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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교육검색

Journal of Japanese Language Education Association


  • - 주제 : 어문학분야 > 일어일문학
  • - 성격 : 학술지
  • - 간기: 계간
  • - 국내 등재 : KCI 등재
  • - 해외 등재 : -
  • - ISSN : 2005-7016
  • - 간행물명 변경 사항 :
논문제목
수록 범위 : 27권 0호 (2004)

김달수삼つの 『족보』를 めぐって - 그 이동을 중심으로

박정이 ( Park Jeong I )
한국일본어교육학회|일본어교육  27권 0호, 2004 pp. 221-234 ( 총 14 pages)
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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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수는 1945년 이전에 발표한 작품을 1945년 이후 창간하게 되는 『民主朝鮮』에 改稿후, 재발표한다. 그런데 『民主朝鮮』에 재발표된 작품 세편 예를들면, 『族譜』, 『塵』, 『雜草のごとく』중, 유일하게 『族譜』의 경우는 작품 내용이 대폭 改稿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1978년 改稿, 改題후 재재발표된 작품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세편의 「族譜」즉, 1941년의 『族譜』, 1948년의 『族譜』, 1978년의 『落照』의 異同을 중심으로 이들 작품을 검토하여, 김달수에게 있어 「族譜」의 의미를 밝혀보았다. 먼저, 1941년의 『新藝術』에 발표된 『族譜』와 1948년 『民主朝鮮』에 발표된 『族譜』의 가장 큰 상이점이라고 하면, 문자의 표기형식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 민족 고유의 衣裳名혹은 고유명사등의 한자표기를 카타가나표기로 바꾸어 외국어로 취급하고 있다. 그것은 異民族으로서의 ‘조선인’ 바꿔 말하면, 민족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1941년 『族譜』의 주인공 김경태와 1948년 『族譜』의 주인공 서경태의 미각의 차이는 조선인식의 차이와 서로 連動하여 나타난다. 특히, 族譜를 태우는 1941년 『族譜』의 종결장면이나 주인공이 창씨개명을 하는 장면등은 1948년 『族譜』에는 삭제되어 있다. 이는 1945년 전후 한 김달수의 역사인식의 변화에 따른 전진적 행동의 반영이라 하겠다. 나아가서 이는 1941년 『族譜』에 대응하는 작품이 다름아닌 1948년의 『族譜』임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그런데, 1948년 『族譜』에는 ‘얼룩·티가 많다’라는 附記가 달려있다. 이는 민족성을 강조한 나머지 카타가나의 多用,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하의 ‘조선인’ 묘사, 또는 저항 장면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작품의 타이틀과 관련된 ‘族譜’의 의미는 물론이고, ‘族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伯父·서귀엄의 존재가 애매해진 점등을 ‘얼룩·티’로 표현했다고 본다. 끝으로, 본고에서는 1978년 『落照』의 이재수와 서귀엄의 異同을 중심으로 이 작품의 구조를 고찰해 보았다. 『落照』는 두편의 『族譜』와는 달리 시공간이 구체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1940년 7월 현재’, 일제 식민지 지배정책의 일환인 ‘창씨개명’을 둘러싸고 식민지 지배정책에 동조하는 이재수의 ‘발흥’과 독립운동가이자 주인공·서경태의 백부인 서귀엄의 ‘석양’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양반’이나 ‘상민’이라는 차이를 넘어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의 ‘피’ 다시말하면, 국가로서 독립을 기원하는 서귀엄의 외적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성장하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반면, 이재수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앞잡이이며, ‘조선’민중에게 창씨개명할 것을 부추기는 ‘皇民化指導員’이다. 즉, 일본의 식민지 지배체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이재수와 좌절한 독립운동가 서귀엄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落照』는 이들 두 사람의 ‘族譜’에 대한 대조적인 묘사를 통해 1940년 이후 ‘조선’민족에게 강요되어진 ‘창씨개명’의 의미를 역조명하여 부각시키고 있다. 야와같이 김달수가 세 번에 걸쳐 개고한 작품 ‘族譜’에는 등장인물과 더불어 사상적으로 전진한 1945년 이후의 김달수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민족문제, ‘조선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 문제가 이 세편의 ‘족보’에는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하 수신교과의 정책연구

정태준 ( Jeong Tae Jun )
한국일본어교육학회|일본어교육  27권 0호, 2004 pp. 235-263 ( 총 29 pages)
6,900
초록보기
道德敎育は國家と社會が目指す理念、社會的な規範、 共同生活に要る生活樣式と技術を習得させて國の構成員としての基準に合わせるようにする。 日本帝國主義が文化的に類似した朝鮮に對して、思想の敎化をもって同化政策を展開したのは效率的なのであったとは言えない。しかも朝鮮總督府は近代化という名目で當時の朝鮮兒童に天皇制の思想を强制に敎化せざるを得なかった。というのは、 植民地の支配經驗がない日本帝國主義にとって、朝鮮における敎育は施行錯誤にならざるを得なかった.つまり、當時の植民地朝鮮の敎育は、日本帝國主義にとって植民地敎育の實驗場になったのである。特に、この硏究の狙いである天皇制の思想敎育は、類似した文化圈の中に屬していた朝鮮兒童のあてに、「天皇制の思想」という新たら類型への絶對服從を强制したのである。 朝鮮總督府も學校という近代の公敎育機關を通じて、天皇制イデオロギ-を注入しようとした。 朝鮮總督府が敎育機關の掌握と共に敎育課程、內容にいたるまで統制したのは、私立學校及び書堂に對する制度的な彈壓政策によく反映されている。 修身、國語(日本語)、日本歷史、地理などが植民支配のイデオロギ-敎育をための主な科目であった。 その中でも修身敎科を痛じて 日本帝國主義と天皇に對する一體の造り上げ、服從、歪んだ忠孝思想を强調したのである。 そういう修身の敎育內容は、韓國の從前までの道德の斷絶をも垂らした。言い替えると、朝鮮民衆の皇國 臣民化への植民主義の意識と思想の再生産という目的から「修身」敎育が行なわれたと言える。 このように修身敎科による傳統的な道德敎育の斷切は、朝鮮獨立以後にもその根本がはなはなしく歪曲させてしまった。その植民地敎育の弊害が今日まで續いているのが韓國敎育の現住所である。以下簡單に要約すると次のようである。 一、朝鮮總督府は修身敎科を植民地イデオロギ-敎育の道具科目に設定したのである。 二、修身敎科の內容は天皇と皇室への崇拜、植民イデオロギ-としての同化であった。 三、道德敎育としての修身敎育は、朝鮮總督府の敎育政策で核心をなしていたのでる。 四、植民地朝鮮の修身敎育は韓國の傳統的な倫理道德敎育の歪曲をもたらしたし、その影響は獨立の後も續い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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