제국의 주체``였다. 이처럼 당시 ``지나어`` 능력은 조선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일본이 호명하는 ``제국의 주체``와는 다른 새로운 ``제국의 주체``로 상상할 수 있었던 기제로서 작동했다. 이를 ``대륙``의 전장에서의 조선인들의 통역 장면에 한정하여 포착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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